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55화 (5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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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롤린

식사는 무난했다. 예전처럼 여자를 대하는데 어색함이 없어 대화도 끊기지 않았다. 시황의 말에 은지는 잘 웃어줘 전체적인 분위기도 괜찮았다.

“오빠, 오늘 정말 잘 먹었어요.”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은지가 말했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배부르지?”

“네. 엄청 배불러요. 오랜만에 와서 너무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쑥스럽게 웃으면서 은지가 말했다.

느긋하게 얘기하면서 먹는다고 뷔페에서 한 시간을 넘도록 있었다. 벌써 해가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근처 공원에 가서 잠깐 걷자.”

“네. 천천히 걸어서 가요.”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었다. 조그만 연못 주변에 산책을 하거나 뛸 수 있는 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연못을 보며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어두운 거리를 은지와 함께 걸었다. 운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이대로라면 고백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시황은 길을 걸으면서 고백할 타이밍을 살폈다. 원래는 카페나 칵테일 바 같은 곳에 갈까 했었는데 카페는 뷔페에서 음료를 많이 마셔 갈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칵테일 바는 은지가 거절하면 곤란하기도 했고 가본 적도 없다보니 무난한 공원을 택했다.

소소한 잡담을 하면서 천천히 공원 주변을 걸었다.

“저기 잠깐 앉을래?”

“네.”

시황이 약간 으슥한 곳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일부러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을 고른 것이다.

벤치에 앉아 잠깐 호수를 바라봤다.

연못의 표면에서 가로등 빛이 일렁거린다.

“은지야.”

시황은 호수를 바라보며 나직이 은지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떨렸다. 고백하는 게 이렇게 긴장될지는 몰랐다.

“네?”

은지도 분위기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약간 이상한 쪽으로 흐르자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은지를 바라봤다.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름 여자에게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그거랑 고백이랑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정도의 긴장감이라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나랑 사귀지 않을래?”

짧고 간단하지만 오늘 몇 번이나 생각하고 정리한 대사를 은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아……. 그…….”

은지와 시황의 눈이 마주쳤다. 은지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저, 정말 죄송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그렇구나.”

충격이었다. 뭐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고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은지가 거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말 거절할지는 몰랐다. 별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순간적으로 느낀 심적 타격이 상당했다.

“어제 본 그 남자야?”

“네.”

은지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방금 전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같이 있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어색함만이 가득했다.

처음 해본 고백인데 차였다.

이때까지 과정이 어떻고 감정이 어떻든 간에 이게 결론이었다.

“이런 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생각보다 멘탈은 금방 수습됐다. 처음 봤을 때 호감을 가득 느끼긴 했지만 아루와 지영, 찬미, 유미를 만나면서 그런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 갔나 보다.

하여튼 이 질문은 자신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기 위해 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할 생각이었다.

“그, 그게……. 하, 학기 초에 만났는데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 도움을 많이 주셔서…….”

시황의 말에 은지가 당황해 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은지의 말은 섹스를 400회 이상한 그 잘생긴 놈팡이가 은지의 호감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의미였다. 그에 비해 시황은 만나기도 띄엄띄엄 만났고 은지에게 그다지 어필을 하지도 못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려면 그만큼 더 노력해야 했는데 그런 노력조차 없이 은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렇구나.”

“정말 죄송해요. 오빠도 좋으신 분이라 저보다 좋은 여자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은지가 미안해했다.

“아니야, 괜찮아. 이제 집에 갈래?”

“네.”

집으로 가는 동안 시황이나 은지나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결과인 거 같았다.

모든 건 자신의 탓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쉬해서 사귀고 섹스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고백한 남자랑 호감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 중에 여자는 누구를 택하겠는가? 생각해보면 그저 이때까지 은지를 성욕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은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여자를 진심으로 생각한 적이 있나 싶었다. 애초에 아루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서 산거였다. 26년 동안 동정이었으니까. 섹스를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아루를 단순한 성욕 해소용 도구라고 전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처음엔 그런 의도로 샀다.

경찰을 부르지 않고 찬미를 직접 도와준 것도 잿밥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고 유미도 3레벨을 위해 이용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여자를 단순한 성욕의 대상과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는 은지처럼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진심으로, 조금 더 마음을 담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보여줘야 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오늘 고마웠어.”

“네? 죄, 죄송해요.”

오피스텔 입구에서 시황이 고맙다고 하자 은지가 당황했다. 고백한 걸 거절했는데 고맙다니?

“난 잠깐 갈 데가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수업시간에 보자.”

“네. 전 들어갈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응. 잘 가.”

은지는 시황에게 꾸벅 인사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은지와 약간 친해졌었는데 이 고백으로 어색함만 남아버렸다.

하지만 좋은 교훈을 얻었으니 손해만 본 장사는 아니었다.

시황은 지영의 집으로 가면서 폰을 꺼내 코코아톡을 보냈다.

[누나, 저 지금 누나 집에 가는 중이에요.]

[금방 도착하겠네? 시황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보넨지 몇 초 되지도 않아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아까 전에 밥을 먹어서 크게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어머, 그래? 그럼 누나랑 간단히 술이나 한잔할래? 누나가 바로 나갈게]

[알겠어요. 그러면 누나 집 앞에서 기다릴게요.]

[알았어. 금방 나갈게.]

10분 쯤 걸어 지영의 원룸 앞에 도착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시황이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지영이 딱 맞춰 나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방금 왔어요.”

원래 지영이 예쁘긴 했는데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느낌이었다. 굽이 있는 힐이 아니라 맨 다리에 플랫 슈즈를 신고 청순한 느낌이 나는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었다.

지영의 키가 168cm에 몸매까지 받쳐주다 보니 플랫 슈즈를 신었음에도 각선미가 굉장히 뛰어났다.

신체 변경을 통하여 173cm나 된 시황이라 플랫 슈즈를 신은 지영보다 확실히 커보였다.

“왜?”

시황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지영이 물었다.

“그냥 오늘따라 더 예뻐 보여서요.”

“뭐야, 부끄럽게.”

시황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지영은 시황에게 엉겨 붙으며 팔짱을 꼈다. 꼭 달라붙어서인지 팔에 브래지어를 한 가슴이 느껴졌고 달콤한 향기가 시황의 코에 스며들었다.

지영은 시황을 데리고 룸으로 된 술집으로 갔다. 일반 술집과 다르게 개별적인 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얘기하기 편했고,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술집에 들어가자 입구에 있는 몇몇 남자들이 지영을 쳐다봤는데 그 중에는 여자 친구가 옆에 있는 남자도 있었다.

시황은 그런 남자들을 이해했다. 그건 의지를 가지고 행한 게 아니었다. 뇌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가고 여자를 보게 되는 이 일련의 행동은 마치 사냥을 하는 야수와 같은 본능적 움직임이었다.

시황은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유리가 되어있어 밖에서 안이 훤히 보였고 방 크기는 네 명이면 꽉 찰 정도였다.

술을 안 마시는 시황은 이런 술집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자 지영은 능숙하게 치킨 샐러드와 맥주 1700cc를 시켰다.

“오늘 뭐하고 놀았어?”

직원이 나가자 지영이 물었다.

“별 거 안했어요. 밥 먹고 공원 좀 걸었어요.”

“그냥 학교 친구야?”

지영은 어제 시황이 여자랑 만난다는 문자를 본 이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계속 났다. 시황에게 문자를 보낼까 수십 번은 더 고민했지만 괜히 방해하면 싫어할 거 같아 차마 그러진 못했다.

“예전에 누나랑 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좋아하는 거 같다는 애 있다고 말했잖아요. 걔랑 만났어요.”

“그, 그래?”

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런데…….”

시황이 뭐라 더 말을 하려는데 직원이 술과 음식을 가져왔다. 직원이 음식을 테이블에 올리는 동안 지영의 표정은 잔뜩 굳어 펴질 줄을 몰랐다.

직원이 나가고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런데……. 오늘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시황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어머, 진짜? 어떡해, 우리 시황이 많이 상심했겠다.”

시황의 말을 들은 순간 지영은 웃음이 나오는 꾹 참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뻐하는 게 너무 티가 났다.

“괜찮아요. 제가 잘난 것도 없는데 당연한 거죠.”

“어머, 아니야! 우리 시황이가 얼마나 멋진데! 시황아 걱정 마. 누나는 시황이를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니까.”

“고마워요. 누나.”

지영은 은근슬쩍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지만 시황은 그걸 지영의 위로로만 알았는지 살짝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밋밋한 시황의 반응이 너무 아쉬웠다.

“누나.”

“왜? 시황아.”

시황이 맥주 한잔을 다 마시며 말하자 지영이 약간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혹시 자신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전 진짜 바보인가 봐요. 걔한테 차였는데도 계속 생각이 나요. 어떻게 해야 되죠?”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시황의 말을 들은 지영은 순간 가슴이 덜컥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감히 시황을 찬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애보다 자기가 훨씬 더 시황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왜 그걸 몰라주는 걸까?

“시황아. 다 잊어. 오늘 누나가 그런 나쁜 기억 다 잊게 해줄게.”

지영은 이틈에 시황의 옆자리로 옮겨서 시황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어떻게 해서든 시황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 애를 잊을 수 있을까요? 하아…….”

품에 안겨 말하는 시황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고 순진한 줄만 알았던 시황이 이렇게 여릴 줄이야. 평소와 다르게 시황의 약한 모습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시황에 대한 감정이 더 커져만 갔다.

지영의 품에 안긴 시황은 달콤한 지영의 향기를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척 했다. 차인 이후로 약간 아릿한 기분이 남아 있어 감정이 생각보다 잘 잡혔다. 원래는 눈물까지 흘려볼까 했는데 그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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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되기 전에 한 편 더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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