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 ------------------------------------------------------
LEVEL UP!
10시.
약속시간은 11시였는데 시황은 벌써부터 은지의 오피스텔 앞에서 서성거렸다. 원래는 아침에 운동을 하고서 경험치를 조금이라도 쌓은 뒤, 한 10분 전 쯤에 나와 기다리려고 했는데 너무 기대되고 긴장된 나머지 1시간이나 일찍 나온 것이다.
시황은 타블렛을 꺼내 다시 한 번 오늘 데이트 코스를 점검했다. 은지는 그저 밥을 사준다고 했을 뿐이었지만 시황은 절대 밥만 얻어먹을 생각이 없었다.
밥을 먹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차를 사준다. 그 뒤에 영화를 보고 저녁을 같이 먹는다는 게 시황의 대략적인 계획이었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코스까지 마무리 해버리면 시황의 추측으로는 1레벨 경험치가 반이나 차지 않을까 생각됐다. 지금까지 대략 100의 경험치를 획득했는데 경험치바의 5분의 1이나 빨갛게 물들었다. 즉, 2레벨까지 가는 경험치가 500정도가 아닌가하고 추측했다.
시황은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이와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옷에 있는 먼지도 깔끔하게 털어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를 했다. 얼굴이 약간 에러이긴 했지만 얼굴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11시에 가까워 올수록 시황의 가슴도 떨렸다. 26년 인생에 여자와 밥 먹는 건 처음에다 이렇게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새롭지 않은 게 없었다.
그리고 11시가 되기 5분전 오피스텔의 입구에서 은지가 등장했다.
그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꽃이 그려진 베이지색의 쉬폰 원피스는 무릎 위까지 와 은지의 아름다운 각선미가 드러났고 굽이 높은 하이힐까지 신어 어제보다 키가 확연히 커보였다. 입술에 핑크색 립스틱을 발라 엄청 청순해 보였는데 살짝 부는 바람에 원피스와 머릿결이 하늘하늘 흔들리자 시황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은지를 쳐다봤다.
“일찍 오셨네요.”
은지가 살짝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정말 예쁘세요.”
시황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해버렸다. 시황은 칭찬을 잘 못했다. 특히 예쁘다 같은 단어는 살면서 써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은지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예쁘다는 말이 툭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고마워요.”
멍하니 말하는 시황의 말에 은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 그……. 어디 갈까요?”
이제야 정신을 차린 시황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좋아하시는 거 있으세요? 제가 다 사드릴게요.”
참으로 고민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간의 음식 취향을 모르니까 어디 가자고 콕 집어서 말을 하기 힘들었다.
“스파게티 먹을까요?”
어제 인터넷으로 자료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자와 밥 먹으러 갈 때 제일 무난한 게 스파게티라고 하였다.
“스파게티로 되시겠어요?”
하지만 그다지 탐탁치 않아하는 은지의 말에 시황은 스파게티는 안 되겠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저것 고민해봤지만 도저히 뭔가 떠오르지 않았다. 음식을 제대로 선택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걸 여자들이 싫어한다고 글을 통해 익힌 시황은 다급해졌다.
“그러니까, 그러면 어…….”
“삼계탕 드실래요?”
“삼계탕요?”
너무 의외의 음식이 나오자 시황이 당황했다.
“싫어하세요?”
“아니요. 완전 좋아합니다.”
“그럼 가요.”
“넵.”
시황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삼계탕 말고는 먹어 본 적이 없어 은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은지와 정답게 걸어가니 주변에 있는 커플들이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가는 여자들하고 은지의 얼굴을 비교하면서 더블킬, 트리플킬, 쿼드라킬, 펜타까지 떴네 라고 생각하면서 뭔지 뭐를 우월감을 느꼈다.
한옥처럼 꾸며놓은 삼계탕 집에 들어갔다.
“여기가 괜찮아요. 전에 친구랑 와봤거든요.”
“그렇군요. 전 처음 와봤어요.”
오피스텔에 갔을 때부터 느꼈지만 은지는 은근히 부유한 거 같았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봤는데 삼계탕 하나에 만 삼천 원이나 하자 시황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콘즈에게서 받은 돈이 아직 400만원 더 남았고 조만간 레벨을 올리면 더 많은 돈을 받게 될 것이다. 정 안되면 지금 있는 차나 음식만으로도 돈을 뻥튀기 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뒀었다.
“은지 씨는 집이 어디세요?”
“오빠 말 편하게 하세요.”
“아, 그……. 네.”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그, 그럴게.”
시황은 어색해 죽을 거 같았다.
“전 집이 부산이에요.”
“그렇구나. 난 집이 창녕이거든.”
시황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제 연애는 안 해봤지만 머릿속으로 상상연애는 꽤 해본데다 어제 은지를 보면서 연습도 해봤기 때문에 그럭저럭 대화를 안 끊기고 할 수 있었다.
얘기 중에 삼계탕이 나왔고 아침을 안 먹어 배가 고팠던 시황은 금새 다 비워버렸다.
“다 먹고 카페 가서 차라도 마실래? 그건 내가 사줄게.”
은지도 다 먹어가자 시황은 승부수를 던졌다.
“아니에요.”
은지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자 시황은 앞이 캄캄해졌다. 어쩌지 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가 사드릴게요.
“응? 네가 또 사준다고?”
시황의 얼굴이 갑자기 펴졌다.
“네. 응급실 비 비쌀 텐데 오빠가 다 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차도 제가 사드릴게요.”
“내가 너무 미안한데…….”
시황은 자기가 돈을 몇 배나 더 내놓고 겨우 몇 천 원짜리 차 얻어먹는 걸 미안해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삼계탕 집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를 처음 가는 시황은 뭘 시켜야 될지 어리바리하다가 익숙한 이름인 레몬에이드를 골랐고 은지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은지가 주문하고 주문한 차까지 직접 테이블로 가져오자 시황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내가 카페를 처음 와봐서 어떻게 하는지 몰랐어.”
사실대로 고백했다.
“괜찮아요. 오빠.”
은지는 전혀 문제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시황은 은지랑 같이 다니면서 느꼈지만 마음씨가 참으로 고왔다. 인터넷에서 묘사하는 여자들은 남자 돈 뜯어먹기만 하는 어장관리녀라는 느낌이었는데 은지는 오히려 자기가 돈을 아낌없이 쓰는 개념녀였다.
“오빠는 좋아하는 연예인 있어요?”
“연예인은 별로 관심 없어서 잘은 몰라.”
“그러면 혹시 강소진이라고 아세요?”
시황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러다 문득 은지하고 약간 비슷한 느낌이 나는 연예인 한명이 떠올랐다. 그렇게 유명한 연예인은 아니었는데 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귀여움으로 나름 인지도를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랑 느낌이 약간 비슷한 연예인이 떠오르긴 하는데 맞는지 잘 모르겠네.”
“맞아요! 사촌 언니인데 작년에 데뷔했거든요.”
“사촌 언니가 연예인이야? 신기하다.”
“저도 신기해요. 헤…….”
“내가 한 번 검색해볼게.”
문득 그 은지의 사촌 언니라는 소진의 프로필이 궁금해졌다. 가방에서 타블렛을 꺼낸 시황은 카페에 있는 와이파이를 잡아 포털사이트에서 강소진이라 검색했다.
사진들이 주르륵 뜸과 동시에 프로필도 나왔다.
[강소진]
[나이 : 23세]
[생일 : 2월 22일]
[키 : 160.1cm]
[몸무게 : 42kg]
[가슴 사이즈 : 75A]
[섹스 횟수 : 없음]
[임신 여부 : 안함]
처녀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얼굴도 예뻤다. 은지도 일반인 중에서 상급에 들어갈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촌 언니라는 강소진은 그보다 훨씬 더 예쁜 거 같았다.
소진의 사진을 보니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들었다. 하지만 연예인인 그녀랑 사귄 뒤에 섹스를 한다는 건 꿈이랑 마찬가지였다.
“은지 네는 다들 예쁘구나.”
시황은 감탄했다. 자기 사촌들은 하나같이 인물이 별로였는데 은지 가족은 하나같이 인물이 뛰어난 거 같았다.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격차가 나니 자기가 이렇게 찌질하게 사는 구나 하고 시황은 가볍게 한숨이 나왔다.
“아니에요. 오빠. 소진 언니가 특별히 예쁜 거에요. 어릴 때부터 엄청 예뻤거든요.”
어느새 은지가 시황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타블렛으로 소진의 사진을 찾아보고 있었다.
은지가 가까이 오자 달콤한 향기가 시황의 콧속을 가득 채웠다. 향수를 뿌린 거 같진 않았는데 여자 몸에서 나는 특유의 화장품 냄새가 너무 좋았다.
조심스럽게 은지의 냄새를 맡던 시황은 은지의 하얀 다리가 맞은편에 앉았을 때와 다르게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의자에 앉아서인지 허벅지가 살짝 보일랑 말랑 원피스가 가려져 있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흥분돼 발기를 해버렸다.
“오빠, 이 사진 엄청 예쁘죠?”
“어? 어, 어. 예쁘네.”
은지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시황을 꼴리게 만드는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소진의 사진을 보여주기 바빴다.
생각 같아서는 은지의 원피스 안에 손을 집어넣어 허벅지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상상으로만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영화 볼래? 내가 돈 낼게. 너무 얻어먹은 거 같아서…….”
“괜찮아요. 제가 사드리기로 한걸요.”
너무 어려웠다. 정말 어려웠다. 여자란 존재가 너무 어려웠다. 시황은 어떻게든 은지를 붙잡고 놀고 싶었는데 은지의 마음은 어떤지 전혀 알 수가 없다보니 여기서 빼야할지 강하게 주장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긴 좀 아쉬워서…….”
“죄송해요.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은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다음에 시간 되면 그 때 보여주세요.”
“그렇구나. 알았어.”
영화를 보고 저녁밥까지 같이 먹고 싶었는데 일이 있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헤어지기 싫다고 떼를 쓸 수도 없는 일이니까.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줄게.”
“고마워요. 오빠.”
카페를 나온 시황은 은지를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럼 다음 수업시간에 봐요. 오늘 즐거웠어요.”
“응. 안녕.”
시황은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은지의 뒷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조그만 리본이 달린 짙은 분홍색 하이힐에서 이어지는 얇고 가는 발목이 눈에 들어오자 시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은지는 안 예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시황은 고시원으로 향했다.
“어휴.”
고시원에 돌아와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시황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나갈 때는 꼭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혹시 재수 좋으면 오피스텔 앞에서 키스도 해보려고 했는데 가당치도 않은 목표였다.
밥만 먹고 헤어질 뻔한 걸 그나마 카페에서 차라도 마시고 헤어진 게 다행이었다.
“다음에는 꼭 성공하고 만다.”
주먹을 굳게 쥐고 다짐했다. 반드시 은지와 끝장을 보고 말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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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