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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13화 (1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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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지

시황은 그녀들을 보내고 침대에 누워있는 은지를 바라보았다. 연약하고 가녀린 팔을 뚫고 들어간 링거바늘을 보자 은지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욕망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걸 시황은 인지하고 있었다. 시황이 비록 학벌이 낮고 돈도 없으며 얼굴도 못생겼지만 성격 하나는 좋았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넌 법 없이도 살 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미안한 마음에 시황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은지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주었다. 원래의 시황이라면 감히 여자 몸에 손을 댄다는 생각자체를 못했겠지만 아까 전에 은지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키스를 해서인지 저항감이 약간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은지가 눈을 뜨더니 시황을 바라봤다.

“죄, 죄송해요. 머리가 헝클어져서 가지런하게 해주려고…….”

시황은 당황해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자고 있는지 알았는데 갑자기 눈뜰지는 몰랐던 것이다.

한참을 시황을 멍하니 응시하던 은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휴…….”

한숨 돌린 시황은 은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오밀조밀한 은지의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저 조그만 얼굴에 눈코입이 다 붙어 있는 게 신기했다. 그 중에 특히 아담하고 붉은 입술이 유난히 탐스럽게 보였다.

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아까 전 뽀뽀를 했을 때는 은지가 자고 있다 보니 전혀 호응도 없었고 입도 닫혀져 있어 혀와 혀가 교차하는 어른들의 키스를 해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아무것도 안하고 은지의 얼굴만 보는데도 시간은 금방 흘렀다.

“음…….”

9시 30분이 지나자 은지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거 같았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많아졌다.

은지가 슬슬 일어나려는 거 같자 시황은 잔뜩 긴장했다. 아까 전 은지가 잘 때 혼자서 온갖 말을 다 했지만 정신이 멀쩡한 여자를 상대하는 건 여전히 많이 떨렸다.

“아…….”

은지가 눈을 떴다. 눈동자가 또렷한 게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하게 된다고 해서 그 사이의 일이 전혀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었다. 뜨문뜨문 하겠지만 분명 이 모든 일의 정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시황과 눈이 마주치자 은지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괜찮으세요?”

시황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

“네.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은지는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이 부끄럽다기보다는 아까 전에 인공호흡을 한다고 입을 맞춘 것 때문에 그러는 거 같았다. 시황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정말 죄송해요.”

“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119도 불러주시고 응급실까지 따라 와주셨는데요.”

뜬금없는 시황의 말에 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준 차 때문에 그렇게 정신을 잃으신 거 같아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차랑은 상관없는 거 같아요. 다른 분들은 괜찮으시잖아요.”

“체질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다 저 때문인 거 같아서 너무 죄송해요.”

시황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닌 진실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80% 이상의 진실을 포함해야 한다. 진실을 바탕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꿔야 그것이 진실 된 거짓말이 되어 누구나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시황은 은지를 쳐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잠깐 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살짝 민망했는지 은지가 시황은 눈을 회피했다.

“의자 선생님이 언제든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응급실 비는 제가 냈으니까 괜찮으시면 바로 퇴원하셔도 될 거 같아요.”

“응급실 비를 내셨어요? 얼마였어요? 제가 돈을 드릴게요.”

시황의 말에 은지는 깜짝 놀라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 탓인데 제가 내는 게 당연하죠.”

“아이 참, 오빠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얼마였어요? 네?”

은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시황은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었는데 자꾸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런 시황의 자상한 면이 은근 매력 있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약간은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밥이나 한끼 사주세요. 전, 그 거면 돼요.”

이 모든 일을 이 하나 때문에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보면 여자 밥을 사주면 호구라는 식으로 묘사하는데 그 사람들이 정작 모르는 게 있다. 바로 시황처럼 아는 여자 애 하나 없는 모태솔로들은 그런 호구가 되고 싶어도 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아무리 밥을 사주고 싶어도 일정이상의 친분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황은 호구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는 그런 불쌍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루트로는 밥을 사주면서 친분을 쌓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변칙적인 상황을 계획한 것이었다. 겨우 팀플레이하면서 여자한테 밥을 사주겠다고 들이대 봤자 수락할 여자는 거의 없었고 팀플레이는 미팅이나 소개팅이 아니었기에 호감과 친분을 올릴 기회가 너무 적었다.

“그래도…….”

대충 트레이드가 된 거 같았다. 누가 봐도 시황이 손해인 트레이드였지만 정작 시황은 일이 계획대로 되어가자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알게요. 이제 괜찮으시면 제가 말해서 퇴원할 수 있게 할게요.”

“네, 네. 부탁드릴게요. 정말 고마워요.”

은지의 태도는 분명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인사도 무뚝뚝하게 받더니 지금은 시황에게 꽤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시황이 퇴원수속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지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거리엔 어둠이 자욱하게 깔렸지만 가로등과 수많은 가게들의 간판이 낮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4월이라 그런지 밤이 되자 약간 쌀쌀했다. 니트만 입은 은지는 바람이 불자 추운지 몸을 살짝 떨었다.

“이거 덮으세요.”

그 모습을 본 시황은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겨났는지 자기가 입던 재킷을 벗어 은지에게 덮어주었다.

“아, 아니에요! 이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은지가 깜짝 놀라하며 거절했다.

시황은 순간 실수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드라마에서 본 거처럼 좀 멋있는 척 해보려고 한 건데 이렇게 거부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저기, 추워보여서, 아직 환자이시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건데, 죄, 죄송해요.”

엄청 당황한 시황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횡설수설했다. 찬바람이 부는데 몸에서 열이 후끈후끈하게 일 정도였다.

“제가 죄송해서요…….”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환자시니까요.”

말을 주고받고 하다가 어떻게 은지가 시황의 재킷을 덮고 길을 걷게 되었다. 병원과 은지의 오피스텔이 그렇게 멀지 않아 택시도 잡지 않고 계속 걸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은지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자 시황은 섣부르게 말을 못 건 것이다. 은지와 뽀뽀도 했지만 그건 노력으로 이룩한 결과가 아닌 편법이었을 뿐이었기에 여전히 여자에게 면역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는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시간 되시면 내일이라도 밥을 사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오피스텔에 다와 가자 갑자기 은지가 시황에게 말했다.

“내일요?”

“바쁘세요?”

“전혀요! 절대로 안 바빠요! 내일 언제쯤이요?”

시황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드디어 여자와 밥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11시에 시간 되세요?”

“당연하죠. 그럼 11시에 제가 은지 씨 오피스텔 앞으로 올게요.”

“집하고 안 머세요? 학교에서 만나는 게 괜찮을 거 같은데요. 여기까지 오시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어쩜 저렇게 마음씨가 고운지 모르겠다고 시황은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욕먹는 된장녀와 차원이 다른 마음씨를 가졌다.

“조금만 걸어가면 제 고시원이에요. 몇 분 안 걸려요.”

“아, 그러시구나. 알겠어요. 그러면 내일 봐요. 전 들어가 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네.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오피스텔 입구에서 시황에게 재킷을 건네준 은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은지의 마지막 모습까지 응시한 시황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고시원을 향해 뛰어갔다.

“큭큭.”

고시원 방에 온 시황은 얼마나 기쁜지 웃음이 끝없이 나왔고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웃기도 하는 등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다.

“아, 최고다.”

정말 기분 좋았다. 은지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느껴본 것도 좋았고 밥 먹기로 한 약속도 말로 형언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26년간 여자와 대화도 못해봤는데 오늘 그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 낸것이다.

기분 좋음 미소를 지으며 집에 온 시황은 샤워를 한 뒤에 추리닝을 입고 호주머니에서 타블렛을 꺼냈다. 여자와 관련된 상당한 양의 퀘스트가 완료돼 혹시 2레벨을 찍지 않았을까 기대됐다.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세요][완료][경험치 15]

[여자와 약속을 잡으세요][완료][경험치 25]

두개만 완료됐다.

분명 퀘스트에 나와 있는 뽀뽀도 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거 전부 다 했는데 여전히 수행해야 할 퀘스트 항목에 있었다.

시황이 엄청나게 억울해 하자 타블렛 상단에 글이 떠올랐다.

[주의 : 여자를 재우거나 정신을 잃게 만든 뒤에 강제로 한 행동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예를 사서 하는 퀘스트 또한 인정되지 않습니다.]

“제기랄.”

욕을 못하는 시황의 입에서 거친 언어가 튀어나왔다.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규칙이 이러니 시황이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정정당당하게 키스를 하고 고백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쉬움은 잠시였다. 시황은 침대에 누워 내일 어떻게 하면 은지에게서 호감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일이 너무 기대돼 시황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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