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 ------------------------------------------------------
강은지
“헉, 헉.”
어느덧 밤이었다. 어둠이 자욱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운동장에는 야간 조명탑이 환하게 밝히고 있어 몇몇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시황은 거칠 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다리는 쇳덩이라도 단 것처럼 무거웠다.
선선한 4월인데도 온 몸에 땀이 흘러 목 늘어난 티가 비라도 맞은 듯 푹 젖어 있었다.
케즈론의 성에서 돌아 온 시황은 저녘이 되자 달리기를 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으로 왔고 지금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1500미터 주파를 위해 달리고 있었다.
상당히 힘이 드는지 갈수록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기초 체력이 약하다보니 달린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체력이 고갈됐고 꼭 하겠다는 정신력으로 꾸역꾸역 달리던 것도 결국 한계가 찾아온 듯 했다.
“하아하아…….”
결국 완주를 하지 못하고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힘이든지 한참을 거친 숨소리만 내었다.
숨을 좀 돌렸는지 시황은 주변 눈치를 살짝 보더니 호주머니에서 타블렛을 꺼냈다. 호주머니의 크기에 타블렛이 들어가기란 불가능 했지만 유산으로 받은 아공간이 덕분에 다른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시황에게는 가능으로 변하였다.
예상대로 1500미터 달리기는 실패했지만 1000미터 달리기는 성공해서 20이라는 경험치를 얻었다.
퀘스트를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경험치 바의 빨간 부분이 꽤 늘어있었다.
의욕이 잔뜩 생긴 시황은 적당히 쉬고 나서 팔굽혀 펴기를 했다. 이것도 10개를 하면 경험치 10을 주었는데 제대로 된 자세로 코가 닿을 만큼 내려가지 않으면 한 걸로 치지 않아 꽤 여러 번 해서야 겨우 경험치 10을 받을 수 있었다.
얼마나 몸이 허약한지 달리기 조금 하고 팔굽혀 펴기 조금 했다고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턱걸이도 3개를 하고 경험치 10을 받고 싶었는데 지금은 당장은 무리였다.
이럴 줄 알고 시황은 가방에서 미리 끓여 온 라민차를 마셨다. 그러자 활력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몸이 운동하기 전처럼 완전히 가벼워 진 건 아니었고 운동을 다시 할 수 있을 만큼으로는 회복이 됐다.
이 후에 시황은 갖은 노력 끝에 턱걸이도 3개를 완료해서 경험치 10을 얻었고 다시 1500미터 달리기에 도전했다가 반도 채 못 가서 지쳐 나가 떨어졌다.
체력이 너무 부실해 하루 이틀 운동한다고 될 수준이 아니었다.
“헉헉,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운동장 한 쪽 구석에 지쳐 쓰러진 시황이 자신에게 말하듯 얘기했다. 바로 어제만 됐어도 꿈도 희망도 없어 혼이 빠진 채로 인터넷만 했을 텐데 이렇게 운동을 하고 스스로를 위로 한다는 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다니까.”
한 번 더 다짐하듯 중얼 거린 시황은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힘이 없어 휘청이는 모습이 약간 위태로워 보이긴 했지만 그 어느 때와 다르게 늠름해 보이기도 했다.
어제 운동을 한 뒤로 10시간이나 수면을 취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몸이 마치 침대와 동화가 돼버린 듯 했다.
간단히 씻고 라민차로 몸의 활력을 회복한 시황은 옷을 사러 간만에 시내로 나왔다. 내일 은지와 만나는데 다 낡아 빠진 옷을 입고 가긴 싫었다. 잡지에 나오는 잔뜩 멋든 옷을 사는 거 까진 아니더라도 깔끔하게 보이는 옷을 살 생각이었다.
시내에 나오자 다양한 옷가게들이 즐비했는데 이런 쪽에는 전혀 관심과 흥미가 없다보니 선뜻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에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그래도 난 500만 원이나 있는데. 겨우 옷가지고 긴장하면 안 되지.”
마음을 먹은 시황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매장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황에게 다가왔다.
[황미진]
[28세]
[키 : 167.8cm]
[몸무게 : 51kg]
[가슴 사이즈 : 70B]
[섹스 횟수 : 588회]
[임신 여부 : 안함]
단정한 차림을 한 미진은 검은색 스타킹과 플랫 슈즈를 신고 있어 청순한 느낌이 물씬 나다보니 외견상으로는 588번이나 섹스를 한 여자로는 안 보였다.
“아, 아니요. 그냥 옷 좀 보려고…….”
섹스를 588번이나 한 여자이긴 했지만 키가 큰데다 얼굴도 수준급으로 예뻐 시황은 자기도 모르게 위축이 되었다.
“요즘 이런 검은색 재킷을 많이들 찾으시거든요. 고객님에게도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 한 번 입어 보세요.”
미진이 건네준 옷은 패션에 일자무식인 시황이 보기에도 세련된 느낌이 났다. 그래서인지 약간 거부감이 생겼다.
시황이라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멋진 거, 세련된 거, 비싼 거, 품격 있는 거에 거부감을 느꼈다. 슬프게도 가난한 서민과 모태 솔로로 26년간을 살아오다 보니 자연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본능이었다. 가련한 생물이여.
“그, 그런가요?”
“한 번 입어 보세요. 이런 옷은 고객님처럼 마른 분들이 잘 어울리거든요.”
“아, 알겠어요.”
시황은 미진이 권해주는 옷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섬주섬 입었다. 그 뒤로 방금 입은 재킷이랑 잘 어울리는 셔츠하고 바지를 하나씩 권해주었는데 그것들도 거절하지 못하고 다 입어 버렸다.
그런데 막 안 팔리는 제품을 권한 건 아닌지 거울 속에 보이는 시황은 나름 옷에 신경 쓴 세련된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만큼 괜찮았다.
“어머, 멋있으세요. 고객님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미진은 가느다랗고 긴 손으로 시황의 어깨 부분을 털어주자 시황은 왠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588번이나 섹스를 했다면 분명 입으로도 남자의 성기를 빨아주지 않았을까? 저 조그맣고 예쁜 입에 들어가면 어떤 느낌일까? 정액은 먹어봤을까?
단정하면서 청순한 미진의 이미지와 다르게 588번이라는 섹스가 가져다주는 파급력이 꽤나 커서인지 시황은 멍하니 미진에 관한 야한 상상을 했고 바지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객님?”
“네? 네?”
시황이 갑자기 멍하니 있자 미진이 옆에서 의아해하며 불렀고 깜짝 놀란 시황이 대답했다.
“자기 모습 보고 반하신건 아니죠? 호호.”
“아, 아니에요. 이거 다 살게요. 얼마에요?”
미진의 농담에 시황은 얼굴을 붉혔다. 방금 그런 상상을 하고 나니 미진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재킷이 32만 9천이고 바지와 셔츠 같이해서 16만원 8천원이에요. 다해서 49만 7천원입니다.”
비쌌다. 정말 미친 듯이 비쌌다. 아니, 그냥 미쳤다.
옷 3벌 샀는데 50만원이라는 가격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시황의 머리로는 전혀 이해가지 않았다.
은지와 미치도록 섹스를 하고 싶은 건 맞았다. 그래서 호감을 살려고 옷을 살 마음을 먹은 거긴 한데 이렇게 비싼 옷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분명 조금만 더 발품을 팔아보면 이 비슷하면서 가격은 반 이하인 옷 가게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가격은 카드로 하실 건가요?”
“네? 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사지 말라고 했지만 입에서는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산다고 말까지 했는데 가격을 듣고 안 산다고 말하는 건 뭔가 좀 아니었다. 시황은 자기가 가난한 걸 알고 이런 옷은 큰 사치라는 건 알았지만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 50만원 때문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앞으로 자신은 케즈론의 유산을 이어받아 허접한 인간의 상상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인데 겨우 50만원 가지고 자존심을 굽히고 부끄러움을 참는다? 이건 안 될 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지면서 오히려 큰 용기까지 생겼다. 이 500만원은 운 좋게 얻은, 그저 500만원이라는 가치만을 지닌 돈이 아니었다. 앞으로 더 큰 일을, 더 큰 돈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이었다.
마음가짐이 바뀌자 50만원을 투자하는 거 따윈 전혀 아깝지 않았다. 시황은 당당하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체크카드를 미진에게 건네주었다.
“결제 완료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네. 수고하세요.”
옷 가게에 들어 올 때의 시황과 지금의 시황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들어가기 전에는 약간 위축 되어 있고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면 지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데다 걸음 자체에도 자신감과 패기가 넘쳤다. 단순한 마음가짐 하나가 이렇게나 큰 차이로 나타났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도 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잘랐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다 팬티와 양말도 새로 샀다. 꽤나 큰 지출이 있었지만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환골탈태였다. 영약을 먹고 뼈와 근육이 최적의 상태로 변화 된 건 아니지만 아침과 비교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세련된 옷을 입고 머리를 다듬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표정의 변화 또한 매우 컸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얼굴은 여전히 좀 못생긴 편이었지만 코디와 머리 스타일 덕분인지 멀리서 보면 나름 괜찮다는 말이 나올 법 했다.
“좋아! 할 수 있다!”
걸어가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용기와 자신감이 사라질까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불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운동할 때 입을 운동복과 런닝화를 사고 집으로 돌아온 시황은 컴퓨터를 켠 게 아니라 바로 운동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말도 안 되는 변화가 바로 시황에게 일어난 것이다.
웅웅.
전화가 왔다.
시황은 아직까지 폴더폰을 쓰고 있었는데 폰을 집자 액정에 엄마라고 나와 있었다.
[시황아, 잘 지내니?]
[어. 엄마. 잘 지내고 있어.]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잘 먹고 있어.]
엄마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황의 나이가 26살인데도 아직까지 애로 보이나 보다.
[옆집 호준이는 은행에 들어 갈 거라고 열심히 준비 하고 있다던데 우리 아들도 취직 준비 잘 하고 있어?]
[준비 중이야. 그러니까 걱정 마.]
옛날 같았으면 옆집의 호준이라는 말 듣는 순간 알아서 한다고 소리를 쳤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져 있었다.
[어머, 아들 엄마한테 소리 안 치는 거 보니까 열심히 하고 있나보네?]
[호준이 보다 잘 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자신 있었다. 퀘스트만 잘해 나가면 호준이가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 회장 이상의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엄마는 우리 시황이만 믿고 있어. 그리고 집에도 좀 와. 우리 시황이 얼굴 본지 벌써 한 달이 다돼가네.]
[알았어. 다음 주에 한 번 갈게.]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간만에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더 큰 의욕이 생겼다. 가슴에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 게 당장이라도 밖에 달려 나가 소리를 왁! 하고 지르고 싶었다.
“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중얼거린 시황은 런닝화를 신고 운동장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