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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지
오후 12시가 지나서인지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부산했다. 학교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시원과 원룸촌이 있어 많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다녔다.
“뭐하지?”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가방에서 타블렛을 꺼내 할 만한 퀘스트를 체크했다.
경험치 10을 주는 퀘스트는 몰아서 한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먼저 학교에 있는 운동장으로 갔다. 달리기 관련 퀘스트부터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 건지 운동장에 축구를 하는 사람과 농구를 하는 사람 등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 달리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트랙으로 갔다. 바로 달릴까 하다가 약간 부끄러워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위 스탠드에서 많은 커플들이 앉아 봄 햇살의 따스함을 즐기며 간단한 샌드위치와 쥬스를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었다.
시황은 그 모습을 보니 의욕이 더욱 샘솟았다. 노력하면 분명 조만간 여자랑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트랙의 끝에 가서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엉거주춤하게 섰다. 고등학교 이후로 마음먹고 달리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0이 된 순간 앞으로 빠르게 뛰었다. 달리기는 시간을 단축하면 단축할수록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뛰었다.
너무 오랜만에 뛰어서인지 생각만큼 앞으로 쭉쭉 뻗지가 않았다. 얼마 달리지 않아 숨이 가빠왔다. 그나마 라민차를 마신 게 이 정도였다. 군대 전역 이후 운동은 전혀 안하다보니 컴퓨터에 앉아 있는 것도 피곤한 몸뚱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헉헉.”
100m를 알리는 트랙선을 지나고 시황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온힘을 다해 뛰어서 그런지 상당히 힘들었다.
옆에 누가 시간을 측정해주는 게 아니라 몇 초가 나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설마 15초를 못 넘진 않았을 거 같았다.
가방을 놔둔 곳으로 돌아가 타블렛을 꺼내 확인했다.
[100m를 달리세요.][완료][경험치 10]
[100m를 15초 안에 주파하세요.][완료][경험치 15]
한 번 달려서 경험치 25가 차자 경험치 바의 10분의 1정도가 빨갛게 물들었다.
“오! 이정도면 2레벨 금방 찍겠는데?”
성취감이 엄청났다. 게임에서 희귀한 아이템 얻은 것과 비교도 안됐다. 온 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시황은 200m, 400m 달리기도 할까 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은데다 트랙도 100미터가 끝이라 이건 나중에 한가해지는 시간에 하기로 했다.
시계를 보자 1시가 되려고 했다. 11시에 교양 수업이 2시간 있었고 1시에는 전공 수업이 있었는데 마침 학교 온 김에 개강하고 처음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오늘부터 열심히 생활하기로 했으니까.”
마음먹은 김에 인문관 203호실로 향했다. 지금 들어갈 수업은 영어회화II였다.
가는 길에 여자들이나 관찰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미지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미리 적응해두는 게 좋았다.
시황이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갑자기 여자들 옆에 프로필이 떠올랐다. 퀘스트에 정신이 팔려 여자들 옆에 프로필이 안 뜨고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왜 그런 거지?”
혹시나 싶어 마음속으로 프로필을 안 봐야지 라고 생각하자 여자들 옆에 떠올랐던 프로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충 구조가 이해갔다.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작동하는지는 몰랐지만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프로필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상당히 직관적이고 간편한 인터페이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프로필 창이 켜져라고 생각하자 여자, 남자 가릴 거 없이 프로필 창이 다 떴고 남자 프로필 창은 꺼야겠다고 마음먹자 여자 프로필만 남게 되었다.
“괜찮네.”
마음에 든 시황은 지나가면서 여자들을 슬쩍 슬쩍 훔쳐보면서 인문관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의 은밀한 정보를 본다는 건 상당한 즐거움과 신기함을 가져다주었다.
가령 지금 막 옆으로 지나가는 은은하게 다리가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신은 섹시한 여자는 처녀인 반면 그 옆에 여자임에도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해 보이는 여자는 상당한 횟수의 섹스를 했었다.
“신기하네.”
대학을 오가는 수많은 여자를 보며 느낀 생각이다.
예쁜 것과 못 생긴 건 쳐녀가 맞다 아니다를 가르는 기준이 전혀 아닌 거 같았다. 좀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하긴 했지만 지금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판단한 바로는 그랬다.
강의실에 도착해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5명 정도 듣는 수업이었는데 여자가 20명이고 남자는 시황을 포함해 5명밖에 되지 않았다.
1시가 되자 60세 정도 돼 보이는 남자 교수가 들어와서 출석을 불렀다.
“자, 오늘은 얘기한 대로 조를 짤 거에요.”
시황은 교수의 말에 심하게 당황했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만나서 어색하게 대화해야 한다는 게 싫었고 그렇게 힘들게 만든 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 건 더 싫었다.
교수는 종이가 든 상자를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주었다.
“4명씩 6개조 정도로 하겠어요. 조는 지금 준 상자에서 뽑은 번호끼리 하면 되겠어요.”
시황의 앞에 상자가 왔고 시황은 3이라 적힌 번호를 뽑았다.
“번호를 다 뽑았으니 왼쪽부터 1조, 2조, 3조 이렇게 앉으세요.”
어색하게 일어난 시황은 3조가 앉아야 할 자리로 주춤거리며 걸어갔다. 이미 거기엔 3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친구로 보이는 둘이 같이 앉았고 혼자 앉은 여자는 그냥 앞만 보고 있었다.
시황은 걸어가면서 혼자 앉은 여자애의 프로필을 자세히 봤다.
[강은지]
[나이 : 22세]
[생일 : 7월 26일]
[키 : 156.4cm]
[몸무게 : 41kg]
[가슴 사이즈 : 65A]
[섹스 횟수 : 없음]
[임신 여부 : 안함]
처녀였다. 왜인지 이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상당히 호감 갔다.
시황은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은지의 옆에 앉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여자에게 면역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보니 이것조차 상당히 고민이 됐던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인사하기 어색한 타이밍에 돌입할 테고 그렇게 되면 이후에 더 어색해질 거 같았다.
일생일대의 고민이었다. 입에서 안녕하세요 라는 말을 꺼내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처음 알았다.
“안녕하세요.”
수많은 갈등을 하다 시황은 은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입이 벌려지고 말이 나오는 순간 얼마나 긴장했는지 등이 찌릿찌릿하면서 식은땀이 흐르려고 했다.
아까 전의 그 다짐이 없었다면 분명 은지에게 아무런 말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을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은지는 약간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네. 하하.”
시황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슬쩍 쳐다봤다가 교수에게로 눈을 돌렸다.
은지의 생김새는 시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타입이었다. 동글동글하면서 귀여운 얼굴은 강아지상이라 호감을 유발시켰고 조그맣고 작은 체구는 시황의 품에 쏙 들어올 거 같았다.
한마디로 예뻤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처녀라는 거였다. 자신 뒤에 앉은 여자 애들은 섹스 횟수가 8회와 132회로 처녀가 아니었기에 급 관심에서 멀어졌다. 특히 8회라는 수치는 남자친구가 이제 막 생겼긴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 둘은 생긴 게 평범하거나 별로였고 은지가 훨씬 예뻤다.
“모두 알겠지만 다다음주에 중간고사에요. 학기 초에 말한 대로 10분짜리 짧은 연극을 할거에요. 연기력은 안 볼 거니까 회화보다 연기를 더 열심히 준비 하면 안돼요.”
“하하.”
교수의 농담에 강의실에 있는 여자애들이 웃었고 은지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그맣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섹스를 한다면 저런 여자애랑 하고 싶었다. 이번 중간고사를 기회로 반드시 친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제는 자유에요. 그런데 영화나 연극을 보고 따라하면 0점 줄거에요. 자, 이제 수업 시작하겠어요.”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든 말든 시황은 어떻게 하면 은지와 친해질까 고민했다. 밥을 사준다고 말하는 건 너무 뜬금없어서 흑심이 있다는 걸 들킬 거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뭔가 친해질 계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