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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우주적 행운아
긴 시간을 얘기한 건 아니라서 차를 마시기 적당한 온도가 되어 있었다.
컴퓨터 책상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아침을 안 먹었음에도 몸에 활력이 샘솟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해냈다. 해냈어. 내가 해냈다.”
시황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우연찮게 당첨이 됐을 뿐이지만 기뻐 죽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한테 이런 날이 오다니. 나도 이제 이런 찌질한 인생은 끝인 건가. 하하하.”
너무 기쁜 나머지 침대에 누워 베개를 두드렸다.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데 뭐더라 제약이 있어서 퀘스트를 해야 한다고 했던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다시 한 번 감겨진 테이프처럼 재생된다.
분명 콘즈가 그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제약 때문에 쓸 수 있는 유산이 거의 없고 퀘스트를 통해 레벨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놨던 타블렛을 켜고 퀘스트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맨 위에 완료된 퀘스트라면서 한 가지 항목이 생성되어 있었다.
[여자와 대화하세요][완료][경험치 10]
그리고 최상단에 LV1이라 적힌 얇은 회색바에 아주 조금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저 빨간색이 경험치의 양일 것이고 회색바를 빨갛게 채우게 되면 레벨 2가 되면서 제약이 풀리는 시스템인 듯 했다.
“신기하네.”
다른 걸로 경험치 올릴 게 뭐가 있나 싶어 목록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먼저 무학은 검술이니 권술이니 하는데 현재로선 아무런 정보가 없다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마법도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지식 쪽에 할 만한 게 꽤 있었다.
[책을 읽으세요. 경험치 10][반복 퀘스트]
[신문을 읽으세요. 경험치 10][반복 퀘스트]
[독후 감상문을 쓰세요. 경험치 20][반복 퀘스트]
이런 느낌이었다.
대충 읽으면서 밑으로 쭉쭉 내리다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세요. 경험치 1000]
[서울대학교에 수석 입학 시 경험치 +750, 차석 +400]
그 위로는 대학별로 경험치가 매겨져 있었는데 일단 서울대가 제일 높았다. 신기한 건 의대보다 서울대가 경험치를 더 많이 준다는 거였다.
“26살인데 대학을 또 가라고?”
단순히 경험치를 받기 위해서는 대학을 다시 가야하는 게 맞았지만 공부를 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유산을 받고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경험치를 얻어야 했다. 혹시 대학에 안 가고도 레벨을 올릴 수 있을 방법이 있다면 가능한 그런 쪽으로 하고 싶었다. 다시 수능 공부를 하기엔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육체 쪽 항목으로 들어가자 여기도 끝없이 퀘스트가 있었다.
[100m 달리기를 하세요. 경험치 10]
[150m 달리기를 하세요. 경험치 12]
[100m를 15초 안에 주파하세요. 경험치 15]
[1500m 달리기를 하세요. 경험치 30][반복 퀘스트]
이 퀘스트들은 처음엔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들뿐이었지만 조금만 내려가도 벅차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많아졌다.
“내가 다 할 수 있으려나?”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제일 궁금한 여자 쪽 퀘스트에 들어가 꼼꼼히 읽었다.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세요. 경험치 15]
[키스를 하세요. 경험치 80]
[가슴을 만지세요. 경험치 100]
[양다리를 걸치세요. 경험치 300]
[여자에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세요. 경험치 350]
[애인 있는 여자를 유혹하세요. 경험치 400]
[처녀와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500]
[자산 10억 원 이상을 가진 여성과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800]
[여자 두 명과 동시에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1000] [단, 직업여성은 제외합니다.]
[연예인과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1200]
[대통령의 딸과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2000]
[처녀인 여자 두 명과 동시에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2000]
[엘프와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5000]
[여성체 드래곤과 섹스를 하세요. 경험치 200000]
끝이 없었다. 여자의 직업, 학벌에 따라서 경험치가 세분화되어 있었고 허들이 높다 싶은 여자는 어김없이 경험치가 높았다. 거기다 엘프니 드래곤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존재까지 등장했다.
“이거 불가능한데.”
급 자신감이 사라졌다. 26년 동안 살면서 여자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자하고 말을 하는 요령도 몰랐고 다가가는 방법도 몰랐다.
거기다 집이 넉넉하지 못해 부모님한테 매달 20만 원 받는 것도 너무 죄송스러웠는데 여자를 만나 밥 한 끼에 만 원 이상 지출하긴 버거웠다.
시황은 책상 옆에 달린 조그만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얼굴은 그럭저럭 볼만했다. 당연히 잘생긴 건 절대 아니지만 나름 눈도 컸고 코도 오뚝했다. 하지만 그런 장점을 상쇄시키는 단점이 너무 컸다. 삐쩍 마르다보니 볼살이 없어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고 이가 튀어나온 돌출형 구강구조 때문에 입을 잘 다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부드러운 얼굴선이나 곱게 휘어진 눈 때문에 선하게 보이는 인상이라 사람들이 약간 못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얼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진 않았다.
“아, 교정하고 살만 쪄도 나름 무난하게 생긴 얼굴일 텐데. 돈이 원수구나.”
튀어나온 앞니를 꾹꾹 눌리면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얼굴이 썩 좋은 편이 아닌데다 공부도 평균 이하, 집안 형편도 나빠 꼬질꼬질하게 하고 다니는데다 소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여자애들하고 친하게 지내기 힘든 건 당연지사. 여기에 남중, 남고까지 나왔는데 외동아들이라 여자에 대한 면역도 제로.
사람이라는 게 단숨에 변하기란 매우 어렵다. 수십 년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단숨에 그걸 변화 시키려면 매우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니, 더 이상은 안 돼. 이미 밑바닥까지 왔잖아? 여기서 변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이렇게 찌질이처럼 살 뿐이야. 그래. 변해야 돼. 더 이상 찌질이처럼 살지 말자. 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놈이잖아. 이제 여자하고 섹스도 하면서 멋지게 사는 거야.”
거울을 보면서 시황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그건 다짐이었다. 이 말 한 마디로 순식간에 사람이 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변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생겨났다.
시황은 켜놓은 컴퓨터부터 껐다. 컴퓨터는 요물이었다. 계속 켜놓고 있으면 방금 전의 굳게 세웠던 마음가짐이 허물어지고 또다시 혼이 빠진 것처럼 인터넷만 할 거 같았다.
옷을 벗고 바로 샤워를 했다. 이 고시원은 다른 건 다 허름해도 방방마다 조그만 샤워실이 있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며칠 동안 깎지 않은 너저분한 수염도 정리하고 머리도 두 번이나 감았다.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손톱, 발톱까지 자르고 나니 새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셔츠와 면바지에 가방을 걸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목적도 없었지만 나가야만 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