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신기루 =========================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이 상태로 있었던 세월들을, 듣지 못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지금 잠겨있다. 그리고 올라오기 싫다. 이 안은 차갑고, 뜨겁다. 마음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다. 깊은 곳에서,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손가락을 자르고. 마치 진짜로 느껴지는 것 처럼 올라오는 고통 속에서. 되돌아와달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수도없이 괴롭히고 있다.
"아직 부족해. 미안해."
쉰 목소리로. 이 깊은 구렁텅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나는 올라갈 수 없다. 아직 안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나의 머릿 속에는 그때의 그 광경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다시 내리 누르는 죄책감이 느껴지고. 나는 그 죄책감을 느끼며 다시 스스로를 괴롭힌다.
얼마나 더 해야 내 머릿 속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사라질 수는 있을까. 나는 영원히 이렇게 있는 걸까.
차라리 이대로 계속해서 있으면 언젠가는 소피아도 레이첼도 떠나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잊고 행복해지겠지. 소피아가 차라리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는데. 약간 까칠하기는 해도 소피아는 좋은 여자니까. 누구와 만나도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다. 레이첼은 말할 필요도 없지. 지금 당장 밖에 나가도 좋다고 따라붙는 남자들이 줄을 이을걸.
그러면... 두 사람이 나를 잊으면 나도 이 미친 짓거리를 멈추고 숨을 끊을 수 있을텐데. 두 사람이 계속 나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으니까 죽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 명을 고통에 몰아넣었는데. 두 사람을 또 고통에 몰아넣을 수는 없다.
그냥 나를 잊어줘. 부탁이야.
저 멀리에서, 목소리가 하나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저건."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펑키 바니. 순간적으로 나는 잠깐 올라와서 티비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펑키 바니가 나와서 킬킬거리고 있다.
저 새끼 만큼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구렁텅이에 널부러져 있던 내가. 천천히 그 벽을 올라가 구멍을 벗어난다. 뒤편을 돌아보면 아직도 구렁텅이는 여전히 남아있다. 다시 돌아갈 거다. 저 녀석을 죽이고 나면. 나는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에 대한 죄값을 마저 치르고, 레이첼과 소피아가 떠나고 나면. 그때 나는 목숨을 끊겠다.
삐쩍 말라붙은 몸. 가늘게 떨리는 호흡. 나는 천천히 내 몸을 바라봤다.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몸에는 뼈만 앙상하다. 목이 마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그것만으로도 온 몸의 뼈가 으직거리면서 몸통을 후려치는 듯한 고통을 안겨준다.
"... 여름인가."
바람 새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내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온다. 두 사람은 내 옆에서 지쳐서 잠들었는지. 이 정도의 목소리에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뼈마디로 쑤시고 들어오는 고통 속에서.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물잔을 잡았다.
더럽게 무겁다. 물이 담겨있는 통도 무겁다. 바들거리던 손이 컵을 떨어뜨리고. 레이첼이 부시시 일어난다.
"... 당신."
그녀의 눈이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물잔을 잡아서 물을 조금 따르고는 내 입가에 가져간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물이, 몸 안으로 번지듯이 스며드는게 느껴진다. 천천히. 마실수록 목이 말라진다.
그리고, 옆에 엎드려서 졸고 있던 소피아가 벌떡 일어난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잔뜩 남아있다.
"너... 너...?!"
그리고, 나는 물을 마시고 조용히 말했다.
"둘 다 나가."
그 말에 막 웃음을 지으려고 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굳는다.
"무슨 소리야, 당신."
나는 기대어서 말했다.
"다 꺼지라고."
나를 떠나줘. 두 사람이 남아있으면 내가 일을 마치고 나서 모든 걸 정리할 수가 없잖아. 소피아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리고 그녀의 입이 움직이려고 한다.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꼴보기 싫으니까. 말하지말고 나가. 레이첼, 너도."
그 말에 레이첼이 나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다시 대답한다.
"알고 지랄이고, 필요없으니까. 나가."
레이첼이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는다. 나는 그 상태에서 저항하려고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움찔거리지도 못한다.
"싫어."
그리고, 옆에서 소피아가 말한다.
"너, 몇 개월 정신 나가있더니 감을 잃은 모양이네."
그리고는, 그녀가 내 이마를 손톱으로 툭 친다.
"내가 나가라고 하면 알겠사와요, 하고 나가는 여자로 보이나봐?"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너 옆에 붙어서 현모양처 놀이를 한 세월이 얼마인데.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절대 안 나갈거야. 덤으로, 내 마음에서 너를 지울 일도 없고, 다른 남자한테 갈 생각도 없어."
그리고, 나를 안고 있던 레이첼이 말했다.
"우리 떠나고 나면 자살하려고? 맨날 밤마다 그렇게 나랑 소피아만 없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울부짖던걸 누가 다 받아줬다고 생각해?"
라면서 그녀가 어깨쪽을 슬쩍 보여주자. 거기에는 내가 손톱으로 긁어낸 것 같은 흉터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다. 우와, 저거 내가 한 거야? 정신병자가 따로 없었구만.
"숙녀 몸에 이런 짓거리를 해놓고는. 결혼도 못하게 생겼잖아."
소피아가 걷어올린 팔에도 흉터가 잔뜩 있다. 이 삐쩍 마른 몸으로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곰같은 힘이 솟아오른거야.
"... 멍청한 여자들. 다 망가진 폐인새끼가 뭐가 좋다고."
그 말에 두 사람이 픽 웃는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여자랑 살던 남자도 있는데. 망가진 남자가 뭐 대수라고."
그리고, 옆에서 소피아도 맞장구를 친다.
"원래 정신병자들끼리 끌리는거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너랑 천생연분이라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아 씨발. 진짜 모르겠다.
"일단 저 티비부터 끄자. 꼴보기 싫어."
그 말에, 잠시 뒤에 티비가 꺼진다. 그리고 나는 둘을 바라봤다.
"다른 이야기는 다 미루어두고... 일단 저 토끼새끼부터 조질거야."
그 말에 레이첼이 대답한다.
"일단 그 몸뚱아리에 살이나 붙이고 말하자."
그래, 그 말대로. 몸뚱아리가 병신이 다 돼어서 지금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식사를 시작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몸에 음식이 들어오면 미슥거리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맑은 스프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라기에는 꽤나 괄목할 만한 성과 아닌가.
몸에 조금씩 힘이 돌아오는게 느껴진다. 하루가 지나면 조금 더 나아지고, 하루가 지나면 조금 더 나아지고. 다만, 두 사람에게는 굉장히 미안한게. 내가 아직도 자고 있다보면 악몽을 꾸는지라 두 사람이 가끔 다친다.
"뭐, 얼굴에만 나지 않으면 상관 없어."
라고 소피아는 대답했지만, 그 날 밤에 얼굴에 상처가 나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날 나를 보며 말했다.
"... 멍들지만 않는다면야."
... 그 다음날 얼굴에 멍이 들었고. 그녀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 말을 하면 내가 노리고 있는 것 처럼 공격하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상처들은 잘 아물었다. 내가 식사를 시작하자 그녀들도 약간 안심하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을 하러 나가고, 식사도 제대로 하는 모양이다.
"토끼 잡을거잖아. 역시, 원흉을 제거하는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지."
두 사람은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는 이쪽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다시 조직의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조금씩 나아지고. 나도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토끼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태동안 벌였던 범죄들...
도대체 이 새끼는 어디에 있는거야?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은 그때 마로니에 시립 공원 아래쪽에서 본 게 전부다. 경찰청을 날려버린 다음에 수많은 경찰들이 달라붙어서 난리를 치며 잡으려고 안달복달을 하고 있었지만. 심지어 그 경찰도 잡지를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이쪽이 바니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만나기를 원해서였다고 봐야겠지. 마음 먹고 숨어버리면 유령처럼 사라진다.
"..."
나는 방송에 나왔던 바니의 동영상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