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큐피드의 화살 =========================
내 손이, 천천히 앞에 앉아있는 토끼탈을 벗긴다. 그리고, 토끼탈이 들어올려지면서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갈색의 머리카락.
지랄하지마. 나는 심장에 화살이 박힌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덕트 테이프로 입이 막혀있는 크리스틴의 눈이 나와 마주친다. 나는, 천천히 그 테이프를 뜯어냈다. 그리고 힘겹게 흘러나오는 크리스틴의 목소리.
"잭, 어째서...?"
어째서. 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심장에 박혀있는 볼트를 바라본다.
"나, 나..."
그리고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줄기와 화살이 박힌 부분에서 번지기 시작하는 붉은 얼룩. 그리고, 말을 다 이어가지 못하고 눈을 뜬 채로 더 이상 말이 없어진 크리스틴. 뒤편에서 들리는 스피커의 목소리.
- 소문 못 들었나? 나랑 얽히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사람 망가뜨리기 박사 학위 소지자인데!
그러면서 깔깔거리는 스피커. 나는 무릎에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 어째서 크리스틴이 여기에 있는거야. 병원에서 대피했을텐데. 왜 여기..
- 그녀 스스로 온 거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스피커를 바라봤다.
- 네가 니 연인들이랑 하하호호하고 있을 동안에, 불상한 신데렐라는 독사과를 먹어버렸거든.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지. 평상시에도 네가 자주 빼서 데리고 다녔잖아? 비슷하게 위장하고 데리러 오던 녀석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니까 잘 내주더군.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모니터가 켜지고. 거기에서 동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비명을 지르면서 앞에 있는 바니를 바라보는 크리스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바니와 크리스틴.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제정신으로 돌아온게 아니라. 저 미친 놈한테 꼬셔진 거였나.
- 저 이후로도 항상 저녁에 나와 크리스틴은 밀담을 즐겼지. 그리고, 일이 벌어지기 이틀 전에 내가 작은 부탁을 했어.
스피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내 고막에 달려와 부딪친다.
- 나한테 납치당한 척 하면 잭이 구하러 올 거라고. 그리고 너는 그걸로 인해서 완전히 제정신을 차린 척 하고 그와 함께하면 된다고. 그때 저 여자의 표정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하하하하핫 하는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화고 뭐고... 내 앞에서 당장 피를 흘리면서 죽어있는 크리스틴의 시체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아서. 네 목소리만 들어도 오르가즘을 느낄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스스로 여기 와서 덕트 테이프로 순순히 묶였지. 아, 물론 자기가 쓰는게 토끼탈인지는 몰랐겠지!
웃음을 참으면서 이야기하는 펑키 바니. 나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 재밌냐."
- 으응? 잘 안들리는데.
나는 고개를 숙인채로 외쳤다.
"재밌냐고 이 개같은 새끼야! 이 모든게 장난같냐!?"
그 말에, 그가 비웃듯이 말한다.
- 나한테는 말이지, 이 모든게 그냥 장난 같은데. 마음에 안드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죽었다. 씨발새끼야."
그 말에 스피커에서 어이없다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 아.아.아. 니가 쏴 죽여놓고 나한테 왜 화를 내는거야!? 그래도 나는 약속은 지켰다고? 신데렐라의 심장 박동이 멈추면 폭탄은 해체되게 되어있으니까! 지금은 그 팔찌를 풀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
... 그 말에 나는 등골에 얼음이 박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새끼, 처음에 팔찌를 끼울 때부터?
- 내 손에서 놀아나기 시작한 이상, 신데렐라는 죽을 운명이었어. 너의 손에서.
그렇게 말하면서 클클거리는 바니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 그래도, 하나를 죽여서 둘을 구했으면 이득이잖아. 웃으라고!
내 눈이 크리스틴의 가슴으로 향하고 나는 다시 주저앉는다. 그래, 결국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크리스틴은 내 손에 죽어버렸다. 너무 경솔했다. 오자마자 죽이는게 아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 그나저나, 큐피드가 납화살을 단단히 여자의 심장에 박아넣었군. 웃기지 않나? 저 계집은 죽어서도 지가 왜 화살에 맞았는지 이유도 모를걸! 뭐,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거지. 알잖아?
손에 힘이 들어가고, 바닥을 긁는 손톱이 부러져나간다. 죄책감에 몸이 부서진다.
- 뭐, 경찰청 날리는 것 보다 사람 정신 날려버리는게 더 재밌단 말이지. 즐거웠습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하, 하..!
그리고 스피커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만을 내기 시작한다.
크리스틴의 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어 본다. 살아있던 떄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너무 지친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궁을 장전했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가져간다. 멍청한 새끼. 병신같은 새끼. 뭘 잘났다고 너 따위가. 고작해야 대가리에 토끼탈이나 뒤집어쓴 정신병자한테도 털리고 다니는 모자란 새끼가.
방아쇠에 손을 걸었을 때, 진동하는 핸드폰. 거기에는 레이첼의 이름이 떠 있다.
"... 젠장."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죄책감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은데. 내가 죽으면, 레이첼과 소피아는. 그 여자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아파해야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혼자 어쩔줄 모르고 관자놀이에 석궁을 가져간 채로 울리는 전화번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부재중 전화 1통
부재중 전화 3통
.
.
.
부재중 전화 13통.
그리고, 뒤편에서 문이 열리고 이쪽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는 두 개의 목소리.
"당신....!"
"너...!"
시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네. 이 개같은 상황은. 나는 내 손에서 석궁을 빼앗는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크리스틴을 죽였어."
그리고, 소피아가 크리스틴을 보면서 얼굴을 굳힌다. 가슴에 박혀들어가 있는 볼트. 그걸 보다가 그녀가 나를 억지로 일으킨다.
"설명을 해봐! 어떻게 된 거야 이 인간아!"
레이첼이, 나를 바라보다가 다가온다. 그리고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뺨을 후려치고 말한다.
"정신차려, 당신."
그리고, 레이첼이 저벅저벅 걸어가서 크리스틴의 상태를 보고, 옆에 굴러떨어져 있는 토끼탈을 본다.
모르겠다. 그냥, 다 싫다. 크리스틴을 죽인 나도 싫고. 차가운 물 속에 익사하듯이.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가습기가 연기를 내뿜고 있다. 레이첼은 손을 내밀어서 연기를 약간 줄인다. 문이 열리고 소피아가 들어와서, 화병에 꽂혀있는 꽃을 간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병원의 침대 양 옆에 앉아서 잭의 손을 잡는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소피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잭의 손을 쓰다듬는다. 잭의 눈은 초점이 없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다. 안 그래도 비실거리고 있던 그 약한 몸은, 식사도 제대로 안해서 빼짝 말라 해골같은 모습에,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어있다. 저 상태로 벌써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숨만 가늘게 쉬고 있을 뿐, 잭은 사실 시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 날 이후로, 경찰청은 다시 공사에 들어갔고, 경찰청장이었던 소피아의 아버지는 그 당시에 자신이 없었다는 것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여전히 경찰에 대해서 영향력이 있지만, 이전처럼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소피아 자체도 조직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 호핑 존스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그것은 아가페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루의 대부분을 병실에서 보내고, 계속해서 잭에게 이야기를 걸지만. 모든 것이 들리지 않는 것 처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밤이 다가오면 경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외치는 내가 죽였어, 라는 외침과 미안해. 라는 중얼거림.
그 끔찍하도록 가슴아픈 광경을 두 사람을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난동에 다친 잭의 몸을 치료하고, 억지로 식사를 먹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레이첼이 잭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두 사람의 정성이 소용이 없다. 거대한 벽에 막힌 것 처럼 잭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라고 멀쩡할까. 잭이 야위고 말이 없어진 이후로 두사람의 몸도 점점 축나고 있었다. 옆에서 잠을 자도 잠을 자는게 아니고.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게 아니다. 목으로 음식이 넘어가지도 않고. 무엇을 봐도 감흥이 없다.
꿈 속에서 잭이 정신을 차리는 광경을 보다가도, 저대로 말라 비틀어져서 죽어버리는 광경으로 바뀌는 악몽에 시달린다. 정신을 차리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로 멍하니 있는 잭을 돌본다. 마음 속이 점점 피폐해지고, 두 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웃음을 잃었다.
"우리 생각도 조금 해줘..."
소피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뼈마디가 만져지는 손에 얼굴을 가져간 채로 눈물을 흘린다.
"아빠가 나보고 선을 보래. 가정에 신경도 안쓰던 사람이 갑자기 은퇴하더니 자꾸 나를 괴롭혀. 빨리 안돌아오면, 나 어디로 가버릴지도 몰라. 안 무서워?"
"소피아..."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지만. 그녀가 그 손을 툭 밀쳐내고 잭을 보며 말한다.
"나 가버릴꺼야! 돌아오고 나면 나 이미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으면 좋겠어!? 니가.. 니가 나중에 정신을 차렸는데. 나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하고, 애가 셋이고! 그랬으면 좋겠냐고!"
난 싫어. 소피아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인다.
"아무것도 필요없어. 딱 1분만이라도 좋으니까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리고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소피아의 손. 레이첼이 그녀를 붙들고 잭에게서 손을 때어놓는다.
"그러다 잭 다쳐."
그 말에 소피아가 레이첼을 바라본다.
"언니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난... 난 다시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야. 하루하루가 악몽이고, 숨을 쉬는게 아니라 독을 마시는 것 같고...!"
"... 잭은 이겨낼거야."
레이첼이 그렇게 말하고 슬픈 표정으로 잭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돌아올거야. 다른 사람도 멀쩡하게 만들어주던 사람이. 스스로를 치료하지 못할리가 없잖아."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거야. 그러면 식사를 만들어주고 같이 이야기하고, 밖에 나가서 햇볕도 느끼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몸이 회복되면 엄청 팰거야. 다시 정신이 돌아온 걸 후회하게 할 정도로. 레이첼이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잭을 눕히고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준다.
"그건 처리했어?"
그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어, 다른 사람한테 뒤집어 씌웠어. 오늘로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꺼도 괜찮아."
아직까지 입김이 남아있을 떄 처리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잭이 스스로 부탁했던 것.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잭을 정상적으로 병원에 입원시킬 수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이전에 있었던 폭격에 대한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제,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고 잭을 바라봤다.
"떠나 있을 일은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피아는 잭의 이마에 입술을 한 번 맞추고 옆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