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늦게 일어났다고 덜 위험하지는 않은 법이다 =========================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가 요 근래에 거의 내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혼자 사는게 아니다. 레이첼도 같이 산다. 두 사람이 매일같이 내 사무실에 들어와서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다. 레이첼은 소피아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눈 앞에서 미녀 두 명이 떠들고 있는데. 그게 딱히 걸리적 거릴 이유는 없지. 눈호강도 되는 편이고.
레이첼이 일이 있어서 이 건물에 없는 오늘도 소피아는 놀러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소피아의 문제를 깨달았다. 시기, 남을 부러워하는 것.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
나는 빨간 가발을 쓰고는 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나를 관찰하는 소피아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관찰은 니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거든? 그냥 장난이 아니라. 지금 눈도 엄청 진지하고. 잠깐 화장실 간 타이밍을 틈 타 자리를 비운 소피아의 지갑을(열면 안되는 건 알고 있다) 열자. 거기에는 나와 레이첼 소피아가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는데. 자신의 머리에 빨간색을 칠해놓고 그 위에 자그맣게 글자도 적혀있다. 자신의 위에는 레이첼, 레이첼의 머리 위에는 가짜.
이야, 이걸 어쩐다. 무거운 감정이 내 몸을 짓누른다. 간만에 느끼는데. 이 무거운 사랑의 감정...! 나는 소피아와 레이첼의 차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슬렌더하고, 소피아는 글레머하고.
안돼, 설마. 그거 잘라버린다고 날뛰거나 하지는 않겠지. 상상만으로도 인류의 크나큰 흥복 하나가 잘려 나가는 기분이다.
그건 절대로 막는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소피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오자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꺼냈다.
"왠일로 도시락을?"
"당신, 도시락 좋아하잖아."
말투 바꾸지마! 너... 너어... 나는 그녀가 싸온 도시락을 한 번 먹어보고 또 한 번 기겁했다.
이거 어디에서 많이 먹어보던 맛인데. 레이첼이 하던 요리랑 똑같잖아. 레이첼에게 그렇게 딱 달라붙어서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맛, 어때?"
저기요? 그 목소리 톤은 너의 목소리 톤이 아니잖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이 여자가 정상으로 돌아올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맛있네. 직접 만든거야?"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소피아. 안되겠다. 정지시키자. 나는 어떤 사명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피아의 어깨를 잡았다.
"소피아."
"으... 응?!"
그러면서 몸을 흠칫거린다.
"... 원래의 너로 있었으면 좋겠어."
싫어. 라고 소피아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포크. 그리고 정말로 간만에 보게 된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그것은 바로 초점잃은 흐린 눈과 음침한 미소로 대변되는 , 마약이라도 진하게 한 방 맞은듯한 표정. 저 살짝 맛탱이가 간 얼굴을 레이첼이 아니라 소피아가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지금은 레이첼은 완전 멀쩡한데!
"소피아는 싫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못생겼어, 성격도 나빠, 말투도 거칠어, 몸매도 별로야."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난 가슴 큰게 좋아."
"그럴리가, 그럼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혼동이 와서 다시 말했다.
"나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그리고 곧바로 돌아오는 소피아의 대답.
"이게 나야."
... 그러면 임마 할 말이 없어지잖아 내가. 물론 그것도 너지. 약간 맛이 가버린 너. 근데 그 맛이 간 너는 내가 별로 선호하지 않거든? 니가 무슨 홍어도 아니고 살짝 맛이 가게 해서 먹어야 제 맛인 것도 아니잖아.
소피아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사랑스러운 듯이 가발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소피아가 좋다고?"
내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그 모습은, 딱 불쾌할 정도로 레이첼을 닮아있었다. 어중간하게, 어설프게 따라한. 그런 레이첼.
"레이첼보다 더?"
"그럼."
순간적인 나의 대답에 소피아가 다시 웃는다.
"거짓말, 당신은 나를 좋아하잖아? 소피아는... 필요 없잖아."
소피아의 얼굴에, 잠깐의 슬픔이 비치고. 이내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온다. 어설픈 레이첼의 흉내. 근데 이 여자가 아까부터 뭐가 자꾸 이상한데. 왜 자꾸 대화가 엉키는 느낌이 들지.
그 말에, 나는 대답한다.
"나 같이 비실한 새끼는 싫다면서."
그 말에 소피아가 웃는다.
"당신, 그건 소피아잖아. 나는 레이첼인걸.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아 선생님. 이거 진짜 왜 이러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대화를 할 수 있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게 이런 겁니까?
"소피.."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입술을 막고 말한다.
"레이첼."
차라리 레이첼은 그냥 이판사판이다! 하고 달려들었는데. 이건 달려들면 더 심각해질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여기에서 레이첼이라고 부르고, 그녀의 사랑에 맞춰주면. 그녀는 더욱 더 레이첼을 흉내낼 것 같다.
소피아, 레이첼, 소피아, 레이첼, 소피아... 레이첼!
내가 말할 때마다 소피아는 레이첼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외치다시피 말한다. 그리고 굳은 표정의 나를 보면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소피아.
"항상 나한테 웃어줬잖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봐줬잖아. 당신,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하는거야?"
이건 그냥 흉내도 아니잖아! 이건 그냥 자기를 레이첼로 보고 있어. 하나씩 껍질을 벗겨갈 수록 나는 내 앞에 던져진 과제가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 물건인지 깨닫는다.
예전에, 술집에서 그렇게 가는게 아니었나보다. 소피아를 그냥 두고 가는게 아니었나보다. 거기에서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가슴 주무르고 입술 빨고 그랬으면 차라리 이렇게까지 소피아가 맛탱이가 가지 않았을까.
"역시 그 가짜 때문이야? 그래서 그러는거야?"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말했다.
"레이첼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 가짜 레이첼."
너 말하는 거지? 갑작스럽게 자기소개 시간을 잠깐 가졌던 소피아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 보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레이첼이잖아. 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가 레이첼의 미소를 어설프게 따라하면서 말한다.
"괜찮아. 가짜는 이제 당분간 여기 못 와."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확 굳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힘겹게 나오는 나의 목소리에 소피아가 대답한다.
"음, 잠깐 다른 곳으로 옮겼어."
설마... 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피아가 가발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죽인거야?"
나의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살아있어. 그치만 오래 살지는 못 할 걸?"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나의 표정을 보면서 소피아가 말한다.
"왜 그래, 가짜가 죽는거 가지고. 여기 진짜가 있잖아."
소피아가 아 슬프게도, 라고 탄식하면서 자신의 가슴에 살짝 오른손을 올린다.
"당신도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지금 여기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은 딱 하나야. 소피아! 정신 단디하자 우리! 너 이런 캐릭터였냐?!
두어 시간의 실랑이가 더 지나가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떳다.
아, 좋아. 나랑 놀자 이거지. 놀아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지, 뭐라도 되라 하면 뭐라도 된다고. 뭐라도 되겠지. 씨발.
"... 해 보고 싶은게 이런 거였어?"
그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한 번 해봐. 소피아. 진짜를 최대한 닮아봐. 최대한 레이첼을 따라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닮아봐라."
무슨 소리야. 내가 레이첼이라니까. 소피아가 말하면서 나를 보며 한숨을 쉰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내기 좋아하는 거 알지?"
그 말에 소피아가 웃는다.
"응, 소피아한테 들었어."
이야, 너 오늘 어마어마하구나. 어떻게 자기 자신의 기억을 남에게 들었다는 듯이 말하지. 사람 싸이코 되면 다 이상해진다고. 그렇게 쿨내나도 당당하던 여자가. 맛이 가니까 또 아주 한도 끝도 없이 가버리는구나.
"한 달. 그 뒤에 니가 말하는 그 '가짜'를 데려와. 그리고 두 사람은 가면을 쓰고 방 안에 들어가있어. 나는 만지거나, 건드리거나, 얼굴을 보거나 하는 일 없이 진짜를 지목하겠어."
그리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니가 진짜라면, 내가 레이첼로 너를 지목하겠지."
그 말에 소피아가 잠깐 눈을 깜박인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진짜인 걸 알거 같아?"
그래, 내가 사람 하나 구분 못하는 눈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것도 구분 못하면 내가 사람새끼가 아니다.
"알았어."
좋아, 일단 이걸로 레이첼이 죽을 일도 없고. 소피아는 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거다. 어설프게 미쳐서 자기 몸에 변형을 가해버리면 한 달 안에 그게 치료될리가 없으니. 소피아가 자신의 몸을 변형할 일도 없다.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지금의 소피아는 진짜로 해낼 것 같다. 무슨 지가 아마존도 아니고 가슴을 잘라내고 웃는 모습이 눈에 선연하게 그려진다.
내가 눈에 락스가 들어가도 그 꼴은 못보지.
그리고, 레이첼의 몸을 쇠약하게 해서 진짜가 티나게 할 리도 없으니. 레이첼의 몸이 급격하게 약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한 나는 소피아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레이첼."
그 말에,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면서 소피아가 나에게 기대왔다.
"응, 당신."
앞으로 여자를 만나면 그냥 묻지 말고 따지지 말고 쏴버려야하나. 유복한 현재와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그래야 할 것 같은데.
============================ 작품 후기 ============================
소피아도 빨리 소멸 중 달고 이번 에피소드를 접어야겠습니다.
연속으로 약간 이상한 정신상태 쓰려니 버겁네요.
짐작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레이첼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현모양처로 변했죠.
소피아는 정상으로 돌리면 뭐가 될까요.
ps. 소중한 여성의 상징을 자꾸 자르고 싶어하지 마세요! 가죽을 벗긴다는 이야기 보고 제가 순간적으로 멍해졌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무섭구나... 이래서 픽션보다 현실이 더하다고들 하는구나...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