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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골목 시뮬레이션-56화 (56/75)

00056 늦게 일어났다고 덜 위험하지는 않은 법이다 =========================

전화를 마치고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장을 열었다. 그냥, 취미로 모아보고 있던 옷들을 모조리 꺼내서 하나씩 몸에 가져가본다.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어떻게 입고 가야 눈이 돌아가버릴 정도로 이쁘게 보일까.

처음에 꺼냈던 옷은 그냥 연한 노랑색 원피스라던가, 드레스 셔츠에 약간 무늬가 들어가 있다던가. 하는 거였지만. 이걸로는 부족할 것 같다. 나는 몸에 달라붙는 티와 핫팬츠를 입어보고 고개를 젓는다. 이건 너무 과감한데.

그렇게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정신없이 옷을 고르고 있는 내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 이걸로 할까. 너무 야해보이지 않으려나. 나는 검은 폴라티를 꺼내들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 년이 가지지 못한 게 나한테는 있으니까."

그 년과는 다른 매력으로, 사로잡아보이겠어. 화장도 하고, 틸트도 입술에 살짝 바른다. 마지막으로 그 옷을 입고 나서 신발장을 바라봤다.

"..."

무심코 단화를 향해서 손을 뻗던 나는 손을 멈추고 옆에 놓여있는 하이힐을 바라본다. 한 번도 신어본 적 없는데. 괜찮을까.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신고 걸어다니는거야..."

발가락도 아프고, 걸어다니기도 힘들다. 그래도, 나는 굳이 하이힐을 신고 거울 앞에서 자신을 한 번 바라본다.

"응. 이 정도면...!"

그 년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잭에게 말했던 곳에 도착했다.

언제 오려나.

그리고, 잭이 나를 보면서 눈을 크게 뜬다. 그 모습이 차라리 안심된다. 내가 그 년보다 이렇게 나은 편이야. 어때? 나는 약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 그 복장은?"

반응이 뭐가 그래. 내가 모처럼 몇 시간이나 걸려서 옷도 입고 단장을 하고 나왔는데. 내가 간부로 처음 호핑 존스에 입회 될 때도 이렇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고. 뭐 조금 다른 감상 없어? 나는 약간 기분이 우울해져서 한 마디 했다.

"왜, 뭐가."

마음에 안드는 건가? 너무 야하게 입었나? 역시 그게 잘못이었나? 나는 마음 속에서 패닉에 빠진채로 어색하게 걸어서 술집으로 향했고. 잭이 나를 부축했다.

"그러니까 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물건을 끼고 와?"

습격인가?! 나는 귓가에서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에 당황했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닫고 혼자 실소했다. 뭐야 이게. 바보같아.

"나, 심하게 안 어울리나?"

술집에서, 나는 약간 용기를 내서 그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리고, 잭이 나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어울리지만. 약간 의외라서."

그리고, 내 목구멍까지 그 년 보다 더? 라는 말이 올라오지만 애써서 참아내고 대신에 다른 말을 하며 그를 슬쩍 째려본다.

"여자처럼 안 입고 다니는 거랑, 못 입는거랑은 달라."

다시 약간 자신감이 붙는다. 그래, 어울린다고 해줬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네. 그리고, 나와 잭은 뭔가 대화를 하기는 했는데 잘 기억나는 건 없다. 대충 일이 정리되고 나서 잭과 눈을 마주친 나는 자신감을 여전히 가진채로 잭을 한 번 떠본다.

"왜, 만져보고 싶어?"

잭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대답한다.

"...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잖아. 기분이 좋아진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입에 딸기를 물어본다. 영화 보면 이런거에 남자들 좋아라 하던데.

"뭐가, 남자들 내 가슴보고 헐떡거리는거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잭이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한다. 벌써?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는 잭을 보면서 나는 황급하게 말했다.

"어, 기왕에 온 김에 더 마시고 가지?"

아, 어떡해. 들키지 않았으려나. 나 지금 완전 급박하게 말했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집에 뭐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것 처럼 잭은 내 말을 거절하고 돌아갔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차를 향해 걸어간다. 발목도 아프고, 발가락도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고. 얼굴에 한 화장도 찝찝하다. 나는 차에 올라타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기사가 입을 다문 상태로 나를 집까지 데려간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시계는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3시간도 안 지났다. 오는 데 십오분 정도 걸렸으니까...

내가 거기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걸린 시간이 네 시간인데. 기껏 나가서 세 시간도 못있었다.

"비참해..."

소피아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하이힐과 양말을 벗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발. 뭐하러 이 더럽게 아픈 신발은 신은거야? 맹물에 떨어뜨린 잉크가 번지듯이 몸 안으로 슬픔이 번져가며 소피아의 기분을 잡친다.

그렇게 번져가던 슬픔이 마침내 그녀의 머리까지 이르렀을 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를 내면 더 비참해 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입술을 다물고.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봐줄 수 있을까.

"... 레이첼."

그는 그 년은 바라본다. 그 년이랑은 같이 산다. 그 년이랑 같이 밥을 먹는다.

나는 옷을 벗고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씻기 위해서 들어간 샤워실의 거울에, 번진 마스카라와 화장품들로 엉망이 된 얼굴이 들어온다. 뻘겋게 쓸린 발도 들어온다.

"..."

순간적으로, 나는 내 모습이 정말 추하다고 생각했다. 꼴 보기 싫어. 밀가루 같이 희멀건 머리카락, 무겁고 쓸 데도 없는 가슴. 제멋대로인 성격, 거친 말투. 모든게 다 싫어진다. 내가 너무 비참하고 너무나도 못나서. 화가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주먹이 거울을 때리고, 금이 간 조각들이 손을 할퀴고 지나가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파..."

그 빨간 핏방울을 바라보자. 그 여자가 떠오른다. 타오르는 불꽃같은, 흘러내리는 핏방울 같은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 거울의 나를 본다. 거지같은 하얀 머리카락. 밋밋한 하얀 머리카락.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레이첼의 몸이 내 머릿 속에 떠오른다.

미끈하게 빠진, 슬렌더한 몸매. 쓸데없이 무겁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매력을 부각시켜주는 아름다운 가슴.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조용한 어투로 이야기하는 나긋하고 은은한 말투.

싸늘하고, 퉁명스럽고, 거친 나의 말투.

그래서 잭이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그래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

그러면, 내가 그녀를 닮으면 그도 나를 봐주는 걸까.

그러지 않을까? 그 여자처럼 될 수 있다면, 나도 그에게 관심 받을 수 있을거야.

============================ 작품 후기 ============================

소피아가 뭘 할지 이제 짐작이 갈 수도 있겠네요.

독자분들이 다들 자르고 때리고 강간하고 감금하고... 심지어 박제를 하고.

무서운 분들이야.

내 소설에 무서운 분들이 너무 많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검은 자기자신이 경험담이라는 건 또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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