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늦게 일어났다고 덜 위험하지는 않은 법이다 =========================
하루 하루가 새롭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레이첼이 웃는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웃음이다.
저녁에는 항상 조금 일찍 돌아가서, 요리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식사를 만들고. 가끔 레이첼은 도시락을 싼다.
항상 레이첼을 경계하던 크리스틴도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레이첼은 빠르게 변했다. 무슨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 마냥. 나에게 딱 달라붙어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드는 크리스틴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가끔 단 것도 줄 정도로 변했다.
내가 RPG로 세인트 메리 대로를 날려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누가 나에게 '레이첼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면 나는 쿨하게 대답했겠지.
텔레토비로 BL쓰는 소리하고 자빠졌다고. 아니, 그건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 수는 있겠지만. 레이첼이 변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멀쩡해지면서 반대급부적으로 나를 고민에 휩싸이게 하는게 있다.
"딸기꽃은 잡초냐?!"
27%까지 올라와 있다.
혼자서도 존나게 잘 자라네! 나는 장마철 죽순마냥 쑥쑥 치고 올라오는 소피아의 검은 새싹 때문에 미칠지경이다. 아니, 별로 만나지도 않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잘 자라는거야?
"갑자기 왠 딸기꽃 타령?"
문을 열고, 소피아가 태연하게 걸어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는 크리스틴.
"여전히 내가 싫나보네."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어흥, 하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틴을 바라보고. 크리스틴이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그걸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웃는 소피아.
아니, 겉보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 그래서 더 무서워! 레이첼은 차라리 곧바로 '널 잡아먹겠어 boy.'하는 느낌으로 달려들어서 차라리 안 무서웠는데.
아직 피어나질 않아서 그런가? 그럼 앞으로 내가 잘 하면 멈출 수 있으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품을 하는 소피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별로, 심심해서 왔는데?"
그 말에 나는 픽 웃었다.
"호핑 존스 관리하느라 바쁘다고 하신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한가하십니까?"
그 말에 소피아가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포트에 물을 담고 끓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바닥이 일이 넘치다가 갑자기 확 사라지는 법이야."
이럴 때 꾸준히 인생을 즐겨야지.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고 홍차 티백을 하나 꺼내서 잔에 담았다.
잠시 후, 포트의 물이 끓고. 소피아는 티백으로 홍차를 만들어서 마시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냥 놀러 오신겁니까?"
그 말에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고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무슨 하청업자 두고 잇는 대기업도 아니고. 왔다 하면 일거리 건네주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아니, 잠깐만.
"... 대기업 맞잖습니까?"
그 말에 소피아가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그러네. 별 거 아니야. 그냥 점심이나 얻어 먹을까 하고."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점심때인데.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문이 열리고 레이첼이 들어왔다.
"당신, 식사 아직 안했지? 어, 소피아님도 계셨네요."
넉넉하게 싸오길 잘 했네. 라고 레이첼은 말하면서 도시락을 꺼냈다. 소피아가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본다.
"레이첼 너무 적의가 없지 않아? 이전에는 무슨 몽구스 코브라 보듯 하던 애가 갑자기 이러니까 엄청 이상하네."
그 말에 레이첼이 사랑의 힘이에요. 라고 말하자 소피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 차라리 예전이 나은 것 같아."
사랑의 힘이래.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소피아는 레이첼이 도시락 꺼내는 걸 도와주고. 테이블에 세팅도 돕는다.
"고마워요."
"뭘, 얻어먹으러 온 입장인데."
그리고는 소피아가 레이첼을 바라본다.
"음, 조금 어색하지만. 금세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레이첼과 소피아, 내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크리스틴은 나를 바라보면서 구석에 있는다.
"크리스틴은?"
그 말에 레이첼이 대답한다.
"같이 못 먹어요. 나중에 나가 있으면 잭이 먹여 줄 거에요."
그 말에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다가 어깨에 손을 턱 올린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머리에 구멍난다."
그럴 생각 없다고 이 년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입으로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내 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거 맛있는데? 어떻게 만드는 거야?"
"이거요? 베이컨을 구운 다음에..."
이상한 기분이다. 지금 이 방 안에 미친 사람이 크리스틴 말고 없는 것 같아. 근데 소피아도 미쳤잖아. 근데 뭐야 이 화목한 분위기는? 레이첼이랑 소피아가 만나면 일어날 일을 혼자서 수도없이 시뮬레이션 해 봤지만. 지금의 상황은 나의 예상에 전혀 들어있지 않다.
저게 어딜 봐서 시기하는 여자의 모습이야?
식사를 하던 소피아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레이첼을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레이첼이 나보다 나이가 많구나.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그 말에, 레이첼이 약간 당황한다.
"아무리 그래도 한 조직의 보스신데."
뭐 어때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소피아님이라고 하면 괜찮잖아요. 라고 소피아가 자연스럽게 존대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둘이 신나게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데. 무슨 사이 좋은 자매 같은 모습이다.
"아, 그럼 잭도 나한테 말 놓아."
라고 소피아가 문득 생각난 듯이 나를 바라봤다.
"예?"
소피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아니, 내가 언니한테 존대말을 쓰고 있는데. 너는 언니한테는 말을 놓고, 나한테 말을 높이면 이상하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찝찝하다.
"그럼, 그럴게."
좋아, 라고 소피아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하면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레이첼과 이야기를 나눈다.
식사가 끝나고. 소피아가 그럼, 이라고 말한 다음 나가고. 나는 레이첼을 바라봤다.
"저렇게 좋은 사람인 줄 몰랐어. 이전에 내가 진짜 뭐에 씌였었나봐."
레이첼이 웃으면서 말하고. 나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좋은게 좋은건가보다 하고 있다가 엿먹을 것 같은 기분인데.
일을 몇 가지 처리하고 있으려니 소피아에게 전화가 왔다.
- 오늘, 일 하나만 처리해줘.
그 말에,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어떤 일?"
그 말에 소피아가 바로 대답한다.
- 별 건 아니고. 저번에 가 봤던 거리 기억해? 니 목에 폭탄 달고 있었는데.
아, 거기는 알고 있지. 어떻게 거기를 잊겠냐.
"그 추억을 어떻게 잊을까."
- 거기에 술집 하나 있는데. 안에서 약 거래를 하나봐. 한 번 살펴봐야겠는데, 같이 좀 가줘야겠어. 새끼들이 누구 눈을 피하려고.
그 말에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조직원들은 다 시에스타 중이야?"
- 한 번 찾아봤다는데. 아무래도 못미더워.
어떡한다?
"보수는?"
- 5만.
그렇다면야. 일단 가 보자고. 기왕에 가는 김에 소피아를 조금 관찰하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럼 저녁 9시에. 그곳에서 보자고."
- 그래.
그걸로 이야기는 끝나고. 나는 시계를 봤다. 저녁은 먹고 갈 수 있겠네. 레이첼은 먼저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고. 나는 코트를 입고 건물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래? 호핑 존스 쪽에서 부탁하는 일이니까."
레이첼이 내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잠깐 핸드폰을 보고는 미소를 짓는다.
"소피아 생각보다 너무 귀여워! 언니 언니 하면서 문자하는게. 꼭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아."
그리고, 레이첼이 입을 꼭 다물고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잠은 돌아와서 자. 알았지?"
걱정도 팔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마쳤다.
"미안해."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돌아올 거잖아. 일 잘 처리하고."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고 그릇을 정리해서 싱크대로 향한다. 뒤에서 한 번 레이첼을 끌어안아주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 그 복장은?"
나는 할 말을 잃고 소피아를 바라봤다.
"왜, 뭐가."
라고 말하지만 너도 지금 쪽팔리잖아! 그게 뭔 복장이야!? 평상시에 입던 옷들은 어디가고.
어디서 구한거야, 그 검은 가슴트임 터틀넥은? 게다가 원피스인데 아랫단이 짧잖아! 너 하이힐 신는 캐릭터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무섭게. 검은색 옷을 빼고 살부터 머리카락까지 온통 하얀색이라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럼 술집에 와이셔츠랑 정장치마 입고 들어갈까?"
그러면서 걸어가는 소피아지만. 하이힐이 어색한지 걸음이 영 불안하다.
"그러니까 왜 제대로 걷지도 못할 물건을 끼고 와?"
나는 그녀를 조금 부축하면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심하게 안 어울리나?"
소피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요. 훌륭한 파괴력이다, 소피아.
"어울리지만. 약간 의외라서."
그 말에 소피아가 나를 가볍게 째려보다가 웃는다. 콧대 높아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여자처럼 안 입고 다니는 거랑, 못 입는거랑은 달라."
예,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나는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술과 함께 먹을 간단한 것을 시켜놓고. 나는 주변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시간을 조금 보냈다.
"대충 짐작이 간다."
나의 말에, 소피아가 나를 바라본다. 저렇게 입고 있으니까 파괴력이 엄청난데. 빈약한 몸매로는 절대로 부각될 수 없는 강대한 장점이 물씬 흘러나온다.
"말해봐."
"메뉴. 시킬 때 웨이터가 주문을 받는 시간이 긴 물건들이 있어."
메뉴에 뭐가 있는 거겠지. 일정한 조합으로 시킨다던가. 아니면 웨이터가 주문을 받을 때 따로 싸인을 주고 받는다던가.
"흠, 다음 번에는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한 번 조사를 시켜야겠네."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지개를 한 번 킨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나랑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장난끼를 눈에 번쩍이면서 말했다.
"왜, 만져보고 싶어?"
"...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소피아가 큭큭거리면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조심스럽게 입에 딸기 하나를 문다.
"뭐가, 남자들 내 가슴보고 헐떡거리는거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어, 기왕에 온 김에 더 마시고 가지?"
소피아가 일어나는 나를 보면서 말했지만. 나는 신중하게 단어 선택을 했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기다리니까. 일찍 가서 자려고."
그 말에, 소피아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일은 다 마쳤으니까. 그러도록 할까."
나와 소피아는 한 잔씩을 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어... 소피아는 아직 27%에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거죠(여러분이 소피아가 정신병자가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속만 곪기 시작하는 거에요)
소피아와 얽힌 잭을 위한 100%의 깜짝 이벤트는 아직 열리지도 않았답니다.
레이첼은 저 언저리에서 잭의 집에 몰래 침입하고 물건을 훔쳤죠. 100%에 감금했고.
감금은 이미 쓰였으니까. 다른 거 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