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냉이꽃 -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
시간이 더 지나자, 소피아의 말대로 거리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일어나던 조직들도 호핑 존스의 눈치를 보면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나도, 사무실에 편히 앉아서(이제는 더 머리를 쓸 일도 당분간은 없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가 다 나아서 걸어다니는게 수월해진 크리스틴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 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면서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히죽거리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에 닿는 말랑거리는 감촉. 이 상태에서 강제로 입술을 떨어뜨리면 적어도 세 시간은 땡깡을 부리니까. 그냥 만족할 때 까지 있어주는게 좋겠지.
거기까지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크리스틴은 여자고 나는 남자니까. 여자의 입술이 남자의 입술로 굳이 와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싶다고 하는데. 그걸 굳이 막을 필요는 없잖아.
사실, 막았어야 했나보다. 나는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문 너머에 서 있는 레이첼을 발견했다.
"... 당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의 눈이 서늘하다. 그리고, 꾸욱 힘을 주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의 턱선을 타고, 땀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나는, 재빠르게 내 입에 달라붙어있던 크리스틴의 입술을 때고 외쳤다.
"레이첼?! 이건 니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
닥쳐, 라고 레이첼이 크게 소리치고 나를 바라본다.
"나한테, 이런 상황 설명하려고 하지마. 지긋지긋하니까! 차라리... 차라리!"
레이첼이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복부에서 밀려 올라오는 뜨거운 감각. 칼...? 야, 너 칼은 어디서 구했냐. 나는 욱신거리는 고통에 인상을 쓰고 레이첼을 바라봤다.
손을 뻗어서 배를 쓰다듬으니, 셔츠가 축축하다. 고개를 내려서 배를 살펴보자. 셔츠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하얀 셔츠 위로 조금씩 베어나오던 피는 이내 점점 커지고. 셔츠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레이첼이 나의 상태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아니... 이건.. 이게..."
레이첼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패닉에 빠지고. 나는 후끈거리는 감촉 속에서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여러분 바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 다시 눈을 떳을 때에는. 나는 병원에 있었다. 예전에도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그 병원.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은 소피아였다. 조금 움직이자 그대로 복부에서 소름끼치는 고통이 전신을 질주한다.
"수술 끝난지 얼마 안 지났다. 그나마 내장 거의 안 다친걸 다행으로 알아. 원래 배에 칼 맞으면 대부분 얼마 못가서 죽으니까."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노트북을 가지고 뭔가를 계속 처리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어디에...?"
그 말에, 소피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레이첼만 미친게 아니라. 너도 미친게 분명해. 지금 그 빨강머리 계집이 니 복부에 칼빵을 박았는데. 그 여자를 찾고 싶어져?"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사소한 오해입니다."
그 말에,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두 사람이 무슨 연애 소설에 나오는 꽁냥거리는 커플도 아니고. 부부싸움 정도는 있는게 당연하지만... 무슨 스케일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거야?"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레이첼은, 찾을 수가 없었어. 어디로 간 건지."
그 말에, 나는 욱신거리는 상태로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없다니, 그게 무슨...?"
그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몰라, 도착 했을 때 상황 보니 앰뷸런스 부르고 응급조치를 한 다음에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더라고."
나는 살며시 내 배를 쓰다듬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야. 칼 다루는 데에 나름대로 전문가인 내가 말하는데. 레이첼이 그 괴력으로 니를 찔렀으면. 칼이 척추까지 박살냈을테니까. 칼이 살갗에 닿았을 때, 힘을 뺀 모양이야."
그 말에, 나는 살짝 내 배를 매만지고 똑똑 떨어지고 있는 링거를 바라봤다. 레이첼은 나 없으면 상태 안좋아질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크리스틴도 그 장면에 거의 정줄을 놔버렸다고. 내가 거기 갔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 침상에 누워서 구속복을 입고 잠든 크리스틴을 가르켰다.
"지금이야 진정제 맞고 자고 있는데. 저 목에 상처 보여?"
크리스틴의 목 주변에는 손톱으로 그은 듯한 흉터가 한 가득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 여자는 나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고. 한 여자는 그 옆에서 자해를 하고.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우울해지는데.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병신아, 움직이지 말라고! 얇게 찔렸다는게 그 여자 힘에 비해서 얇게 찔렸다는거지. 너 지금 함부로 몸 움직이면 포도주 다 빠져나가서 뒤져!"
그 말대로, 조금 움직이자 살짝살짝 붕대에 붉은 반점 같은게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와, 이거 존나게 아프네 진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 바로 앉았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여기서 죽여줄까?"
소피아의 말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레이첼 지금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나는 레이첼과 호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피아에게 해주었다.
"... 역시, 그 맛탱이가 가버린 눈은 그냥 나오는게 아니었구만."
그 정신상태로 어딜 가겠다고. 나는 욱신거리는 배를 잡고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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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을 공격했다.
레이첼은, 어두운 지하실 구석에서 멍하니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가, 잭을 공격했다. 칼로, 그것도 죽을 수도 있는 배를.
"꺼져..."
레이첼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거야? 위로라도 해줄까 하고 왔는데."
검은 옷의 레이첼. 그녀가 다시 레이첼을 찾아왔다. 아무도 없는, 레이첼 자신도 위치를 잘 모르는 지하실에서. 그녀가 레이첼을 보고 웃는다.
"마지막에 힘을 빼서 조금 아쉬웠어. 그대로 깊게 찔러 넣었으면 잭은 그대로 쇼크사 했을텐데."
"꺼져! 꺼지라고!"
그리고, 레이첼의 주먹이 벽에 기대어서 웃고 있는 검은 레이첼에게 박힌다. 허상일 뿐인 검은 레이첼의 몸을 통과해서, 레이첼의 주먹이 지하실의 벽을 두들긴다. 쿵, 쿵, 쿵... 그리고,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레이첼의 주먹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성을 내는거야? 잭을 찌른 건 너잖아?"
... 그 한 마디가 레이첼의 몸을 그대로 정지시켰다.
내가 죽이려고 했어. 잭을! 가질 수 없으면 죽이겠다는 식으로 항상 말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잭을 칼로 찔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검은 옷의 레이첼이 그녀를 보면서 키들키들 웃었다.
"너는 그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아. 잭도 사실 네가 부담스러울걸? 생각해봐. 누가 너 같은 년을 좋아하겠어?"
"아니야... 아니야..."
그리고, 검은 레이첼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게다가, 이제는 그 남자의 복부에다가 칼 까지 박아넣고. 응? 나도 물론 냉정한 편이긴 한데. 와, 니 행동에는 감탄했어. 어쩜 그렇게 미련없이."
그게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이첼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잭을 공격했고. 거의 죽일 뻔했다. 그 상태에로 그냥 두었으면 잭은 죽었다.
"으윽.... 흑..."
레이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검은 레이첼이 비아냥거린다.
"오, 갑자기 왜 우는거야? 잭을 죽인 죄책감 때문이야?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네. 아마 지금쯤 잭은 병원에 누워 너를 생각하면서 이를 갈고 있을걸?"
그렇겠지. 나 같은건 꼴도 보기 싫지 않을까. 앞으로 내가 잭의 곁에 있는다면. 내가 과연 잭을 다시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심지어, 그 때는 저 빌어먹을 검은 년도 없었다.
순전히 레이첼 스스로가 한 일이다. 그게 더 그녀의 마음을 산산히 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지하실 구석에 박혀서.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고, 손톱을 부러뜨리면서 벽을 긁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오로지 한 여자가. 뚱한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다.
"괴로워 하는 척 하기는."
검은 레이첼이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게 괴로우면 그냥 죽어. 어차피 너 같은거 없어도 잭은 잘 먹고 잘 살걸?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여자를 사랑할 일은 평생가도 없을테니까. 지금 죽는게 덜 괴롭지 않겠어?"
처음으로, 레이첼의 귀에 저 검은 여자의 목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그럴까? 그게 잭을 위해서 나은 걸까?"
그 말에, 검은 레이첼이 미소지으며 천천히 다가온다.
"그럼, 어차피 너 같은 여자. 옆에 있어봤자 위험하기만 하잖아. 너의 사랑하는 잭을 위해서."
죽어버려. 라고 검은 레이첼이 속삭였다.
"니가 직접 말했었잖아? 니가 먼저 죽어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 말에, 레이첼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잭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모처럼 네 입에서 나온 제대로 된 말인데. 실천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잖아."
그러면서 검은 레이첼이 천천히 레이첼의 뒤로 돌아가서 그녀를 끌어안는다.
"잭을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 너는 죽는 편이 좋아."
레이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죽을게."
그 말에, 뒤편에 있던 레이첼의 입이 귀 밑에 걸릴 정도로 크게 찢어지면서 끔찍한 웃음을 그려낸다.
"잘 생각했어."
그때, 레이첼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돌이켜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첼은 지하실에서 일어났다. 근처의 화장실로 가서, 그녀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깨끗하게 씻는다. 옆에서 검은 레이첼이 투덜거리면서 흐려진다.
레이첼은 흐린 눈으로, 축 쳐진 어깨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거리로 나섰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로얄 플로렌스 호텔. 그녀는 그곳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은 레이첼이 하염없이 그 호텔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같이 밖에서 잠들었던 곳이었다. 사실,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능하면 좋은 일들만 떠올리고 싶지만. 그때 봤던 환상들도 함께 떠오르며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30분 정도, 그곳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잭의 집 근처. 감히 저 안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한채. 그녀는 그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저 곳에서, 나는 잭을 가두었다. 저 곳에서, 잭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요리를 해 줬고. 처음으로 같이 잠자리를 가졌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머릿 속에 들어가 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주렁주렁 쏟아져 나온다. 저 안에서 있었던 기억 중에서. 슬픈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오히려 그때의 달콤했던 기억들이 그녀의 가슴을 쑤시고 들어와 속을 뒤튼다. 바라보는게 너무나도 괴로워서. 그녀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그녀가 다음으로 걸어간 곳은 복구가 완전히 끝나고, 정상적으로 영업까지 하고 있는 엔젤스 니플. 그녀를 알아볼 것이 분명하기에. 그녀는 멀리 떨어져서 그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술집 하나를 찾아들어갔다. 잭과 갔던 술집. 그녀는 테이블을 잡고 앉은 다음. 아는 척을 하는 사장에게 말했다.
"키르 로얄, 크뤼그 써서. 샴페인 맛 죽이면 혼난다고 말해두고. 내 테이블로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해."
잠시 뒤에, 그녀의 앞에 놓인 잔. 그녀는 천천히 그 술을 마시면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뭐 하고 지내십니까?"
"뭐, 항상 바쁘지. 아무래도 조직관리를 하고 있다보니. 제대로 쉴 시간도 잘 나지 않는 편이야."
"뻥치고 있네."
혼자서, 그녀는 잭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앞에 잭이 있는 것 처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울상이 되어서. 술잔을 붙잡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레이첼이... 마음에...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레이첼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말을 끝 맺지 못한다.
============================ 작품 후기 ============================
레이첼 치료 테라피를 하려고 합니다.
... 그냥 제목을 바꾸려고 했는데 50화가 날아가버렸네요. 죄송합니다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