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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골목 시뮬레이션-46화 (46/75)

00046 하늘을 수놓는 수백개의 불꽃 =========================

약간 시간이 지나고. 레이첼이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슥 보고는 놀랐다.

"... 왜 이렇게 땀 투성이야?"

그 말에, 레이첼이 살짝 미소짓고 말한다.

"오랜만에 운동을 조금 해서 그런가봐."

나 조금, 씻고 나올게. 라고 말한 다음 레이첼은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뭐야 방금 전의 그 파리한 안색은. 운동이 건강에 좋다더니 다 개소리였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인데.

잠시 시간이 지나고, 레이첼이 목욕가운을 입은 채로 나온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녀가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는다.

"왜 그래?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아."

나의 말에, 레이첼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한 다음 내리려고 하던 나의 손을 붙잡는다.

"조금만, 더 만져줘. 당신."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뺨을 가볍게 매만지고. 이마에 뽀뽀를 해준다.

"힘내."

"응, 힘내고 있어."

그리고, 레이첼이 나를 살짝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와인이라도 한 병 마실래?"

레이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에는 금세 와인 한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가 차려진다. 와인잔에 술이 따라지고.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있잖아."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아가페 근거지를 그쪽으로 옮기는 건 힘들까?"

그 말에, 나는 잠깐 고민하기 시작한다. 핸드폰으로 연락할 때에는 잘 몰랐는데. 앞에 마주본 상태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너무 힘들다. 나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레이첼."

"... 아니, 힘들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나는 고개를 돌리며 하는 그녀의 말에,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그녀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나의 말에, 그녀의 눈이 약간 떨리기 시작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그냥 당신과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런거야. 부담 되면 괜찮으니까!"

레이첼의 양 어깨를 꼭 잡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이 여자 지금 이상해. 아니, 원래 이상한건 나도 아는데. 내가 맨날 말하잖아. 이렇게 표현하면 평상시보다 약간 더 이상한 걸 의미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레이첼이 평상시보다 약간 더 이상하다. 내가 무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존나 답답한 남자 주인공 새끼도 아니고. 사람이면 이 정도는 눈치채는게 당연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 숨기지 말고."

상황 돌아가는 걸 좀 알아야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나와서 너무 좋다면서 생글거리던 여자가 어마무지한 생리통이라도 겪는 것 같은 표정을 갑자기 짓다니.

"... 요즘 내가 이상해. 아니, 정확히는 내가 카를에게 아가페를 뺏기기 전부터 그랬어."

레이첼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고. 나는 천천히 레이첼을 테이블에 앉히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당신이 없으면 자꾸 헛것이 보여."

그렇게 말문이 터지기 시작한 레이첼이, 나와 마찬가지로 와인잔을 들고 와인을 쭉 들이킨 다음 입을 연다.

"나는 여기 있는데. 다른 내가 자꾸 보여.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나와 똑같이 생겼는데. 모든게 다 검은 내가. 그리고, 나에게 자꾸 말을 걸고. 그 뒤에는 환각이 보여..."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그 환각이라는 물건들이 결코, 절대로 보통 물건들이 아니었다. 뭐냐 그 소름끼치는 호러 무비는. 혼자 있을 때 마다 쏘우를 찍고 있었네.

대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레이첼은 나에게 그렇게 많이 문자와 전화를 걸었는가. 어째서 그녀가 항상 내 곁에 있고 싶어했나. 어째서, 그녀가 내가 없으면 뛰쳐나가고 싶다고 말했나.

다 이유가 있었다.

"레이첼. 내일부터 아가페 이쪽으로 옮길 준비해."

그 말에, 레이첼이 당황한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조직들이 엄청 경계할거야."

그건 니가 말 안해도 알고 있어 임마.

"됐어, 녀석들이 움직일리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어. 걱정하지마. 옮겨."

그리고,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와인을 마셨다.

그래, 소피아에게 호핑 존스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적절한 시점에 뒤통수를 후려까고. 호핑 존스를 먹어치워서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펑키 바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그 뒤로는 펑키 바니를 잊고 내가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아니, 근데 씨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러기가 힘드네.

... 밤일을 마친 후에, 레이첼은 내 옆에서 잠들었고. 나는 잠깐 바람을 쐰다는 말과 함께 베란다로 나왔다.

"펑키 바니."

목적이 바뀌었다. 그냥 적당히 자리 굳히고 아무도 깝치지 못하게 한 다음에 레이첼의 깊은 상처와 크리스틴의 깊은 상처를 치료하고. 기회가 된다면 소피아까지 꼬셔내서 평화롭게 게임을 이어간다는 나의 목적은 이제 휴지조각이 되었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이제는 크리스틴의 머릿 속에 도대체 뭐가 자리잡고 있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소피아에게 진짜로 호핑 존스를 넘겨야겠네."

그리고, 그쪽에서 일정량의 수입만을 보장 받으며. 위장 신분을 만들고. 나는 다른 쪽으로 손을 뻗어야겠다.

"원래 하렘을 만들고 싶으면 미연시부터 켜야 하는 법이지."

설마, 내가 오징어를 버리는게 아니라. 잭 오 랜턴을 버리고 오징어를 취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상의 조직으로는 돌 마스크나 아르카나, 크립티드 같은 숨어다니는 조직들을 잡아내는게 굉장히 어렵다. 조직의 성격이 다르고. 애초에 지켜야 할 근거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호핑 존스 같은 조직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다. 힘은 강하고, 덩치도 거대하지만 속도는 떨어지는 공룡 같은 조직. 그에 비해서 돌 마스크 같은 경우에는 작은 생쥐 같은 녀석들이다. 빠르고,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근거지를 옮길 수 있다. 아니, 애초에 근거지라는 개념 자체도 희박하다. 범죄를 꾸밀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그걸 곧바로 근거지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나도 군살을 빼고 달려들어야 한다.

언젠가는 그 아.아.아. 거리는 재수없는 인형탈을 벗기고 마빡에다가 네일건을 박아주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을 정리하고 나면 이 로고스 시티가 도시 단위로 멀쩡하게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시 단위로 갈 필요도 없지. 일단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걸어다니는 정신병동 같은 나의 위치도 조금 재조정되고.

... 재수 좋으면 크리스틴이랑 레이첼을 한꺼번에...!

"나도 정말 미친새끼야, 가만히 보면."

생각의 흐름이 이상하잖아. 지금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려있는 두 사람을 구하는게 목적이잖아. 근데 왜 갑자기 섹스 생각은 하고 지랄이야. 미친 대가리 같으니라고.

============================ 작품 후기 ============================

저는 정상이에요.

... 아마도? 그치만, 내가 쟁여두고 있는 다른 소설들은 얼마든지 정상적인데.

이건, 그... 작가가 소설에 몰입을 너무 잘한다고 생각해주세요.

보자. 이제 본 궤도로 다시 이동하려고 합니다. 항상 그렇듯이 약간은 마음에 안드는 에피소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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