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9장 요동신성(遼東辰星) (80/82)

제79장 요동신성(遼東辰星)

「제도개혁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 폐하의 연호(年號)를 공식적으로 병용(倂用)하되, 각종 공문서 및 국가 행사와 교육제도의 전면에는 요동국 개국기년(開國紀年)을 공식적인 기년법(祈年法)으로 삼되, 그 기원은 심요도독부가 폐지되고 국부(國府)를 세운 때가 아닌, 성명왕 전하께서 심왕작을 받아들여 심양부에 도읍을 정한 때로 삼아 심왕부를 창건한 때로 삼는다.

또한 기존의 이척(里尺)의 단위를 폐하고 전통적인 도량 단위도 모두 폐지하며, 프랑스 제국 정부 및 라인 동맹, 스웨덴 왕국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 동영연방공화국, 포르투갈 왕국, 진서자치국의 각국 정부가 지난해에 동의한 바와 같이 새로운 메트르(meter)법을 기용하여 모든 도량 및 측량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와 함께 기존의 의무교육제도를 정비하여 소학(小學), 중학(中學), 대학(大學)의 체제로 완전히 정비하고, 각 학업 연한은 6년, 5년, 4년으로 삼되, 필요한 경우 대학에 예과(豫科)를 설치하여 대학의 학업 연한을 6년으로 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국민은 소학교의 학업 과정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며, 각 부군(府郡) 단위마다 설치될 중학 및 로(路) 단위로 설치될 국립대학(國立大學) 및 민간의 자치대학(自治大學)은 의무교육제도에 두지 않는다.

이 외에 고급 장교의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武官學校)와 소학교 및 중학교의 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師範學校)의 제도는 존치시켜 중학교 과정을 마친 자에 한하여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며, 대학의 예과(豫科)에 상당하는 과정으로 보아 2년제로 운영하도록 한다.」

―〈기년법 및 도량제와 교육제도 등에

관한 교서(敎書)〉, (1817)

1819년

개국(開國) 403년 계추(季秋)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제5대 요동국왕인 김회(金茴)가 1811년 여든 줄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요동 왕실은 왕위 계승을 놓고 한동안 진땀을 흘려야 했다.

늦은 겨울에 갑자기 졸중으로 김회가 세상을 뜬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몇 달 전에 세자였던 김흘(金屹)이 독감을 심하게 앓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적손(嫡孫)이 있기는 했다. 김흘의 장남인 김호(金瑚)는 이제 나이 스물둘로, 10여 년 전 내홍 끝에 도입된 요동국의 「종친법 및 세후법」에 따라 형산대군(亨山大君)의 위(位)와 동녕후(東寧侯)의 작(爵)에 봉해져 있었다.

위의 종친법 등과 함께 개정된 「왕위승계법」에 따라 형산대군 동녕후 김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했다.

법제상으로도 그가 계승 1순위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다가, 위급한 마당에 일이 복잡해져서 그런 것이지, 아버지 김흘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면 어차피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승하한 조부 김회의 장손이었다.

문제는 겨우내 끝에 선왕이 승하했기에 그해 중으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선대 국왕의 국상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식을 거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왕의 자금줄 노릇을 했던 신완군 여순현남(旅順縣男) 김시유가 국장도감(國葬都監)에 또다시 큰돈을 대었고,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조정에서는 시호를 「흥정왕(興定王)」으로 올려 바쳤다.

그렇게 장례가 끝나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새 왕으로 형산대군 동녕후 김호가 즉위하니, 곧 1812년의 일이었다.

이 새 국왕 김호는 의욕적인 정사를 펼치고자 애쓰는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만큼 노련함은 없고 오로지 의욕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은 근년에 들어서도 요동 또한 점차 의회의 주권이 강화되어 국왕 전제(專制) 또한 점차 퇴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요동에서도 국왕이 마음대로 정사를 휘두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서임의원의 숫자도 이미 여러 차례의 법 개정을 통해 많이 줄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완전히 모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한 한국에 비해서 요동의 국왕은 처신의 품이 좀 더 넓었다.

김호는 그래도 아직까지 백 년 전에 비해 그 숫자가 반 토막이 나기는 했지만, 전체 200명의 국회의원 중에 25인을 왕명으로 종신서임의원(終身敍任議員)에 임명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옛 개혁 성향의 왕당파인 서당(西黨)을 전신으로 하는 「자유당(自由黨)」과 성경부의 관료 귀족 집단을 대변하던 동당(東黨)을 전신으로 하는 「국민당(國民黨)」으로 의회의 의석수가 나뉜 가운데, 전통적으로 국왕과 연대해 온 자유당과의 제휴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김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먼저 손을 댄 것은 철도 부설이었다.

그는 왕실의 내탕금을 비롯해 국고에서 일부 재원을 확보하고, 왕실 종친이자 성광사의 사주인 여순현남 김시유를 불러들여다가 무순의 탄광에서 심양 교외의 공장지대까지의 직통 철도를 시범적으로 부설하게 했다.

1814년, 이 시범철도가 성공적으로 운행하게 되자, 공식적으로 의정부 내에 「교통청(交通廳)」을 설치해 철도 및 도로, 항만 운수의 전반을 관장하도록 했다.

이 교통청에서 세워진 계획에 따라 우선적으로 성경―요양―여순 간의 철도가 계획되었고, 이 철도는 국유철도로 건설이 목적되었다.

성광사는 공사에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국왕 김호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철도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내지 철도와 접속되는 성경―의주 간 철도는 성광사에 매우 비싼 값에 부설권을 매각하였다.

이로써 성광사는 요동 내의 주요 철도의 매집을 포기하는 대신에, 요동의 수도인 성경부로부터 내지의 황성부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가는 주요 항구인 동래부 부산포까지 이르게 되는 총연장 1,000km가 넘는 종단철도(縱斷鐵道)의 운영권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철도만큼이나 김호가 심혈을 기울여 여기저기에 공사를 벌여 놓은 것은, 바로 운하(運河)였다. 요동을 관통하는 요하(遼河)의 수계(水系)는 대체적으로 매우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엉켜 있는 물길들이 많았다.

이러한 지형을 고려해 내륙수운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예로부터 사영(私營) 운하들이 적지 않게 조영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일부는 국유화하고, 일부는 직접 국가에서 연장하는 등 대대적인 개보수에 돌입하여 철도와 연계한 수륙교통의 접목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특히 최근 들어서 점증하는 광물 및 산업물자의 운송은 기존의 교통수단으로는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새로운 교통수단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기는 했다.

시기적절하게도 국왕 김호는 이러한 상황을 읽어냈고, 집권 초반부에 이러한 정책을 주도적으로 집행함으로써 국민들, 특히 상공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왕숙께서 특히 내지보다는 이 요동에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함께 상생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국왕 김호는 굳이 따지자면 당숙(堂叔)쯤 되는 여순현남 김시유를 가까이 불러들여서 산업 정책을 수시로 논했다.

물론 김호가 국가적 사활이 걸린 근대적 식산(殖産)을 수단으로 삼고 있기는 했지만, 실상 그가 그러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안정적인 내탕금의 재용(財用)을 마련하고, 국세에서 나오는 보조 이외의 왕실의 자기 자산을 마련하여 정치적인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왕권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던 국민당이나,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며 정치외적인 부분에서 충분히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동의 거대 자본들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왕실과 유착관계에 있으면서도 충분히 탄탄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김시유의 성광사와 더욱 밀착하는 편이 나았다.

김호에 의해 각종 이권이 성광사에게 불하되었고, 이중 적지 않은 부분은 성광사에 의한 지분의 공여(供與)로 고스란히 왕실의 재산으로 다시 귀속되었다.

김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채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왕실 재산 목록은 거의 두 배 이상 증가했고, 가용 내탕금 또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요동의 거대 자본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자금 동원력을 국왕이 가지게 된 것이었다.

심양 한씨를 비롯한 요동의 주된 구문벌 계급이 중심이 된 국민당은 이를 알고서 국왕 김호를 점점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정책을 편의대로 시행해서 왕실의 재산을 무한정 불리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더군다나 주요한 국책사업의 시행권을 성광사에게 모조리 빼앗기고 있다는 불안감이 든 거대 자본들 또한 국민당과 결탁하여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가 시행하는 정책들은 요동의 향후 산업의 개진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들이었고, 때문에 정책 자체를 무위로 돌릴 것을 이들이 주장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오로지 초점은 국왕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왕실의 자산을 늘리고 있다는 것에 맞춰졌는데, 이 또한 아직 봉건적인 인습이 남아 있는 민간의 인식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아니, 나라 땅이 원래 다 전하의 것인데 조금 재산이 늘었다고 해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덤벼드는 놈들이야말로 날이 갈수록 배에 기름이 차고 있지 않은가?”

시중의 여론은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원체 국민당이 상류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며 민심과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부적으로는 노동 계급을 수탈하고 외부로는 순나라와 같은 경제적인 식민지를 경영하여 끊임없이 탐욕적으로 자본만을 증식하는 거대 자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서 국왕의 재산이 조금 늘어난 것 정도야, 하는 생각이 요동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생각이기는 했다.

요동은 이미 헌법(憲法)을 채택하여 왕권을 점차 축소하고 국민의 이익을 공정히 대변하기 위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완성하기 위한 정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고, 더군다나 정치적인 수단으로 국책 사업을 불하시킨 다음, 거기서 다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방법은 국왕이라 하더라도 부정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초기 근대사회에 접어든 요동에 있어서,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가치 판단까지 완전히 근대적으로 각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봉건시대의 잔재는 세계 어디나 할 것 없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이러한 의식은 근대화의 거대한 물결과 마주치고 있는 한국, 요동,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군주정이 잔존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김호는 전시적 행정으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면서, 실익을 챙길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호라고 해서 언제고 요동에서도 프랑스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예전 내지에서처럼 불만이 가득한 사족들이 국왕의 전권을 철폐시키는 의회주의적인 반역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장기적으로 국왕의 정치적 권리가 축소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그가 모든 권리를 내어놓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제도적으로든 실제 정치의 현장에서든, 아니면 국민의 마음속에서든 김호는 왕실이 영향력 있고 명예로운 자리로 존속되기를 원했다.

취약해져 가는 왕실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는 것이야말로 다음 시대를 위한 자신이 할 일이라고 김호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종의 사취(詐取)를 조금 했다고 한들 문제가 될 일이냐는 것이 김호의 내심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요동 국민들은 그것을 눈감아 주었다.

다만 김호가 그렇게 역풍을 피해갔다고 하더라도 성광사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에게 가야 할 비난이, 만만한 성광사에게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략적으로 왕실과 결탁하는 것은 이미 심양의 자본가들과 선을 긋고 있는 우리 성광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이제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우리가 져야 할 상황이다. 우리가 이미 건설 중에 있는 철도에 대한 불하를 취소하라는 탄원이 의정부에 쏟아지고 있을뿐더러, 요동에서 돈을 벌어서 한국에다가 쏟아붓고 있다는 비판이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더럽기로 치면 순나라나 요동 국내에서 각종 방법으로 자본적인 수탈을 하고 있는 그들이 더할 터인데, 우리가 워낙 부각 되다 보니 포화를 맞는 것을 면할 수가 없구나. 네 생각은 어떻냐? 우리가 어찌 해야 좋을까?”

최근의 고민으로 부쩍 늙고 주름진 김시유는 여순의 자택의 응접실에 앉아서, 오랜만에 찾아온 장남 김현과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국 본토에서의 성광사 사업을 부친을 대리해서 총지휘하고 있던 김현은, 요동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냉철한 판단 능력과 사업 감각은 이내 곧 맥락을 짚어가기 시작했다.

“정면 대응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론이라는 것은 갈대와 같아서 큰 바람이 불면 한쪽으로 모두 휩쓸리어 갔다가 다른 바람이 불면 또 반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풍향을 우리가 주도해야 합니다. 그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바람을 어떻게 조성해야 할꼬?”

“한국이나 요동이나 할 것 없이 이제는 사법에 의한 조정이 갈수록 활발해질 것입니다. 이미 저들이 국유재를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불하했다고 주장하면서 재판을 청구하는 소장을 작성하고 있다지요? 우리는 우리대로 상업 법률가들을 육성해서 앞으로 늘어날 이러한 재판에 대처해야 합니다. 법적인 수단을 광범위하게 확보해 놓지 않으면, 요동에서 앞으로 사업하기가 힘들어질 테지요. 둘째로는, 민심을 돌려놓기 위해서 재단 따위를 설립해서 성광사가 그동안 축적한 부를 민간에 환원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 돈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고아원을 세우고 빈민 구제에 돈을 내어 놓고, 학교를 세우고……. 철도나 운하를 건설해 얻을 수 있는 돈에 비하면 매우 푼돈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공격하기가 껄끄러워지는 것이지요. 위에서 큰돈이 오고 가는 일의 내막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전시적으로 보여지는 자선 활동은 뇌리에 깊숙이 남지요. 우리는 사회적인 기업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양의 금융 자본들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요. 누가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지, 어떤 자본으로 움직이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심양 은행가들에 비해서 성광사는 차라리 인민들에게 다가가기 쉽습니다. 직접 여기저기 사업을 벌여서 눈에 보이는 투자와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공격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단점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친숙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대체 국민들 중 심양의 주요 은행들이 심양 한씨, 요양 성씨 같은 옛 문벌가문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반대로 성광사 사주가 여순현남 김시유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지요. 우리는 이걸 차라리 무기로 삼아야 합니다.”

김시유는 아들 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끔 김현의 날카로움에 흠칫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예리함이 기업 운영에 큰 도움이 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김시유는 내심 아들 둘 중에 하나는 건졌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느끼곤 했다.

둘째 아들은 철없이도 신분과 계급을 망각하고 이상주의에 빠져서 집안과 연락을 끊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어도 후계자로서 장남 김현이 보여주는 판단 능력을 김시유는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부인인 전혜린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듯했지만, 갑작스럽게 기업을 물려받아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야 했던 김시유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타고난 기업인의 기질을 보이고 있는 김현이 믿음직스러웠다.

김시유가 생각하기에 이제 더 이상 예전 모친인 유청령이 옛 남성물산을 운영할 때처럼 느슨한 방법으로는 기업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업가는 불가피하게 자본의 논리를 쫓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판단을 몸에 이미 익히고 있는 장남 김현은 그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후계자였다.

“네 말대로 하도록 하자.”

“법률가에 대한 지원이나 재단 운영을 사람들을 기만하는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성광사가 고려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은 바로 기업 자체가 살아남아 번창하는 일이지, 국가에 어떠한 기여를 하느냐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지 정부 관료가 아닙니다.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색내기 수준으로 재단을 운영하며 푼돈을 풀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희생으로 생각하고 칭송해 줄 것입니다. 지방의 만석꾼이 지주 노릇을 하며 늘 놀면서 소작료를 취해도, 기근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면 훌륭한 신사로 칭송을 받습니다. 기업 운영도 별 다를 게 있겠습니까? 우리는 농경시대의 대지주와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백을 벌어서 십만 내어놓아도,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 구십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말지요.”

김시유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충분히 이 성광사 전체를 맡아서 운영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사업을 익힌 듯싶구나. 이 일이 마무리되면 너에게 운영권의 대부분을 넘기도록 하마. 내지뿐만 아니라 요동의 사업도 네가 조만간 총괄하도록 하여라. 그전에 국왕 전하와 왕실 인사들과도 자주 얼굴을 마주하며 안면을 터놓도록 하자. 그들 만한 사업의 동반자가 없다.”

김현은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자신이 물려받을 기업이었다. 괜히 아버지를 위협해 가면서 빨리 경영권을 취하려는 인상을 줘서 좋을 것은 없었다.

“아직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서둘러 경영권을 물려받기 보다는 천천히 아버님 밑에서 더 배우겠습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충분하다.”

처음부터 기업가가 아닌 학자의 인생을 살기 원했던 김시유였다. 다행히 운도 따라주고, 기업 운영에 대한 나름의 수완도 있어서 지금까지 성광사를 잘 성장시키고 이끌어온 그였으나, 그 일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때가 되어 김현이 일을 충분히 물려받을 때가 되면 언제고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그때가 찾아온 듯싶었다.

김시유는 김현의 제안대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적지 않은 돈을 내어서 자신의 군호(君號)를 따서 1819년, 「신완재단」을 세우고, 각지에서 구호사업과 빈민 지원, 그리고 학교 운영 등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여순에다가 「사립성신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이 학교는 성광사의 이익을 대변해 줄 상업법률가 및 회계사, 무역 인력 등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통적인 전인 교육이 아닌 근대적인 자본 계급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 그런 전문인력을 키워내는 것이 바로 이 대학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학이 설립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한 해 전인 1817년에 국왕 김호가 정략적으로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발표한 교서(敎書) 덕분이었다.

도량형 및 연호법, 그리고 교육제도에 대한 포괄적인 개혁령을 담고 있는 이 교서에는 민간이 자기 목적에 따라 자치대학(自治大學), 즉 사립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는 데 성광사의 로비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렇게 세워진 대학은 성광사와 신완재단의 각 앞 글자를 따서 성신(星愼)이라 이름을 명한 데서부터 그 대학의 가치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 대학은 명석하고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나, 대학 교육을 받기에는 자금이 충분치 않은 학생들을 장학금을 수여해 가며 공부시켰고, 이렇게 배출된 인력은 성광사의 도움으로 공부했기에 그 기업이 요구하는 일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많은 졸업생들이 성광사가 사외에 세운 법률사무소와 회계법인 따위에 들어가서 성광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숫자가 성광사에 아주 취직하기도 했다.

더러는 드물게 성경부의 관가(官街)에 진출하여 관료가 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또한 성광사와 깊게 연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성광사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개적인 활동은 곧 여론이 성광사에게 우호적으로 바뀌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김현의 말마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광사가 어렵게 번 돈을 국익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내어놓았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모두 성광사에게 이득이 되는 일들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예리한 사람들은 성광사의 묘수를 파악해 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세기 전, 정경대군 김우가 순나라 인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자 일으킨 남성물산의 본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1820년

개국(開國) 404년 계추(季秋)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요동에서 공식적인 기년법(紀年法), 즉 연도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개국(開國)」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젊은 국왕 김호의 개혁적인 정책 중 하나로 시작된 이 개국연호는 한국의 심심한 반발을 불러왔지만, 요동에서는 크게 환영받았다.

명목상 요동국왕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라는 의식적인 끈만 남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이러한 연호의 개수를 제약할 방법이 한국으로서도 마땅치 않았다.

더군다나 공식적으로 개국 연호를 쓰되, 필요에 따라 한국 황제의 연호를 쓰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명분 또한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연호가 바뀌는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요동이 책봉(冊封) 관계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형식적인 군신 관계에 따라 새 국왕이 즉위했을 경우 황성부에 주재하는 고등판무관을 통해 대한제국 황실에 이를 알리기는 했으나, 요동에서는 더 이상 책봉 사절을 황성부에 보내지도 않았고, 대한제국 정부에도 이를 공식적으로 통보하지도 않았다.

요동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요동국왕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일 뿐이지, 요동국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 사이는 완전히 대등하며, 아무런 종속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외교적 방침하에 황성부 주재 고등판무관실 또한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주차 대요동국 고등판무관실」로 이름이 고쳐졌음은 물론이었다.

의회혁명으로 황제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은 데다가, 같은 황제를 섬기되 정부는 공유하지 않는 제주자치국, 진서자치국 같은 정부들이 세워졌기에 내지 정부의 운신의 폭은 더더욱 좁아졌다.

더군다나 지난 세기 말에 들어서부터 공식적으로 국제 관계를 규율하기 시작한 일종의 합의적인 국제 법률인 「만국공법(萬國公法)」, 혹 「국제법(國際法)」의 존재로 인해 이는 더욱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황성부 조정에서는 요동과의 관계가 제국 내의 법령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지만, 실질상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요동국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국제법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동이 독자적인 개국기년을 사용하는 것을 황성부에서 어떤 형태로든 제약할 방법은 전무했다.

여전히 국력에 있어서 한국이 우세하기는 했지만, 요동은 약소국이기는커녕, 오히려 열강에 가까운 나라였다. 이러한 나라를 물리적으로 명분 없이 제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복 조치로 요동산 물품에 대해서 내지 정부가 관세를 일시에 인상하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흔들릴 요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비난하는 요동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만 높아졌을 뿐이었다.

요동은 자신들을 제국의 일부로 여기지 않은지 이미 오래였다.

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한국에서 찾기 보다는, 요동사(遼東史)라는 계통수를 세워 확보하고자 이미 한 세기 가까이 시도하고 있었다.

한국은 삼한(三韓), 신라(新羅), 고려로 내려오는 반도문명이며, 자신들은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요와 금을 거쳐 내려오는 대륙문명이라는 분열사론(分裂史論)이 요동국 정부의 주장이었다.

고래로부터 요동은 예맥(濊貊), 말갈(靺鞨), 거란(契丹)이 함께 살아온 땅이었으며, 실제로 요동국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조선계 인구뿐만 아니라, 옛 원나라 지배 시절 이주한 고려인들, 신대륙 이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잔류해 있는 여진인들, 그리고 몽골계 및 한족 계열의 인구까지의 다양한 혈연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요동의 성격상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요동 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한국 내지를 중심으로 범한국주의(凡韓國主義)가 점차 형성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는 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상용(常用)했던 옛 대한제국판도 내의 국가는 다시 제국의 깃발 아래에 뭉쳐서 단결해야 했다는 쇼비니즘적인 국가민족주의는 점차 내지에서 목소리를 얻고 있었다.

실상 대한제국은 이전 시대의 상업제국을 해체하고 근대적인 제국주의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직한 옛 외지 영토들은 정리되고 식민정책이 자본적 착취가 수월한 동남아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전통산업 종사자 및, 농민 계층 등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제국이 쇠락하고 있다는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민족주의 정서로 국민을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점진하고 있는 다른 열강들로부터 제국의 영광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범 한민족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거창한 수식어가 여기저기 나붙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요동의 민족주의는 소(小) 민족주의라는 배반적 사상으로 내지에서 지탄받고 있었다.

이러한 소 민족주의가 진서에서의 반동적인 내란을 불러 왔으며, 제국을 해체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극우적인 민족사상을 지닌 자들이 공공연하게 도심에서 강론(講論)하면서 진서인이나 요동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은 이제 보기 힘들지 않은 광경이었다.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의 수순을 밟고 있던 재지사족(在地士族) 출신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쉽게 휩쓸렸다.

도시로 노동력이 방출되고, 값싼 수입 곡물 때문에 농산물의 가치는 떨어지고, 예전과 같은 향촌사회의 정신적인 지도층으로서의 위상도 잃어가는 이 향반(鄕班) 계급은 자신들의 영광스럽던 과거와 몰락한 현재를 제국의 부침(浮沈)과 같은 선상에서 보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본 수탈로 배를 불려가며 번영하고 있는 황성부의 귀족들과 자본 계급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몰락한 것이 내부의 반역자들이 제국을 찢어놓고 외부 세력들이 한국의 이권을 노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외부 자본에 대해서도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특히 요동 자본으로 지목된 성광사 소유의 철도에 대해서 공격을 시도해 10여 인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는 소동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천손단(天孫團)」, 「다물회(多勿會)」, 「흑룡사(黑龍社)」, 「신단회의(神壇會議)」 등의 극우단체를 구성해 가면서 신문사를 운영하고, 테러 단체를 지원하고, 극우민족주의적 성격이 짙은 책을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몰락 이후 200년 간 해체 과정을 겪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태동기에 분할 상태에 놓여 있었던 탓에, 특히 선진적으로 산업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동남 해안 지역의 양(梁)나라나 월(패)나라 같은 경우에는 단일한 한족(漢族) 민족주의를 부정하며 독자적인 근대민족형성의 과정을 거쳤다.

한때는 중앙의 관화(官話)에 비해 거칠기 짝이 없는 지방 방언으로 취급받았던 지역어들이, 새로운 국가의 국어(國語)로 승격되고 문어화가 진행되었다.

양나라에서는 오어(吳語)와 민어(뙤語)에 기초한 새로운 문어(文語)가 국가 주도하에 정비되었고, 국어로서 공용되고 있었다.

월나라는 급진적으로 한자를 포기하고 라틴문자를 차용해 월어, 즉 광동어를 국어로 삼아 표기했으며, 국가적 전통도 한당(漢唐)이 아닌 남월국(南越國)에서 찾았다.

2천여 년 전 진말(秦末) 한초(漢初)에 남해(南海)·계림(桂林)·상(象)의 세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 남월국은 월나라의 민족적 정통의 기원으로 여겨졌으며, 남월을 건국한 무왕(武王) 조타(趙陀)는 월 민족의 시조로서 추앙되었다.

양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월나라에 비해서 중국적 전통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지역 사가(史家)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통성을 옛 춘추시대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서 찾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함께했다는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성어인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양나라 정권하에서 강소(江蘇)계, 곧 동오(東吳) 지방 출신과 복건(福建)계, 즉 민월(뙤越) 지방 출신으로 크게 나뉘어 있는 양나라의 단합적인 민족 정통을 대변하기 위한 긍정적 의미를 담은 구호로 사려 깊게 전환되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국민들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봉건시대의 잔재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몰락하고 있는 순(順)나라나 주(周)나라와 같은 옛 국가들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중국(中國), 혹 중화(中華)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 자신들과 구분하여 내륙지역의 국가들을 지나(支那), 키탄, 즉 거란이라 폄칭하기도 했다.

그들 스스로는 양나라는 강남(江南), 월나라는 영남(嶺南) 등의 보다 고상한 어휘를 사용하여 표현하며 미개하고 뒤떨어진 내륙지역에 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혈통적, 지역적 우수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어 제국주의적 정책을 펴 나가고자 하는 국가적인 열망이 이 안에는 담겨져 있었다.

물론 반대의 현상도 똑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범한국주의에 필적할 만한 「범중화주의(凡中華主義)」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외세에 대하여 옛 한당송명의 판도 아래에 있던 모든 지역이 단결해야 하며, 다시 단일한 국가를 이루어 지방 방언을 폐지하고 순수한 주(周)나라 시대의 고어(古語)에 기반한 민족적 중국어를 정비하여 순결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체적으로 순나라나 주나라에서 양나라나 월나라 등으로 유학을 나와 온갖 차별을 받았던 고학생(苦學生)들에게서 먼저 주장되기 시작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던 계층으로 번져 나간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또한 자신들이 받고 있는 부당한 차별을 범중화주의라는 수단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의 상상 속에서 가오리방즈(高麗奉子)와 르이번귀즈(日本鬼子)들은 범중화민족해방의 대적(大敵)이었으며, 중화민족의 단결을 부정하는 양·월의 소민족주의자들은 소적(小敵)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적 침탈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순나라 민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외세를 몰아내고 양나라, 월나라의 분열주의자들을 척살하여 중화의 일통을 다시 이루어내자는 염원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순나라 조정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악용했으며, 고립되어 가장 취약하게 몰락하고 있는 주(周)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의 명분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

양나라 및 요동이 개입해서 주나라에 대한 순나라의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기는 했으나, 이는 도리어 순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범중화민족주의를 훼손하려 하는 가오리방즈와 매국 양나라 소민족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국민에 대한 지배와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하게 된다.

이 국민국가는 국경 내의 다양한 계급과 지역의 사람을 묶어서 민족(民族)이란 이름으로 재탄생시키고, 단일한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복무시킬 사상적 정당성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각 국민국가 사이의 이러한 민족적 이해관계는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몰락하는 제국은 옛 영광을 민족주의로 되찾으려 하며,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는 자긍심의 원료로 민족주의를 이용한다.

몰락하고 억압받는 국가는 저항의 수단으로, 단결을 위한 민족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국민국가의 정치적 구호는 이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도배가 되고 있었고, 타 민족 및 국가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가장 좋은 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인종주의적인 색깔이 뒤섞이며, 선진적이고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계도하기 위해 식민 지배를 하거나, 문명을 전수하기 위해 미개한 지역으로 진출한다는 담론이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당시대의 요동의 어떠한 사이비 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극동과 유럽은 유사 이래로 인류를 선도하기 위한 경쟁의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이제 그 기나긴 경주 끝에 극동이 승기를 잡기 직전까지 왔음은 명약관화하다. 위대한 아시아의 민족들은 인류문명을 지도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우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예맥(濊貊)민족의 후계인 요동인들이야말로 인류 인종의 위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담화는 그 민족의 이름만 바꾼 채 동일한 수사로 여기저기서 반복되기 일쑤였다.

다른 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꽃피기 시작한 일본의 국수주의(國粹主義) 이념의 정신적 거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주(神洲)인 일본은 천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강림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세운 땅이며, 천황(天皇)은 그 신손(神孫)으로 팔굉일우(八紘一宇)에 군림할 대군주(大君主)이시다.

근래에 이르러 각 열강 사이의 경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크게 나누어 동서 간의 쟁투(爭鬪)가 격화되고 있는데, 나는 이 가운데에서 동방민족들이 서양을 누르고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승리할 동방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이념을 누가 주도하느냐이다.

나는 단언컨대, 그 역사적 역할을 일본이 맡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동방의 역사적 무게의 추는 서쪽인 중국 황토고원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강남(江南)으로, 다시 한국(韓國)으로 점차 동쪽으로 흘러왔다. 이것은 역사적 운명이며, 결국 동방에서도 가장 동쪽인 일본에게 역사적인 신명(神命)이 내려질 것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마토(大和)민족은 이제 다시 남으로는 진서·유구를 천황의 품으로 안고, 북으로는 에조(蝦夷, 아이누)를 계도하여 천손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를 지도할 일본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1824년

개국(開國) 409년 맹춘(孟春)

요동국 남양로 여순부

1823년, 요동국 개국 409년 봄, 오랜 기간의 공사 끝에 성경과 여순 간의 소위 「경려선(京旅線)」철도가 준공되었다.

당초 예정된 대로 공사는 성광사가 맡았으나, 철도 자체는 국유철도로 귀속되었다. 요동 최초의 장거리 철도인 이 경려선의 완공으로 요동은 한국과 잉글랜드에 이어 철도 총연장이 100km가 넘는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 새로운 혁명적 기술은 산업화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철도 기술은 빠른 속도로 여러 국가들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1820년대에 들어서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와 일본 및 양나라 등이 최초의 철도 부설을 위한 착수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소위 산업의 쌀이라 칭송받는 강철(鋼鐵)의 대량생산을 위한 근대적 제철소(製鐵所)도 각국에 경쟁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들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산업정책을 시책(施策)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향후의 군비 경쟁과 국력을 키우는 일에도 직결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 국가의 위정자들은 파악하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산업에 경쟁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과 극서에서는 이러한 열강들 사이의 국력 경쟁이 점차 본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전신사업이라니, 그게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이오?”

노령을 이유로 반쯤 은퇴한 아버지를 대신해 성광사의 사주의 지위에 오른 김현은, 경려선 철도의 완공 이후 내지에서 건설 중인 경의선과 요동에서 진행 중인 성경―의주 간의 철도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여 접속시키기 위한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많은 구간의 철도가 이미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으나, 험준한 산지를 통과해야 하는 지역에서는 불가피하게 우회로를 건설하거나, 제한적으로 성공을 거둔 터널 공법에 의존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압록강을 건너기 위한 철교도 건설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총 연장 1,000km가 넘는 이 철도의 건설 계획은 생각보다 지연되고 있었고, 그만큼 성광사의 재정에 부담이 지워졌기에 김현은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여순의 성광사 본부에 어떤 중년의 남성이 사업 제안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당연히 그런 날카로운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전기를 통해서 통신을 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남자는 김현의 까다로운 반응에 기가 죽은 듯 말에 힘이 없었다.

요양부 출신의 발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우한기(于韓琦)라는 사내는, 어렵사리 기회를 얻어 성광사 사주를 만날 수 있었으나, 이미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전기라니, 자석에서 나오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이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지금 요동 정부에서도 한국과 같은 국영우편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착수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경쟁력이 있는지 어쩔지도 모르는 전신이라는 사업에 투자할 자금이 없소.”

평소 같으면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신이라는 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살펴보았을 김현이었지만, 막대한 돈을 성경―황성―부산 간 철도의 건설에 쏟아부은 데다가 이를 차질없이 관리하느라 정신적으로도 피로가 상당한 상황이었다.

어렵게 시간을 마련해 그 발명가라는 촌뜨기를 만났더니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을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아진 김현은 내쫓듯이 사내를 물리쳤다.

“다음에 또 뭔가 제안을 하고 싶거든 증명된 기술을 가지고 오시오.”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성광사 사옥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우한기는 이 일을 체념할지 어떻게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나 전신이라는 것이 김현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황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은 우한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전신기술의 기초적인 연구는 이미 지난 세기에 유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전기 현상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달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정보 전송에 이용하기 위해 착수된 연구의 역사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1753년에 스코틀랜드왕국의 학술지에 정전식 전신(靜電式電信, electrostatic telegraph)이 제안된 바가 있었다.

실제로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한 가닥의 전선을 알파벳 한 글자에 대응시켜서 전달한다는 구상이었다.

19세기가 밝아오기 직전인 1795년에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는 볼타전지를 개발해서 전기의 이용에 대한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1801년, 라인동맹의 물리학자인 사무엘 폰 죄머링(Samuel von Sommering)은 1799년에 발표된 아라곤왕국의 과학자인 프란시스코 살바 캄필료(Francisco Salva Campillo)의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라틴 알파벳과 숫자에 해당하는 최대 35개에 달하는 전신묶음을 이용하여 10km에 달하는 거리에 전보 송신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상용화하기에는 효율성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Ørsted discovered)가 1811년 전류가 자기장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듬해에 요한 슈바이거(Johann Schweigger)가 전류 및 전압 따위를 검사할 수 있는 검류계(galvanometer)를 개발해 냈다.

이러한 기술은 거의 격차 없이 한국 및 요동 등지에도 소개되었으며, 이에 따라 극동 지역에서도 전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점차 불이 붙기 시작했다.

1814년, 양나라의 과학자인 이세홍(李世洪)이 전자석(electromagnet)을 개발했다. 전자석은 전류가 생성해 내는 자기력을 증가시켜 줄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을 개량한다면 거리가 늘어날수록 커지는 저항(抵抗)을 뛰어넘어 정보를 송신할 수 있다는 착안이 여러 사람의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잉글랜드의 조셉 헨리(Joseph Henry)가 먼저 이 일에 뛰어들었으며, 소기의 성과를 보아 24km에 달하는 정보 송신에 성공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카와구치 미노루(河口實)가 비슷한 기술을 이용하여 쿄토(京都) 안에서 시범적인 전신을 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경우 전신이 유용하게 사용될 만한 장거리 송신에는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이 단계에서 바로 전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뛰어든 것이 우한기였다. 그는 이계현이 최근에 세운 황성공업전수학교를 막 졸업한 상황이었으나,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었다.

요동으로 돌아와서 그는 어렵사리 요동국 교통청(交通廳)에 어렵사리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이곳에서 기존의 철도와 역들을 따라서 전신을 놓고 정보를 송신하는 방안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박봉이긴 했지만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확신을 얻었지만, 실제로 장거리의 전선을 설치해서 실험을 해볼 자금이 그의 수중에는 없었다.

때문에 고민 끝에 투자를 받고자 교통청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성광사의 인맥을 통해 김현에게 만남을 요청했던 것이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한기는 내심 이것을 포기하고 마음속에 접어놓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자신도 이론적으로 설계만을 마쳤을 뿐, 실제 실험을 해보기까지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기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게 되었다.

그 기회는 우한기에게 기술을 상용시킬 수 있게 해주었지만, 대신에 전신의 발명자로서의 명예는 위태롭게 했다.

우한기가 성광사를 찾아가 전신의 도입을 설득했던 그 해, 지구 반대편 뉴잉글랜드 공화국 보스턴에서 모스(Morse)라는 젊은 기술자가 자신의 전신기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 결과를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기술학회지에 발표했으며, 전신기술의 개발자로서의 명예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우한기가 자신의 기술을 학술지에 발표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과 요동의 학회에서는 기술공학을 분과학문으로 아직 다루지 않을뿐더러, 응용과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다뤄주는 학술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대학이 아닌 전수학교의 학력이 전부인 그에게 그나마 기술 관련 논문을 다뤄주는 학술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 가지 우한기가 빠르게 해두길 잘한 일이 있다면, 1816년 공식적으로 설립된 요동국 특허청에 자신의 전신기술에 대한 특허를 내어 권리를 확보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더불어 한국에도 특허를 출현해 놓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모스의 실험 결과가 한국에 전해지기 전에 그 특허가 허가되었다.

실제 전신 실용화에 있어서는 모스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뉴잉글랜드 공화국은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과 로드 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사이에 전신실험을 허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1825년 5월 1일 전선 부설 공사가 끝났고, 성공적으로 전신을 프로비던스에서 보스턴으로 송신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은 이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서 요동에도 도착했다. 우한기는 허탈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내어놓은 특허가 그의 권리를 구제해 주었다.

요동과 한국에서는 이 새로운 전신사업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모스의 기술을 가져와서 시행할 수 없었다.

전신에 관한 일체 권리가 우한기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한 채 연구를 진행했지만, 모스와 우한기의 전신의 설계 방식은 그간 축적된 같은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했기에 매우 흡사한 것이었고, 우한기의 특허권리를 무시하고 모스의 방식대로 특허법망을 피해가서 전신을 부설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스의 전신 성공 소식을 들은 성광사에서 뒤늦게 우한기에게 사람을 보내서 특허권의 매입을 타진했으나, 김현에게서 받은 모욕감을 잊지 않고 있던 우한기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대신에 직접 회사를 차리기 위해 투자를 받을 결심을 했고, 특허권을 아무에게도 매각하지 않고 대신에 투자를 권유했다.

대부분은 별 이득이 되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일부 자본가들은 우한기에게 돈을 대 주었고, 우한기는 요동화 59만 환에 달하는 자본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자본을 바탕으로 「요동전기회사(遼東電氣會社)」를 설립하고, 성경―여순 간의 전신 설치를 계획했다.

두 도시 간의 정보 교환은 주로 급행우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새롭게 개통된 철도를 이용하더라도 족히 하루는 꼬박 걸렸다.

그러나 전신이 상용된다면 매우 빠르게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고, 우한기는 여기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철도를 따라 전신을 설치하는 것이 그가 교통청 관료였다는 이유 때문에 매우 쉬워졌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적어도 여순―성경 간의 경려선이 국유화된 탓에 성광사에서 전신을 깔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정부에서 지원까지 받아서 우한기는 경려선 철도를 따라 5개월에 걸쳐 전선 설치 공사를 할 수 있었고, 1828년 2월 5일에, 뉴잉글랜드의 모스보다 3년 늦은 시기에 전신을 실용화시킬 수 있었다.

이 전신사업으로 인하여 우한기는 빠른 속도로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다시 이 자본을 바탕으로 각 도시 간의 전신 연결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우한기의 요동전기회사는 1830년에 이르러서 「기송관(氣送管, Pneumatic Tube)」이라는 기술을 개발해서 상용화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기다란 관(管)들을 건물 내부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설치하여 관 내부의 기압을 이용해 종이 쪽지 따위를 쏘아 보내는 기술이었다.

이것은 이내 여순 및 성경 등지에서 실용화되었고, 정부기관에서 빠른 문서 전달을 위해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신과 기송관의 설치 사업과 운용을 통한 수익으로 우한기는 이내 요동의 재벌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도 성광사의 김현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825년

개국(開國) 410년 계하(季夏)

요동국 남양로 여순부

무덥게 찌는 여름날이었다.

여순현남 신완군 김시유가 예순아홉을 일기로 타계한 것은 초복(初伏) 무렵이었다.

지나친 흡연과 일상적인 과로는 그의 몸을 일찍 지치게 만들었고, 폐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 손쓰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 당시의 의학기술의 견지에서 암은 불치병이었고, 특히 폐암은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절단도 불가능한 장기에서 퍼져 나간 암을 막을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광사의 운영권을 이미 장남 김현에게 충분히 옮겨 두었기에 경영상의 혼란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김시유는 임종을 앞두고 개인적인 여한이 남았다.

첫째로는 가업을 물려받느라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것과 둘째로는 북해로 떠나간 이래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둘째아들 김효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둘째에 대한 속상함은 이루 말할 바가 없었다.

그는 항상 그 아이의 철없음을 탓하면서 먼저 고개 숙이고 들어오기까지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는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부인 전혜린이 남편의 이러한 마음을 알고서 북해로 소식을 보냈으나, 채 답신이 오기도 전에 김시유는 임종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종 후 며칠 뒤 발인이 있었고, 결국 보고자 하던 둘째 아들의 모습은 보지 못한 채로 여순현남 김시유는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조용한 장지에 몸을 뉘였다.

워낙에 실업계의 거물이었던 탓에, 장례식에는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요동국왕 김호는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으나 조의를 표했고, 요동국 의정부 및 한국 의회에서도 조문단이 찾아왔다.

가족들도 대부분 자리를 지켰지만, 둘째 김효는 결국 발인일까지 여순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가 여순의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였다.

북해의 영안부에 있는 요동국 영사관을 통해서 소식을 들은 그는 망설임 끝에 절연했던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안드레아와 자녀들과 함께 여순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 사이 부부 사이에는 첫째 아들 요섭에 이어서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더 생겼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아들은 아내의 친정에 맡겨두었다.

“내어놓은 자식이 무슨 면목으로 여길 찾아왔느냐?”

별로 환대를 기대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장례식은 끝난 뒤였고, 이제 집안의 가주가 되어 남작이라는 거창한 작위까지 물려받은 친형 김현은 대놓고 김효에게 면박을 주었다.

김효가 집안을 떠나서 북해로 가게 된 계기가 김현에게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적반하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김현에게 김효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피붙이에 불과했다. 그에게 있어서 동생은 철없이 굴면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고 다니는 동생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에게 이 무슨 대접이니.”

그나마 김효를 매우 아꼈던 어머니 전혜린이 없었다면 김효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북해로 되돌아가야 했을 터였다.

전혜린은 김효의 가족들은 모두 환대해 주었다.

김시유의 묘소에도 함께 동행했고, 김현과 김효 사이의 불편한 공기를 눈치채고 김효의 가족들이 여순에 있는 동안 자신의 별장에 머물 수 있도록 신경 써주었다.

“어머니, 그간 찾아뵙지 못한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오랜만에 전혜린의 얼굴을 보고, 손을 붙잡은 김효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나마 어머니라도 살아계신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형의 쌀쌀맞은 얼굴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애초에 이 집안에서 뭘 얻어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으나, 김현은 아주 김효를 자신의 돈을 뺏어갈 도적놈으로 보는 듯 했다.

더군다나 이민자 출신의 백인 목축업자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을 두고서는 대놓고 모욕을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평소에도 되먹지 못하더니 결혼도 제멋대로 하고서는……. 아버지가 생전에 네 처자식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다.”

김효는 그런 소리를 듣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다시는 형이 있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 일이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디에 장가를 들었는지 아느냐? 이름 높은 개성공 이산의 따님이 바로 내 부인이다. 그게 바로 집안 간의 격이 맞는 결혼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런 집안과 동서지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내 처가에서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할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참 좋다고 하시겠소.”

“이놈, 그게 할머님을 끌어들여서 할 이야기냐? 솔직히 말하마. 그래, 그 할머님 덕분에 우리 집안이 초장에 어떤 고초를 겪어야 했느냐. 아버지는 서출 취급을 받았고, 왕가에서는 우리를 종친으로 인정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왕손의 핏줄이 어디 가지 않기에 가업을 이만큼 일으키고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러하니 만큼 더욱 집안 간의 성혼을 통해 격을 유지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할 터인데, 너는 스스로 격을 낮추다 못해 집안의 명예에 까지 누를 끼치지 않느냐?”

김효는 형과의 대화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분노를 간신히 자제시킨 뒤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가는 길에 배웅은 없었다. 그는 어머니의 별장으로 돌아와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제 김효에게 자신의 핏줄은 오히려 천형(天刑)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저런 몰상식한 자본가 집안에서 태어나느니 차라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하게 신분주의자에다가 엘리트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천박한 형의 인식이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나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가족을 영원히 증오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내게는 개성공가의 따님보다 네 아내가 더욱 예쁜 며느리이고, 그 현이 놈의 철부지 같은 아들놈보다는 네 아이들이 더욱 눈에 드는구나. 네 형은 원래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이였다. 나는 걔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 어릴 때부터 말이야. 그 얘가 여덟 살 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집에서 키우던 개를 해부해 보겠다고 칼을 들이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는 모를 게다. 그 뒤로도 그 잔혹하고 쌀쌀맞은 성정이 어디 가지 않았어. 그 아이는 나이가 들고서는 한 번도 나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단다. 마지못해 어머님이라고 부른 것이 다이지. 나는 종종 걔가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그에 반해 너는 얼마나 애교도 많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지…….”

김효는 어머니의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불효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을 언제도 거둔 적이 없었다.

그가 영안부에서 힘들게 고학할 때도 몰래 우편환을 송금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내 앞으로 그나마 재산이 조금 있어서 유언장에 그것을 모두 너에게 주도록 해놓았다. 너희 아버지가 떠나고 나시니 나도 언제까지 숨을 쉴지 장담을 하지 못하겠더구나. 그런데 지금 보아서는 차라리 유산으로 내어줄 것이 아니라 명의를 네 앞으로 일찌감치 옮겨 놓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버지께서 남겨 놓으신 성광사와 유산들도 너도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네 형이 절대로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만하면 다행이지. 내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면 유언장을 고쳐서라도 너에게는 한 푼도 남겨놓지 않고 내 유산을 홀라당 가져가고도 남을 놈이다. 그러니 거절하지 말고 집문서고 땅문서고 받아가도록 해라.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저는 돈이 그렇게 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그냥 남은 여생 동안 편하게 다 쓰세요. 제 처가도 목장을 크게 경영하고 있고, 북해에서는 그렇게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아 모자람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자녀들도 모두 학교에 보내고 있구요. 사치만 부리지 않으면 먹고 사는데는 전연 문제가 없어요.”

김효의 말에도 전혜린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네가 가진 그…… 뭐라고 해야 하니? 노동 없이 생긴 소득을 경멸하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것 때문이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큰돈은 아니야. 내 앞으로 남겨진 돈들은 모두 네 외조부와 그 조상님들께서 땀 흘려 번 돈이니 부끄러운 돈은 아니다. 책상에 앉아서 철길 노선을 그리고 증권시장에서 돈놀이를 해서 번 돈은 아니란 말이다.”

“…….”

그날 밤새도록 아내와 앉아서 고민한 끝에, 김효는 어머니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어머니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돈을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훗날에 그 돈이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지 모를 일인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언제까지고 처가에 의지해서 생활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돈으로 북해의 어느 한적한 곳에 농장을 사고, 그곳에서 집필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잘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지금 건네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팔 할이다. 나는 나머지로도 충분히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고, 네 형도 있으니……. 그 아이도 차마 제 어미를 굶기지는 못하겠지. 나는 걱정하지 말고 받아가도록 해라.”

전혜린은 온갖 땅문서와 집문서를 공증을 통해 명의를 완전히 김효에게 이전한 뒤에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재산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자산 가치로만 하더라도 요동화로 30만 환이나 되는 액수였다. 한화(韓貨)로 환산하면 금화 2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어머니…….”

“그냥 말없이 받아가고, 종종 얼굴을 보여주렴. 언제 한번 내가 북해로 놀러가거든 먹여주고 재워주면 된다.”

김효는 말없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다시 한 번 울었다.

김효가 여순을 떠나간 뒤, 결국 전혜린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 년 뒤 북해로 한번 찾아가겠다는 편지가 도착했으나, 이내 들려온 소식은 그녀가 중풍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김효는 다행히 그녀가 임종할 때에 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다.

이번에도 형은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조롱하듯이 늙은 어미를 구슬려서 재산을 빼돌렸다가 옆에서 이죽거렸다.

김효는 생전 다시는 여순을 찾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어머니와 여순항을 모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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