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4장 증기시대(蒸氣時代) (75/82)

제74장 증기시대(蒸氣時代)

「언젠가 오랜 옛날에 그 걸음들이,

잉글랜드의 푸른 산들 위를 거닐었던가

또 신성한 어린 양이,

잉글랜드의 푸른 초원에 나타났던가!

또 신의 얼굴이

이 구름 낀 언덕들 위로 빛났던가?

또 이 어두운 악마의 멧돌 사이로

예루살렘이 세워졌을까?

내 불타는 황금의 활을 가져오라

내 열망의 화살을 가져오라

내 창을 가져오라, 오 구름이 걷히는구나!

내게 내 불의 전차를 가져오라!

나는 내 마음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또 내 손의 칼을 쉬게 하지 않을 것이라

잉글랜드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 위에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질 때까지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Walk upon Englands mountains green:

And was the holy Lamb of God,

On Englands pleasant pastures seen!

And did the Countenance Divine,

Shine forth upon our clouded hills?

And was Jerusalem builded here,

Among these dark Satanic Mills?

Bring me my Bow of burning gold;

Bring me my Arrows of desire:

Bring me my Spear: O clouds unfold!

Bring me my Chariot of fire!

I will not cease from Mental Fight,

Nor shall my Sword sleep in my hand:

Till we have built Jerusalem,

In Englands green &pleasant Land」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서시(序詩):언젠가 오랜 옛날에 그 걸음들이〉,

Milton a poem(1804)

1790년

홍문(弘文) 52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그 해 봄, 지난겨울부터 폐렴 증상을 보이던 홍문제는 건강의 악화를 이유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경운궁 석조전에서 칩거했다.

모두들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이제 그 나이 일흔에 가까워 오고 있었으니, 그 보령이 적지 않았다.

황제에 대한 소문이 황성부 저잣거리를 메우고 있을 무렵, 김시유는 행당동에서 안정된 가정을 만족스럽게 꾸려 나가고 있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언어학 학유(學諭, 교수)에 임명된 것이 결정 나던 즈음, 그는 서소문 일대에서 수신학원의 여학생 한 명을 본 바 있었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며칠을 시름하며 그 얼굴을 잊지 못했으나,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를 시작하게 되는 바람에 이내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스승이자 학문적 동료인 정약전이나, 신당동의 연암 선생으로부터도 중신을 설 테니 선을 보라는 권유가 들어왔으나, 그럴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한동안 바빴었다.

그러던 차에, 제국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 시절 기숙사 동료인 주수겸(周收兼)이 제국은행 행장의 딸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청첩장이 왔기에 거절할 수 없어 시간을 내어 제국은행 별관에서 이루어진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그는 우연찮게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양식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는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기억이 있기에 한참을 고민했더니, 어느 순간 머리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몇 달 전 서소문에서 보았던 여학생과 꼭 닮은 얼굴이었다.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했기에 알아보지 못했으나, 분명히 그녀임에 분명했다.

그때 대동하고 있던 하녀들은 없고, 아버지로 보이는 늙은 사내가 옆에 서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혹시 저 숙녀분이 어느 댁 자제인지 아는가?”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오늘 혼례의 당사자인 주수겸의 동생이 마침 근처에 왔기에, 김시유는 은근히 그녀의 신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 증기선으로 떼돈을 번 동광기선 전보현 사주의 외동딸입니다. 형님, 근데 그건 어째서 물어보십니까?”

주수겸의 동생이 능글맞은 얼굴로 물어보기에, 김시유는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동광기선의 전보현 사장이라면 그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가 아직 어렸을 적에, 경강에 황제 부처와 내빈이 모두 모인 가운데 그가 직접 제작한 증기선을 끌고 와 시연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그 후로 투자금을 성공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포함을 장착한 증기선을 해군에 납품하는 동시에 내지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요 항구에 저탄소(貯炭所)를 설치하고 무역용 기선을 대량 운용하는 방식으로 물류업계의 거물이 되어 있었다.

그가 아들 없이 딸 하나라는 사실도 유명했는데, 그 딸의 미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었다.

설마하니 그 딸이 자신이 서소문에서 보았던 그녀일 줄은 김시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여기에 이렇게 나와서 얼굴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올해 초에 수신학원을 완전히 졸업했다는 이야기겠구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딸을 적절한 신랑감과 이어주기 위해서 전보현이 이런 자리에 딸을 데리고 나온 것 같았다.

학교도 마쳤고 혼례를 치를 나이도 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듣기에 전보현은 사업의 성공으로 큰돈은 만졌으나, 귀족주의적인 성향이 아직까지 짙게 남아 있는 내지의 상류사회에 성공적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괜한 자격지심에 딸을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수신학원에 집어넣고, 온갖 작위가 있다는 귀족 집안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친분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풍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큰돈을 번 졸부가 신분이 아쉬워 자녀의 결혼에 발 벗고 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폐쇄적인 내지의 귀족 계층은 쉽게 그 문을 열어주지 않을 터였다.

김시유가 뜨뜻하게 데운 청주(淸酒) 한 잔을 홀짝이고 있는 사이, 전보현이 잠시 딸 옆 자리를 비워두고서 황급하게 제국은행 행장에게로 바르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주수겸의 동생이 김시유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서 말이나 붙여보시죠, 형님.”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주수겸의 동생에게 무어라 대꾸는 못하고, 김시유는 애꿎은 술잔만 손에서 굴렸다.

한참을 고민 끝에, 김시유는 전보현의 딸이 혼자서 말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서 다가갈 결심을 했다.

그녀는 아마 대부분이 관료와 귀족들인 이 결혼의 하객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가서 말동무라도 좀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게 김시유의 생각이었다.

머쓱하게 주춤거리며 다가가다가, 무슨 용기였는지 김시유는 서양산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서 어깨를 활짝 폈다.

손에 쥔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서 배에 힘을 꽉 준 다음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말을 붙였다.

“혹시 절 어디서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생각만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기껏 갑자기 불쑥 앞에 서서 꺼낸다는 이야기가 시답지 않은 소리였다.

자기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가 서소문에서 탄 궤도마차에서 눈을 마주쳤던 자신을 기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공산이 높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내심 스스로에게 당황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풋풋한 웃음소리가 그의 귀로 파고들어 왔다.

“그럼요, 기억해요. 서소문 정차장.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설마하니 자신을 진짜로 기억할 줄은 몰랐던 김시유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자신을 보고 웃음을 지었던 것이 자기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아버님이 굳이 동행하자 하셔서 이렇게 따라 나왔어요. 저는 오늘 결혼하시는 분들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해요. 그쪽은요?”

“아, 저는, 오늘 결혼하는 신랑의 학교 동기라서…….”

“어머, 그럼 제도대학 출신이세요? 저는 그때 궤도전차에서 봤을 때 명례방에 즐겨 나가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그, 그렇게 보였습니까?”

“칭찬이에요. 워낙에 깔끔하게 입고 계셔서. 거기에 외간 처녀한테 뻔뻔하게도 눈길을 계속 주시기에 좀 잘 노는 한량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괜히 자기도 모르게 변명을 하고 나서, 김시유는 진땀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괜히 그때 난봉꾼으로 보지 않았을까 싶어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전혜린이라고 해요.”

김시유가 진땀을 흘리며 말문이 막힌 것을 알았는지, 전혜린이 배시시 웃으면서 그가 탈출할 구멍을 내어 주었다.

“저는 김시유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 뒤로 전혜린의 아버지 전보현이 뒤늦게 나타나 눈치를 주고 딸을 채갈 때까지, 둘은 연회장의 구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시유의 예상대로 전혜린은 그해 봄에 막 수신학원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집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혼처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디에 시집을 가더라도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늘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열아홉의 나이인지라, 늦어도 서너 해 안으로는 그녀를 시집보내겠다고 아버지는 마음을 먹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팔려 나가듯이 시집가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자기는 양금(洋琴)을 연주하거나, 시를 짓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것이다.

살짝 술기운이 올라서 문화적으로 여성이 너무 천시당하고 있으며, 여자도 남자만큼이나 한 사람 몫을 훌륭히 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그녀의 모습이 김시유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제껏 결혼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김시유는, 그날의 재회 이후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한참을 고민 끝에 그녀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어 서신 교환을 하자고 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면서도 전혜린은 그래도 좋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뒤로 둘은 매일같이 서로 편지를 교환했다.

그러나 전보현의 엄격한 교육 방침 때문에 밖에서 만나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시유가 전혜린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을 무렵, 결국 전혜린의 서신 교환은 전보현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전보현이 정중하게 제도대학의 연구실로 사람을 보내 자신을 만났으면 한다는 의중을 전달했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선생이 어떤 분인지 좀 알아보았습니다.”

종로에 있는 동광기선의 사무실로 찾아가자, 전보현은 대뜸 담배를 피워 물고서는 위압적인 어조로 김시유에게 입을 열었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라 김시유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전보현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내 딸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있으십니까? 김 선생님.”

“그…….”

“딸이 과년하여 좋은 곳에 시집을 보내려고 내 그렇잖아도 이리저리 발품을 팔고 있었습니다.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나 같은 장사치가 명문 일족과 사돈을 맺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잖아도 쉽지 않은 일인데, 딸에 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되면 사실상 혼사길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니 혹여 괜히 딸아이를 희롱하는 것이면 그만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김시유는 희롱이란 말에 발끈했다.

정말로 그러한 마음으로 전혜린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딸과 결혼할 의중이 있단 이야깁니까? 선생은 요동왕가의 종친이고, 거기에 부족할 것 없는 제도대학의 명예 있는 교원인데다가, 남성물산을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지요. 나는 꽤나 운이 좋아 증기선으로 많은 돈을 벌어 들였지만, 본래 좋은 신분 출신도 아니고, 더욱이 동광기선은 남성물산만큼 뒷배 좋고 자본이 넘쳐 흐르는 회사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 딸과 결혼하실 겝니까?”

전보현이 노련한 장사꾼답게 은근히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김시유는 알아챘다.

여기서 대답을 회피한다면, 다시는 전혜린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편지조차 나눌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김시유는 직감했다.

말 한마디로 여기서 결혼을 확언하던가, 아니면 영영 연을 끊던가의 양자택일에 김시유는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어중간한 대답으로는 눈앞의 전보현을 납득시킬 수 없을 터였다.

“요동의 어머님께 인편을 넣어 정식으로 그쪽에 매파를 보내겠습니다.”

그제야 전보현의 눈매가 풀어졌다.

사실 그는 딸이 김시유와 서신을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심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사실 내지의 문벌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였다.

왕공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대로 벼슬하여 그 공훈으로 말단 작위를 지니고 있는 소귀족들조차도 통혼의 문을 잘 열지 않았다.

물론 몰락하여 작위만 있는 귀족들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쥐어주고 딸을 시집보내 신분을 사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전보현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상류 계층에 편입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딸을 훌륭한 집안에 시집보내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략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외동딸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이었다.

그렇게 고심을 거듭하던 차에, 훌륭한 조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신인 남자가 자신의 딸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처녀가 외간남자와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추문이 되기 딱 좋은 일이었으나, 일이 잘 풀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노릇이었다.

좀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긴 했지만, 김시유의 나이가 아직 서른을 넘지는 않았고, 더군다나 역시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요동왕족이었고, 직업, 신분, 자금의 면에서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심 확답을 얻으려고 전보현도 김시유의 얼굴을 보자고 했던 것이다.

막상 만나고 보니, 헌앙하게 잘생기고 풍채도 좋은데다가, 결단력도 있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차고도 넘쳤다.

본인이 이렇게까지 확답을 내려 주었으니, 부디 요동의 유청령으로부터 거부 의사가 나오지 않기만을 전보현을 바랐다.

이왕지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김시유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여순에 있는 어머니 유청령에게 혼인하고자 하는 처자가 있으니 부디 허락해 주고 정식으로 매파를 보내 혼인 의사를 전달해주십사 하고 간곡하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그렇잖아도 장가를 어디 들일까 걱정하고 있던 차에 신부감을 구해 왔다니 두말 않고 허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말하긴 했어도, 아마 전혜린에 대하여 이리저리 알아보기는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 자신부터가 순나라의 이름 없는 동네 훈장의 딸로서, 그 신분 때문에 온갖 견제와 아픔을 요동왕가로부터 받은 이력이 있는 여자였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전혜린의 집안이 지금보다 훨씬 못한 처지였더라도 허락했을 터였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같은 상계에 종사하는 집안의 딸이라면, 서로를 위해서도 혼인이 이득이 될 것이라는 판단까지 했을 터였다.

김시유는 어머니의 의중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양가의 혼례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식으로 사주단자를 교환한 다음에, 최수일이 직접 황성부로 찾아와 결혼 준비를 도맡아 해주었다.

이내 가을의 좋은 길일(吉日)로 혼례가 잡혔다.

그렇게 1784년의 가을, 전혜린과 결혼을 하게 된 지도 벌써 여섯 해가 흘렀다.

신접살림은 이미 김시유가 살고 있던 행당동 저택으로 정해졌다.

결혼을 할 때부터 김시유는 전혜린을 가부장적으로 대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는 늘 삶의 동반자로써 부인을 대하고자 노력했고, 전혜린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자 직접 집에서 부인의 공부를 도우기도 했다.

보수적인 제도가 여자의 대학 진학은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에, 우선은 김시유로서도 전혜린으로서도 이렇게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혜린의 총기는 눈에 띄는 것이었다.

종종 집으로 찾아오는 동료 학자들을 부인으로서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혜린는 당당하게 함께 앉아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인 주제에 대해서 동등한 자격으로 논했다.

처음에는 그녀와 합석하는 것이 껄끄럽다던 정약전은 이내 그녀의 지성에 탄복하여 찬양해 마지않을 정도가 되었다.

김시유의 행당동 집에는 정약전의 동생이자 제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총명한 학생인 정약용(丁若鏞)이 하숙을 들어왔고, 다른 젊은 준재들과 명사들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학문을 논했다.

전혜린도 뛰어난 재기를 갖춘 황성 부중의 부인들을 집에 초청하여 함께 차를 나누면서 소담을 나누곤 했는데, 이런 이유로 하루도 집에 손님이 끊길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에도 자녀가 생겨,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장남인 현(賢)은 두 돌에 벌써 한글과 숫자를 깨칠 정도로 똑똑했고, 장녀 민혜(敏慧)는 어머니를 꼭 빼닮아 예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효(曉)가 태어난 것이 올해, 1790년 봄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낙에 김시유는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 행복하고 평온한 시절이 계속되지는 못했다.

늦여름, 여순에서 급박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최수일의 이름으로 보내진 서찰에는 어머니 유청령이 뇌졸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홍문제의 붕어 소식으로 황성 부중이 애도 분위기로 침잠하고 있던 때였다.

1791년

융무(隆武) 원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대한제국의 제16대 황제인 홍문제가 세상을 뜬 지도 또다시 두 해가 흘렀다.

홍문제에게는 인종(仁宗) 현황제(顯皇帝)의 시호가 올려졌다.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황태자 이굉은 연호를 「융무(隆武)」라 정했다.

홍문제와 며칠 간격으로 여순에서도 세상을 뜬 여걸(女傑)이 있었다.

남성물산을 굴지의 사업체로 길러낸 유청령이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쉰여덟의 나이였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은 김시유의 조용한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급작스럽게 가족을 대동하고 여순에 가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김시유는 그간 거리를 핑계로 모친을 잘 찾아보지 못한 것이 큰 상처가 되어 남았다.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좋은 자리에 하관(下官)을 하고 나서 김시유는 삼 일 밤낮으로 술에 진탕이 되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상 아비 없는 자식인 그를 이만큼 길러낸 것이 바로 그 어머니였다.

전혜린은 상심한 남편에게 그저 자리를 옆에서 지켜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그 상처가 깊었던 탓이다.

제도대학에는 모친상을 이유로 장기간의 휴직을 신청해 두고, 김시유는 가족과 함께 그 뒤로 거의 반년간을 여순의 집에서 머물렀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었지만, 그만큼 오래 나와 살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는 집이다 보니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사실상 병자와 같은 모습으로 한참을 이곳에서 출입도 자제하고 있던 김시유를 보다 못한 전혜린은 결국 최수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일 또한 이제 나이가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유청령의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남성물산의 경영 문제를 처리하느라 잠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다.

몇 달 사이에 부쩍 늙은 최수일은, 이대로는 자신도 견디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자신이 남성물산을 도맡아서 경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혜린으로부터 전갈이 오자, 최수일은 지체 없이 요순항 언덕빼기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경영 일선에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돌아가신 선자당께서도 바라시던 것이 아닐 겁니다. 도련님.”

집안에만 틀어박혀 핼쑥해진 모습의 김시유를 보고서 최수일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상심을 잊고 제대로 된 생활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아무리 슬프다고 한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최수일이 생각하기에 이제 김시유가 제도대학의 교수로서 학문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다른 의무가 생긴 것이다.

“유언대로 선자당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대부분의 남성물산 증권은 모두 도련님께 상속되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이제 남성물산의 운영에 책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최수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시유는, 한숨을 푹 쉬고서는 바짝 마른 입술로 입을 열었다.

“날더러 이제 경영 일선에 나서라는 말입니까?”

“대안이 없습니다. 설마 아버님께서 세우시고 어머님께서 일으키신 남성물산을 낯 모르는 이의 손에 넘기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최 선생님께 운영권을 드려도 저는 좋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결단코 사절하겠습니다. 도련님의 양친되시는 분들이 저에게 이런저런 은혜를 주셨기에, 본의 아니게 매인 몸이 되어 평생을 남성물산에서 보냈지만, 저도 가정이 있는 몸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눈도 혼탁하고 정신도 혼매하니, 적당한 때에 뒤로 물러나 난초나 치고 여생을 보내려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만한 충분한 돈도 있고, 여순에 큰 집도 사 두었고, 제 고향에는 친지들에게 맡겨둔 큰 목장도 있습니다. 일개 광부의 아들인 제가 무슨 아쉬움이 더욱 있어서 남성물산을 제 손에 두려 할까요. 이 노인에게 남성물산을 경영하라는 것은, 제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짐 덩어리를 떠넘기는 것입니다.”

최수일은 단호했다.

김시유가 남성물산을 경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혜택을 입은 것이 있으니, 당연히 이제는 책무를 져야 했다.

설마하니 최수일도 유청령이 그리 일찍 가 버릴 줄은 몰랐기에 김시유가 이렇게 빨리 남성물산을 물려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재촉해서 김시유를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이 혼란을 틈타서 남성물산의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이는 이들이 있었다.

아마 남성물산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요동의 거상들일 터였다.

이들에게 남성물산이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최수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담합에 일절 참여하지 않고, 요동 상인들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도 준수하지 않으며, 방해를 받으면 도로 다른 방법으로 시장을 개척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남성물산은 이들에게는 눈꼴사납다 못해 성가신 존재였다.

더군다나 왕실의 암묵적인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눈 안에 든 돌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남성물산을 집어삼키지는 못하더라도 혼란을 틈타 고권(股券)을 매집하여 남성물산의 경영에 큰 영향을 끼칠 기회를 포착하였으니 이들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최수일은 지난 몇 달간을 이들에게서 남성물산을 방어하는 데 전념하며 보냈었다. 그러나 후계 구도가 안착되지 않으면 이러한 사태는 지속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황성의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었어요. 당신이랑 새로운 사업을 하나 논의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옆에서 묵묵히 앉아서 최수일과 김시유 사이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전혜린이 입을 열었다.

그녀로서도 남편이 좋아하는 학자 생활을 그만두고 자본가로서 생활하는 것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려받은 유산을 지키지 않는다면 평생 남편은 죄책감으로 멍이 된 가슴을 짊어지고 가야 할 터였다.

“장인어른이 말인가?”

“네. 언제쯤 황성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조바심 내고 계세요.”

김시유는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별안간 갑자기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남성물산 같은 거대한 기업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도 회의감이 들었지만, 자꾸만 상황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애도를 핑계 삼아 이 상황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평생 자신에게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압박을 준 적이 없는 어머니였으나, 아마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헤아리고 있었을 터였다.

일체의 부연 없이 유언장에 남성물산의 고금(股金)의 6할에 다다르는 지분을 김시유에게 넘긴 것만으로도 명확했다.

그것은 남성물산을 책임지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최 선생님. 모든 게 너무 급작스러워서……. 힘에 부치시겠지만 향후 몇 년간 저를 좀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김시유가 최수일의 손을 붙잡고 부탁했다.

언제고 은퇴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최수일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신만 쏙 빠져서 물러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남성물산에서 고생해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성물산을 경영하는 데 아무런 경험이 없는 김시유를 혼자 내버려 두고 유유자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시면 여순 시내의 본사 건물로 나와 주십시오. 그 다음에 황성으로 가셔서 전 사장님과 어떻게 협력을 할지 논의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수일의 말에 김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유가 본사에 나타날 때까지 며칠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최수일이었으나, 의외로 김시유는 다음 날 아침 바로 본사로 출근했다.

김시유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최수일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업무를 익혀 나갈 수 있었다.

원체 머리가 비상하기도 했기에, 열흘이 지나가기 전에 남성물산의 일이 돌아가는 윤곽을 김시유는 이제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제도대학에 사직서를 제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업무를 익혀 나가던 어느 날, 김시유는 최수일에게 제도대학에서 사직할 문제를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최수일은 김시유의 마음이 이제 완전히 정리된 것을 알고 기쁜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김시유는 학계에서 공히 인정받고 있는 유능한 젊은 학자였다. 그간에 저술한 책만 일곱 권이었고, 발표한 논문만 해도 수십 편이었다.

더군다나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제 완전히 내려놓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 시작을 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을 요하는 일인지 최수일은 짐작할 수 없었다.

김시유가 남성물산 및 계열사인 남성은행, 남성화재 등의 경영권을 확실히 확보했다는 소문이 확인되자, 남성물산에 대한 공격은 이내 진정되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남성물산의 고권 거래가가 안정되고, 혼란 속에서 적자를 보고 있던 남성물산의 장부도 어느덧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겨우 이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서, 김시유는 쉴 틈 없이 바로 황성부로 가는 배편에 올랐다.

최수일을 통해서 사직서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스승인 연암 박지원과 정약전에게도 제대로 찾아가서 일이 이렇게 되었음을 말해야 했다.

또 장인인 전보현과의 상담(商談)도 잡혀 있었다.

“일이 그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언어학 교수좌를 물려받을 사람은 대충 결정해 두었나?”

정약전을 찾아가 일의 전말을 말해주자, 정약전은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다.

“약용 군이 지금 제도대학에 출강하고 있는데다가, 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그만한 적임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직 부족하지 않을까?”

“약용 군이라면 잘할 겁니다.”

정약전은 김시유가 자신의 동생인 정약용을 추천하자 그만 머쓱해졌다.

내심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괜히 동생에게 교수좌를 물려주라고 한 꼴이 되어 버려서 미안했던 것이다.

“언제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 학문을 계속하고자 하면 제도대학으로 돌아오게. 내 자네를 위한 자리는 언제고 마련해 놓고 있겠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김시유의 사직을 아쉬워하는 것은 정약전뿐만이 아니었다.

《백과전서》를 완간하고 학계로 돌아와 「정치경제대학(政治經濟大學, 구외학원)」의 총장으로 있던 연암도 김시유가 학계를 떠난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래도 네가 학문을 계속했으면 하지만, 그건 그냥 내 욕심이겠지. 너도 마음이 복잡할 텐데 내 더 이야기하지 않으마.”

환갑의 나이가 다 되어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혀 있는 스승은 애석함을 가득 담아서 제자를 떠나 보내야 했다.

“종종 황성에 들를 때마다 찾아뵙겠습니다.”

“일이 바쁘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종종 근황이나 전해다오.”

옛 스승에게 구배(九拜)를 하고 김시유는 눈가에 눈물을 맺은 채로 행당동으로 돌아왔다.

이 집은 팔지 않고 황성에 올 때마다 기거할 요량이었다.

복잡한 심경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다음 날 동틀 녘이 되자 김시유는 습관처럼 몸을 일으켰다.

늘 학교에 출강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던 탓이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종로에 있는 동광기선의 본사로 향했다.

최수일이 아침 일찍부터 마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용 마차를 처음 타보는 김시유였으나, 이제 이런 것에도 하나하나 익숙해져야만 했다.

“분명히 전 사장님이 제안하는 것이 허투루 된 것은 아닐 겁니다. 요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그만큼 제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맥을 짚어내는 사람도 드물지요. 뭘 기대하시든 충분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제시할 겁니다.”

김시유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최수일이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 것을 반쯤 흘려들었다.

생각이 매우 복잡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기로 단단히 다짐했으나, 어제 선생들을 찾아뵙고 온 뒤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런 김시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수일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차마 그만하라 하지 못해서 김시유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고는 있었으나 대화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종로의 복잡한 거리를 헤치고 마차는 대로변에 면한 3층짜리 널찍한 건물인 동광기선의 사옥에 도착했다.

건물 뒤편에 마차를 대어 두고서 내리자, 사환 한 명이 나와서 김시유를 맞이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가니 전보현이 환한 얼굴로 나와서 김시유를 얼싸 안으며 반겼다.

“사위, 오랜만이네.”

“장인어른께서는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별거 있나. 아직 몸도 팔팔하고, 사업도 크게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으니 아쉬울 게 없지. 어서 앉아 보게. 해야 할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닐세. 최 선생님도 어서 앉으시지요. 오늘 얘기할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선생의 노련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시유와 최수일이 자리에 앉아, 전보현은 비서에게 일러 차와 약주(藥酒)를 내어 오라 이른 다음에, 이런저런 지도 꾸러미와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내가 증기기관으로 돈을 번 사람이란 사실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그걸 배에 달아서 바다를 항해할 생각을 한 사람이 운 좋게도 내가 처음이었던 덕분에 떼돈을 손에 쥘 수 있었지. 그런데 아무리 혁신적인 것도 언제까지나 새로운 것일 수는 없는 법이네. 내가 이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탄원을 거듭해서 내지에 드디어 특허 제도가 생겼고, 이 증기선에 관한 일체를 특허를 내었지만, 그렇다고 이 기술이 보호되는 것은 아니지. 이미 많은 내지의 경쟁자들도 이를 모방해 기선을 제조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외국에도 기술이 흘러들어 갔네. 이제 일본도 기선을 자기 기술로 제작하고 있고, 연공에서도 기선을 자체적으로 제조했다고 하더군. 프랑스와의 전쟁에 영국군이 기선을 투입해 상륙 작전을 저지했다는 이야기도 돌더군. 내가 판 것이 아니니 필시 유럽에서 제조된 것일 터이지.”

전보현은 씁쓸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렇게 기술이 퍼져 나가는 건 인력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손을 빨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속사포같이 빠르게 말하고 나서 질문을 해오자, 김시유는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최수일이 입을 열어 대화의 맥이 끊기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남들이 손을 안 댄 것을 시도해야지요.”

“최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내가 기선을 처음 만들었을 때도 그것이 남들이 한 적이 없는 것이기에 큰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지금 돌아보건대 그때 돈을 탕진해 가며 그 기선을 만드는 데 젊음을 바친 것이 절대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바로 그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젊은 날처럼 머리가 휙휙 돌아가지도 않고…….”

전보현은 직접 손을 머리 주변에 휘저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타성에 젖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유지할까만 궁리하던 차에, 평양에 출장을 갔다가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전보현은 책상 위에 내지와 요동이 그려진 전도(全圖)와 어떤 기계의 설계도로 보이는 도면을 펼쳤다.

“궤도 위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설계한 특허가 평양 특허국에 출허가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낼름 그 특허를 낸 사람을 찾아가 보았더니 매우 젊고 영리한 사람이더이다. 이름은 문정하라고 하는데, 평양대에서 공부하다가 자퇴하고 최근에는 운산에서 광산기사로 있다가 평양으로 돌아와 이 특허를 냈다고 합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광산에서는 지하에 찬 물을 퍼내기 위해서 증기기관을 일찌감치 이용하고 있고, 또 캐낸 광물을 쉽게 나르기 위해 나무 궤도를 깔아서 말이 끄는 광차(鑛車)를 쓰고 있지요. 이 문정하라는 인물이 운산 광산에서 말 대신에 증기기관으로 차를 만들어다가 궤도 위에서 시범 운행을 해본 겁니다. 광산에서 산 아래 마을까지 궤도를 깔아서 이 차를 굴려보고, 여러 차례 시험 끝에 썩 효율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직접 운산으로 함께 가서 이게 실제 운용되는 것을 보니 아주 장난이 아닙디다. 물론 아직까지 손 봐야할 점도 많지만…….”

어느새 김시유와 최수일은 전보현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손에 한참을 찻잔을 쥐고 있던 것을 까먹을 정도였다.

전보현은 입이 말랐는지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허나 문제는 이 청년이 특허는 쥐고 있는데 이걸 사업으로 만들어 볼 자금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요. 문정하 군은 이걸 전국의 광산에 보급해서 근처 물류 중심지까지 광물을 실어 나르게 할 수 있다면 매우 효율적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어요. 이 증기기관차가 광물만 나르기에는 아까운 기술입니다. 여객이나 다른 화물도 충분히 실어 나를 수 있어요. 그런데 이쯤 오면 짐작들 하시겠지만, 몇 백 리에 걸쳐서 궤도를 깔고 석탄을 때워가며 묵직한 기차를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많은 투자금이 들어간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광산에서부터 몇 리 정도 궤도를 깔아서 왔다 갔다 하는 거랑은 천양지차란 말이지요. 그래도 나는 여기에 사운을 걸어볼 만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최 선생님?”

“아직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군요.”

“저도…… 장인어른께서 정확히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이제 말씀해 주셔도 될 듯합니다.”

최수일의 말에 김시유도 거들었다.

“그런가? 흠……. 각론이 길었군. 자, 이제 이 지도를 보게. 최 선생님도 이리 가까이 와 보십시오.”

전보현은 잉크를 가득 묻힌 펜으로 지도의 예성부에서 개성 사이에 검은 선을 한 줄 그었다.

그 다음에는 인천 제물포에서 황성부까지를 그었다. 그 다음에는 개성에서 황성 사이를 그었다.

“이 셋 중 어느 한 노선을 시범 삼아서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이네. 물론 당장에 될 일은 아니고, 그간 기관차에 대한 개량도 있어야 할 것이고, 수송 능력에 대한 검증도 이루어져야겠지. 또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게야.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네. 남성물산과 동광상회에서 기본 자금을 대고, 혹여 모자라다면 송상이나 경상을 끌어들이면 될 일일세. 어떤가? 이미 이 특허로 인해서 나는 수익의 2할을 보장해 주기로 하고 문 군에게서 꽤 높은 값에 특허는 사두었네.”

전보현의 말에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도 위에 그려진 선들이 어떻게 구현될지 아직은 확신이 없었지만, 정말 전보현의 말대로라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1795년

융무(隆武) 5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경기도 예성부(禮成府)

최초의 철도 계획은 예상대로 순탄하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초기 자본이 엄청나게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철도가 깔릴 땅을 매집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철도기관차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데다가, 심지어 이 계획을 허락받으러 찾아간 정부기관에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여객과 화물을 장거리 운송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기관차를 개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광기선의 증기기관 기술자들이 모두 달려들었음에도 만족할 만한 품질이 나오는 데는 족히 2년이 걸렸다.

철도를 어느 구간에 먼저 깔 것인가 하는가도 문제였다.

당초에 인천에서 황성까지 경인가도를 따라 철도를 깔려고 했으나, 경강(京江, 한강)을 건널 철교를 건설하는 데 들 엄청난 비용과 경인운하와 경인가도라는 경쟁력 있는 운송로가 있는 상황에서 잘못 뛰어들었다간 엄청난 손실이 날 것이 우려되어 기각되었다.

그 다음으로 개성과 황성 사이의 노선 부설은 여객 수송에 대한 검증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려되자마자 포기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예성부 벽란도와 개성 시내 사이를 잇는 노선이었다.

황성부와 인천항에 밀려서 점차 몰락하고 있는 개성부와 예성항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을 좋은 기회라고 여긴 지역 유지들과 상인들이 개성 부윤에게 탄원을 내가면서까지 협조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철도 부설지에 대한 토지 매집에 난항이 있었으나, 모자라는 자금을 「송도상공회의소(松都商工會議所, 구송상)」에서 대겠다고 나오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793년(융무 3)에 공식적으로 동광기선이 자금의 4할, 남성물산이 3할, 그리고 송도상공회의소가 2할, 그리고 나머지 1할을 일반에 고권을 매각하여 지분을 정하고 「개경철도고금회사(開京鐵道股金會社)」가 설립되었다.

임시로 사장 자리에는 최수일이 선임되었다.

남성물산 경영에 오래간 참여한 경륜과 대주주들의 의견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철도 부지에 대한 매입도 끝나고, 부설 자금도 마련되고, 개성부와 예성부로부터 허가도 받았으나, 마지막으로 문제가 하나 남았으니 황성부의 정부로부터 운영권에 대한 최종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설권은 지방의 부윤으로부터 득할 수 있었으나, 이것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최종 허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부에서 이 일을 꺼릴 만한 이유는 몇 가지 있었지만, 특히 내지 자본이 아닌 요동계의 남성물산 자본이 3할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숙려(熟廬)의 이유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김시유는 직접 나서서 최수일을 통해 막대한 로비 자금을 내부(內部)와 상공부, 탁지부(度支部)의 관료들에게 먹였다.

이와 함께 의회에 대한 설득에도 들어가, 결국 집권당인 연합당(聯合黨)의 의원들로부터 긍정적인 회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결국 의회에서 〈철도법(鐵道法)〉이 통과되고, 이에 준거하여 행정부에서 허가를 내주고서야 본격적인 철도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2년간 건설 비용에 들어간 돈만 하더라도, 한화 44만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여기에는 부지를 매집하는데 들어간 비용 30만 원가량은 계상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전에 증권 파동으로 인해 얼떨결에 김시유가 3만 원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마치 거부가 된 기분을 느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액수는 당최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

이 정도 자금이라면 종로 일대의 가장 비싼 건물들을 수십 채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만큼의 자본이 들어간 만큼, 동광기선과 남성물산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만약 이 철도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두 기업은 사실상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사실상 도박과도 같은 심정으로 김시유와 전보현은 이 철도 건설에 매진했다.

1795년 초 봄, 드디어 1년 3개월의 공사 끝에 속칭 「송예철도(松禮鐵道)」의 공사가 끝을 맺었다.

33리(약 12km)의 연장 거리에 총 7개의 정차장이 설치되었다.

개성부 성문 남쪽의 역마차 정차장 인근 부지를 사들여서 남대문역(南大門驛)을 기점(基點)으로 삼고, 예성항 인근을 매립하여 벽란도역을 건설하고 종점(終點)으로 삼았다.

이 구간을 달릴 총 8대의 열차도 개성부 인근에 세워진 철도창(鐵道廠)에서 제조가 끝나서 투입될 준비를 마쳤다.

개통을 앞두고 기차가 달리면 농작물이 다 쓰러져 죽고, 그 굉음 때문에 사람이 말라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개성부와 예성부의 유지들은 이 철도가 가져올 유용성을 일찌감치 간파하였고, 이러한 소문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대대적으로 철도의 개통을 홍보했다.

정식 개통을 앞둔 3월 8일에는 시범 운행 행사가 기획되었고, 개성부와 예성부의 관료 및 주요한 유지들이 모두 초청되고, 최수일, 김시유, 전보현 등 주요 관계자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지게 되었다.

2층 벽돌 건물로 지어진 단출한 개성 남대문 역사는 팔백여 명에 이르는 인파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시승식에 초대받은 인사들은 일찌감치 승강장에 서서 증기기관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섰고, 개성 부중에서 일손을 놓고 기차를 구경 나온 사람들은 역 바깥 쪽 선로가 훤히 보이는 둔덕 위에 줄을 지어 섰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1리 밖 차고지에서 출발한 증기기관차가 엄청난 소리로 연기를 내뿜으며 남대문역으로 들어왔다.

선두의 기관차 뒤로 2량의 객차와 3량의 화물차가 연결되었고, 화물차에는 납과 철, 그리고 쌀을 잔뜩 실어 기차가 훌륭한 운송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선전했다.

남대문역에 들어와 승강장에 선 기차는 이내 하객들을 태우고 기적을 울렸다.

매캐한 연기가 다시 기관차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고, 바퀴가 선로 위에서 구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엄청난 환호성으로 답했다.

증기기관이 비교적 보편화된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미 이런 증기기관의 위력은 증기선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지되고 있었지만,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선로 위를 내달리는 기차의 위용은 이전에 보지 못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속도는 마차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에 비해 조금 빠른 정도였지만,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자와 여객을 생각한다면 역마차가 비견될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역마차 제도는 삼백여 년에 가깝게 정비되어 오면서 내지와 요동 각지로 연결되지 않는 도시가 없을 정도로 성업하고 있었고, 물류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적지 않았지만, 이 기차의 위용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이 역마 제도도 이내 곧 종식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압도된 사람들을 뒤로하고 남대문역을 출발해 서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도 전율을 느끼며 감탄하고 있었다.

특히 유일한 외국인으로 시승하고 있던 예성항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상인으로, 특별히 초청된 빌럼 반 다이크(Willem Van Dijk)는 할 말을 잊고서 기차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얼굴 위로 밀려들려 오는 바람을 맞고만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 철도 체계를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고, 훗날에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유럽 최초의 철도를 부설하는 사업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이들이 타고 있는 여객 열차는 황성부에서 성업 중인 궤도마차의 차량을 도입하여 조금 수리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철도 운용 계획에 증기기관차는 중량이 무겁고 가치가 나가는 화물 수송 위주로 운영하고, 일반 여객은 철도 궤도 위를 말이 끄는 궤도마차로 수송한다는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객 차량은 때에 따라서 증기기관차에 연동될 수 있도록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개조된 것이었다.

이내 수년 내에 남대문역의 철도 선로를 개성부 성내로 연장하여 이를 통해 여객용 궤도마차가 개성 성내까지 운행될 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최대 몇 량까지 연결하여 화물 수송이 가능한 겁니까?”

기관차 바로 뒤 차량에 시승해 있던 송도상공회의소의 대방 이우신(李祐信)이 감탄해 마지않으며 최수일에게 물었다.

“최대 일곱 량까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하루에 스무 번가량 왕복할 수 있다고 보면, 지금 개성과 예성부 사이를 오고 가는 화물의 대부분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거 투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그려.”

그 자리에 합석하고 있는 개성과 예성의 상인들도 동감이었다.

더군다나 이 철도가 자기 고장에 최초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묘한 자부심도 있었다.

자신들의 돈이 투자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이러한 유지들의 만족감 이상을 김시유는 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 객차에 가족들과 함께 탑승한 김시유는 자신이 남성물산의 경영을 시작한 뒤로 가장 큰 성과가 지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자 그간의 노고가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두 아들과 딸이 객차에서 탄성을 지르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일을 시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간 당신 수고가 많았어요. 이 철도는 꼭 성공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팔장을 끼며 귓가에 속삭이는 아내 전혜린의 목소리에 김시유는 순간 울컥하며 가슴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서는 대답했다.

“다 당신 덕분이야.”

기차는 한 시간 반 만에 종점인 예성항의 벽란도역에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리면 더 이르게 도착할 수 있을 터였으나, 각 정차장마다 오 분씩 쉬어가느라 조금 지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많은 화물을 한 시간 남짓으로 예성항까지 실어 나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처음으로 기관차를 설계한 문정하도 느끼는 감회가 남달랐다.

이미 그는 특허권을 넘기는 대가로 약속받은 이윤의 2할 외에도 증기기관차의 실제 제작 과정에 참가하여 기술 감독을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손에 쥔 상황이었다.

그는 이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개경철도회사의 고권을 사는 데 썼다. 처음에는 그저 광산용으로만 철도의 용도를 생각했던 그였으나, 적절한 때에 투자자를 만나 철도의 부설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이 철도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기관차의 설계자로만 이름이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이 철도의 발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그 돈을 이 철도사업에 환원될 수 있도록 고스란히 고권을 매집하여 재투자한 셈이었다.

이 사업이 잘될수록 어차피 자신에게는 그 이상의 이익이 되돌아오게 될 터였다.

“문 군. 어떻소? 내가 잘될 거라고 하지 않았소?”

문정하에게 특허를 사들이며 이 일에 끌어들인 전보현의 말에 문정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전 선생님을 만난 건 천운이었습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허허.”

두 사람은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벽란도 항구가 훤히 보이는 역사에서 축배를 드는 것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이제 밝아오고 있었다.

시범 운영으로부터 두 달 뒤인 1795년 5월 1일, 세계 최초의 공공철도인 「개성(송도)―예성 간 철도」, 속칭 「송예선」이 공식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에 3시간 간격으로 화물 차량이 네 번 개성에서 예성으로 출발하고, 다시 그곳에서 회차하며 돌아오는 것이 기본적인 편성이었다.

이 외에도 화물기관차의 운행과 간격을 두고 말이 이끄는 여객용 궤도마차가 이 철도구간을 달렸다.

이내 이 철도는 개성부가 자랑하는 명물이 되었고, 계획대로 이듬해에는 여객용 마차를 위한 철도가 개성 남대문역에서 시가지로 연장이 되면서, 성 안에서 바로 여객용 마차를 타고 예성항까지 직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철도의 인기는 생각 이상이었고, 일시적이나마 예성항이 백여 년만에 처음으로 인천항의 물동량을 앞지르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송상을 전신으로 하는 송도상공회의소에 속한 상인들은 물류 수송을 이 철도에 몰아주었고, 그로 인해 창출된 이익은 고스란히 그들이 소유한 철도회사의 고권가가 상승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

철도가 등장한 지 3개월이 지나지 않아 개성부와 예성부 사이를 운행하던 역마차는 거의 고사 지경에 이르렀다.

이 철도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 적지 않은 공장들이 평양이나 황성으로부터 개성으로 이전해 올 것을 타진하기 시작했고, 점차 쇠락해 가던 개성의 경제는 다시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적어도 철도가 다른 지역에도 부설되기 시작하여 이 효과가 반감될 때까지 개성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된 셈이었다.

1798년

융무(隆武) 8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개성에 부설된 철도에 대한 반향은 생각보다 빨랐다.

송예선이 운영되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나가자, 개경철도회사는 막대한 투자 비용을 상쇄하고 이윤을 내기 시작했다.

이내 철도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우후죽순처럼 철도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신청서가 쇄도했지만, 특허 문제를 들어 정부에서는 대부분을 반려했다.

성급하게 통과시켰던 〈철도법〉에 의해 관련 기술에 대한 법적 권리를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철도 부설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순히 철도를 깐 뒤에 차량을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와서 철도를 운영하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저 군침만 흘린 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얼떨결에 내지에서 이 철도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사실상 확보하게 된 개경철도회사는 부설권을 협상할 수 있는 사업부를 황성에 내기로 결정했다.

개경철도회사에 특허권에 대한 이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부설권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에 응찰한 것은 평양 지역에서 탄광(炭鑛)을 채굴하는 광업 회사들이 연대하여 세운 「유경철도회사(柳京鐵道會社)」였다.

평양 공업에 핵심적인 석탄을 공급하고 있는 평양 근교의 사동탄광(寺洞炭쮨)은 막대한 석탄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었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총 5개의 광업 회사가 성업하고 있었다.

이들은 채광 기술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평양광업전수학교(平壤鑛業傳受學校)」를 평양 부중에 세워 전문 인력을 독자적으로 충당하고 있을 정도로 성업하고 있었는데, 이 탄광업으로 쌓인 막대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평양의 공업 지대까지 석탄을 원활하게 실어나를 수 있는 철도를 부설하길 원하고 있었다.

개경철도회사는 이 평양철도의 지분 4할을 투자하여 이득을 나누는 조건으로 특허권의 이용을 허락해 주었고, 이 계약을 바탕으로 유경철도회사는 정부로부터 철도 부설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철도 사업을 통해 자신감이 붙은 김시유는 개경철도회사와 별도로 직접 이 유경철도에 자본을 투자했다.

평양의 사동탄광과 평양부를 잇는 이 철도는 대동강을 건너는 철교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숙고 끝에 기존의 평양철교를 확장하여 철도도 지나갈 수 있도록 개수(改修)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짧은 구간에 비해 꽤 많은 자본이 들어가고 노력을 요하는 철도 부설이었으나, 송예선의 부설 과정에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동철도는 9개월 만에 부설이 끝나서 대동강 맞은편까지 운행을 개시했고, 평양철교의 개축 과정에 1년이 더 소모되어 1798년 여름에 완전히 공식 개통할 수 있었다.

평양의 사동탄광에서 생산된 막대한 석탄이 지체 없이 평양의 공장들로 흘러갈 수 있게 되었고, 추가로 대동강의 하항(河港)에도 철도가 부설되면서 선박을 통해 생산된 물품을 즉각적으로 실어 나르기에도 유리한 환경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두 철도의 성공으로 김시유는 많은 돈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보현이 고령을 이유로 은퇴하면서, 유일한 외동딸인 전혜린에게 사실상 동광기선을 넘겨주었고, 전혜린은 그 영업권을 다시 남편인 김시유에게 넘기면서, 사실상 동광기선과 남성물산은 같은 회사가 되게 되었다.

김시유는 영업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두 회사를 통합한 지주회사인 「성광사(星光社)」를 세웠다.

남성의 성자와 동광의 광자를 딴 것이었다.

이 성광사가 이하 계열사들의 지분을 절반 이상 보유함을 통해서 직접 지배가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

남성은행과 남성화재가 각각 「성광대륙은행(星光大陸銀行)」, 「성광화재해상보험사(星光火災海上保險社)」로 재편되었고, 남성물산은 「성광해운고금회사(星光海運股金會社)」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동광기선은 물류 기능을 성광해운으로 이전하고, 나머지 기선 제작 분야 「성광조선(星光造船)」으로 재편되었다. 마지막으로 「성광철도고금회사(星光鐵道股金會社)」가 창설되었다.

이 성광철도고금회사는 유경철도에도 절반가량으로 늘어난 지분을 가지고 지배적 경영이 가능했을 뿐더러, 기존에 이미 70%에 가까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개경철도회사도 수중에 넣고 있었다.

대략 총 자본금 한화 500만 원에 가까운 거대 기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송상을 근간으로 하는 송도상공회의소의 회원사들의 자본 총합이 한화 1천 7백만 정도이고, 이와 유사하게 경상에서 발단해서 나온 제도상공회의소(帝都商工會議所)의 회원사들의 자본 합계가 1천 5백만, 몰락기에 접어든 내상이 총자본 7백만 정도임을 고려해 볼 때 단일기업으로서는 한국 전체에서 필적할 데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몰락 중인 계영양행의 총 자본금 2백만에 비해서는 두 배가 훌쩍 넘는 수치였다.

이러한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김시유의 성광은 소위 재벌(財閥)이라 불리며 국제적인 자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본래 남성물산이 세워질 때에 목적했던 뜻은 많이 퇴색되게 되었다.

이제 남들을 도와주는 자본이 아니라 노동력을 수탈하고 자본이 자본을 낳는 자본주의적인 악순환에 일익을 담당하는 기업이 된 것이었다.

김시유는 당초에 기존의 영업 방침을 고수하려 했으나, 그 뜻이 어떻든 수많은 자본과 이해관계가 성광사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됨에 따라 자본의 논리에 스스로 순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회사에 투자한 많은 자본가의 이해관계에도 복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성광사가 그나마 공정한 기업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김시유의 조심스러운 자제심과 더불어 아직까지 남성물산의 초창기 정신을 잊지 않고 있는 최수일 덕분이었다.

이제 일흔의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난 최수일이었으나, 여전히 많은 지분을 지니고 김시유의 고문 자격을 유지하면서 경영을 돕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무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김시유를 인도했고, 또 특히 당초 남성물산이 목적으로 했던 순나라의 약탈 경제에 희망이 되어 주고자 하는 동기를 상기시켰다.

그 뜻을 따라 김시유는 순나라에 최초의 대학인 「천진상공대학(天津商工大學)」을 세우고 순나라의 젊은 학생들이 그들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조성해 주었다.

그러나 성광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사실상 곡물 매매에서 철수한 성광사의 빈자리를 약탈적인 요동 자본이 다시 메웠고, 순나라의 곡가는 다시는 안정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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