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서해각축(西海角逐)
「서방세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전(抵抗戰)에서 드물지 않게 나오는 이름이 바로 안노스(Hannos)이다. 이 일가(一家)의 연원은 극동(極東)에까지 닿아 있다. 처음으로 몰락해 가던 동로마제국에 발을 딛은 조선인이 바로, 안노스 가문의 시조 요안네스 안노스(조선명 한학정)이다. 그는 운이 좋게 당대의 명사인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동로마제국에서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 여자와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둘째 아들을 제외한 장남 콘스탄티노스 안노스(조선명 한경직), 삼남 이사키오스 안노스(조선명 한경호), 사남 게오르기오스 안노스(조선명 한경조)의 세 아들은 모두 각각 이탈리아, 그리스, 대한제국으로 흩어져 다가오는 16세기에 활약하게 될 후손들을 남겼다.」
―라오니코스 크리토불로스(Laonicos Kritovoulos),
《그리스 부흥의 기록》,
(아테네:베사리온社, 1782), 260p.
1506년
이슬람력 912년 계춘(季春)
오스만 투르크 제국(帝國) 콘스탄티니예(Kostantiniyye).
1453년,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로마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의 손에 떨어졌다.
이미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영토들 속에 포위되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결국 술탄은 원하던 그 도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술탄 메메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자마자 그 이름을 오스만 식의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ye)로 고치고, 스스로를 로마 황제로 선포했다.
투르크 사람들은 이 도시를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도 불렀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황폐해진 도시를 술탄 메메드는 재건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술탄의 명령에 따라 많은 투르크인들이 그 도시로 옮겨와 황폐한 도시를 생기 있게 채웠고, 투르크 양식의 화려한 집들이 동로마 양식의 무너져가는 가욱들 위에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다.
상점은 흥성하기 시작했고 근동(近東)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소리 높여 흥정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폐허 위에서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니예의 정지 작업이 끝나자 술탄 메메드는 궁중의 원로인 할릴 파샤 찬다를르를 견제하고 나섰다.
그는 전대 술탄인 무라드의 가장 신뢰받는 신하였으며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술탄 메메드는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기 전에 보여 준 애매한 행동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위를 풀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할릴 파샤는 동로마제국에 대한 공격과 지속적인 정복전이 서방의 국가들과의 전면전으로 비화될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탄 메메드는 그를 반역죄로 죽일 것을 고려했지만 그러기에는 할릴 파샤가 보여 준 행적이 불분명한 것도 사실이었다.
의심은 충분했지만, 확증은 없었다.
술탄 메메드는 결국 할릴 파샤를 제거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아나톨리아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술탄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술탄은 어느 정도 숨을 돌리자 바로 세르비아로 군대를 몰아가 세르비아 왕 조르제 브란코비치에게 영토를 내어놓으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아흔인 이 늙은 노왕(老王)은 마지막 정치적 모험을 선택했다. 헝가리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헝가리는 오스만 투르크 못지않게 세르비아의 영토를 탐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정복자인 술탄보다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가 낫다는 것이 조르제 브란코비치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헝가리 군대는 선전했고, 베오그라드를 둘러싼 공방전에서는 성공적으로 술탄의 군대를 막아 냈다.
비록 늙은 세르비아 왕 조르제가 성탄절 전야에 결국 막사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지만 술탄은 그것을 기회 삼아 정복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동쪽에서 화약고가 터지고만 것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흑양조(黑羊朝, 카라 코윤루)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백양조(白羊朝, 아크 코윤루 Aq Qoyunlu)와 장기간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백양조의 술탄 우준 하산(Uzun Hassan)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투르크에 대한 경계심을 항상 거두지 않고 있었고, 아나톨리아로 유배당해 술탄 메메드에 대해 앙심을 품은 할릴 파샤가 투항해 그를 충동질하자, 이내 마음을 굳히고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진칸(Erzincan)을 점령하고, 살아남은 그리스계 국가들 중 하나인 트레비존드 제국의 도움을 얻어 군사력을 보강한 뒤, 그는 착실하게 군대를 서쪽을 향해 행군시켰다.
콘스탄티니예의 술탄 메메드는 세르비아로 보낸 군대를 우준 하산을 막아 내기 위해 회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두 군대는 마마 하툰(Mama Hatun)과 오틀루크벨리(Otlukbeli)에서 맞붙었다.
마마 하툰에서는 오스만이, 오틀루크벨리에서는 백양조가 이겼다.
그러나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할 수 없었고, 3년여간의 소모전 끝에 양쪽은 화평을 합의했다.
1460년 봄이 되어서야 겨우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올 수 있었던 메메드 2세는 다시 유럽 지역에서 영역을 확충하는 일에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라만(Karaman)의 베이(Bey, 君主)인 이브라힘이 말썽이었다.
카라만은 오스만과 같은 투르크 계통의 나라로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시리아에 걸친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브라힘은 그의 젊은 시절에 이미 헝가리와 동맹을 맺어 오스만을 압박한 적이 있었고, 그때에 겪은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베네치아와 밀약을 맺고서 일부 병력을 지원받아 아나톨리아 남부를 압박하는 데에 나섰다.
이제 막 백양조와의 전쟁을 끝내고 아나톨리아에서 철군한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빈자리를 카라만 군대는 쉽게 진군해 가며 점령해 나갔다.
술탄 메메드 2세는 이제 다시 군대를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1462년의 앙카라(Ankara)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메메드 2세는 패한데다가 오른쪽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카라만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넉 달 뒤에 펼쳐진 전투에서 메메드 2세는 앙카라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고, 카라만과 마음에 들지 않는 평화를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메메드 2세가 동방의 적들과 싸우는 동안 모레아스 일대에 남은 동로마제국의 잔존 세력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충실하게 술탄에게 연공을 바치며 상황을 정비할 수 있었고, 1466년에 비록 오스만의 군대가 임브로스, 테네도스, 림노스와 에노스를 병합했지만 아테네 공국(公國)의 피린체인 공작 프란코는 다소의 성공적인 방어를 해냈고, 술탄에게 지불하는 연공을 5,000두카트에서 8,000두카트를 올리는 조건으로 아테네 공국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아테네 공국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즉 모레아스 일대에 잔존한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보루(堡壘)가 한숨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오스만의 해군은 강성했지만 육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본격적인 상륙이 가능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아테네 공국의 영토를 통하지 않고서는 모레아스로 육군이 진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술탄은 카라만과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럼에도 그는 한동안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드라큘라라는 악명(惡名)으로 더욱 잘 알려진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Vlad...epe..)는 술탄이 보낸 사절들을 말뚝에 박아 처형시키며 술탄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나 술탄은 이 흡혈귀를 징벌할 수 없었다.
1470년 여름, 왈라키아로 진군하는 길에 술탄은 상처가 도져 결국 욕창(탓瘡)에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니예로 군대를 회군시켜 돌아갈 때까지 숨이 붙어 있었지만, 결국 그해 겨울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아들 바예지드 2세가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술탄의 자리를 승계했지만, 이내 그의 동생 젬(Cem)을 등에 업은 재상 카라마니 메흐메트 파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꼬박 일 년간의 내전 끝에 바예지드 2세는 술탄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고, 메흐메트 파샤를 처형하고, 동생 젬을 카라만에 인질로 보내 버렸다.
“술탄께서는 젬을 잘 돌봐 주기 바라십니다. 그리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술탄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술탄의 사절은 교묘하게 카라만의 베이 카심(Kasım)으로 하여금 젬을 독살하도록 부추겼다.
카심은 바예지드 2세와 대립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고 있었고, 젬을 독살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바예지드 2세는 이것을 구실 삼아 군대를 몰아 카라만으로 향했다.
카라만은 그간 벼려 왔던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에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474년,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는 카라만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고 카라만의 베이 카심을 콘스탄티니예로 압송해 보냈다.
술탄의 군대는 이제 지체 없이 그 말머리를 트레비존드 제국으로 돌렸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고립된 트레비존드 제국은 술탄의 배려하에 흑해를 오고 가는 제노바 상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나라는 유약해져 가고 있었다.
트레비존드는 손쉽게 바예지드의 손에 떨어졌다. 황족들은 콘스탄티니예로 압송되어 보내졌고, 소년들은 예니체리에 징발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나갔다.
산악 지대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트레비존드의 함락은 오스만에게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빌미를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백양조의 우준 하산이 다시 칼을 꺼내 든 것이다.
우준 하산은 그동안 티무르의 영토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페르시아의 서쪽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호르무즈, 바스라, 그리고 타브리즈에서 나상(羅商)의 상인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고, 나상의 행수 조계응은 그에게 용병단을 이끄는 모승호를 알선해 주었을 뿐더러 모승호를 통해 총포(銃砲)도 삼천 정을 매각했다.
상남(湘南)을 통해 흘러나온 보총(步銃)과 소포(小砲)는 대한제국에서 사용된 개량된 능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오스만의 화력을 제압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거기에 이 총포를 다룰 충분한 능력이 있는 모승호의 용병단이 조계응을 통해 우준 하산에게 고용되면서 백양조의 전투 능력은 한층 개선되었다.
일단의 조선인들을 포함한 우준 하산의 군대는 1475년 국경을 넘어 술탄 바예지드를 공격해 들어갔다. 아나톨리아에서 무패 행진을 계속한 우준 하산은 한때 카라만과 오스만 사이의 접전이 벌어졌던 앙카라에 손쉽게 입성했다.
바예지드는 다시 이 앙카라를 둘러싸고 우준 하산과 공방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력은 강성했다. 열 달에 걸친 앙카라 공방전은 결국 우준 하산을 협상으로 끌어내게 되었다.
바예지드는 우준 하산에게 옛 트레비존드 제국의 일부와 아나톨리아의 동부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화평을 맺을 수 있었다.
바예지드는 동쪽이 안정되자 이제 말머리를 알바니아로 돌렸다. 용맹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스칸데르베그가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한 번 술탄의 군대와 맞섰다.
그는 비록 전사했지만 알바니아 소국들의 연합인 레체(Lezh) 동맹은게릴라전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술탄은 이내 지엽적인 전투를 포기하고 이내 관심을 동쪽으로 돌렸다.
그는 회군하는 길에 몰다비아에 행군하여 종주권을 재확인한 다음 함대를 보내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획득했다.
그러나 바예지드는 더 이상 서쪽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기간 동안 우준 하산을 경계하고 백양조와 전투를 하는 데에 정력을 쏟았다.
1478년 백양조의 술탄 우준 하산이 병사한 이후, 백양조의 세력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술탄은 조금씩, 천천히 백양조를 잠식해 들어갔다.
1481년에 이르러 술탄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모승호가 이끄는 용병단을 대패시키고 아나톨리아 전역을 다시 제국의 영역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했다.
바예지드 2세는 백양조와의 몇 차례의 전투를 더 치른 뒤에 더 이상의 전쟁은 그만두고, 남쪽으로 향해 이집트에서 시작해 시리아까지 넓게 뻗은 맘루크와의 전투에 골몰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바예지드 2세가 동방에 신경을 쓰는 동안 그리스 일대의 소국들은 동로마제국의 유산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팔라이올로고스 황조(皇朝)의 혈통들이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에게해 연안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식민지들이 술탄의 공격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로도스에는 십자군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기사단(騎士團)이 여전히 통치를 행하고 있었고, 키프로스 왕국도 잔존해 있었다.
바예지드 2세가 오래간의 정력적인 확장에 지쳐 병상에 누은 1506년 봄, 천천히 제국의 위기는 숨죽인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1508년 맹추(孟秋)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스페인은 다시 분열되었다. 결혼 동맹으로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을 통치했던 카스티야 여왕 이자벨라가 서거함으로 카스티야 왕국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딸 후아나(Juana)에게 상속되었다.
페르난도는 여전히 아라곤 왕국의 왕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손자인 엔리케에게 카스티야의 왕위를 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유일한 아들인 후안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유복자(遺腹子) 엔리케만을 남긴 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고, 카스티야의 대귀족들은 이사벨라 여왕까지 죽고 나자, 아라곤 왕 페르난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질긴 싸움 끝에 페르난도는 결국 카스티야에 대한 모든 권리를 딸 후아나에게 양도했고 아라곤 왕국의 왕으로서만 남았다.
대신, 그는 손자인 엔리케에게 아라곤 왕국을 남겨 줄 생각이었다.
아라곤은 작지 않은 나라였다. 아라곤은 하나의 커다란 연합왕국으로, 옛 아라곤 지방을 포함해 카탈루냐, 발렌시아, 사르데냐,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서지중해의 강자였다.
그러나 왕국의 전성기는 이제 지나갔으며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카스티야 왕국과 완전히 갈라선 다음에 아라곤은 이제 유지하기 벅찬 영토들만이 지중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쇠약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했다.
페르난도 왕의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라곤의 영토들은 지중해에 면하고 있어서 대서양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대서양은 온전히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몫이었다.
그러나 아라곤이 기댈 수 있는 지중해 무역은 예전 같지 못했다.
오랜 동맹국이었던 베네치아는 물론이거니와 아라곤 왕국 자체도 동지중해 무역에 거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오스만 투르크였다.
동지중해를 통해 들어오는 향신료와 각종 수입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다.
오스만의 술탄들은 지속적으로 근동 지역에 긴장을 조성했다. 다행히 이집트를 통해 들어오는 항로는 아직까지 살아 있었지만, 문제는 오스만 해군이나 무슬림 해적과 끊임없이 부딪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는 사이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를 개척해 직접 대서양으로 수송한 후추는 유럽 시장에 싼값에 풀렸고, 동지중해 무역은 채산이 갈수록 맞지 않고 있었다.
아라곤 왕실의 재정도 당연히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흩어진 국토를 유지하는 것은 돈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르난도는 끊임없이 농민 봉기나 소귀족들의 군사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고용하고, 지중해 무역을 사수하기 위해서 함대를 꾸려야 했으며, 거기에 자신의 풍부한 사치 성향까지 충족시켜야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 탓에 좋지 않아진 건강을 회복할 겸 여름 내 바르셀로나의 하궁(夏宮)에 와 있던 페르난도 왕에게 베네치아에서 보낸 사절이 찾아온 것은 가을로 막 접어들 무렵의 일이었다.
페르난도 왕은 모리배 같은 베네치아 인들을 그다지 신용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동안 이들은 믿을 만한 동맹군이었다.
굳이 만남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잘만 된다면 몇 만 두카트 정도를 베네치아로부터 빌릴 수도 있을 터였다.
“존귀하신 아라곤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표해 감히 알현을 요청한 데메트리오 단니(Demetrio d’Anni)라 합니다.”
페르난도 왕은 옥좌에 몸을 파묻고서는 자신의 앞에 정중한 태도로 서 있는 대사(大使)를 보았다. 예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이 늙은 대사는 꽤나 유창한 카탈루냐어(Catalan)를 말하고 있었다.
페르난도 왕은 어째서 이 늙고 위엄 있는 대사에 대해서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듣지 못한 젊은 사람을 보냈다면 풋내기로 취급할지언정 아직 실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을 뿐, 이유가 있는 인선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름 없는 늙은이는 능력에 대한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구나. 베네치아의 수많은 명사 가운데에서 왜 그대가 내게 오게 되었는지 조금 들어봐도 되겠는가?”
“송구하오나 본래 저는 베네치아 사람이 아닙니다. 베네치아에 머무는 그리스 인으로서, 레오나르도 로레단 원수(元首, doge)가 이번 사안에 대해 제가 적임자라 판단하고 저를 전하께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베네치아 시민도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15년 전에 베네치아의 시민이 되었고, 지금은 480인 대평의회(大評議會)의 의원입니다.”
“그리스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제 가계(家系)로 말씀 드리자면, 제 본명은 데메트리오스 안노스로, 제 부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 안노스라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에 저와 식솔을 이끌고 피렌체로 건너와 서적상을 열었습니다. 부친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한 덕에 저는 파도바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장성한 뒤에는 법률가로 일하다 베네치아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장사에 손을 대 동지중해 무역에 참여했었습니다.”
“안노스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제 조부가 콘스탄티노스 안노스로, 동로마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의 문하(門下)에 있었습니다. 제 조모는 안티고노스가(家)의 엘레나로, 동로마제국 황제의 궁정에서 법률관으로 봉사하던 가문 출신이며, 제 모친은 디테카리우스가의 요안나로 모레아스의 소귀족 출신입니다.”
“콘스탄티노스 안노스라면 들어 본 바 있네. 인도였나, 중국에서 온 자 아니었던가?”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코레아(Corea)입니다.”
“알렉산드리아까지 코레아 상인들이 들어와 베네치아와 무역을 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네. 따지자면 자네 핏줄은 코레아와 그리스가 섞여 있고, 태어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지만, 자라난 것은 피렌체고, 지금은 베네치아의 원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용무를 들고 내게 와야 했기에 그대가 대사로 선임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겠군.”
페르난도 왕의 물음에 데메트리오 단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중하게 밀랍으로 봉인 된 서찰을 페르난도 왕에게 건넸다.
화려하게 묶인 금실을 풀고 밀랍을 뜯어낸 다음, 페르난도 왕은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페르난도 왕이 입을 열었다.
“내게 위험한 제안을 하는군. 오트란토(Otranto,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의 도시)의 일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네.”
“그런 일을 더더욱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제안 드리는 바입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우라슬로 전하께서도 이미 군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레체의 알바니아인들에게도 밀사가 이미 출발했으며, 아테네와 모레아스의 그리스 군주들은 단연코 이 도움에 감사할 겁니다. 제노바 또한 흑해의 남은 식민지들을 사수하기 위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이 동맹에 참여해 주시면 저희는 기꺼이 전하께 승리를 만들어 바칠 것입니다.”
데메트리오 단니가 들고 온 제안은 다름 아닌 동맹군을 결성해 오스만 투르크와 결전을 벌이자는 이야기였다.
베네치아는 에게해와 동지중해에서 아직까지 대부분의 식민지를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켜 내고 있었지만, 수십 년에 걸쳐서 많은 섬들을 잃은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섬보다도 항로의 확보 문제였다.
알바니아와 헝가리가 건재한 덕분에 아드리아해(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의 바다)가 오스만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알바니아 남부의 해안은 오스만에게 일부 점령당했으며 보스니아 또한 위협에 처해 있었다.
문제는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안에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경영해야 할 영토였다.
오스만의 육군이 그곳에 임박하게 되면 베네치아로서는 모든 길이 봉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드리아해를 제압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한 차례 이탈리아 본토로 공략전을 시도한 전례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1481년의 오트란토 전투였다. 백양조를 패퇴시킨 직후 술탄은 명장(名將) 게디크 아메드 파샤에게 해군을위임해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 장화 굽 부분에 위치한 오트란토를 공격하게 했다.
오트란토를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는 다름 아닌 바로, 아라곤과 나폴리의 왕 페르난도의 지배에 놓여 있는 땅이었다.
페르난도 왕은 이곳에 휘하의 프란체스코 라르고(Francesco Largo)를 보내 막아 내게 했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스만 해군은 오트란토를 함락시키고 3년간 머물며 아드리아해를 오고 가는 배들을 위협했다. 거기에 자신의 땅에 오스만 군대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페르난도 왕에게 있어서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오트란트로 해군을 보내던 주요 기지였던 알바니아 남부의 항구가 다시 오스만으로부터 알바니아인들에게 탈환됨에 따라 오스만 군대는 오트란토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이때의 기억은 베네치아에게도,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에게도 선명했다.
앞으로 이러한 일을 방비하기 위해 먼저 치고 나가자는 것이 페르난도 왕 앞으로 데메트리오 단니가 들고 온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안이었다.
“그대들의 제안은 잘 알겠네. 십자군이나 다름없구만. 혹시 교황청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갔는가?”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로마의 교황 성하(聖下)께서는 저희 베네치아에 대한 파문을 아직 풀지 않으셨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이번의 동맹은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공인된 동맹은 아닙니다. 하지만 프랑스, 카스티야,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왕들이나, 혹 신성로마제국 황제께서도 투르크인들의 공격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베네치아, 그리고 전하께서 다스리시는 아라곤과 나폴리는 이 잔인한 술탄들의 군대에게 오랫동안 지켜 왔던 땅들을 쉽게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만큼 좋은 기회도 없습니다.”
“좋은 기회라니?”
페르난도 왕이 관심을 보이자 데메트리오 단니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왕에게 바짝 다가갔다. 왕이 손으로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자 데메트리오 단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 공화국의 첩자에 따르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바예지드 술탄의 두 아들인 아메트(Ahmet)와 셀림(Selim) 왕자의 반목이 지금 극도로 치달았다고 합니다. 셀림 왕자는 지금 몸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건너갔으며, 백양조를 무너뜨린 페르시아 세력과 연대해 아버지와 형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내란 중에 끼어들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그다지 많지 않겠구만. 얻을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적다, 이 말인가?”
“공화국의 상인들이 지금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그곳의 코레아 상인들과 접촉해 좋은 총포(銃砲)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 백양조가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설 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코레아산 총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에게 큰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쓸 만한 코레아 용병들도 백양조가 무너진 뒤 이집트로 건너와 재정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들도 고용할까 생각 중입니다. 전하께서 동맹에 참여한다는 의사를 표해 주시는 즉시, 저는 돌아가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원들에게 80만 두카트의 전비를 편성해 주기를 청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적지 않은 돈입니다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공화국에서는 이 예산을 반드시 승인할 겁니다. 지금 베네치아 전체가 전쟁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데메트리오 단니의 말에 페르난도 왕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이번 전쟁이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지중해 무역을 되살려 놓을 수만 있다면 지중해 기반의 왕국을 구축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었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대서양 항로에 대항하기 위해서 자신은 다시 이 지중해 무역을 되살려 놓는 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왕은 결심을 굳히고 데메트리오 단니에게 말했다.
“알았네. 내 도장을 찍도록 하지.”
1509년 성하(盛夏)
모레아스 전제국(專制國) 미스트라스.
모레아스(Moreas)의 옛 이름은 펠로폰네소스였다. 그 옛날 스파르타가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올림피아도 이 반도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도의 대부분은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북동부의 매우 좁은 지협(地峽)을 통해서만 육지와 연결되는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이곳 모레아스의 전제국(專制國, Despotate)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지협의 위쪽에 예전 십자군전쟁 당시 라틴계에 의해 세워진 아테네 공국(公國)이 십분 군사적, 외교적 능력을 발휘해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막아서 준 덕분이기도 했다.
당대의 모레아스 전제국의 군주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Andreas Palaiologos)였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쉰일곱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치아도 거의 빠져 있었고, 왼쪽 팔에는 마비가 와서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좋지 않은 건강에도 그는 스스로를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있었고, 적법한 계승법에 따라서 자신을 동로마제국의 황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공개적으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칭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요인 덕분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쓸려 나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콘스탄티니예의 술탄 바예지드가 스스로 로마제국의 황제로 칭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공(年貢)으로 목숨을 사고 있는 그가 동로마제국의 계승을 주장하고 나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동로마제국을 부흥시키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모레아스는 산지가 많고 식량이 풍족하지 않은 땅이었지만, 적어도 싸울 의지는 이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자금은 부족했고, 사람은 모자랐다. 그에게는 겨우 3천 명의 군대만이 있었고, 화승총은 100정, 대포는 12대에 불과했다.
그의 군대는 거의 창과 활로 무장된 경보병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군대의 지휘관의 능력만큼은 탁월했는데, 바로 나이 서른셋의 젊은 무관 알렉시오스 안노스였다.
알렉시오스 안노스의 증조부 한학정, 즉 요안네스 안노스는 스승인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주선으로, 미스트라스에서 전전대(前前代) 모레아스 군주 테오도로스 2세의 궁정에서 봉사했었다.
테오도로스 2세의 사후 그 자리는 동생 토마스(Thomas)에게 물려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전후 해, 한학정은 토마스의 궁정으로 돌아와 미스트라스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학정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은 둘째 아들을 제외하고는 세 명이 장성했다.
첫째 콘스탄티노스(한경직)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식솔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렌체에서 서적상을 운영했고, 그 장남 데메트리오스는 베네치아로 가서, 이탈리아식 이름인 데메트리오 단니로 시민권을 취득했다.
막내인 게오르기오스(한경조)는 신숙주의 사행단(使行團)을 따라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모국인 대한제국으로 건너가 심양에서 심왕가에 봉사하며 관리를 지냈고, 그 품계가 요동행정서에서 정1품 대부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손들은 모두 심양에서 풍족하게 명맥을 잇고 있었다.
한학정을 모시고 마지막까지 함께한 아들은 바로 셋째인 이사키오스(한경호)였다. 그는 부친과 함께 미스트라스로 와서 대를 이어 토마스의 궁정에서 봉사했고, 1460년 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재무관(財務官)의 자리를 지냈다.
그 아들인 테베리오스 안노스도 부친의 재무관 자리를 이어받아 1495년 숨을 거둘 때까지 봉직했다.
테베리오스에게는 아들과 딸이 각각 하나 있었는데, 그중 아들이 바로 지금 모레아스의 군대를 통솔하는 알렉시오스 안노스였다.
딸 이레네는 올해 나이 열아홉으로, 그 미모가 모레아스 전역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4대에 걸쳐 모레아스의 궁정에서 봉사한 덕에 군주 안드레아스의 알렉시오스 안노스에 대한 신임은 상당했다.
그것은 알렉시오스 자신의 능력이 탁월한 덕분이기도 했는데, 3천 명밖에 안 되는 군대를 무기와 자금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정예로 키워 냈던 것이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는 지금에 와서 빛을 보고 있었다.
“동맹군의 함대가 베네치아에서 출항해 지금 아테네를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군대도 아테네로 향해 줄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전하.”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앞에서 단단한 품새로 보고하고 있는 알렉시오스를 바라보았다.
베네치아의 주도하에 결성된 대오스만 동맹은 이제 결전을 앞두고 아테네 공국에 군사를 집결시키려 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두 왕자 아메트와 셀림이 차기 술탄의 자리를 놓고 내전 중이었고, 이러한 때를 틈타 전격적으로 공격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군대를 내어 이들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동로마제국의 제관(帝冠)은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의 손에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을 격퇴시키고 제국에 걸맞는 위상을 다시 점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시오스는 그 목적을 위해 자신에게 몸을 바쳐 봉사해 줄 것이었다.
군주 안드레아스는 진심으로 알렉시오스를 신뢰하고 있었다.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출발해 주게. 이번의 동맹군의 공세가 실패한다면 더 이상 이 모레아스도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보루로 잔존하기 힘들 것이야. 다음 대의 술탄이 누가 되든 내란을 틈타 배후를 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걸세. 그러니 모든 것을 걸고 아낌없이 싸워 주게. 천오백 년을 내려온 제국의 명맥을 여기서 끊을 수는 없네. 천 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지도 벌써 오십 년이 훌쩍 지났네. 지금이 마지막 기회네.”
안드레아스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알렉시오스 안노스에게 당부했다. 젊은 무관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안드레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스 전역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낼 때까지 부끄럽지 않도록 싸우겠습니다.”
“부탁하겠네.”
그날 저녁, 알렉시오스가 이끄는 3천 명의 군대는 미스트라스의 성문을 나섰다. 후덥지근한 여름이라 해가 없는 저녁과 밤에 행군을 하고, 낮에 휴식을 취하는 방식을 택했다.
알렉시오스는 출정을 하기 전 손아래 동생인 이레네를 찾아가 당부를 했다.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서 이 나라의 운명도 갈라지게 될 거다, 이레네. 나는 늘 딸같이 동생인 너를 아껴 왔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은 지금, 이 그리스 땅에 안노스 성을 쓰는 이라고는 나와 너 둘뿐이다. 내가 혹여 변고를 당하거든 투르크 군대가 이곳까지 밀려들어 오기 전에 지체 없이 베네치아 상인들을 찾아가거라. 베네치아에는 큰할아버님께서 계시니 그분이 너를 훌륭히 돌봐 주실 거다. 네가 술탄의 군대에 욕을 보는 것만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알렉시오스의 말에 이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크고 맑은 그녀의 눈동자는 한 톨의 의심도 없이 단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나약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께서 반드시 이기고 오시리라 저는 믿어요.”
이레네는 유난히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아름다움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이자,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모델이 된 체사레 보르자의 동생인 미녀 루크레치아와도 비견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심지어 모레아스의 군주 안드레아스도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짝으로 이레네를 염두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이레네는 미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강단이 있었고, 품위가 있었으며, 학식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여인이라 하더라도 요즘 같은 뒤숭숭한 정국에서 알렉시오스는 동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드시 이기고 오도록 하마.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좋지 않은 상황이 되면 내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해라.”
알렉시오스는 동생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알렉시오스가 이끄는 삼천의 군대가 아테네에 도달하기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이미 베네치아, 제노바, 아라곤의 군대가 아테네 근교에 막사를 치고 주둔하고 있었다. 헝가리 군대는 북쪽에서 육로를 통해 따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알렉시오스는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적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던 당숙(堂叔) 로드리고 단니였다.
바로 백종조부(伯從祖父) 데메트리오스의 넷째 아들이었다.
같이한 추억이 별로 없는 오촌지간이었지만, 연배가 비슷한 탓에 이들은 곧 죽이 잘 맞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로드리고는 베네치아군의 갤리선 하나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해상에서 오스만 군대의 상륙을 저지할 임무를 맡은 함대에 편성되어 있었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는 전쟁이지만, 아마도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을 거야. 베네치아도, 아라곤도 모두 각기 자기 이익을 거둘 만한 시점이 되면 더 이상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는 오스만과의 전투를 지속하지 않고 협상에 들어가겠지. 우리는 섬을 몇 개 얻고 무역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면 소기의 성과는 달성된 셈이지.”
“저들을 멸망시킬 때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단 말인가?”
로드리고의 말에 알렉시오스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보게, 조카. 왜 서방의 기독교 군주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말로만 하던 십자군을 결성하지 않았을까? 동방의 기독교 형제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말이야. 심지어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자들 중 일부는 투르크인들이 트로이의 후손들이고, 그리스인들이 이들을 멸망시킨 인과응보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 빈정대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탈리아의 선조가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이니까. 그 말대로라면 무슬림 이교도들과 이탈리아인들이 형제지간이고, 같이 그리스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말밖에 안 되지 않는가. 사실 이런 말이 중요한 게 아니네. 이런 말까지 나온다는 건 서방의 사람들이 제 이익을 챙기기 바쁘다는 걸 증명할 뿐이지. 하긴,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카톨릭 교도만이 그런가? 그리스 정교도들도, 무슬림들도, 아니면 다른 이교도들도 다들 자기 상황에 맞춰 움직일 뿐이네. 남의 명분을 위해 싸워 주는 고결한 기사라는 건 희망일 뿐이지.”
로드리고의 말에 알렉시오스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때때로 고결한 목적을 가장하더라도 그 밑에는 그 일이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가 있었다.
분명 이 동맹군도 겉으로는 이교도를 몰아내자는 숭고한 목적으로 치장했겠지만, 사실은 동지중해의 무역로를 보전하기 위한 경제적인 동인으로 움직인 군대였다.
사실 자신도 다를 것은 없었다. 오스만의 위협 아래 막대한 연공을 바치며 숨죽이고 있다가, 서방 군대가 출정하자 그 덕을 보아 동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아 보려 나선 것이 자신이 이끄는 모레아스의 군대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그런 현실을 노골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로드리고, 부디 싸울 때만큼은 충실히 임해 주게. 금전으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러도록 하지. 어쨌든 나도 그리스 혈통을 받지 않았는가.”
로드리고는 열심히 싸워 줄 것이다. 그러나 동맹군의 다른 지휘관들과 병사는 어떨지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저쪽 들판에 따로 주둔한 병력들이 보이지?”
“타타르인들이 섞여 있는 부대 말인가?”
“이런, 무슨 아쉬운 말씀을. 바로 우리 할아버님의 고국으로부터 용병으로 온 이들이네. 백양조에 고용되어서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었다 하더군. 지금은 코레아 출신 노병(老兵)들은 얼마 남지 않았고, 거의가 무슬림 출신인데 기독교로 개종한 시리아 사람들과 이집트 콥트 교도들인데, 기율이 엄하고 무기에도 숙달이 되어 있다 하더군. 저들이 배후를 받혀 주면 든든할 걸세.”
로드리고의 말에 알렉시오스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들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그냥 길잡이를 할 타타르인 부대 정도로 여겼었는데, 병사들 모두 보총을 지니고 있을 뿐더러, 포 또한 백 문에 가까웠다.
겨우 열두 문의 대포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부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알렉시오스가 이들을 다시 본 것은 바로 증조부의 조국에서 온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증조부가 동로마제국에 흘러들어 왔을 때, 그는 평생 다시는 조국으로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너무 늙어 감히 먼 길을 여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렀다. 지금은 알렉산드리아까지만 가면 조선인들을 보기가 어렵지 않았고, 거기에 용병단까지 흘러들어 와 있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아테네에 집결한 군대는 국경을 넘어 오스만 투르크의 내륙지역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주력 군대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오스만령 그리스 일대에 주둔한 몇 안 되는 군대들을 격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미아(Lamia)와 파르살라(Pharsala), 데메트리아스(Demetrias) 같은 도시들이 이내 동맹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지방의 파샤들은 그다지 저항하지 못했다. 에피루스 지역에서는 알바니아의 전사들이 투르크군과 싸우고 있었고, 헝가리 군대는 불가리아 지역에서 오스만 군대와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그리고 아라곤의 연합 함대는 네그로폰테(Negroponte)의 연안에서 상륙을 시도하던 오스만 군대를 제압했다. 동맹군은 이제 육로와 해로를 잇는 요충지인 테살로니카로 진격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석에 누운 술탄 바예지드는 이를 언제까지 좌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예니체리들을 보내 왕자들 중 셀림을 거들게 했다.
내전을 끝내고 자신의 영토를 침범한 기독교도들과 싸울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1509년 계추(季秋)
오스만 투르크 제국 테살로니카.
술탄 바예지드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자 두 아들 사이의 내란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콘스탄티니예에서 출발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술탄의 주력 군대는 셀림을 도와 아메트의 군대를 격파시켰고, 셀림은 당당하게 콘스탄티니예로 개선해 들어왔다.
그러나 아버지 바예지드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셀림을 거들어 주긴 했지만, 셀림의 태도를 의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셀림이 언제고 아버지인 자신을 몰아내고 술탄의 자리에 앉으려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때문에 바예지드는 셀림이 콘스탄티니예에 오래 머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셀림이 개선한 다음날 즉시, 바예지드는 아들에게 군대를 주며 서쪽으로 진군해 기독교도들과 맞서 싸울 것을 지시했다.
셀림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로서도 술탄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히려면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5만 명에 가까운 군대가 셀림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주력 무기인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병들 또한 탁월했으며, 오랜 기간 전투 경험으로 다져진 능란한 병사들이었다.
셀림의 군대가 출병했을 무렵, 알렉시오스가 이끄는 모레아스군은 테살로니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크루기오스의 오스만 주둔군을 무력화시킨 뒤, 조그만 성채를 점령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용병단 또한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본래 이 용병단을 이끌었던 모승호가 죽은 뒤로, 그 아들 모선우(毛宣祐)가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 용병단은 병력이 1천 명에 가까웠고,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마자파히트, 인도, 백양조 등지에서 싸워 온 경력이 있었다.
이들은 본부를 나상의 도움을 받아 소코트라에 두고 있었는데, 사실상 고용된 곳을 떠돌며 정착하지 않고 있었다.
모선우는 투르크인들에게 모셴이라 불렸는데,그 탓에 이 용병단 또한 모셴대(隊)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모선우는 마자파히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이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전전했다. 조선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했던 초기의 노병들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용병단은 때때로 현지인들로 인원을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무슬림 지역에서 소수자인 기독교도나 배화교도(拜火敎徒)들이었기에 모선우 자신도 껍데기일 뿐이지만 정교회 신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나상을 통해 무기 밀매를 하고 있었고 용병대에 직접 장인(匠人)을 고용해 무기를 개량하고 제조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끄는 부대의 포격술은 근동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는 여러 채의 성채를 함락시키고 오스만 군대의 진격을 몇 차례 저지하는 활약을 보였다.
지휘부로부터 그의 용병단은 마크루기오스에서 모레아스군과 합류해 테살로니카로 진격할 것을 명받았고, 때문에 그는 알렉시오스와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조상이 조선인이란 말이오?”
함께할 군대의 지휘관과 안면을 익힐까 해서 가진 자리에서 모선우는 알렉시오스의 집안 내력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소. 증조부가 이곳으로 건너와 자리 잡았소.”
“그거 놀라운 일이오. 우리도 별종이라 여기까지 흘러들어 오긴 했지만, 여기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인 출신이 있는 줄은 짐작도 못했소.”
둘은 놀랍다는 듯이 대화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조선어가 아닌 터키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모인 진영에서 조선계의 두 사람이 투르크 말로 대화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평생 조선어라고는 접해 본 적이 없는 알렉시오스는 차치하고서라도, 태어나서 고국의 땅을 한 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모선우 또한 조선어가 짧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선우는 아나톨리아,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일대를 전전하며 터키어를 익혔으며, 알렉시오스 또한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모레아스에서 나고 자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터키어를 필요상 익힌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런 인연이라도 있으니, 우리가 좀 더 잘 맞을 수 있을 것 같소.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테살로니카 앞바다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막고 포격 지원을 하기로 했고, 아라곤 군대는 헝가리군과 합류해 테살로니카의 서쪽에서 들어가기로 했소. 그쪽과 내가 할 일은 테살로니카 성 밖 북쪽 고지대에서 이들에게 포격 지원을 하는 것이오. 그러다가 성문이 함락될 쯤이 되면 병력을 움직여 함락전을 돕게 될 거요.”
모선우의 말에 알렉시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됐든 테살로니카 함락이라는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될 일이었다.
이들은 병력을 합쳐 북쪽으로 테살로니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미 테살로니카 앞바다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갤리선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도합 3만에 달하는 아라곤과 헝가리 군대가 테살로니카 서쪽의 평원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테살로니카의 오스만 관료는 타협 없이 저항할 것을 선언했지만, 이들 중 아무것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만큼 테살로니카에 있는 병력은 보잘것없었고, 이쪽은 승운(勝運)을 타고 있다고 여겼다.
모선우의 용병대와 알렉시오스의 모레아스군도 테살로니카 북쪽의 언덕을 손쉽게 손에 넣고 테살로니카 성이 보이는 고지대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테살로니카 성의 성벽은 지척이었고, 포를 쏘아서 운이 좋다면 성안으로도 떨어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전투는 사흘 뒤에 시작되었다. 테살로니카의 성벽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가기 시작했고, 성내의 오스만 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내에서는 그리스계의 테살로니카 시민들이 내부 교란까지 벌이고 있는 듯 보였다.
베네치아는 특히 이 테살로니카 공방전에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바로 1423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의 위협에 노출된 이곳의 그리스인들이 도시의 지배권을 베네치아에 양도했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이 도시를 1444년까지 거의 20년 넘게 지배하고 있었는데, 결국 오스만 군대에 빼앗긴 경험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이 법적으로 이 도시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고, 때문에 이 전쟁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전리품으로 테살로니카를 얻으려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열흘에 걸친 공방전 끝에 동맹군은 테살로니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바로 사흘 뒤, 테살로니카의 동쪽에서 셀림이 이끄는 5만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전투 중에 거의 허물어진 테살로니카의 성벽으로는 동맹군이 이 군대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때문에 동맹군도 군세를 총동원해 테살로니카 동남쪽 해안가의 넓은 평원에서 셀림의 군대와 마주했다.
전투는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승리는 셀림의 것이었다. 전투를 돕고자 육상에 상륙해 싸웠던 로드리고 단니는 결국 전사했고, 아라곤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알렉시오스가 이끄는 모레아스군은 겨우 80명 만이 살아남았고, 알렉시오스 자신은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눈을 잃었다.
모선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용병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셀림의 군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도 그였다.
모승우가 쏜 총탄은 셀림의 어깨 한쪽을 못 쓰게 만들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함대는 다행히도 거의 멀쩡했고, 때문에 평원에서의 회전에서 동맹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방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헝가리군과 합류해 테살로니카 성에서 셀림의 군대를 다시 한 번 저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성벽은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공방전은 길어졌다. 비록 셀림이 이끄는 오스만군이 회전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그의 군대 또한 가용 전력이 절반 아래로 줄어 있었다.
정예병인 예니체리들은 크게 활약했지만, 소수의 예니체리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군대의 지원을 받을 길이 없는 동맹군과 다르게 오스만군은 지속적으로 인원 보충이 가능했고, 보름 정도의 공방전 끝에 결국 동맹군은 테살로니카를 셀림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전략적으로 후퇴했다. 테살로니카 서쪽의 산맥 지대에서 동맹군은 알바니아의 제후들이 이끄는 군대와 그리스의 민병(民兵)들과 합류해 방어선을 쳤다.
전쟁은 길어졌고 겨울이 찾아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음 해로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술탄 바예지드는 셀림 대신 다른 아들에게 술탄의 자리를 넘겨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셀림은 위기감을 느꼈고, 아버지가 엉뚱한 결정을 하기 전에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여름에 접어들 무렵, 셀림은 독단적으로 콘스탄티니예의 부친과 상의 없이 동맹군과 전격적으로 화의를 맺고, 군대를 그대로 몰아 콘스탄티니예로 들어갔다.
술탄 바예지드는 이미 중병(重病)으로 의식이 불완전했기에 셀림은 궁전을 차지하고 남아 있는 형제들을 모두 유배 보내 버렸다.
병석에 누운 바예지드는 이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몇 명의 대신들마저 셀림의 손에 처형당한 뒤에 셀림은 아버지를 독촉해 술탄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바예지드는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셀림은 테살로니카 서쪽을 포기했다.
그가 잠시의 휴전을 맺고 콘스탄티니예에서 정치적 처리를 하는 동안, 이미 동맹군은 주둔 병력을 늘려 그리스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사절을 보내 확실한 경계를 매듭짓기를 종용했다.
테살로니카 서쪽에서 마케도니아를 지나 세르비아로 가는 새로운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에피루스 지역과 그리스 중부의 많은 땅이 모레아스에게 넘겨졌다. 안드레아스는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동로마제국 황제에 스스로 올랐다.
여전히 마음속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지만 아쉬우나마 그는 미스트라스에서 쪼그라든 채로 다시 세워진 제국을 통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시오스는 공로를 인정받아 에피루스의 총독이 되었다.
동생 이레네는 결국 황태자의 신분이 된 안드레아스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와 혼인을 맺게 되었고, 3년 뒤 안드레아스가 숨을 거두자, 뒤를 이은 콘스탄티노스 12세로 남편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해, 동로마제국의 황후(皇后)의 신분이 된다.
아테네 공국은 오스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아라곤의 영향권 아래에 다시 놓였고, 아라곤 왕국은 아테네 공국을 통해 아테네, 테베, 볼로스 등의 주요 지역을 통치할 권리를 얻었다.
네그로폰테(유보이아)와 에게해의 많은 섬들이 베네치아의 영역에 확실히 편입되었으며, 제노바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자리한 스미르나(Smyrna)를 술탄으로부터 양도받고, 흑해의 식민지로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보장받았다.
모선우의 용병단은 공적을 인정받아 2만 두카트의 보상과 함께 아라곤 왕 페르난도로부터 보이오티아 기사단(Boeotian Order)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들은 아테네 공국령 내의 테베를 본거지로 삼을 권리를 얻었다. 이들은 별칭으로 동방 기사단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알바니아의 레체 동맹은 오스만으로부터 확실한 자유를 얻었으며, 헝가리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영향권 아래에 놓는 데에 성공했다.
새로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셀림은 비록 그리스의 많은 지역을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군대는 건재했고,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서쪽으로의 확장을 보류하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군대는 이집트로 파죽지세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결국 3년간의 항쟁 끝에 문을 닫고 오스만에 병합되고 만다.
동맹군은 그리스에서 다소간의 승리를 얻었지만, 이내 동지중해의 무역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에게 무너짐에 따라, 다시 한 번 무역에 있어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술탄의 명에 의해 닫혔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함선들은 입항을 허가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 상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상은 알렉산드리아에 상관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들이 거래 상대로 삼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역 거래는 축소되었고 많은 상인들이 바스라나 숙주로 철수했다. 한동안 인도양 중심의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새로운 경쟁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으니, 바로 인도양으로 세력을 뻗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