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만리창파(萬里蒼波)
―공주제국신보(公州帝國申報),
1464년(가경 20년) 10월 하순(下旬)호
1464년
가경 20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전라도 목포부(木浦府).
나상의 대행수 오상기가 숨을 거둔 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
나이 아흔에 가까웠으니 대단히 장수한 셈이었다.
그는 나상의 조선소가 있는 목포부 인근에 자택을 두고 있었는데, 아흔아홉 칸짜리의 거택(居宅)이었으니, 그의 부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오상기는 젊은 시절 세훈과의 인연을 발판 삼아 탐라에서부터 세훈의 지도 아래에 상단을 운영하기 시작해 이를 동영주상행계, 그리고 나상으로 확대해 탐라를 중심으로 목포와 황성부, 그리고 종래에는 바호디르와 함께 대외무역선단을 꾸려 페르시아까지 무역로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크나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장가를 들어 딸만 일곱을 두었다. 적자(嫡子)가 없으니 사위만 일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상은 원래 세훈의 도움을 받은 오상기를 주축으로 한, 탐라의 상인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운영하는 상단이었고, 상단의 권리는 개인에게 귀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상기는 상단의 지분의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예순 해 가까이 대행수의 자리에 있었으니 그 영향력이 막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사후, 일곱 사위들이 상단에 포진해 대행수의 자리를 노렸을 때, 그것을 제지할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계응(趙啓應)의 아버지 조첨식(趙添植)은 달랐다. 조첨식은 원래 오상기 휘하의 고만고만한 행수들 중 한 사람이었으나, 바호디르에 이어 페르시아 무역을 관장하면서 크게 성장한 인물이었다.
바호디르가 마지막 항해 도중 인도에서 열병으로 목숨을 잃고 나서 그가 책임져 왔던 원양 무역은 지도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말았다.
두 해 가까이 이 원양 무역이 정상화되지 못하자 오상기는 바호디르를 따라 열 차례 정도 호르무즈까지 다녀온 경력이 있는 조첨식을 발탁해 이 원양 무역을 관장하는 행수의 자리에 앉혔다.
“자네가 좀 힘을 써 주어야겠어. 지금 이 일을 맡아 줄 것이 자네밖에 없네.”
오상기가 조첨식을 불러서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이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조첨식은 이 원양 무역을 관장하는 일을 훌륭히 수행했다. 카라 코윤루와도 무역 규모를 확대했으며, 바스라에도 고정 상관(商館)을 개설해 바그다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타브리즈로 한 해나 두 해에 한 번 고정적인 상행(商行)을 보냈다.
그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항로 각처(各處)에 상선의 기항과 보급을 용이하게 해 줄 전초기지를 세우기도 하고, 주요 항구의 권력자들과 관계를 맺어 무역상의 이익을 사수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가진 지위를 사용해 자기 소유의 선박이 원양 선단에서 차지하는 규모를 조금씩 늘여 갔다. 또한, 도자기와 비단, 쥘부채의 수출 규모를 독보적으로 늘려 발화기와 직물 등 이미 많은 이들이 생산하고 있는 수출품에 비해 경쟁자가 없는 제품의 비중을 높여 갔다.
조첨식의 탁월한 상재(商材)가 빛난 것은 바로 대한제국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뿐만이 아니라, 싼값으로 명나라의 도자기와 진서도호부와 일본에서 생산되는 칠기(漆器)를 대량으로 구매해 높은 이윤을 남기고 서방에 팔아넘긴 상행이었다.
칠기의 상품 가치를 눈여겨 보았다가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서방제국(西方諸國)으로 넘겨준 것이 바로 이 조첨식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제노바 상인 페드로 알부아니와 나상은 연계를 맺게 되었고,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 당시 망명길에 오른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을 심양부로 보내준 것도 조첨식의 공로라면 공로였다.
조첨식은 이렇게 서방 무역에 있어서 자신의 지분을 점차 확대해 나가면서 나상 안에서의 발언권도 점차 늘여 가기 시작했다.
오상기는 이러한 조첨식에 대해서 일종의 방조 태세로 일관했다. 그가 조첨식을 발탁해 쓴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오상기는 욕심 많은 사위들에 의해 나상이 사분오열될 것을 우려했고, 이것을 적절히 견제해 줄 사람으로 조첨식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조첨식이 오상기와 혈연적으로 연이 닿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찍 죽은 오상기의 맏사위와 장녀 사이에서 난 딸이 조첨식과 혼인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한 인척 관계가 오히려 오상기에게는 적합하게 여겨졌다.
조첨식의 조금은 불안한 위치가 오히려 나상의 일에 발 벗고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첨식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조금의 과욕을 부리는 것도 내심 눈감아 준 것이다.
그리고 결국 오상기가 숨을 거두었을 때, 조첨식은 오상기가 내심 예상했던 대로 행동했다.
오상기의 사위들은 대행수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머지 나상의 행수들과 상인들은 곧 이러한 싸움에 환멸을 나타냈다. 오상기의 지분이 사위들에 의해 여기저기 찢겨 있는 사이, 나머지 상인들의 추대를 받아 조첨식이 대행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조첨식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불법적인 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상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계(契)로 맺어진 전통적인 상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상이 처음 등장할 당시에 동영주상행계라는 형식으로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나상의 성장과 함께 막강한 상업적 권력을 휘둘러 온 오상기가 가진 지분이 막대하긴 했지만, 나상이란 단체는 근본적으로 처음에 출범할 때부터 세훈의 후원 아래에 탐라 지역 상인들이 연대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나상에 참여하고 있는 상인들은 나름대로의 지분이 있었고, 제각기 행수나, 객주(客主) 자리를 차지하고서 나상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만큼 기본적으로 오상기의 핏줄이 명분상 대행수 자리를 잇기에 이점은 있을지언정, 이들 상인들의 동의가 없으면 함부로 대행수를 자처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만큼 다른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행수들을 조첨식 자신의 편으로 돌리기 위해서 매수와 뇌물은 기본적으로 동원되었고, 앞으로의 해외 상선에 대한 지분도 거래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나마 조첨식이 한 것은 오상기의 사위들이 한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오상기의 사위들은 어떻게든 권력의 핵심인 심왕가(瀋王家)의 사람들이나 조정, 특히 상공부(商工部)의 관료들과 연줄을 닿게 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상인의 촉각은 사실 조정에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떠한 정책이 시행되고 폐기되느냐에 따라서 상업적인 이해관계도 같이 맞물리게 되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세훈이 세워 놓은 대외 무역의 기조에 따라 성장해 왔던 나상이니 만큼, 상단의 운영에도 사실상 조정의 입김이 닿아 있었다.
그러나 입김이 닿는다는 것과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직까지 세훈의 유지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는 심왕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뇌물에 경멸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부적절한 청탁에 응해 줄 심왕가의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청백리적인 자세로 재상에 앉아 있는 현도나, 실질적으로 중앙정부에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심양에서 요동의 경략(經略)에 집중하고 있는 서윤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보일 리가 없었다.
심왕가의 또 다른 인물인 현진의 경우, 관직은 고사하고 상업적으로 일부분 경쟁 관계에 있는 계영양행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러한 나상의 문제에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깐깐한 심왕가의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이러한 관례적인 얼굴 봐주기에서 유연한 상공부의 관료들도 앞으로 상계를 좌지우지할 나상의 새로운 대행수의 선발에 이러한 금전 거래가 있을 수는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결국 이러한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오상기의 사위들의 다툼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한 끝에 자멸로 끝나 버렸다.
가장 중요한 나상의 상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거의가 상인 출신이 아닌, 사대부 출신이었던 사위들이 이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다 결국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 바로 나상의 상인 출신으로 조직에 깊게 뿌리 박고 있었던 조첨식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조첨식이 대행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 나상은 전력적으로 국외 무역에 집중하여 대한제국 제일이 아닌, 사해(四海)에서 으뜸가는 상단으로 거듭나도록 진력하겠소. 나상의 근간은 실로 이전부터 땅에 있지 않고 바다에 있었으니, 이것은 우리의 출신이 탐라의 도민(島民)이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소. 바닷사람이 마땅히 장사치가 되었으면 바다를 오고 가며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이까.”
조첨식이 대행수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앞으로 나상의 방침을 밝힌 것은 다름 아닌 대해(大海)의 무역권을 장악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 발언은 무역의 비중을 늘려 대외 무역에 치중되어 있는 자신의 지분을 더욱 늘리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었다.
조첨식은 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아들 조계응(趙啓應)을 단단히 준비시켜 두었다.
조첨식의 아들 조계응은, 조첨식이 미리 이러한 권력 관계를 이해하고 일찌감치 죽은 오상기의 첫째 사위인 명주현(明周賢)과 오상기의 장녀 오은(吳誾) 사이에서 난 딸인 명수인(明秀仁)과 혼례를 치러 나은 자식이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인척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서 몸을 낮추는 동시에, 오상기로 하여금 조첨식에 대해서 이해관계를 돌봐 주게 만들었던 것이니 만큼, 상인다운 현명한 계산에서 나온 친족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오상기에게 있어서나 조첨식에게 있어서나 이것은 상호간에 이해가 맞아떨어졌던 관계였던 것이다.
조첨식은 애초에 장인인 명주현이 오상기 사후 승계 구도를 두고 다툴 경우 명주현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생각이었으나, 명주현이 오상기보다 먼저 죽고 아들도 없는 상황이 되자, 조첨식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오상기에 의해 적극적으로 길러질 수 있었다.
조첨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오상기에게 접근해 신뢰를 얻었던 것이다.
손녀사위인 조첨식이 다른 사위들에 비해 못할 것도 없다는 오상기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첨식은 이를 발판 삼아 오상기가 세상을 떠나자 다른 사위들을 돕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것을 명분 삼아 대행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정략적인 혼인 관계로 태어난 아들 조계응을 조첨식은 일찌감치 호상(湖商)과의 유대 관계까지 고려하여, 호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공주제국신보의 소유주의자 남양무역에 큰 지분을 지닌 모도이(毛道二)의 딸과 혼사를 맺게 했다.
그런 가운데 조첨식은 조계응을 오상기가 일찌감치 대외 무역에 종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설립한 습외어학원(習外語學院)에 입교시켜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힌디어 등을 두루 익히게 했다.
조계응이 다행히 재주가 있어 외국어 또한 수월하게 익혔을 뿐더러, 상재(商材)에도 탁월함이 있어 이내 치부에도 재능을 드러내 보였다.
회계(會計)를 보는 데도 역량이 있었고, 아버지 조첨식에게도 조언을 할 정도로 상거래를 보는 눈도 트여 있어 조첨식으로서는 아들 조계응을 날이 갈수록 귀히 아낄 수밖에 없었다.
조계응이 스무 살이 되자 조첨식은 아들을 페르시아로 가는 무역 상단의 책임자로 보내 일을 익히도록 했고, 조계응은 아버지 조첨식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꽤나 큰 수입을 남겨서 돌아왔다.
물론 일찌감치 조첨식이 장악하고 있던 서방 무역에서 아들인 조계응이 이러한 인맥관계를 활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조계응의 능력은 탁월한 것이었다.
이러한 아버지가 구축해 놓은 상업적인 관계망을 충분히 활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것을 간수하고 성장시키는 데에 있어서 조계응은 그 수완을 보여 주었다.
이 정도의 능력을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조첨식이 대행수에 오르자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조계응이 대외 무역을 전담하는 행수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상의 꼬장꼬장한 늙은 상인들조차, 이 조계응의 능력을 보아 트집을 잡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조계응은 아버지 조첨식을 한 수 뛰어넘는 상계의 거두로 성장하고 있었다.
“알 에스칸다리아(알렉산드리아의 아랍어 이름)로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그곳은 오래된 대항(大港)으로 서방 각국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니, 그곳으로 직접 갈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하고 싶습니다. 바스라를 통해 육로로 2년에 한 번 상행을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계응은 행수에 자리에 오르게 되자 아버지 조첨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조계응이 보았을 때, 새롭게 항로를 개척하고 무역로를 뚫지 않는 이상 점점 경쟁이 치열해져 가는 서방 무역에서 더 이상 큰 수익을 얻기는 힘들다는 계산이었다.
남양(南洋)은 이미 호상(湖商)이 뛰어들어 무역을 전매(專賣)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인도를 거쳐 페르시아로 가는 항로는 나상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상(京商), 송상(松商)에 이어 이제는 내상(來商)까지 뛰어들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세에 따라서 언제고 중단될 수 있는 무역의 위험성을 고려해 볼 때, 최대한 손실을 줄일 수 있도록 무역로를 다변화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첨식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의 의지를 꺾는 것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서해 항로에 아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상인으로서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선대 오상기 대행수의 외증손(外曾孫)이고, 또한 당금의 나상 대행수인 나, 조첨식의 아들이다. 이러한 족보를 잇고 있는 너한테는 상인의 핏줄이 한가득 흐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네가 보여 준 상재가 탁월하였으니, 아마 하늘도 네 재능을 귀히 여겨 환란을 피해 가게 해 줄 것이다. 그러니 내 너를 믿고 서방으로 보내겠으니 부디 뜻하는 바대로 좋은 결실을 맺고 돌아오너라.”
조첨식의 바람은 대행수로서의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것이기도 했다.
아들이 나상의 행수로서 좋은 결실을 맺어 돌아온다면 대행수로서 조첨식은 그만한 이득이 없었고, 또한 아들이 상재를 탁월하게 발휘하여 그 재능을 꽃피운다면, 그것 또한 아비 된 자로서 복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부디 당부하신 대로 좋은 결실을 맺어 오겠나이다.”
조계응은 단단히 다짐을 하고 항해에 떠날 준비를 했다.
조계응이 꾸린 함대는 무역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장과 항로를 탐색할 목적이 짙었다. 때문에 함대는 원양 무역을 하며 삼각돛과 사각돛을 함께 달아 바람을 때에 따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도록 발전한 복범교관선(複帆交關船)을 위주로 편성되었다.
원양 무역의 초기에 사용되었던 교관선은 이렇게 보다 크고 빠른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고, 특히 복범교관선은 다른 상단에 비해 아직까지 나상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는 선박이었다.
조계응은 이렇게 14척의 배에 8백여 명의 선원을 태워 동남방으로 돛을 올려 제주항을 출항하니, 이것이 1464년 음 12월 보름의 일이었다. 이른바 조계응의 항적(航跡)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1465년 중춘(仲春)
마자파히트 왕국 수라바야(Surabaya).
케르타위자야 왕의 뒤를 이은 라자사 와르다나(Rajasa Wardhana)왕이 서거한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5년간의 내전기에 접어들었다.
왕은 옹립되지 못했고, 서로 왕위의 계승을 주창하며 왕족들은 무력을 동반한 정쟁(政爭)에 돌입했다.
호상(湖商)의 주요 행수들 중 한 명이자, 공주제국신보를 소유한 모도이의 맏이 모승호(毛昇浩)가 마자파히트 왕국으로 건너온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아버지 모도이는 모승호가 공주상학을 졸업한 뒤, 황성부로 유학가서 관료가 되기를 바랐지만, 모승호는 학습원(學習院)의 입학 시험에 두 차례 떨어진 뒤, 호상의 무역 선단에 들어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마자파히트를 비롯한 남양 각지에서 거래를 확대해 가고 있던 호상의 상단에 회계사(會計司)로 들어가 물품의 정산(定算)을 도맡았다.
그러나 마자파히트 왕국이 내전에 접어들면서 호상의 대외 무역 수지는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안정된 거래가 불가능해지고 때로는 함대에 직접적인 위해까지 가해지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든 노릇이었다.
호상의 대외상단이 잠시간 무역을 중지하고 상남(湘南)으로 철수해 아주 본국(本國)으로 귀환까지 고려하고 있던 와중에, 모승호는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모승호는 상의 없이 호상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으로 그간 모아 둔 돈에 아버지에게 부탁해 상남으로 급전을 융통해, 상남 파견대의 군 장교들과 인맥을 쌓았다.
상남 파견대에서는 때마침 구형 보총을 폐기 처분하려 하고 있었고, 모승호는 그간 쌓아 둔 장교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폐기하려던 보총 2백 정을 구매한 다음, 상남 파견대에서 퇴역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군인들 2백여 명을 용병(勇兵)으로 고용했다.
모승호는 이들을 호상(湖商)에게서 빌린 배 두 척에 나눠 싣고 마자파히트로 향했다.
모승호의 생각은 다름 아닌, 마자파히트 왕국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여하려는 심산이었다.
“금은보화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꽤 많은 패물과 금전을 모을 수 있을 거요. 줄만 잘 선다면 앞으로 마자파히트 왕국과의 무역에서도 지분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
모승호의 생각은 단순하다면 단순하다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수요와 공급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긴 했다.
사실 모승호의 행적은 대한제국의 중앙 조정에서 보았을 때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외부로 흘러가서는 안 될 보총을, 상남 파견대에서 일개 개인인 모승호에게 매각한 것부터, 군사적인 대외 개입을 불허하고 있는 조정의 의지에 반해 모승호가 독자적으로 용병대를 꾸려 마자파히트로 향한 것은 분명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민에 대해 완벽한 통제 체제를 갖추지 못한 대한제국은 상당할 정도로 중앙집권을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급속한 팽창 뒤에 오는 공백이 공존하는 나라였다.
이렇게 연락하는 데에만 배로 한 달이 걸리는 거리 밖에 있는 신민들에게 통제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남 파견대도 국가의 명령에 대체로 복종하고 있으나, 이러한 규율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동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모승호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아직까지 군대의 규모에 비해서 충분한 재정을 확충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대한제국 조정으로서는, 예전에 비해서 그 정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각지의 진위대 및 파견대가 일정 부분 운영을 위한 자금을 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에 목화(木花)를 전매했던 진위대들이 그러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각 부대(部隊)에 토지를 지급하여 이곳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부대의 재정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영진분견대의 경우에는 모피 무역에 참여함으로서 재정을 확충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상남파견대는 조정의 지원 외에는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남에서 거래되는 물건에 세금을 조금 물려, 이것을 상남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외부 소속의 상남서(湘南署)를 통해 지급받고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예산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때문에 일종의 편법을 써서 구형 보총을 모승호에게 처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모승호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상 조정의 지휘를 받고 있는 상남서(湘南署)가 상남에서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실질상 상남은 만 리 밖에 떨어져 있는 곳이라 이곳 특유의 관습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입김 이상으로 이곳에서는 이곳 상남의 활로(活路)를 책임지고 있는 상인들과 인구에 비해 많은 수로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입김이 센 편이었다.
또한 초창기에 이곳 상남에 정착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토호(土豪)라고 불릴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되어, 상남 일대의 토지와 부를 독점하고 상남의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사(紳士)로서, 이들은 상남의 교육제도에도 깊숙이 개입해 정부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이 없는 상남에서 상남의숙(湘南義塾)이라는 학당을 세워 상남서에서 일하는 하급 관료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니만큼 상남의 경우 대한제국 본토에 비해 조정의 영향력이랄 것이 미미한 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지역적인 이해가 얽히고설킨 상남에서 모승호를 황성부 조정에 고발할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상남파견대가 적정 수위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해서 모승호에게 보총을 넘겼고, 이러한 상황을 뻔히 알 뿐만 아니라, 상남파견대와 긴밀한 유대 관계에 있는 상남서의 관료들과 지역의 신사들이 이것을 문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니, 도대체 만리 밖에서 이러한 소동을 벌인들, 황성부에서 어떻게 자신을 처벌할 것이란 말인가?
그러한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모승호였기에 이러한 일을 걱정 없이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모승호의 용병대는 심지어 포(砲)까지 구한 뒤 함선에 장착하여 마자파히트의 호상 근거지였던 수라바야(Surabaya)로 향했다.
수라바야 항을 점거하고 있던 호족 군대를 향해 포격을 한 뒤 수라바야에 상륙해 손쉽게 그곳을 점령한 모승호는 본격적으로 마자파히트의 내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제게는 이백 명의 정병과 총포(銃砲)가 있습니다. 충분히 대가만 약속하신다면 저하를 왕위에 올려드릴 능력이 저희에게는 있습니다. 분명히 적절한 때에 저희를 크게 활용하실 때가 있을 겁니다.”
모승호는 수라바야의 점령을 마자파히트 전역에 선전하여 결국 전전대 왕인 케르타위자야의 아들인 기리사와르다나(Girisawardhana) 왕자와 접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강력한 왕족들과 대척하면서 꾸준히 자바섬 일대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적들은 많았고, 기리사와르다나 자신만의 힘으로는 아직까지 앞길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어느 정도 토대를 닦은 지금에 와서 왕위 쟁탈전에서 물러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보다 무력의 확충이 절실한 상황에서 모승호는 기리사와르다나 왕자에게 좋은 협력자로 여겨졌다.
“과연 그대의 정병들은 뛰어나구려.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대에게 관직과 토지, 그리고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지. 부디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시오.”
모승호가 이끄는 용병들의 총포 시범을 본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이내 감복하고 모승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승호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왕위를 놓고 다투는 여러 인물들과 세력들을 분석한 뒤였다.
그가 보기에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자신이 없어도 언젠가는 왕위를 차지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황은 혼돈에 휩싸여 있었고,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럴 때에 기리사와르다나 왕자의 곁에서 전쟁을 돕는다면 큰 수고 없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모승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승호의 생각은 적중했다.
루마장(Lumajang)과 발리(Bali), 그리고 라셈(Lasem)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승호의 용병들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활약했다.
자바(Java) 섬과 발리(Bali) 섬, 그리고 인근 해역이 곧 기리사와르다나 왕자의 손아귀에 장악되었고, 이를 토대 삼아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결국 마자파히트 왕국 내의 모든 적대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1458년, 왕위에 앉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신의가 있었던 기리사와르다나 왕자는 왕위에 오른 뒤 모승호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이제는 2백 명에서 백이십 명 정도로 숫자가 준 모승호의 용병대는 큰 보상을 받았다.
원하는 자들에게는 마자파히트에 정착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은급(恩級)으로 토지와 하인들이 지급되었다. 일부는 무역에 있어서 지분을 얻었으며, 용병들은 이 지분을 가지고 호상의 무역에 직접 참여하거나 이것을 호상의 상인에게 팔아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사람은 바로 모승호였다. 모승호는 왕의 친위대(親衛隊)를 이끄는 장군의 지위를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금괴 100근과 함께 발리 섬에 커다란 농장(農場)을 하사받고 호상과의 거래를 왕을 대신해 대리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이때부터 모승호가 수라바야에 자리를 잡고 수라바야에 조선인 거류지(居留地)를 조성한 다음, 마자파히트와 호상 간의 무역을 중개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거 참, 그 코맹맹이 모승호가 이렇게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소. 이제 호상의 무역이 그 모씨 집안 장남에게 좌우되겠구려. 모도이 행수가 아주 복을 얻었어, 복을.”
호상의 상인들은 부러움과 질시 섞인 눈으로 모승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런 중개인이 생긴다는 것이 꼭 호상에게 있어 손해는 아니었다. 호상은 비교적 이전보다 안정된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되었고, 모승호를 통해 직접적으로 마자파히트 왕국 내의 왕족이나 귀족들과도 거래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자파히트 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 모승호는 그만큼 호상에게 있어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모승호는 호상과는 한 발짝 떨어져 중개인의 자리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가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호상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고 있었다.
그 또한 호상 출신으로 아버지 모도이는 아직도 호상의 행수 자리에 앉아 있을 뿐더러, 마자파히트에 무역을 들어오는 상단이 가끔 들어오는 이슬람 상인들을 제외하면 호상이 전부나 다름없으니 모승호의 명운 또한 호상과 함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모승호의 성공에 힘입어 마자파히트로 많은 젊은 조선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할 일 없는 반쯤 부랑배 같은 이들이었으나, 기리사와르다나 왕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주었다.
이들은 용병이 되어 기리사와르다나 왕의 호위를 전담했으며, 그들에게는 적어도 그럭저럭 부와 명예가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기리사와르다나 왕의 주변에는 조선인들이 점차 늘어 갔다. 기리사와르다나 왕은 이들을 아주 신뢰하고 아꼈는데, 언제고 다른 토호들이나 귀족들에게 붙을 수 있는 토착민들에 비해, 이들은 철저히 기리사와르다나 왕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므로 오히려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모승호는 이러한 여건들을 잘 활용해서 마자파히트 왕국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도가로 떠올랐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기리사와르다나 왕의 권력의 주변에는 절대 그림자도 비치지 않음으로서 기리사와르다나 왕의 신뢰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철저히 호상과 기리사와르다나 왕 사이에서 자신의 이윤을 추구했으며, 때문에 적절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치부한 모승호가 자신의 어린 여동생과 결혼한 매제(妹弟)인 나상의 조계응이 항로를 개척하는 함대를 출범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이내 상남으로 가 조계응의 함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계응의 함대가 상남에 입항하자마자 모승호는 조계응을 찾아가 협상에 들어갔다.
“매제, 내가 충분히 자네를 지원할 자금을 내어 놓을 수 있소. 그러니 앞으로 개척하는 항구의 무역 거래에 일정 부분 내 지분도 확보해 주시오.”
모승호의 제안에 조계응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상에서 충분한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함대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자본은 있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심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처남께서 호상(湖商)의 상인 신분으로 참여하시는 것은 안 됩니다. 경쟁 상단의 지분을 저희 항해에 편입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개인 신분으로 참여하신다면 괜찮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편의를 봐드릴 수 있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조계응의 말에 모승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어디까지나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상에서 꾸린 함대에 호상의 지분을 들이는 것이 반가울 턱이 없었다. 그것은 조계응으로서도 불편한 모험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인 모승호가 출자하는 것은 문제가 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출자한 돈으로 모승호가 직접적으로 무역에 뛰어들 가능성은 희박했고, 나상을 통해 전입되는 배당금을 노리고 투자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상이 지속할 무역에서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되었지 손해가 될 여지는 없었다.
“나도 그럴 생각이오. 당연히 나상이 하는 일에 호상의 이름으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지. 나는 그저 조금 지분만 확보할 수 있을 정도면 되니 너무 유념치 마시오. 반대로 앞으로 남양 무역에 있어서 나상과의 거래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있지 않겠소?”
모승호 또한 자기 출신 배경이긴 하지만 호상과의 단편적인 거래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나상이 마자파히트 무역에 뛰어들 생각만 있다면 언제고 협상하에 지분을 내어 줄 생각이 있었다.
“그건 천천히 고려해 보도록 하지요. 남양에서 크게 성공하셨다더니 정말로 헛소문이 아닌가 봅니다.”
“보통 수완이 아니면 힘든 일이지. 내 자랑 같아서 대놓고 이야기는 안 하지만, 이러한 이윤이 남는 일에는 눈치가 남들보다 몇 배로 빠르네. 다 매제의 수완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라 판단하고 뛰어들고자 하는 것이니 우리 둘 다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나는 믿소.”
모승호는 만족스럽게 가경통보로 은화 2만 냥을 내어 놓았다. 은화 2만 냥이라면 황성부 내에 거대한 석축 건물을 세 채는 세우고도 남을 돈이었으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모승호의 자금 지원까지 받은 조계응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자금이란 것은 많을수록 상업적인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는 것이다. 조계응에게는 모승호의 자금 지원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이 조금 더 늘어난 것이었다.
우기(雨期)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가을이 되자 조계응은 함대의 뱃머리를 인도를 향해 돌렸다. 우선의 목적지는 페르시아의 호르무즈였다.
1465년
페르시아력(曆) 843년 맹동(孟冬)
티무르조(朝) 페르시아 호르무즈.
서방으로 가는 상단이 대부분이 최종 목적지로 삼는 곳은 여전히 호르무즈였다.
호르무즈는 여전히 페르시아 전역과 중앙아시아 내륙까지 뻗어 있는 티무르조(朝)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티무르와 샤로흐 이래 여러 차례 군주가 이어져 지금의 티무르조는 아부 사이드(Abn Saod)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부 사이드의 정식 이름은 아부사이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미란샤 이븐 티무르(Abr Saqd b. Musammad b. Murvnshwh b. Timxr)로, 즉 티무르의 증손자(曾孫子)였다.
그의 주요 관심은 북쪽의 투르코만인들과의 싸움에 있었고, 호르무즈는 역대 티무르 군주들이 그랬듯이 여러 수입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약속된 세폐의 납입 정도에 만족했으며, 대한제국의 상인들을 그저 동방의 사치품을 가져다주고 적절히 돈을 바치는 유용한 자원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러한 정도의 관심은 나상의 상인들에게는 충분히 이득이었다.
특별한 제재 없이 나상의 호르무즈 상관은 규모가 갈수록 커져 갔고, 이제는 소규모 거류지를 포함한 3백여 명이 상주하는 일종의 거점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이 3백여 명은 나상뿐만이 아니라 경상, 송상, 내상 등의 상단 인원을 포함하면 두 배인 6백 명까지 늘어나는 숫자가 되었다.
이들 상단들은 나상을 중심으로 호르무즈 외항(外港)에 각기 창고와 상단을 열어 두고 있었고, 수십 년에 걸쳐 확립된 호르무즈 태수(太守)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티무르조 전체와의 안정된 우호 관계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계응이 도착했을 무렵의 호르무즈 정세는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역 상단은 호르무즈 항에서 발이 묶인 채 출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호르무즈 항의 조선인들은 수심이 짙은 얼굴로 조계응을 맞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조계응이 나상의 호르무즈 상관을 책임지고 있는 행수 김회(金回)에게 물었다.
“호르무즈 태수(太守)가 티무르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는 내륙으로 가는 모든 상행을 거부하고 아부 사이드에게 가는 세폐를 끊었습니다.”
“호르무즈 태수는 아부 사이드의 신하가 아니었습니까? 티무르조에 의해 유임된 태수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조계응의 물음에 김회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복잡합니다. 아부 사이드는 지금 티무르조 전역을 장악하고 헤라트와 사마르칸트 양 도시의 군주(君主)로 군림하고 있지만, 사실상 샤로흐 이래 티무르조는 여러 후손들에게 갈라져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의 태수(太守)는 원래 이곳 호르무즈를 중심으로 해협의 양안(兩岸)을 지배하고 있던 호르무즈 왕국의 후손입니다. 바호디르 님의 친척이었던 옛 태수 라술 또한 이 핏줄을 이어받고 있었지요. 그 다음 대를 이은 멜릭 파흐르 에딘 투란샤(Melik Fakhr Eddin Touranschah) 태수는 라술 태수의 오촌 종형제로, 다음 대의 태수를 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본토의 티무르 군주들과 삐걱대기 시작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멜릭 태수의 아들인 자만샤(Jamanschah)가 태수의 자리에 올라 호르무즈 왕조의 복원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본토의 아부 사이드는 북쪽의 투르코만인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이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고, 자만샤는 티무르조가 쇠락해 가고 있다고 판단해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상황이 복잡하군요. 그래서 지금 나상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우선은 페르시아 내륙으로 가는 상행은 일절 중지하고 이 사태와는 상관이 없는 카라 코윤루의 바스라로 가는 선박만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장기화되면 타격을 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조계응은 잠시 호르무즈에 함대를 묶어 둔 다음 생각에 잠겼다. 상인들은 정치적 상황에 상당히 민감하게 마련이다. 뜻하지 않게 외부적 요인에 의해 상행이 중지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이것은 막대한 손실로 이어지곤 했다.
아직까지 호르무즈의 사태는 급변하지도 않고 당장 손해가 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장기적으로 간다면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계응의 이번 목표는 우선 홍해(紅海)를 통해 이집트 연안에 접선하여 알렉산드리아로 무역로를 직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을 재검토할 필요가 생겼다. 바로 호르무즈의 불안정성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무역 창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기반이 쌓여 있는 호르무즈를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외부적 요인에 흔들리지 않는 항구가 필요하긴 했다.
“혹시 호르무즈 상관에 비축해 둔 무기류가 있습니까?”
“자만샤 태수가 상인들의 무장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하지만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해 둔 선박에 일부 총포가 실려 있습니다. 카라 코윤루에 팔 무기들입니다.”
조계응의 물음에 김회가 대답했다.
조계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김회에게 슬쩍 다가가 귓전에 대고 말한다.
“그 무기들을 좀 빌려 주셔야겠습니다.”
조계응의 말에 김회는 깜짝 놀라 손사래 친다.
“안 됩니다. 카라 코윤루의 술탄에게 인도하기로 한 날짜가 촉박합니다.”
“가급적 멀쩡한 상태로 돌려 드리겠소. 그리고 혹여 인도에 차질이 있거든, 이 은화로 카라 코윤루의 술탄에게 배상하시오.”
조계응은 김회에게 모승호에게 투자받은 가경통보 2만 냥을 내어 놓았다. 김회는 그제야 목소리를 죽이며 조계응에게 살며시 물어 온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무기를 쓰려고 하십니까?”
“장기적으로 이 호르무즈에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소. 새로운 무역항을 개척할 생각이오. 다만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외부 세력이 쉽게 손을 쓸 수 없는 곳이면 하는데, 좋은 곳이 있소?”
조계응의 물음에 김회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한 군데 있습니다.”
그렇게 목표로 선택된 곳은 홍해(紅海)의 입구에서 조금 나아간 곳에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마주하고 인도양에 떠 있는 섬인 소코트라였다.
소코트라는 디소쿠리두(Disokouridou)라는 이름으로 1세기 그리스 문한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드비파 수카다라(Divipa Sukadhara)에서 온 것으로 보여진다.
거의가 이슬람화된 인도양 서안(西岸)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소코트라는 전승에 따르면 서기 52년, 성 도마에 의해 기독교가 이곳에 전래된 이래로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소코트라의 기독교 신앙은 정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예전 동로마제국의 전성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의 영향권 아래에 있기도 했었다.
이 소코트라는 예멘 지역의 이슬람 술탄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가 방기(放棄)되었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어떤 술탄도 장기적으로 이곳에 제대로 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없었다.
소코트라는 일종의 무역 거점이자 해적들의 기항지로서 악명이 높았는데, 그마저도 15세기에 들어서는 시들해지고 있었다.
조계응의 함대가 소코트라에 내항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소코트라는 섬의 토호들에 의해 예멘에 세폐를 지불하며 지배되고 있었고, 이들의 방어력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주요한 무역 거점이기는 했지만 이곳에서의 무역은 불안정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계응은 포격전을 시작으로 소코트라 섬에 4백 명의 선원들을 보총으로 무장시켜 상륙시킨 뒤, 섬의 수읍(首邑)인 수크(Suq)를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소코트라는 크게 두 개의 섬과 두 개의 바위 암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조계응은 이들 전역을 손쉽게 장악하고 이곳에 1백여 명의 선원을 주둔시킨 다음, 나상(羅商)의 상단령(商團領)으로 선포했다.
명목상 이 영토는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헌납되었지만, 실질상 점령 당시부터 나상의 상단이 점유한 영토였고, 이곳의 통치는 나상에서 파견한 행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계응은 이곳 소코트라에 1년간 머무르면서 주변 지역을 항해 탐사하는 한편, 이곳에 상관을 세우고, 이곳 주민들이 정교도 신자라는 점을 알고서는, 특별히 심양 대주교 알렉시오스에게 수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1년이 지나 파견된 두 명의 수사는 한 명은 동로마 유민 출신이었고, 한 명은 조선인이었는데, 이들은 소코트라에 정착하여 기존의 전례를 정비하고, 소코트라에 주교좌(主敎座)를 설치하여 심양 대주교구에 편입시켰다.
다행히 무역 거점만을 원할 뿐 정치적인 압박을 원치 않았던 나상의 소코트라 점령은 주민들의 저항과 맞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소코트라에는 정식으로 숙주도(宿州島)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나상의 행수(行首) 한 명이 숙주어행수(宿州禦行首)라는 직함으로 이곳에 부임하여 행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관행적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조계응은 소코트라를 정비한 이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여 잔지바르(Zanzibar)에 다다라 이곳의 무슬림들과 거래를 열고 상관(商館)을 설치했다.
그 다음에 다시 북상하여 소코트라로 회항한 뒤에 홍해로 들어서, 마사와(Massawa) 항구를 거쳐 북상을 계속해 사와킨(Sawakin) 항구를 통해 맘루크조 관리들과 접촉했다.
사와킨 항구에 상관(商館)을 개설한 조계응은 이곳에서 육로를 통해 나일강으로 들어가 알렉산드리아로 나가는 무역로를 탐지하고, 이곳에 이미 들어와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과 교섭해 교역로 개척을 시도했다.
이것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고, 소코트라에서 출항을 할 경우 사와킨항에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상품을 부정기적이지만, 연중 10회 정도 하역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계응은 맘루크 술탄의 허가하에 1468년 알렉산드리아항(港)에 정식으로 상관을 개설한다.
이곳에 상주시킨 직원은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현지 이집트인을 고용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 상인들과 교섭하게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호르무즈―바스라―바그다드―알렉산드리아를 통하는 하나의 루트와 소코트라(숙주, 宿州)―마사와―사와킨―알렉산드리아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여 확보함으로서 나상은 정치적인 요인으로 상행이 중지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469년
이슬람력(曆) 874년 맹동(孟冬)
맘루크 술탄국 알렉산드리아.
빈첸초 모나텔리(Vincenzo Monatelli)는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베네치아와 베네치아령 칸디아(Candia), 즉, 크레테 섬을 오고 가는 무역에 종사하며 적지 않은 부를 모았다.
그는 그러나 이내 직접 무역업을 하는 것을 그만두고 서른둘의 나이에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그곳의 베네치아 공관(公館)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체류하던 중에, 나상의 조계응이 홍해로부터 들어와 알렉산드리아에 상관(商館)을 설치했고, 빈첸초 모나텔리는 조계응과 접촉해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상관을 세우는 일에 도움을 준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 이국적인 동방의 상인들이 먼 바다를 배를 몰아 왔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베네치아는 점진하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동지중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주요 무역항이 모두 이슬람의 세력권에 위치한 만큼 무역선을 지키는 것이 갈수록 쉽지 않게 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공관도 맘루크 술탄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고 폐쇄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든든한 무역 상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나 소득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꽤나 박학다식한 사람이었고, 한학정에 의해 옮겨진 논어(論語)를 읽은 적도 있었다. 그는 최근 근동(近東)을 통해 들어오는 동방의 물품이 거의 요안네스 안노스, 즉, 한학정의 출신지인 코레아(Corea)에서 무역 선단에 의해 팔려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경쟁국인 제노바의 상인 페드로 알부아니가 이들 코레아 상인들과 근동에서 접촉하고 있는 사실은 베네치아의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차에 자신이 체류하던 알렉산드리아에 나상이 2년마다 한 번 보내오던 무역 상행을 확대해 아주 상관을 설치하겠다고 나섰으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공관(公館)에 있는 빈첸초 모나텔리라고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앞으로 저희 공화국과도 지속적인 거래를 틀 수 있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조계응이 상단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오자마자 직접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조계응과 빈첸초 모나텔리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섞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조계응은 그리스어가 짧은 반면 아랍어가 유창했고, 빈첸초 모나텔리는 그리스어는 유창한 반면에 아랍어가 짧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을 확인하자, 빈첸초 모나텔리는 본격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나상이 상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맘루크 술탄과의 접견을 성사시켜 준 후에, 이것을 빚으로 삼아 조계응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는 아니었지요?”
“예. 우리는 전통적인 유교의 교범(敎範)만을 받들 뿐, 신들을 잘 섬기지 않습니다.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방에서는 불교 신자가 꽤 되지요. 동방 정교회의 수사가 여러 해 전에 입국하여 북쪽 도시에 교당(敎堂)을 세웠습니다. 그곳에 동로마 출신의 망명객들이 여럿 기숙하며 학문을 강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그곳까지 가 있다구요? 정말입니까?”
“예. 일전 이곳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저희 상단의 귀국길에 동행하여 들어갔습니다. 좋은 보살핌과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거 놀라운 일이군요.”
빈첸초 모나텔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사건은 큰 동요를 일으켰었다.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어떤 적절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무너진 제국의 종말은 예견된 일이긴 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후계자가 결국 최후의 문을 닫고, 이로서 동방의 기독교 제국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은 많았다. 빈첸초 모나텔리도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때문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베네치아로 망명한 동로마 제국 출신의 학자들과 교분을 지속적으로 맺고 있었고, 그리스어도 유창하게 익혔다.
“이제 귀국길에 오르십니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모국을 떠나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 이제는 귀환을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조계응이 귀국길에 오른다는 말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다.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나상의 상단을 따라간다면 충분히 동쪽 끝까지 다녀온 뒤 귀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빈첸초 모나텔리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출신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을 견문한 뒤에 희대의 저술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그 뒤로 동방의 끝까지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그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제2의 마르코 폴로가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저도 귀국길에 동행했으면 합니다. 부디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제가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저희가 귀공이 안전하게 동쪽 끝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살펴 드리겠습니다. 짧으면 갔다가 돌아오시는 길이 2년이면 충분할 것이고, 늦어진다면 다섯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빈첸초 모나텔리의 요청을 결국 조계응은 수락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다음 날 바로 자신이 근무하던 주(駐) 알렉산드리아 베네치아 공관의 공관장에게 이러한 기회를 갖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공화국 정부에서 인증하는 신분 증명을 발급받은 뒤에 그의 여행을 보고서로 묶어 공화국 정부에 제출하는 조건으로 500 두카트의 여행비를 받았다.
그가 받은 오백 두카트의 여비는 알렉산드리아의 나상 상관에서 가경통보로 환전했다. 이곳을 떠나면 서유럽과 지중해에서 통용되는 두카트를 환전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나상에서는 다행히 두카트를 정확히 계량하여 가경통보로 환전해 주었고, 환전해 손에 쥔 가경통보는 정확히 420냥이었다.
“여행하시는 중에 크게 경비를 지출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가 모쪼록 성심껏 돌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계응의 약속은 믿을 만한 것이었다.
나상의 상인들은 빈첸초 모나텔리를 성심껏 돌봐 주었다. 그는 여행을 하는 동안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홍해에 나가서 나상의 선박으로 옮겨 탄 뒤에 이들은 소코트라, 즉, 숙주로 배를 항해해 갔다.
소코트라가 나상에 의해 점령된 사실을 알고서 빈첸초 모나텔리는 적잖이 놀랐다.
“이곳에 근거지를 확보하셨단 말입니까? 예멘의 술탄이 질겁하고 덤벼들까 걱정입니다.”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에 요새를 정비하고 있을 뿐더러, 내년부터는 상단에서 퇴역 군인을 고용해 이곳에 경비단을 꾸리고 총포로 방비할 생각입니다.”
조계응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소코트라로 오게 될 용병들은 마자파히트에서 용병대를 운영한 전력이 있는 모승호가 모집해 주기로 서찰로 연락이 되었다.
모승호는 지금쯤, 마자파히트로 용병 노릇을 하러 온 퇴역 군인이나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소코트라로 갈 것을 제안하고 있을 터였다.
봄이 되자, 우기를 피해 재빨리 소코트라를 출항한 나상의 함대는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을 따라 항해해 호르무즈에 기항(寄港)했다.
그동안 티무르조의 영향력은 호르무즈에서 급격히 감퇴했고, 스스로 술탄을 자처한 호르무즈의 태수 자만샤는 중요한 수입원인 나상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무역로를 돌봐주고 있었다.
비록 페르시아 내륙으로 가는 무역로는 단절되었지만, 대신에 카라 코윤루와의 무역관계는 더욱 확대되었고, 이듬해에는 바그다드에도 상관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빠짐없이 보고서에 기록해 나갔다. 앞으로 베네치아의 동방 무역은 이들 코레아니(Coreani, 韓國人)에 의해 좌우될 것이 분명했다.
인도를 거쳐서 함대는 상남(湘南)으로 나아갔다.
우기가 찾아와 여름철 인도에서 한참을 머무른 탓에, 상남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바뀌어 1470년으로 접어들었다.
상남의 거류지는 번창하고 있었다. 처음 단순한 요새항으로서 출발했던 이곳은, 지금은 인구가 물경 10만에 가까운 거항(巨港)으로 거듭나 있었다.
육상 병력인 상남파견대에 이어, 1456년에는 원양 전단 휘하의 해군 상남 전대가 설치되었고, 상남 전대의 전함들은 믈라카 해협의 항로를 감시하며 무역선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상남의 항만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항구에 면한 곳에는 십수 개의 상단 지부들이 제각기 건물을 올리며 경쟁하고 있었다.
나상의 주선으로 빈첸초 모나텔리는 상남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여각(旅閣)인 안동여숙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안동여숙은 1대 주인인 소만식이 스무 해 전 세상을 뜬 이래로, 그의 맏손녀와 그 남편인 천정욱이 경영하고 있었다.
천정욱은 호상의 남양 무역에 관여하여 남쪽 섬들을 여러 차례 탐방한 뒤, 귀국하여 『남양도해록』을 집필했었다. 이후 십 년간 황성부에서 머물며 저술 활동을 하다가 아버지 천안석이 군문에서 은퇴한 뒤 작고하자, 이내 가산을 정리해 상남으로 돌아와 안동여숙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제는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이 상인 겸 여행가인 천정욱에게서 빈첸초 모나텔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 또한 상인이면서 여행가의 몸으로 지금 머나먼 바다를 건너오고 있지 않았던가.
이내 두 사람은 손쉽게 의기투합했다.
여행 중 조선말이 부쩍 는 빈첸초 모나텔리는 천정욱과의 대화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어 갈 수 있었다.
“이 남쪽으로도 섬들이 많단 말입니까?”
“마자파히트 왕국이라는 나라가 있소. 이 남쪽 바다로는 수천 개의 섬들이 떠 있는데, 이 마자파히트의 옛 선조들이 그 섬들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웠소이다. 지금은 국운이 쇠락하여 각 섬의 토호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나, 여전히 자바(Java) 섬을 중심으로 한 왕국의 중심부는 번영하던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소. 그대가 몸을 기탁해 온 나상과는 또 다른 상단인 호상이 그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소이다.”
천정욱의 말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商)이라는 말이 상인, 상단, 상업 등을 총칭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 앞에 말이 붙어 나상이니, 송상이니, 경상이니, 호상이니 하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상단의 이름입니까?”
“대체적으로 아조(我朝)의 상단들은 지역적인 연고를 지니고 있소. 가장 큰 나상(羅商)은 탐라라고 불리는 섬을 근거지로 하였기에 나상이라고 하고, 경상은 황성에 근원을 두고 있어 경상이라 하지요. 경(京)이라는 것은 서울, 즉, 도읍을 말하는 것이오. 호상(湖商)은 공주(公州)라는 도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이 공주가 호서(湖西) 지방의 수부(首府)이므로 호상이라 하오. 이런 식으로 지역적 연고에 따라 그 상단의 이름이 붙는 것이 관습이오이다.”
천정욱의 말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조국인 베네치아도 근처에 이웃한 여러 도시들과 경쟁적으로 무역을 펼쳐 왔습니다. 크게는 제노바라는 경쟁 도시가 있고, 아말피, 피사 같은 고만고만한 도시들도 있었지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여기 상남에 머물며 오고 가는 객들만 바라보고 있소만, 그대처럼 다시 젊은 나이가 된다면 멀리 서쪽까지도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 같구려. 조금만 젊었다면 그대가 돌아가는 길을 따라 그대가 말한 나라들을 찾아가 보았으련만.”
천정욱과의 만남을 통해 빈첸초 모나텔리는 남쪽 바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천정욱을 비롯한 상남에 기항하는 상인과 용병들을 찾아 다니며, 마자파히트 왕국을 비롯한 남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지식을 얻어 듣고서는 견문록에 적어 나갔다.
1470년의 봄이 무르익을 무렵, 나상의 함대는 다시 상남을 떠나 북쪽으로 올라갔다. 대월국(大越國)을 거쳐, 순항한 함대는 명나라 영파에 들러 거래를 하고 물품을 조달 받은 뒤, 목포항을 향해 떠났다.
배가 목포에 기항한 것은 1470년 음 4월 6일의 일이었다.
조계응은 이곳에서 나상의 상인들에게 항해의 성과를 보고하였고, 총 4만2천 냥의 수입을 남긴 것을 정산했다.
비록 수 년에 걸친 항해이긴 했지만, 단일 항해로 이 정도의 수입을 걷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통 한 번 페르시아로 향하는 함대가 벌어 오는 수익이 대략 4천 냥에서 8천 냥 사이였다. 그런데 그 수 배에 달하는 수익을 남겨 왔으니, 나상의 상인들로서는 조계응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상의 행수회(行首會)를 견학한 뒤, 조계응이 알선한 나상 출신의 상인과 함께 빈첸초 모나텔리는 북쪽으로 향했다.
공주까지 이어져 있던 호서가도는 이미 목포까지 연장되어 서해가도(西海街道)라 불리고 있었고, 목포에서 황성부까지 이미 역마차가 운행을 시작한 뒤였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 잘 정비된 가도 위로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역마차를 인상 깊게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모크포이움(Mokpoium, 목포)는 제국의 남서쪽 끝에 있는 항구이다. 인구는 3만 명 정도로, 이곳 해안 맞은편 200리그 밖에 예윰(Jejum, 제주) 항구가 있다. 예윰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왕가(王家)의 발원지이다. 가장 강대한 상단인 나상(Collegias Jejus)또한 이곳에서 기원했다. 모크포이움에서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세울룸(Seulum), 즉 황성부(Urbus Imperii)까지는 잘 정비된 도로가 닦여 있다. 도로는 잘 쪼개진 반듯한 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마치 로마 제국 시대의 도로를 연상하게 한다. 이 도로는 호남(Lacus Auster, 湖南) 지역을 관통하여 호서(Lacus Occidens, 湖西) 지역의 도읍인 코니움(Conium, 공주)을 지나간다. 코니움은 호상(Collegias Lacus)의 근거지이다. 이곳에는 호서 지방을 감독하는 총독(관찰사)이 기거하며, 2만의 군병이 주둔해 있다. 이들은 잘 훈련되어 있어 수십 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즉시에 진압했다고 한다. 코니움에서부터 길의 사정은 더욱 좋아진다. 모크포이움에서 코니움을 거쳐, 세울룸까지는 매일 두 차례 역마차가 출발하는데, 사이사이에 있는 역참(驛站)에서 지친 말을 바꿔 달린다. 가급적이면 정기적인 시간에 각 도시에 정지하도록 되어 있는데, 가도 중앙으로 역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기에 더욱 빠른 속도로 내달릴 수 있다. 호서 지방의 북쪽에 있는 곳이 바로 경기(Regio Capitis, 京畿) 지역이다. 이곳의 중심부에 바로 제국의 수도인 세울룸(Seulum, 서울)이 위치한다. 도읍을 둘러싸고 거대한 하천인 하누스(Hanus, 漢)강이 흐른다. 이 강의 가장 좁은 지점에 열두 해 전에 가교(架橋)가 건설되어 도로가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세울룸의 인구는 40만이며, 이것은 베네치아의 두 배, 로마의 네 배에 가까운 숫자이다……(후략)…….」
빈첸초 모나텔리는 황성부에 도착한 뒤, 원했던 제국의 황제인 가경제를 알현할 기회는 얻지 못했으나, 모나텔리의 표현에 따르면 심니움의 왕(Rex Simnius, 심왕)이자 제국 원로원(Senatus)의 집정관(Consul, 執政官)인 현도를 접견할 수 있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당초 이곳에서 멈추려던 여행을 계속하여 서북가도를 따라 평양, 의주를 거쳐 심양에까지 이른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시오스 대주교를 비롯한 그리스 유민들을 마주하고서는 눈물을 흘렸다.
“먼 곳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곳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빈첸초 모나텔리의 말에 그리스 학자들은 모두 고국을 생각하며 잠시간 침묵에 빠져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 사람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베네치아 사람들은 동로마제국 전체에 널리 퍼져 상업에 종사하며, 제국의 경제를 뒤흔들었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도 아주 어릴 적 콘스탄티노 폴리스에 아버지를 따라 입항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곳까지 베네치아 사람이 올 줄은 몰랐소. 그대들은 가지 않는 곳이 없구려.”
이제는 나이가 들어 흰 수염이 가득한 알렉시오스 대주교의 말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수긍했다.
베네치아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런 동쪽 끝까지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 그리스 사람들은 보다 먼저 이 땅을 밟아 정착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베네치아로 귀국하게 되면 여러분의 고귀한 삶에 대해 글을 꼭 남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혹여 그리스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전달할 서간이 있다면 제 편으로 부탁하십시오. 시일이 걸리더라도 꼭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빈첸초 모나텔리의 호의를 그리스인들은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어로 빼곡하게 쓴 편지를 한가득 모아 모나텔리에게 전했다. 모나텔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여 잘 간추렸다.
심왕세자로서, 지금 요동을 통치하고 있는 서윤과 접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나텔리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 왕자는 당당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현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모나텔리는 서윤이 그리스어로 그를 반기자 놀라서 그만 예의를 차리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리스어로 말하니 놀라셨나 보구려. 천천히 심양을 구경하고 꼭 귀국해서 이곳의 풍물에 대해 적어서 그대의 동포들에게 전해 주시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윤이 남긴 인상은 빈첸초 모나텔리가 만난 어떤 조선인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곳의 심양대학에서 1년간 체류하며 라틴어와 베네치아 방언(Veneto)을 강의하고, 휴대하던 단테(Dante)의 신곡(神曲)도 강해했다.
심양의 관료 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맺으며 충분히 심신의 휴식을 취한 뒤에 빈첸초 모나텔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평범한 길을 택하지 않고 동녕부에서 건주부를 거친 다음에, 최근에 개척된 임도(林道)를 따라 영명진으로 향했다.
백두산 아래의 울창한 산림 사이로 좁게 나 있는 이 임도는 분명히 위험하고 안전하지 못한 길이었지만, 다행히 빈첸초 모나텔리는 서윤이 내어 준 호위병 몇 명의 도움으로 영명진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다.
북쪽 변방의 개척지를 견식한 뒤에 모나텔리는 함주를 거쳐 춘천을 통해 다시 황성부로 들어섰다.
이번의 귀항로는 예성부 벽란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벽란도에 와 있던 조계응을 만나 그간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귀국을 위한 선박을 알선받았다.
벽란도를 출항해 목포와 제주를 거쳐 다시 호르무즈로 향하는 선박이 모나텔리를 태우고 출항한 것은 1472년 음 3월의 일이었다.
다시 항로를 더듬어 호르무즈에 다다른 빈첸초 모나텔리는 이곳에서 다시 소코트라로 가는 용병들을 태운 함선에 동승해 소코트라로 건너간 다음, 그곳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상행이 출발하길 기다렸다가 음 12월에 상인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했다.
빈첸초 모나텔리가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온 것은 1473년 1월의 일이었다. 1469년 말에 여행을 출발했으니, 꼬박 만 3년이 조금 넘는 기행이었다.
빈첸초 모나텔리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네치아 공관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보고하고서, 그간 써 둔 견문록을 포함한 보고서를 써서 베네치아 본국의 의회에 송부하였다.
베네치아 정부는 이를 면밀히 검토한 뒤에, 다섯 해가 지난 뒤 견문록을 빈첸초 모나텔리가 개인적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권리를 인허해 주었다.
그동안 모나텔리는 원고를 갈고 담아 1482년 3월, 베네치아에서 라틴어로 쓴 기행문을 출간하니, 바로 《조선기행 Itinerarium Coreae》이다.
책은 출판된 직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내 이탈리아 속어(俗語), 프로방스어, 카탈루냐어, 스페인어, 영어로 번역 출간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서아프리카 해안의 포르투갈 상업 기지인 엘미나(Elmina)와 리스본을 오가는 탐험대에 끼어들어 개인적인 무역에 종사하는 동시에 리스본에서 동생과 함께 지도 제작소를 경영하고 있던 제노바 출신의 모험가 기질이 다분한 상인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는 이 모나텔리의 《조선기행》의 애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책은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내 1485년 그의 사업을 정리하고, 리스본으로 가서 포르투갈 국왕에게 서쪽으로 가면 중국과 조선, 인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Joyo II)는 아프리카 남단을 선회(旋回)하는 항로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이를 허황된 소리로 치부하고 거절한다.
이 모험가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