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요동천리(遼東千里)
「중세적 구조를 넘어서 근세(近世)로 접어든 당대 한국과 아직 봉건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명과의 일전은 단순히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구질서와 신질서 사이의 충돌의 서막이었다. 이보다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을유전역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단순히 약간의 기술 우위를 점한 조선군이 약간의 열세에 처해 있던 명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전쟁은 단순히 기술 우위가 아니라 병력의 운용 방면에서도 확실하게 체계화되기 시작한 대한제국의 압도적 승리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시의 명나라 조정으로서는 한국군의 막강한 화력을 체감하였지만, 그 이면에 있는 사회적인 구조 변화의 수반을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단순히 총포의 질과 사거리에서 그 힘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혁이 대한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였다.」
―최명길(崔鳴吉),
학도(學徒)를 위한 국사소편(國史小編)
1438년
명(明) 정통(正統) 원년 계춘(季春)
대명국 산동성(山東省) 요동도사 직하(直下) 요양성(遼陽城).
봄도 이제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한겨울에 시작된 평원에서의 전투는 이제 치열하기 짝이 없는 공성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요양성의 명군은 생각 외로 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군은 전력으로 이들을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적인 병력의 접근을 통한 공성을 자제하고 화포의 사격으로 성벽을 흔드는 방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요양성을 허물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내의 극심한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미 요양성 사방에 보급선마다 병력을 주둔시켜 본국의 지원을 일절 받지 못하게 하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끊어 혼란을 극대화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춘궁기에 접어들어 들판에서 나락 하나 건지기 힘든 상황이었다.
의주와 건주위를 거쳐 들어오는 안정된 보급로를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군과 성내의 양식이 거의 바닥나고 물조차 구하기 힘든 명군의 상황은 철저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유 있게 포격전을 전개하며 동시에 요동도사 휘하의 위진들을 토평하고, 이미 군정(軍政)을 실시하기 시작한 제국군은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다.
물론 광활한 대륙이 아니라, 요동이라는 제한된 곳에서 치러지는 전투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여전히 요동도사의 휘하 위소이자, 산해관의 입구로 그 방비를 맡고 있는 금주위는 건재했고, 장성을 넘지 못하게 산해관의 방어가 한층 강화되고 있을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성의 조정에서 내려온 훈령은 확전을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대한제국의 국력으로 명나라 전체를 상대하는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기 힘들었다.
다만 어차피 원해서 시작한 전쟁이 아니라 명나라의 공격으로 시작된 것이니, 적어도 요동은 완전히 점거하고 북경을 압박해 매우 유리한 강화를 맺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언제든 병력 증원을 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이미 평양의 제10진위대와 영녕의 제18진위대가 이를 위해 의주에 도달해 대기하고 있었다. 언제고 상황이 위험해지면 압록강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정식은 본국의 훈령에 따라 이를 이미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요양성의 성곽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 안에는 역병까지 돌고 있는 듯했다.
결국 요동총병관 당염무는 휘하 배장들을 불러 모아 놓고 최후의 결단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병력의 반 이상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고 성중에는 기근과 역병이 돌아 군마를 잡아서 그 고기를 회쳐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북경과는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으니 이제는 결심할 수밖에 없다.”
결심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투항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당염무 자신도 그 조상이 요나라 때의 거란족 귀족 가문에 닿아 있는 자로서, 그 조부는 원나라 조정에 봉사하던 사람이었다.
이렇듯 요동의 정세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그 호적을 바꾸기를 거듭하는 것이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당염무도 북경에 대한 충심으로 분사(憤死)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장 그 자신부터 배를 굶고 목이 타는 상황이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성문을 열고 투항할 의사를 전해라.”
이렇게 요양성의 성문이 결국 열린 것이 1438년 음력 3월 3일의 일이었다.
제국군은 요양성을 점령하고 군기(軍旗)와 황제의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이 수놓아진 깃발을 나란히 요양성 문루에 걸었다.
금주위를 제외하고는 요동 전역이 제국군의 점령하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분전하느라 고로가 많으셨소. 더 이상 싸우지 않고 귀부(歸附)하셨으니 조정에서 마땅한 훈작을 내릴 것이오.”
서정식이 복잡한 마음으로 침식을 잊은 당염무를 달랬다.
당염무의 성성한 흑발은 며칠 사이에 새치가 돋아 있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힘들다 판단해 성을 내어 주고 항복해 귀부하기를 청한 처지였으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용히 은둔할 집과 부쳐 먹을 밭뙈기 정도만 선처해 주길 바랄 뿐이오. 나라를 저버린 패장이 무에 할 말이 더 있겠소이까.”
요양성에 둔지를 확보하고 주둔한 제국군은 이내 압록강을 건너온 제10진위대와 제18진위대에 요동 전역의 방비를 맡기고 군세를 다시 몰아 금주위를 들이치기 시작했다.
4만 병력이 주둔해 있던 금주위였으나 지휘동지 성등(成登)은 결국 전투를 포기하고 금주위에서 퇴각해 산해관의 병력과 합류하고 말았다.
3월 20일에 이르러서는 결국 남으로는 여순구에서 북으로는 개원(開原)에 이르고, 동으로는 압록강에서 서로는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요동 전역이 제국군에 의해 평정되게 되었다.
산동에서 해로로 급파되어 여순구로 들어오려던 명군 병력은 해군 서해함대 관서전단의 차단으로 결국 상륙하는 데에 실패하고 큰 손실을 내고야 말았다.
결국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 채 명은 요동 전역을 손에서 잃고 만 것이다.
거기다가 북경이 지척인 산해관 앞에 제국군이 집결하여 관문을 부수려 들고 있으니, 북경의 명 조정은 결국 식겁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리해서 산해관을 넘을 필요는 없다. 우리 병력이 아직 5만에 이르고, 총포로 멀찍이서 관문을 두들기기만 하면 된다. 최대한 병력의 손실을 줄이고 적을 압박하도록 하라.”
서정식의 일사분란한 지휘 아래에 아침부터 밤까지 제국군은 포를 쏘며 산해관의 장성(長城)을 두드려 댔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발해(渤海)에 면해 있는 협소한 육로를 막고 서 있는 관문이었다.
이곳에서 북경은 이백 리 길 안으로, 이곳이 뚫리게 되면 북경이 바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가 들어서고 다시 개축하기 시작한 장성의 방비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산해관에 급파된 병력의 기강도 해이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산해관의 성벽은 무너지고 병력은 탈주하며,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져들어 갔다.
조선군은 수비의 우위를 점할 수는 있었으나 확전이 되어 수렁과도 같은 명나라 내륙으로 들어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가만히 목을 죄듯이 점차 압박해 가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산해관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북경에서는 결단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각 수보, 즉, 재상으로서 강화 협상의 책임을 맡은 양사기와 부사(副使)의 자격으로 양영이 북경을 출발해 산해관에 이르러 강화를 제의하는 전갈을 보냈다.
“뜻하던 바대로 되었다.”
명군의 강화를 제의하는 통첩을 받아 든 서정식 참장은 미소를 지었다.
서정식은 전선 지휘관의 권한으로 우선은 교전을 중지시킨 다음 조정에서 강화 협상을 지휘할 관리를 보내 주길 바란다는 서찰을 보냈다.
황성부에서는 이내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문제가 급하게 논의되었고, 외부대신 이예(李藝)를 정사(正使)로 하는 강화 협상단이 곧 황성부에서 출발하여 요동으로 향했다.
협상장은 요양성이 아닌 산해관에 마련되었는데, 심리적인 압박을 지속하기 위해 명군이 아직 점유하고 있는 곳에서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선 것이다.
이렇게 대한제국 측에서는 외부대신 이예, 대명제국 측에서는 내각 수보 양사기를 각각 대표로 하여 산해관의 응빈각(應賓閣)에 화평을 위한 협상 장소가 마련되어 강화 처리에 들어가니, 이것이 1438년 음력 4월 30일의 일이었다.
1438년
흥정 6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호외요, 호외!”
“명나라와 강화!”
광통교 앞의 황성순보 매대에는 호외를 알리는 현란한 전단이 나붙고,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있었다.
특별히 동전 너푼으로 줄인 값에 호외를 다룬 기사를 네 쪽 실어서 내어 놓은 것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곧 이 매대에 놓인 호외(號外)의 신보를 집어 들고 값을 낸 다음 펼쳐 들기 시작했다.
“강화를 약조했다는구만.”
“외부대신 이예가 인물이야, 인물.”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는 신보를 사서 들고 꼼꼼히 읽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 읊어 주는 기사를 귀에 새겨들으며 이 대단한 일의 전말을 먼저 알고자 했다.
아직 관령(官令)으로 이 강화 조약에 대해서 따로 공시된 바가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이 황성순보가 독점적으로 내어 놓은 기사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황성순보에서도 자세한 강화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글을 싣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강화 조약이 성사되었다는 사실만 살짝 언질을 주었을 뿐, 아무런 세부 내용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황성순보에 실린 단편적인 내용을 가치고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심요(瀋遼)가 혹시 우리 땅이 되는 것은 아녀?”
“그거야 뭐 좋은 일일까 싶네. 땅이 넓어지면 또 세금이 늘어나겠지.”
“우리 아들내미도 지금 병졸로 평안도에 있어서 지금쯤 요동에 들어간 건 아닌가 모르겠네. 강화된다믄야 좋은 일이지만서두, 이거 병역을 늘리는건 혹여 아닌가 모르겄어?”
“그야 그렇지만, 나라가 이렇게 융성하니 우리 같은 장사치들도 덕을 봅니다. 한동안 이 명나라가 영파랑 동녕관에서 훼방들을 놓는 바람에 물건이 나가는 것이 영 시원찮았는데, 이제 우리가 승전했으니 명나라에서 우리 산품을 살 수밖에 없잖겠어요?”
“그나저나 자꾸 시원찮은 땅이 넓어져서 뭐 좋을 것 있나 싶네. 아직 여기 황성부야 어디 견줄 데 없이 번화하지만, 사실 평양만 가도 고려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야.”
“님자레, 거, 오데 가서 그런 멍충한 말 나불대고 다니지 마쇼. 내레 뭐 피양 사람이지만서두, 이 제국이 들어서고 났을 때를 생각해 보믄 뎐조와는 확연이 다르오. 피양에도 이 신보라는 놈이 들어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포목(布木), 물산(物産) 어디 하나 떨어지는 것 없으니끼니. 류상(柳商)이 피양 성중에 짓고 있는 석축(石築)만 다섯이 넘소.”
요즘 들어 황성부의 특기할 만한 특색이라 한다면 상대적으로 언로(言路)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원래 왕조국가에서는 함부로 조정의 시책에 대해서 운운(云云)하는 것이 당연히 경계되는 일이었고, 잘못 입이나 붓을 놀렸다가는 멸족의 수순을 밟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간되는 신보들에 대해서 문부(文部)의 검열이 명나라와의 전쟁을 계기로 실행되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지만, 적어도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벽에 몰래 붙이는 벽서(壁書)의 수준을 뛰어넘어 공개적으로 인쇄하여 의견을 담은 소식을 사고 판다는 것 자체가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황권 중심 체제에서 신료들 간의 합의를 통해 정국을 운영하는 체제가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자 특별히 어떤 한 정치적 의견을 맹종하고 강요할 필요가 수그러든 탓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제국은 중세국가를 막 벗어나고 있는 처지였고, 언론의 자유라는 말은 지금 상황에서 등장하기에는 매우 고상한 말이었다.
그저 이렇게 한차례 검열을 거쳐 발간된 신보를 가지고 저잣거리에 모여서 이런저런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덜 조심스럽게 나누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발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저잣거리에서는 황성의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이 황성순보를 놓고 이런저런 추측을 내어 놓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같은 시간 조정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편람(便覽)할 수 있게 실어서 급하게 발간된 공보(公報)를 놓고 대신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미 시전(市廛)의 백성들에게도 황성순보에서 강화 사실을 알려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야, 무에 숨길 것이 있겠소이까. 문부 검열국(檢閱局)에서 이미 확인을 하고 내보낸 내용 아니오.”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이야기는 그게 아니지 않겠소. 앞으로의 우리 대신들을 비롯한 정부 각처(各處)에서 다음의 수순을 밟는 문제가 우선 아니겠소.”
이날 모인 회의는 내각(內閣) 및 추밀원(樞密院)의 합동 각료 회의였다.
경복궁 광화문 바로 좌측에 새로이 석축으로 들어선 추밀원의 의당(義堂)에 모여 앉은 이들은 바로 지금 대한제국을 이끄는 면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단지 단 위의 상석(上席)이 비어 있는 것은 황제가 참관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고, 단 바로 아래의 재상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이것은 세훈의 병환이 위중해져 등청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만, 지금 상공부상서대신인 세훈의 아들 현도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령을 조목이 들고 와 전달을 해 놓은 상황이었다.
이미 이예는 산해관으로 갈 때 명에게서 어떤 것을 얻어야 하고, 어떤 것을 내줄지 조목이 지시받은 대로 가지고 가서 협상에 임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명이 거부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날 늦은 밤 황성에 도착한 장계에 적힌 열흘 전 산해관에서 관인(官印)을 맺은 강화 내용의 조목은 다음과 같았다.
《한명강화장정(韓明講和章程)》
제1조 대명제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권위와 국체(國體)의 엄중함을 인정하고 대등한 우의(友誼)로서 대하도록 한다.
제2조 대한제국의 외부와 대명제국의 외부에서는 각각 관원을 뽑아 상대방 도성에 주재시키도록 한다. 이때의 관등은 대표를 주재정사(駐在正使)라 하고, 나머지의 관등 각품(各品)은 각국의 편의에 따라 정하도록 한다.
제3조 대명제국은 요동도사를 폐지하고, 대한제국의 산해관 이동(以東) 영유를 인정하도록 한다. 산해관에는 특별히 세관(稅關)을 두어 상호 간의 교역을 감시토록 하게 하고, 동녕관은 기존과 같이 무역시로 개방하여 산해관을 넘어오는 명국 상인들이 대한제국의 호조(護照)를 받아 이곳에 입시할 수 있도록 한다. 나머지의 세목은 추후 정하도록 한다.
제4조 대명제국은 이후 대한제국에게 영파, 광주(廣州), 천주(泉州)의 세 항구를 해시(海市)로서 개방하도록 하며, 이곳에 자격을 갖추고 입시를 원하는 대한제국의 상민에 대하여 호조(護照)의 발급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해서는 아니 된다. 기존의 감합(勘合)은 폐지하도록 한다.
제5조 대한제국과 대명제국은 앞으로 영원히 서로의 영토를 노리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서로 간의 우의와 신뢰로 대하도록 한다.
제6조 상호 간의 조공 의례를 영구히 폐지하도록 하며, 앞으로의 관계는 제2조에서 정한 양국의 주재정사를 통해 상대국 외부(外部)와 직접 교섭하도록 한다.
제7조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은 대명제국의 국경 안에서, 대명제국의 신민은 대한제국 국경 안에서 합당한 보호와 권익을 존중받을 것을 약속한다.
제8조 대명제국은 그간의 전란에 대한 전비 보상으로, 향후 10년간 총 3만 관(貫)의 순은을 대한제국 정부에 나누어 지불하도록 한다.
제9조 합의된 사항의 내용은 각국 황제 폐하께 양도되어 옥새를 찍은 시점에서 발효하도록 한다.
대한제국 외무대신 판공사(判公司)
이예
대명제국 내각 수보
양사기
이 내용은 거의 실상 이미 전란이 한창이던 때에 세훈이 기초해서 이예에게 일러 두고, 내각 회의에서 회람시킨 것을 실제 협상장에서 이예가 관철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때에 국가 간의 조약에 장정(章程)이란 단어가 등장했으며, 조목이 조(條)를 나누어 내용을 세분하였고, 여권이라 할 수 있는 호조(護照)의 발급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음으로 인해 근세적인 조약의 효시라고 불릴 만한 작품이었다.
이미 내각에서 협상 이전에 내용이 회람되었기에, 이 체결된 장정의 내용이 대신들에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절차가 완료되었으니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가 부담스러운 문제가 되었다.
“우선은 요동에 진둔시킬 군사부터 문제올시다. 도대체 막막하기가 짝이 없어요. 지금 군부가 감당할 수 있는 병사의 숫자는 지금이 한계요. 이미 많은 진위대가 식량 등은 일부 자급하는 상황이오. 40만에 육박하는 육군 병력을 이 요동을 방비하기 위해서 추가로 늘릴 수는 없다, 이 말이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군부상서대신 고상온이었다.
이제는 그도 늙어서 머리가 희끗해진 나이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전시(戰時)에 돌입하게 되자, 실전 경험이 풍부한 그를 세훈이 청해 다시 조정으로 불러왔다.
일흔을 넘긴 나이였으나, 고상온은 역전 노장으로서 대신의 지위를 맡아 정부 일선에 복직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쭉 군문에 몸담고 은퇴한 뒤에도 여러모로 관심을 쏟아서 지금 대한제국의 신식 군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상대적으로 내륙에 있는 진위대의 편제 병력을 줄여서 새로이 요동군을 편성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상공부상서대신인 현도가 물었다.
“군부에서도 충분히 그 문제를 고려하고 있소. 내 하고 싶은 말은, 더 이상의 병력을 충원하자고 이 자리에서 의결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이오.”
“내부에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막중하고 힘든 군역을 늘릴 경우에는 행정에도 무리가 따를 뿐더러, 민심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내부상서대신 허조(許稠)가 말을 받았다.
“탁지부에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무리하게 병력의 규모를 늘렸다가는 그 자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게 됩니다. 그간 서른 해에 걸쳐 차근차근 병력을 증강해 와 지금에 이른 것을 생각하면, 갑작스러운 대규모의 병력 증강은 나라에 독이 될 것입니다.”
탁지부상서대신은 김종서였다.
그는 영진도독부의 설치에 관여한 뒤로, 조정에 다시 돌아와 호부(戶部)를 거쳐 탁지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업무를 수행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공부에서는 이번의 장정 체결을 통하여 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호조의 발급과 무역항의 문제는 외부대신께서 귀국하시면 상호 상의하여 전결을 올리겠으나, 우선 요동의 편입에 따른 경해가도의 평양까지의 우선 확장과 이어 요양까지 이을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탁지부에서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보상금의 일부를 이곳에 내어 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러나 그 순은들은 전부 은화의 가치를 담보하기 위해 모두 유지고에 들어가기로 예정한 자금들인데…….”
“일부만 내어 주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세워지는 가도에 대하여 압록강변과 황성부로 들어오는 곳에 두 곳의 가도세관(街道稅關)을 설치하여 가도를 통하는 물품에 세를 조금씩 물린다면, 이 조세권을 모두 탁지부로 이관하여 자금의 이익 환수에 사용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도록 합시다.”
“다음은…….”
이렇게 밤새도록 내각 회의의 불은 꺼지지 않고 전후 처리의 문제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하며 정책의 대강을 짜내고 있었다.
사흘 뒤에는 정확한 강화 정장의 내용과 함께 이에 따른 정부시책이 함께 시중에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1438년
흥정 6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계동 심왕저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훈의 나이도 어느덧 예순넷이었다.
5년 전 졸중에 한 번 쓰러진 뒤로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사실상 요양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정사(政事)를 놓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심하게 앓아누워 마른기침만 토해 내고 있었다.
“정무를 그만두시는 것 외에는 좋은 처방이 없사옵니다.”
제중원(濟衆院)에서 나온 의관 유현이 천천히 진찰을 해 보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유현은 일전 한성에 콜레라가 유행한 이후로, 전통의학의 길을 벗어나 세훈이 국책으로 새운 제중원에서 꾸준히 실증의학을 연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 막 중세의학을 벗어나 실증적인 의학을 전개하기 시작한 지 채 스무 해가 되지 않았다.
제중원에서는 여전히 중의학을 함께 다루고 있었고, 세훈의 병은 도무지 진맥 정도로 가려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병인지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세훈의 손을 꼭 부여잡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고상희가 물었다.
남편의 병중이 악화되는 것을 눈으로 고스란히 지켜 보고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거의 마흔 해를 함께 살아온 인연이었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최근 십 년 사이 부쩍 기력을 잃은 남편의 모습이 그저 안타깝기 짝이 없는 그녀였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선은 요양을 취하시는 것이…….”
유현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로서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세훈의 지원이 없었다면 제중원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도 이렇게 제중원의 학장(學長)까지 되어 의학 연구에 매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살려 내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도무지 병명조차 알아낼 길이 없었다.
“변명이 되지 않는 줄은 잘 압니다만, 노환(老患)이라고밖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세훈을 침통하게 바라보며 유현이 부연했다.
“앞으로 가망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의식을 잃거나 하시는 것 같습니다. 호흡도 정상이고, 심박도 나쁘지 않으니 어신(御身)이 죽어 간다고 할 수는 없나이다. 단지 앞으로는 일체의 일을 그만두시고 가료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줄 아룁니다.”
21세기의 의학 혜택을 받는다면 세훈은 아직 중년의 젊음을 유지하며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였다.
그러나 15세기의 조선에서 그러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위생적인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섭식(攝食)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노화를 막을 길은 없었다.
오히려 평균 수명이 50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예순을 훌쩍 넘겼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한 환경에서 지내 온 덕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지나친 격무에 시달려 왔으니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몸이 쇠약해진 이유 중에는 과로도 있었기에 우선은 유현의 말대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의식을 잃었다 깨다를 반복하던 세훈은 보름 정도 앓은 후에야 간신히 기력을 차렸다.
“정무를 그만두시고 가료를 하시는 것이…….”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은 세훈과 마주한 아들 현도의 말에 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여기는 그였지만, 괜히 몸을 더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갑상선이 심하게 붓는 것이 호르몬 계통에 심각한 이상이 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위장도 편치 않았고, 허리에는 혹이 생겼다. 전부 지금의 의술로는 원인을 규명하거나 치료하는 것이 힘든 것들뿐이었다.
“전후 처리가 모두 끝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잘못 듣는다면 은퇴를 종용하는 말로 들릴까 싶어 현도가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지만 세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권력에 심대한 욕심이 있어서 시작한 일들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올라와 국가 대사를 지휘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지만, 끝 모를 권력욕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을 줄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병중에 계시는 동안 그전 일러 두신 대로 각 대신들과 협의하여 이미 시책을 시행하고 있나이다.”
“그렇느냐. 어찌들 했느냐?”
자나 깨나 국무(國務)에 대한 생각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현도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번 전후 처리는 부친이 가장 심려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목이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추가 징병이 용이치 않다고 하여 기존의 상대적으로 안전한 삼남(三南)의 진위대 병력 편성을 줄여 요동군을 창설하고, 이하에 보병대 및 기병대를 편성키로 했나이다.”
“그렇구나. 잘한 선택이다. 그러나 둔영을 조성하고 보급을 하는 데도 재정이 막대하게 들어갈 터인데?”
“일부는 병력이 줄어드는 삼남의 진위대로 가던 재정을 돌려서 쓰기로 했고, 또 일부는 요동에서 걷히는 거래세(去來稅)에 국방세(國防稅)를 조금 붙여 충당하기로 했나이다. 다만 이로서는 한계가 있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조정의 지원이 필요할 듯합니다.”
“좋다. 행정 처리는 어찌했느냐?”
“우선은 진서의 선례를 따라 요동에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를 설치하기로 했나이다. 그 행청(行廳)은 요양에 두기로 하고, 요양부(遼陽府), 동녕부(東寧府), 심양부(瀋陽府), 건주부(建州府)의 네 부를 설치했나이다. 나머지는 기존의 명이 설치해 둔 위소(衛所)를 군(郡)으로 고쳐 지방관을 이미 파견했나이다.”
“잘되었다. 그렇다면 건주위는 이제 심요도독부의 관할로 들어간 것이냐?”
“예. 그렇사옵니다. 요양에는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 북변사(北邊司)를 설치해 도독부 휘하에 두어 기존의 건주위에서 하던 일을 이어받게 하였고, 또 행연사(行燕司)를 두어 명나라와 관련된 변경 사무를 치리하도록 하였나이다.”
“음, 그렇게 엄중한 관할권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이지.”
“또, 황제 폐하께서 심왕가의 봉지(封地)인 심양이 제국의 강역에 편입되었으니 심양을 중심으로 사방 오백 리를 식읍(食邑)에 봉하고, 대대로 심왕이 동의하는 자로 심요도독을 임명하기로 하였나이다. 다만 군권(軍權)은 중앙에 예속되고, 조세권 또한 중앙으로 걷히는 세금을 정해진 비율로 나누는 정도로 제한되었나이다.”
“아! 우리 왕부(王府)가 심양에 들어선단 말이냐?”
“예. 봉왕(封王)이나이다. 이곳 황성의 계동저는 앞으로 행궁(行宮)으로 두고, 심양에 본궁(本宮)을 열 준비를 하고 있나이다.”
그간 심왕의 작위는 명분이 강한 작위였을 뿐, 경기도 일원에 조금씩 흩어져 있는 식읍을 제외하고는 따로 들어오는 수입원도 없고, 봉해진 땅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역의 승전으로 인하여 대신들이 황제를 압박해 원래 심왕의 봉지가 되어야 할 심양을 얻게 되었으니, 이를 희사하고 요동에 대한 각종 권리를 주도록 한 셈이었다.
“언제 한 번 가 보고 싶구나.”
“우선은 몸을 회복하시는 것이 가장 중한 일이나이다. 심양은 이곳 황성에서 삼천 리 길이니 계동에 머무르시면서 좋은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그래, 우선은 그래야지.”
아들의 걱정에 세훈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어느새 어리기만 했던 아들은 강성해서 자신의 뒤를 이어 제국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맏아들 현도는 자신을 닮은 부분이 많았다. 생긴 것도 그렇거니와 늘 조심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점이 그랬다.
군문에 들어섰다가 이제는 함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둘째 아들 현진과는 그런 점이 달랐다.
“그 외에도 배상금의 일부를 이용하여 심양까지 가는 가도를 해주에서부터 이어서 축조하기로 하였고, 여력이 된다면 이 가도를 남쪽으로도 공주에서 중단된 것을 목포까지 이을 생각이나이다. 또한 지난 40여 년간 늘어난 삼남의 일구를 일부 옮겨 심요로 옮기는 것도 의론되었나이다.”
“말을 들어 보니 명나라와의 강화도 내가 일러 둔 대로 잘 진행된 모양이구나.”
“외부대신 이예 공이 외교에는 잔뼈가 굵은 인물이나이다. 그가 받은 지침 대로 잘 처리하여 그 수완에 대해 요즘 관가에 칭찬이 자자하나이다.”
“그래, 좋다. 좋아. 나도 이제 마음 놓고 일선에서 물러날 수 있겠구나.”
세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간의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을 스치듯 지나가기 시작했다.
탐라에 표착해서 결혼, 그리고 반정과 전쟁들……. 이제는 환갑을 넘겨 얼굴에는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하게 되기까지 고비 고비 쉽지 않은 삶이었다.
세훈은 사흘 뒤 등청하여 황제에게 사의(辭意)를 표하고 내각의 수장인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길 청했다.
그간 세훈의 그늘에 눌려 있었던 황제로서는 굳이 이를 반려할 이유가 없었다.
관청가에서 열린 조촐한 송별연을 마지막으로, 세훈은 그간의 나라의 대사를 좌지우지했던 최고 관직에서 물러나, 나라의 존경받는 황제 다음의 작(爵)인 심왕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섰다고는 하나 지금의 내각은 세훈이 일궈 놓은 인재들과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고, 추밀원의 작위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세훈이 의도했던 대로 강력한 내각과 추밀원의 견제에 힘입어 세훈이 물러난 뒤에도 황제는 감히 권한을 늘리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지금의 제국은 거의 귀족 과두정(寡頭政)으로 굴러 가고 있었다. 이른바 정도전이 생각했던 신권국가(臣權國家)의 체계가 실현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440년
흥정 8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심양 심왕부(瀋王府)
명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란이 산해관에서의 강화장정의 체결로 끝을 맺은 지도 어느덧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초대 요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온 것은 황보인(皇甫仁)이었다.
황보인은 세훈과 직접적으로 연을 맺은 구신단(舊臣團)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차기 심왕의 작을 이을 상공부상서대신인 현도와 매우 절친하여, 농월정에서 늘 모이던 젊은 자제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농월당(弄月黨)의 일원이었다.
본인 자신이 한림원을 나와 관료의 길로 들어선 능력 있는 준재였고, 심왕가의 지지에 힘입어 심요도독으로 요양에 부임해 올 수 있었다.
심요도독부는 실질상 심왕가의 영지이면서 동시에 중앙에 속한 행정 단위이기도 했다.
심요도독은 심왕가의 동의가 있어야 부임할 수 있었으며, 심요도독부에서 걷히는 세금 중 2할은 심왕가의 사재(私財)로 편입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심양을 중심으로 사방 오백 리의 땅이 공식적으로 심왕의 봉지(封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행정은 심왕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황성의 황제가 임명해 심왕이 동의한 행정 관료인 심요도독이 집행하게 되어 있었고, 군권은 모두 중앙의 군부로 집결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심왕부는 심양에 설치된 반면에 심요도독부는 요양에 두어져 그 중심 또한 이원화되어 있었다.
요컨대 말해서, 심왕의 봉지와 심요도독부의 관할지는 거의 같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이런 특성으로 인해 서로의 관계는 점차 긴밀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심왕이 가진 심요도독의 임명 동의권이라는 것이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은퇴한 뒤로 조용히 집필 활동에 천착하고 있는 세훈을 대신해, 심왕가의 일은 모두 맏이인 상공부대신 현도와 함주와 황성, 그리고 이제는 심양을 오고 가며 상로(商路)를 구축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는 둘째 현진이 알아서 맡아 하고 있었다.
모피 무역의 중개를 거의 독점하게 된 현진은 그간 벌어들인 사재를 내어 심양에 심왕부를 건축하는데 큰돈을 쏟아부었고, 자신이 운영하는 계영양행의 지부도 심양에 내었다.
당연히 심양의 일자리는 늘어났고, 재화는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곳에는 많은 속민들이 밀려들어 와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심양 지역의 위세 강화와 심왕가의 저력의 증강을 촉발했다.
“심양에 가면 먹고 사는 것이 궁하지 않다.”
“먹고 사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큰 재화를 벌어들일지도 모른다.”
넓은 땅에 인구는 적었으니 새로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심양이 가진 결점은 상대적으로 오랜 세월 이 지역의 중심지 노릇을 했고, 지금도 심요도독이 진둔하고 있는 심양부나, 명나라와의 무역 거래로 급격히 성장하여 아직도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은 동녕부와의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성부에 있어서 자주 이곳에 들르지 못하는 현도는 동생인 현진에게 여러 가지의 이권을 내어 주며 이곳에 투자를 하기를 재촉했다.
현진은 그것에 응해 심양에 면직 공장을 대규모로 세우고, 근교에는 양을 치는 목장을 확장시켜 양모업(羊毛業)도 연계시켰다.
결정적인 것은 심양 근처에서 발견된 은광(銀鑛), 철광(鐵鑛) 따위였다. 순도 높은 철광이 발견되자 심양에는 곧 제철소가 세워지고, 은광은 바로 심왕가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이곳의 순은은 채굴되는 즉시 심왕부의 사고(私庫)에 채워졌다.
이들 산업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현진은 계영양행을 이용하여 동녕부에도 지부를 내어 명나라와의 무역을 중개하기 시작하는 한편, 벽란도에도 지부를 내어 영진에서는 함주를 거쳐 모피를 들여오고, 심양에서는 동녕이나 벽란도로 포목, 양모, 철괴 따위를 보내 파는 상로를 정착시켰다.
“앞으로 이곳 심양이 우리 가문의 본거지가 될 것이니라.”
상공부대신으로서 정무가 바쁜 것을 잠시 시찰을 핑계 삼아 제쳐 두고 심양으로 먼 길을 찾아온 현도가 거의 심양에서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진에게 말했다.
한번 둘러본 심양은 슬슬 공업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벼농사를 짓기도 힘들어 목축업을 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이곳에 오래 상주하고 있던 인구도 없고 외부 유입 인구가 절대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양질의 광산이 개발되고 있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대한제국에서 공업 집중이 탄생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공업이래 봐야 실상 광산업이나 직물업이 전부인 상황이지만, 심양에서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공업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당연히 40년에 걸쳐 공업이 성장해 오고 있는 황성부나 제주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단기간에 어지간한 본토의 지방 도시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공업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모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발한 생각이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이렇게 춥고 거친 곳에서는 저렇게 양모로 직물을 자아서 걸치는 것만큼 든든한 것이 없지요. 아마 내지에서는 잘 안 팔리겠지만, 이곳 심요와 평안도, 영길도, 영진, 그리고 명나라의 화북, 여진족들에게는 매우 잘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현명하게 잘 생각했다. 심양의 방비는 어떠하냐?”
“요동군 제2보병대의 둔지 조영이 완료되어 얼마 전 1만 5천 병력이 이곳에 주둔을 완료했습니다. 그간 이곳에 주둔해 있던 제15진위대의 병력은 본토로 철수 다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걱정이 많았다만 다행히도 잘되어 가고 있는 듯싶구나.”
현진의 말에 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인 형님도 종종 이곳에 들러서 심양을 시찰하고 가곤 합니다. 비록 몸은 요양에 있지만, 이곳 심양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을 하시니. 심요 도독부의 재정으로 요양부에서 심양으로 오는 가도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본토 밖에서는 처음으로 포석가도를 까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지로 돌아가는 길에 요양에 들러 황보인이 얼굴도 한 번 보고 가야겠구만. 허허.”
현도와 황보인은 서른 해를 알고 지낸 막역지우였다.
때문에 이번 심요도독부의 대도독에 황보인이 부임된 것이다.
이곳 심요 지역을 거점으로 부흥을 꾀하는 심왕 일가가 황보인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버님의 병환은 어떠하신지요?”
해를 걸러 황성부에 들르는 꼴이 된 현진이 세훈에게 문안을 올리지 못한지 오래라, 걱정된다는 듯 용태를 묻는다.
“많이 차도를 보이고 계시다. 요즘에는 마른기침 외에는 크게 앓거나 하시지는 않고 계시니. 밤낮으로 책을 쓰고 계신데, 아마 이런저런 국사(國事)에 대해 논하는 글일 듯싶다. 나도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직 정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어릴적에는 아버님 어깨가 그리도 높아서 그렇게 늙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헌헌장부도 세월은 못 이기는 법이지. 너나 나 또한 주름이 이제 잡히고 몸이 굽기 시작하지 않았느냐. 내 나이도 어느덧 불혹(不惑)이니라.”
“서윤이는 요즘 어찌 지냅니까?‘
“그놈 나이가 벌써 열여덟이다. 공부는 할 대로 다 마쳐서 학습원(學習院)도 이제 곧 졸업인데, 전시(殿試)도 준비하고, 아버님 수발도 거들 겸 해서 학교를 잠시 쉬고 집에 있으며 요즘 아버님 글 쓰는 일을 옆에서 돕고 있다.”
서윤은 바로 현도의 외동아들이자 세훈의 맏손자였다.
어느덧 재롱 피울 나이도 훌쩍 지나 학문을 갈고닦은 뒤 관직에 오르기 전에 건강이 좋지 않은 조부 세훈을 도우며 수양하는 중이었다.
“그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지 다들 머리가 그리도 좋습니다. 우리 아들놈 둘은 아버님과 형님의 좋은 머리를 하나도 못 물려받았는지 시원찮은 짓만 하고 다니니…….”
현진의 아들들이라 함은 바로 현진과 최해산의 딸인 최인영(崔麟英) 사이에서 난 경윤(景潤)과 명윤(明潤) 두 형제였다.
어렵사리 글을 익히고 함주의 상학(廂學)을 들어간 경윤은 그다지 머리가 좋다고 하기 힘들었고, 둘째 명윤도 책은 던져 놓고서는 아주 공부와는 담을 쌓고 활쏘기에 빠져 있었다.
“경윤이야 상학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면, 명윤이는 이곳에라도 불러서 일을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떻냐?”
“그놈이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아직 나이가 열 살이다 보니 천지 분간을 못하는 게지요. 조금 나이가 더 들어 철이 든다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 그래. 그나저나 세월이 빨리도 흐르는구나. 아랫머리에 새치가 잡히기 시작하니 말이다.”
현도는 담담한 표정으로 심양의 문루(門樓)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문득 돌아보니 나라를 뒤엎고 심왕가를 세운 아버지 세훈 이래 벌써 3대째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이 심양이 그들 일가의 발판이 되어 주리라 현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른 요동의 벌판이 멀리서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