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제22장 황성별곡(皇城別曲) (23/82)

제22장 황성별곡(皇城別曲)

「……(전략)…….

그런 이유로 인해, 이 시기의 한국에 있었던 변화의 양상을 미시적인 시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수 세기가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 당시의 거시적인 양태와 그로 촉발된 일련의 사회적, 경제적인 혁명과 그것이 세계에 끼친 영향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이 변혁의 시기에 당시를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상상력에 빚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일정 부분 짐작이 가능한 것은 아마 당시의 국가 시책을 좌우하던 일단의 관료층을 제외한 일반 민중은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가 겪고 있는 변혁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 겪고 있는 변화에 대해서 둔감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듯이, 더욱더 빈한한 정보 속에서 살고 있던 15세기의 한국인들의 경우 당연히 현실인식의 조망범위는 그 자신들이 겪고 느끼는 생활의 반경 안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혁명 속에서는 그 위대한 물줄기를 체감하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일어난 변화는 충분히 이 시기의 한국인들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략)…….」

―김주성(金週晟), 《15世期 韓國社會의 微視的 考察》

안평(安平) 16년, 서울, 제도대학교(帝都大學校) 출판부

국사학과 석사학위 제출 논문집 115p

1435년

흥정 3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조선국의 국호를 버리고 제국을 선포한 지도 어느덧 세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국왕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그다지 없었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그 신민들에게 이르기까지, 이것은 잠시간의 지나가는 어떤 바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란한 칭제건원의 의식이 지나간 뒤 기층의 생활은 그저 소리 없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칭제건원은 적어도 황제에게 있어서는, 칭호가 올라간 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개악(改惡)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제국을 선포하자는 주장 뒤에는 이것을 계기로 삼아 신권(臣權)을 정치 저변에 구축해 황권(皇權)을 누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심왕 김세훈을 주축으로 제국의 정권은 강력한 관료 집단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국사(國事)는 일종의 귀족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추밀원(樞密院)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정되지 않았다.

거기에 조정을 내각(內閣) 대신들이 장악하여 추밀원과의 긴밀한 연대하에서 황제의 권익을 압박하는 것이 점점 노골화되어 가고 있었다.

황제로서는 당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각을 견제할 수단이 없는 황제로서는 그저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미 군부가 내각의 일부로서 이들 막강한 관료 집단의 통제하에 놓여 있는 이상, 제국의 군대는 황제의 권익을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관료 집단의 의견을 충실히 대변하는 무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흥정 3년, 대한제국의 정치는 일종의 황제의 권한을 법령과 무력을 통해서 볼모로 잡은 귀족, 혹은 관료들의 과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중심에는 세훈이 있었고, 갈수록 악화되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재상(宰相)으로서 국사를 일괄하며 마지막 초석 다지기에 힘을 쓰고 있었다.

20년 전 상황에 비교하면 독재권을 전횡하기보다는 강력한 신료 집단과 손발을 맞추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민심이 이반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세훈을 비롯한 관료 귀족들은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것은 비단 칭제건원 이후로 시작된 일은 아니지만 꾸준히 그동안 벌려 왔던 일들이 알게 모르게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영길도 두만강 너머 개척된 영진도독부에 주둔한 영진분견대(永鎭分遣隊)의 분견대장으로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육군 정령(正領)으로 승진해 황성으로 올라온 천안석도 그런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천안석은 거의 4년간 북방의 벽지에 새로 개척된 영진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모피 무역을 정착시켰다. 거기에 둔지를 안정시켜 인구를 물경 2만으로 늘린 공적까지 인정을 받아 군부 육군청(陸軍廳)의 정4품 주임관(奏任官)으로 상경을 명받은 것이었다.

안동 진위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여 일본으로 파병된 이후, 경상도 진주의 육군진무관을 졸업하고 장교의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진서, 상남, 영진 등의 국외 근무만을 해 왔으니, 오랜만의 본국 부임은 물론이거니와 처음으로 나라의 도읍인 황성부에 입성하는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천안석이 느끼는 한성의 번영함은 상상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

황성의 동북쪽에서 내려오는 길이었기에 영길도와 강원도에서 주로 들어오는 흥인지문으로 가는 길로 말을 달려온 천안석이었다.

중랑천과 개천(開川, 청계천)이 맞닿은 곳에 얼마 전 개축된 살곶이 다리[箭串橋]에 이르자 다리 너머로 동틀녘의 황성부중이 어슴푸레하기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장관이었다.

천안석은 그 풍경을 보고 짐짓 놀란 것이었다.

풍문으로 황성이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천안석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행당산 언덕이 있고, 그 아래가 그 유명한 무학 대사가 도읍을 찾기 위해 다녀갔다는 왕십리(往十里) 일대였다.

지명에서도 보듯이, 도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부터 십 리 길이었다.

그러니만큼, 아직 황성을 둘러싼 성벽은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 이미 수천 호의 번창하는 취락이 들어서 있는 것이었다.

“나리, 황성은 처음이십니까요?”

양주(楊州)에서부터 말을 끌며 천안석의 길잡이를 한 관속(官屬) 나졸이 짐짓 뽐내듯 묻는다. 나름 황성에서 가까운 양주 관아 소속이니, 나름 얼치기 서울내기라도 된다는 폼이었다.

“외지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천안석은 자기도 모르게 얼빠져 있던 얼굴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여기 살곶이 다리를 건너면 황성부(皇城府) 경내입니다요. 원래 사대문 안만이 옛 한성에 속해 있었는데, 황상께서 제위에 오르시고 한성부가 황성부로 고쳐지면서 그 경내를 넓혀 위로는 북악산에서, 아래로는 경강수(京江水, 한강)까지, 우로는 이곳 살곶이 다리가 지나는 중랑천부터, 좌로는 삼개나루[麻布, 마포]까지 아우르게 되었으니 가히 황거(皇居)의 도읍이라 할만 합지요.”

관아 소속으로 뻔질나게 높은 어른들을 모시고 황성을 드나들었는지 말만큼은 청산유수였다.

천안석은 나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살곶이 다리에서 말을 내려 천천히 건너가면서 펼쳐지는 풍경을 살펴보았다.

살곶이 다리 바로 너머는 행당산(杏堂山)으로, 산이라기보다도 나지막한 둔덕이 중랑천변에 다리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이곳 언덕에는 학습원(學習院)의 교사가 터럭을 따라 들어서 있었는데, 학사(學舍)의 규모가 늘어 제법 그럴싸한 기와지붕들이 수백 칸을 잇대어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중에는 석조의 3층 건물도 있었고, 목조로 2층을 올린 건물도 있었다.

그 아래로는 단층, 혹은 복층의 목조 주택들이 살곶이 다리를 따라 이어지는 길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길은 포석(鋪石)으로 단정히 포장되어 있었고, 가도 주변의 가택들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윤택해 보였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안개 너머로 그런 가옥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풍경이 북방의 외지와는 비교할 바가 못되니, 천안석의 입이 떡 벌어질 만도 했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됩니다. 성안으로 가 보셔야 아십니다요.”

“내가 물으면 말하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으스대는 이 나졸이 내심 마음에 안 드는 천안석이었다.

그러나 황성은 초행길인지라, 이 나졸이 또 뭐라고 설명하며 구경을 시켜 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포석으로 잘 포장되어 말을 타기 편한 길은 행당산 자락을 지나 왕십리로 접어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왕십리를 지나가는 가도 북측으로는 나라에서 군마를 길러내는 목장이 있었으니, 이른바 마장(馬場)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 마장은 너른 둘레로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고, 아직까지는 큰 재산인 양질의 군마를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목책을 따라 지나가는 동안, 백 보 간격으로 목책을 지키고 서 있던 병졸들이 천안석의 군복을 보고서는 경례를 올렸다.

거의 수천 보에 이르는 마장 목책 길을 따라가는 동안, 수십 번의 경례를 받았으니 천안석은 괜히 으쓱해져 아까 전까지 으스대던 나졸을 은근슬쩍 보았다.

“나리도 대단하시구만요. 허어, 어째 병졸들이 길을 가는 내내 경례를 붙인다요.”

나졸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짓자 천안석은 괜히 으쓱해졌다.

마장을 지나서도 포장길은 계속되었지만 한동안은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었다.

행당산에서 마장 아래 왕십리까지 걸쳐 형성된 시가(市街)는 채 스무 해가 되지 않은 곳이었고, 이제 막 발전하는 중이니 아직 사대문 안과는 도심지로 이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장에서부터 개천길을 따라 이어진 가도를 얼마 가지 않으니, 도성의 정동문인 흥인지문이 보였다.

처음 이곳에 도읍을 한 뒤로 개축된 바가 없는 흥인지문은, 그 위용이 대단하다기보다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천안석이 보기에는 충분했다.

황성으로 부임해 온다는 신분 증명을 내밀자, 성문을 지키던 병졸이 경례를 붙이며 통과를 확인했다.

그렇게 황성 안으로 들어오자 천안석은 다시 입이 떡하고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성부 최초의 석조 건물인 보문각이 공사를 시작한 것이 1407년의 일이었다. 그 뒤로 한성부 시절부터 황성은 공사판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제 3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사대문 안의 윤곽은 거의 잡힌 상황이었다.

흥인지문을 지나자마자 반듯하게 석판을 올린 큰길을 따라 좌우로 2층, 3층의 목조건물들이 길 앞으로 상가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운종가(雲從街, 종로)라고 불리는 길입니다요. 이런 건물들이 경복궁 앞 관청가에 이르기까지 쭉 계속됩니다요.”

“허어.”

천안석은 그저 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도읍이 도읍은 아니로구나.’

천안석이 내려오는 길에 들른 큰 성읍은 함주(咸州)와 춘천(春川) 정도였다. 함주는 영길도 감사가 거하는 곳이며, 예전 태조의 근거지였던 만큼 동북면에서는 가장 으뜸 가는 고을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을이나, 인구는 채 2만을 겨우 웃돌았고 성안은 상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초가살이가 기와집 사이에 드물지 않게 섞여 있는 곳이었다.

황성으로 올라오는 길에 들른 춘천도 그나마 사정은 나았지만 함주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드문드문 복층으로 올린 건물도 보이고 관아와 상점가는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고 길에는 오물이 드물지 않게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온 천안석에게는 놀랄 것이 못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성부는 달랐다.

우선 인구만 해도 지방의 큰 성읍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30만이 넘는 육중한 도시였다.

거기에 지난 20년에 걸쳐 계속해서 실시된 도시 정비 사업이 비록 근대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상하수도가 갖춰지고, 오물 처리가 체계를 갖추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라 황성부, 특히 사대문 안의 석재로 포장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고, 복층 건물의 허용으로 상업이 밀집된 곳에는 2층, 높게는 3층의 건물들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드문드문 새롭게 지어지기 시작하는 석조나 벽돌 건물들까지 보이고 있었으니, 도성의 풍경이 조선팔도의 다른 도시들과 견주어질 턱이 없었다.

이런 정비는 최근 들어 국제 무역으로 번창하는 목포(木浦)나, 중앙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세훈을 비롯한 탐라당의 근원인데다 나상의 자본이 경제에 즉각적으로 유입되는 제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읍의 규모 자체가 황성에 견줄 것이 못되다 보니 비교 대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근 수십 년간 세훈이 이끈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중세사회에서 벗어나 근세로 접어드는 길목에 선 대한제국은 이제 곧 찾아오게 될 사회적 진통을 예견하듯, 번영의 명암이 조금씩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농본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제국이었다. 백성의 절대다수인 농민들은 이앙법의 시행 등으로 인한 생산력 증대 등의 사소한 혜택을 보고 있었다.

물론 이들 절대다수의 삶은 예전에 비해서 확실히 나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큰 격차로, 일부의 성장이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각 지방, 그중에서도 상업의 발전과 수공업에서 이제 조금씩 공장제공업으로 진화하고 있는 공업의 발달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의주, 평양, 개경, 공주, 목포, 제주, 대구, 동래 등의 성읍과 다른 성읍 및 지방 간의 격차가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석이 거쳐 온 함주나 춘천 등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나마 모피 무역의 혜택을 이제 보기 시작한 함주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큰 성읍이었지만 이런 교역길에서 크게 소외된 강릉이나 안동 같은 곳은 수십 년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큰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

중세사회에서 급속도로 벗어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도시와의 비교도 황성부에 이르면 무의미해졌다.

이미 황성부는 대한제국의 거의 전부였다.

그 인구가 물경 이제는 35만에 이르러 두 번째로 큰 성읍이자, 옛 수도인 개경의 7만 인구와 거의 다섯 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사회가 도시화라 부를 정도의 단계에 진입하지 않았기에 공방이 들어서고 교역의 중심지에 위치한 성읍들이나 인구 3만을 웃돌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세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은 황성뿐이었다.

팔도와 진서, 영진의 도독부, 그리고 상남을 거쳐 바다로 뻗어 나간 무역 상단에서 흘러들어 오는 자본과 상품이 모두 이곳 황성으로 집결되었다.

그뿐 아니라 소규모 공장들이 줄을 지어 들어선 마포 일대는 면포와 발화기, 공예품, 도자기, 칠기, 한지, 군복, 총포를 제국 전토의 생산량 중에 절반 이상을 생산해 내는, 처음 등장한 공업 집적지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거기에 그동안의 상하수도 정비와 가도 정비, 그리고 국가적인 시책으로 장려한 복층 건물과 석조 건축이 상업의 발전과 인구 증가에 힘입어 사대문 안에서 장려하게 펼쳐지기 시작했으니, 길 안쪽으로는 아직까지 빈곤한 이들의 허름한 집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으나, 큰길만 다닐 때는 고래(古來)로 볼 수 없었던 고래등 같은 도시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천안석이 황성 부중에 들어섰을 때는 아침이 시작될 무렵으로,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인력거(人力車)를 이끄는 거꾼들이 길거리에 나오기 시작하고, 상점은 문을 열 준비를 하며, 아낙들은 아침밥을 지을 물을 해 갈 무렵이었다.

운종가 길을 따라 옛 육조 거리, 지금은 의정로(議政路)라 이름이 붙은 관청가로 가던 중에 천안석의 눈을 붙잡은 것은 바로 아낙들이 물을 긷는 광경이었다.

길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상한 쇠 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그것을 움직여 물통에 물을 받는 광경이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바로 셰르조드베크가 중동에서 발전한 펌프의 원리를 응용하여 설계한 대로 일전 황성부중에 설치가 완료된 수빙(水泵)이었다.

“이보게, 저건 뭔가?”

천안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나졸이 이마를 치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아! 저것 말씀이십니까. 허허, 저도 처음에 보고는 놀랐습니다요. 웬 쇠기둥에 달린 꺽쇠를 삐걱거리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황성부의 물은 요즘 다 저렇게 풉니다요. 깨끗한 물만 도성의 땅 아래로 관을 파 지나가게 한 다음에, 그 관을 지나가는 물을 저렇게 관과 이어진 저 요상한 쇠뭉치로 퍼 올린다고 합니다요. 이름이 뭐랬더라… 아, 수빙이라는 놈입니다요, 그려.”

“그거 대단하구만. 그럼, 저 조그만 수레 같은 걸 끌고 다니는 자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조그만 수레를 끄는 자들이란, 다름 아닌 인력거를 끄는 이들이었다.

세훈이 황성의 인구가 물경 30만을 헤아리고, 가도가 깨끗하게 정비되고 나자 시내를 오고 갈 교통수단이 필요해진 것을 알고서는 그간 나상과 송상에 이래저래 치이던 경상(京商)에 사업거리를 준 것이었다.

경상은 발전하는 황성의 경제를 등에 업고, 최근 해외에도 무역선을 보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이미 나상과 송상도 황성의 시장에 들어와 거의 이들과 황성의 상권을 나눠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상의 발전을 독려할 겸 지금 상황에서는 근대적 교통수단인 전차나 자동차들을 만들어 보급하거나 할 기술이 못되는 것이 당연하니,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마차와 인력거였다.

마차는 17세기 이래로 영국 등 서유럽에서 주요한 도시 간 혹은 도시 내 교통수단이었고, 이미 대한제국에서도 황성에서 개경을 거쳐 해주로 가는 경해가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천안을 거쳐 공주로 가는 길에서 역마차가 운영되고 있었다.

인력거는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에서 근대에 개항한 일본에서 개발되어 1882년 박영효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동양에서 초창기 도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물건이었다.

도시 빈민의 고용 창출과 동시에 비교적 간편한 도시 내 이동 수단으로 각광받았었는데, 지금 한성에서는 그만큼 적합한 물건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훈은 아들인 현도를 통해서 상공부(商工部)에 일을 맡겼다. 상공부 주임관(奏任官)으로 교통국(交通局)에 있던 현도는 세훈이 일러 준 이 인력거를 검토한 뒤에, 일전 거중기를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임서응에게 도안과 원리를 건네주고 직접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제품을 경상을 통해 시범 운용하다가 경상의 주관하에 인력거 조합을 결성시키고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이 이제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들이 끄는 것은 인력거라는 놈입니다요. 도성이 커지다 보니 이래저래 발품 팔아 움직이기가 녹록지 않습니다요. 그러다 보니 동전 몇 푼 쥐어 주고 저기에 올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요.”

“허어. 거 참…….”

천안석으로서는 발품 좀 아끼려고 돈을 주고 저런 것을 타고 다닌다는 것이 아직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경제가 부흥하고 있는 황성의 부유층에서는 이제는 인력거 이용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거, 참 듣던 대로 별천지로구만.”

고려 이래로 강력한 중앙집권의 체제가 완성이 되었고, 그것은 곧 지방으로 분권이 된 국가 형태가 아니라 도읍에 모든 것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회 형태를 가져왔다.

그것이 근래에 일어난 상업의 발달과 공업의 진화에 힘입어 황성부에 엄청난 부의 집중을 가져왔으니, 다른 지역과 격차가 나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조선 중기를 지나면 인구가 물경 20만에 이르렀던 한성이었다.

중세적인 도시 구조로도 20만을 수용할 정도로 물자가 밀집되었는데, 이미 세훈의 존재로 인하여 다른 과정으로 파격적인 발전의 초입부에 들어선 황성부는 이미 그 정비가 50만의 인구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시 정비와는 별개로 아직 황성부는 35만 정도의 생계를 책임질 고용 능력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의 인구만 해도 당대의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구였다.

명나라의 북경이나 남경 정도가 이를 좀 웃돌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운종가가 끝나고 관청 거리인 의정로(議政路)와 마주합니다요. 최근에 남북으로 뻗은 길은 로(路)라고 이름 붙여 정비하고 있고, 동서로 뻗은 길은 가(街)라고 이름 붙여 정비하고 있습니다요. 이 운종가와 의정로가 만나는 십자로가 여깁니다요.”

상가와 민가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던 운종가와 다르게, 의정로에 이르자 육중한 석조 건물과 멀리 광화문 뒤로 보이는 궁궐들이 과연 제국의 중심부라고 불릴 만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근처에 자리한 관청은 상공부(商工部), 탁지부(度支部), 문부(文部) 같은 것들이옵고, 군부(軍部)는 이 의정로를 따라 숭례문을 지나서 좀 내려가야 합니다요.”

나졸의 말마따나 의정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니 곧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이 나왔다.

숭례문을 나서자 바로 멀찍이 용산 모개전이 보였고, 서쪽으로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호서가도(湖西街道)의 종착 역참(驛站)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 며칠을 공주에서부터 정기적으로 달려온 역마차들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 큰 연병장이 있었고, 그 뒤쪽에 같은 형태의 3층 석조 건물이 서로 마주하고 서 있었는데, 그 위로는 단정한 조선 기와로 지붕이 올려져 있었다.

“저곳이 군부입니다요. 좌측의 건물이 육군청, 우측의 건물이 해군청입니다요.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저 뒤쪽에 군부 본청(本廳)이 있습니다요.”

군부로 안내하는 임무를 마친 나졸은 천안석에게 푼돈 사례를 받고서 다시 양주로 돌아가고, 천안석은 입구에서 경계를 서는 병졸에게 신분 증명을 하고서 군부로 들어섰다.

천안석은 지금부터는 역외(域外), 즉, 본토를 제외한 영진, 진서의 양 도독부와 상남 등의 해외 거점에 주둔하는 병력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바로 군부 육군청 역외국(域外局)의 책임관인 정4품 주임관(奏任官)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그간의 천안석이 진서, 상남, 영진을 두루 거치며 쌓은 역외 근무에 대한 능력을 군부의 수뇌들이 인정한 것이다.

안동 풍산의 무지렁이 천칠개가 안동 진위대에 입영한 것이 스물여섯 살의 일이었다.

그가 이제 산전수전을 겪고 당당하게 정령의 계급이 되어, 쉰셋의 나이로 이곳까지 승진하였으니, 그야말로 상놈 중의 상놈이 시대의 풍운을 타고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전히 쉰을 넘긴 천안석에게도 낯선 황성에서의 삶은 떨리는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곧 가족들도 상경하여 둔영과 가까운 용산에 거처를 꾸릴 것이다.

진서에서 결혼을 하고 낳은 장남 천태식(千太識)도 이제 나이가 차 학습원으로 진학하겠다고 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참의 상경은 잘된 일이었다.

천안석은 호흡을 가다듬고 병졸과 사관들의 경례를 받으며 본청으로 전속 신고를 하기 위해 들어섰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1436년

흥정 4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세훈의 둘째 아들 현진이 서른셋의 나이로 군문을 떠난 것은 1436년, 흥정 4년 가을의 일이었다.

학습원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관료로 출사한 형 현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택한 현진이었다.

육군진무관을 나와 임관하여 장교의 신분이 된 지도 어느덧 열 몇 해의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부령(副領)의 자리까지 고속 승진했지만, 현진은 더 이상 군문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천안석의 후임으로 1년간 영진도독부에서 영진분견대를 지휘하고 모피 무역을 감독하던 현진이 그간 보고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추석을 맞아 거의 한 해 만에 황성에 올라온 현진은 우선 계동의 본가를 찾아서 그 생각을 밝혔다.

“이제 그만 군문에서 나올 생각입니다.”

아버지 세훈과 형 현도가 함께 앉은 자리에서 현진은 군인답게 단정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의견을 여쭈었다.

“젊어서부터 군인의 길을 쭉 걸어온 네가 갑작스럽게 이제 와서 어째서?”

이제는 더 이상 나이를 숨기지 못하고,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린 세훈이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서 현진에게 물었다.

“영진도독부에서 분견대장을 지내며 영명성과 일대의 관할을 감독하는 동안 느낀 바가 컸습니다.”

“어떤 것이냐?”

“이미 잘 아시다시피 저의 전임인 지금은 육군 본청에 가 있는 천안석 정령이 다져 놓은 모피 거래가 이제는 영진도독부와 영길도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많은 전역자들이 엽사(獵師)를 택해 북방의 산야를 누비며 모피를 구하고 있고, 이를 통해 영진 이북의 여러 토민(土民)들과도 거래가 이루어져 영명성의 시전이 이제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모피가 함주를 거쳐 흘러나가 이제 파사국까지 팔려 나간다고 하니 가히 재물이 모이고 있습니다. 비록 임금을 떠받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문에 출사하였으나 이런 것을 지켜보다 보니 좀 더 큰일에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사에 나서려 하는 것이냐?”

“그렇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옵니다. 저는 함주(咸州)에 선창(船倉)을 만들고 사람을 부릴 생각입니다. 배도 건선(建船)하고, 함상(咸商)에 출자해 모피 무역도 중계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직접 장사치로 나서는 일이 아니라 조합을 설립해 그 조합장을 맡을 생각입니다.”

“조합이라?”

세훈이 의문을 표시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단순히 제가 돈을 직접 굴리는 것이 아니라, 큰 사업을 일으키기 위하여 출자(出資)를 받을 생각이나이다. 이미 제 장인어른과 나상의 오상복 아저씨, 그리고 함상에서 이 돈을 내어 받기로 했나이다.”

현진의 장인은 바로 최해산이었다.

몇 년 전 현진은 최해산의 딸과 혼례를 치러 이미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다.

“네가 그 돈들을 빌리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저 돈을 받아 그 돈으로 조합을 굴리고, 돈을 내어 놓은 양 만큼 수익을 분배 할 생각이나이다.”

현진이 말하는 것은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투자를 받아 조합을 꾸리고, 그 돈을 굴려 수익을 낸 다음에 그 지분만큼 수익을 배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개념이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이 출자를 한 자금이 얼마든 경영권은 현진에게 귀속되어 간섭을 할 수가 없었고, 투자한 자금도 주식(株式)처럼 만들어 매매할 수 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식회사라기보다는 합자회사(合資會社)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훈은 내심 아들이 이런 궁리를 해 낸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런 방식은 네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냐?”

“저와 함상의 유지들이 궁리해 낸 생각이옵니다. 구상을 하고 자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반년이 되었나이다.”

“그렇구나.”

세훈은 무거운 눈꺼풀을 지그시 내려 감았다. 여러 가지 기묘한 생각이 교차하는 탓이었다.

아들이 무엇을 하기를 딱히 바란 적은 없었지만 내심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자신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군문에서 봉직해 준다면 체면상 좋은 일이었다. 본인이 그것에 불만이 없었기에 지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달라져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그것을 구태여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것이 장사라는 것에 적잖이 놀랐을 뿐이었다.

“아직 장사는 천한 일이니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것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앞으로 점차 그런 것들은 흐려지고 공상(工商)이 대우받는 세상이 가까워졌지만, 네가 서반(西班)의 신분을 버리고 미천한 장사 일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단 말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세훈이 입을 열었다.

세훈 스스로가 조선에 표착한 이래 이러한 유교적 신분 질서를 부수고 공인과 상인이 대우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을 떠나 유럽에서도 공상(工商) 계층의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것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였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고귀한 푸른 피, 즉 귀족의 혈통은 그들보다 대우받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고작 개혁의 발걸음을 막 뗀 이 대한제국에서, 섭정공을 거쳐 심왕(瀋王)의 작위에 이른 세훈의 둘째 아들이, 출세가 보장받은 군문을 뛰쳐나와 아직 은근히 천시받는 장사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세훈은 그러한 파격적인 생각에 쌍수를 들고 환영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내심 아들의 일이 되다 보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 왕작(王爵)이시니, 제게도 미천하나마 군호(君號)가 내려지지 않았나이까. 군호가 있다는 말은 앞으로 그 공훈에 따라 작위를 내려받고, 추밀원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이 나오는 일이나이다. 저는 이미 군호가 있어 계영(啓永)이라 하였으니, 이에 따르는 식호가 이미 1천 호이나이다. 이것을 일전 함주 일대에 받아 두었으니 제가 하는 일은 돈을 부리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식읍을 건사하기 위해 하는 일이 되옵나이다. 이것이 어찌 명문대반의 거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부끄러울 일이 되겠나이까.”

“네 생각이 그까지 닿았다면 말리지 않겠느니라. 돈이 필요하느냐?”

“본가에는 의존치 않고 제 힘으로 하기로 했나이다. 이미 장인어른이 자금을 내어 주셨고, 제 식읍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니 본가에 폐를 끼칠 일은 없나이다.”

현진의 의지는 강고했다. 세훈은 어느덧 삼십대에 이르러 가정을 꾸리고, 앞을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현진의 모습을 보며 내심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여라.”

다음 날로 용산의 육군 본청에 들어가 전역을 하겠다고 관직을 물리는 청을 한 현진은 영진도독부의 분견대장의 보직을 이어받을 이로 이징옥(李澄玉) 정령이 인선되자, 이내 인수인계를 마치고 함주에 거관을 짓고 이곳에서 기거하며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서 출자받아 세워진 조합은 함상과 긴밀한 협력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현진의 군호를 따서 계영양행(啓永洋行)이라 하였다.

양행(洋行)이라는 것은 곧 바다를 통해 거래에 종사하는 장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계영양행은 이내 함상을 통해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모피 무역의 중계를 빠른 속도로 체계화해 가면서,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안정화된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현진은 곧 이 수익을 일부 배분한 뒤, 나머지를 함주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포구를 축조하고 조선소를 만드는 데에 쏟아부었다.

이것은 현진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영길도 관찰사와 영진도독부의 전폭적인 협력과 함주의 사대부 계층의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상업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의지로, 지역 유지들이 황성과 해주를 잇는 경해가도처럼 함주와 황성을 잇는 경함가도(京咸街道)를 건설해 줄 것을 끊임없이 상공부(商工部)에 탄원하기 시작했다.

그간 많은 토목 사업에 돈을 쏟아부어 포장 도로인 가도를 함주까지 연결해 줄 재원이 없었던 조정에서는 이를 반려하고, 추후 반영하기로 약조하는 선에서 매듭지었지다.

비록 청원에 머무르고 실제로 옮겨지지 못한 계획이었으나, 조정에서 공론화가 되어질 만큼 함주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삼남(三南), 특히 영남(嶺南)에서 이 북쪽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큰 상업이 움직이기 시작한 영진도독부와 함주 일대에 많은 가호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일대 번영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시점을 잡아내 정확히 뛰어든 것이 현진의 재능이라면 재능이라 할 것이다.

1436년

흥정 4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이제는 나이가 꽤 들어 은거를 결심한 최해산의 뒤를 이어 상공부대신(商工部大臣)의 자리에 현도가 오른 것은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군문에서 나와 스스로 상도(商道)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동생 현진과는 다르게, 현도는 관도(官途)를 걷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현도는 아버지 세훈의 그늘에 가려 제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십여 년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수완 좋게 일을 처리한 결과, 조정 대신들의 그에 대한 평판은 썩 나쁘지 않았다.

단순히 세훈의 2세로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스스로의 능력이 충분한 관리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 삼십대 중반인 현도가 상공부대신의 지위에 이르렀을 때도 조정의 대신들은 따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훈과 현도가 이를 고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추밀원 대신들의 추천에 힘입어 황제의 인준까지 내려지자, 현도는 상공부대신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자신이 집행해 왔던 상공부의 정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도를 믿고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 온 최해산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었다.

아직 쉰일곱의 나이라 아직까지는 충분히 일을 더 할 수 있는 최해산이었으나, 그간 서른 해 가까이 쉬지 않고 나랏일을 해 왔기에 쉬고 싶은 마음이 내심 있었다.

본인이 원한 바 대로, 최해산은 이제 학습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학습원의 학장이라 할 수 있는 대학사(大學士)로 내정되어진 것이다.

“부디 뒷일을 잘 부탁하겠네.”

이제는 내심 홀가분한 마음이 된 최해산은 등청하여 상공부 대신의 관인(官印)을 수령하기 위해 온 현도를 바라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족한 몸이나마, 맡은 바 직분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겠나이다.”

현도가 최해산의 말에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자네 부친 되시는 심왕 전하와 함께 그간 각고(刻苦)의 세월을 보내온 것이 벌써 서른 해가 넘었네. 그동안 자네가 자라 오는 모습도 여실히 지켜보았지. 나는 자네가 충분히 이 몫을 감내해 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네. 내가 후임의 인선을 택할 때 자네를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은 단순히 인정(人情)에 끌려서가 아니라, 자네의 능력을 눈여겨 보았기 때문이네. 굳이 자네의 아버님이나 나를 염두에 두고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다 이 말이네. 아무도 자네의 관료로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내 단언할 수 있네.”

“유념하겠나이다.”

최해산의 말에 현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최해산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 어린 충고를 못 알아들을 그가 아니었다.

현도가 상공부대신의 자리에 보임되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대한제국 전국의 상업 규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꽤나 예산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때문에 최해산이 이미 10여 년 전에 세훈과 함께 의논해 계획했었지만, 막상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현도는 그간에 이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조금씩 축적해 왔던 상공부의 관금(官金)을 이 기회에 쓸 생각이었다.

숫자로 된 자료를 취급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먼저 한 것은 우선 학습원의 산학(算學) 학유들 및 우수한 생도들에게 일종의 통계법(統計法)을 연구하는 일을 발주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다 보니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도수분포나 정량화의 개념 따위가 아직 정밀화되지 않은 제국의 산학 수준으로는 근대적인 통계학을 수립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세훈이 직접 이 개념을 지도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한제국이 여태까지 쌓아 온 거름으로 직접 발전해 나가길 바라는 세훈은, 이런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알면서도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때문에 학습원 산학과의 학유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를 총괄하게 된 것은 화학전습원 1기 졸업생으로 지금은 학습원 산학과의 학과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학사(學士)의 자리를 10년 째 유임하고 있는 조진이었다.

조진은 우선 기존의 제국과 중국에서 쌓여 온 호구 조사의 방법을 근간으로 하여 여기에 엄밀한 수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방식은 근대적인 통계학이라기보다는 17세기 영국에서 국가의 규모나 산업 형태를 계량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정치산술(政治算術)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우선은 상업 규모를 산정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조세 납입의 규모나 상거래의 장부를 토대로 하여, 지역 단위별 상업의 규모를 추산해 내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다행히도 이 계량화의 작업은 상공부의 지원하에 생각보다 진척이 빠르게 이루어져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는 「동국계상산법(東國計商算法)」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되었다.

이 「동국계상산법」이 다루는 조목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 방법에 따라 이듬해 1437년의 정초부터 전국의 주요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이 상행 규모의 계량화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작업을 용이하게 하고 앞으로도 이런 전국적인 상업의 실태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8도의 관찰사가 주재하는 수부(首府)와 영명성, 동래, 목포, 제주, 의주, 동녕관, 박주(博州, 옛 하카다)까지 총 15개소의 상공부 사무국이 개설되었다.

이 사무국을 중심으로 이 「동국계상산법」에 따라 진행된 1437년 정사년(丁巳年)의 이 일대 조사로 파악된 규모는 곧 상공부의 정책 집행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우선 밝혀진 것은 상업의 황성부 집중 현상이었다.

황성부로 거의 모든 물자가 들고 나가며, 일종의 공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황성부에 집중됨에 따라 이곳의 생산량이 막등한 반면, 지방의 각처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국제무역도 일부 거항(巨港) 및 상업 요충지에 집중되어 목포, 제주, 박주, 개경 등에서는 일종의 신흥 거부들이 등장하고 있는 반면, 다른 지역 도시들에서는 이런 혜택을 전연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1424년의 개혁 정책에 따라 대한제국에서는 은의 함량이 97%인 은화(銀貨)가 이미 유통되고 있었는데, 황성부와 같은 거대 산업도시에서는 이미 이 화폐제가 정착이 되어 상거래가 화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납세도 은화대로 지불하는 반면에, 나머지 지방에서는 여전히 포목(布木)과 쌀을 화폐 대신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명료해졌다.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도읍과 주요한 요로(要路)에 위치한 성읍들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나, 제국의 나머지 지방에서는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기 전과 비교해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조사를 총합해 내각 회의에 출석한 현도는 다른 대신들을 바라보며 결과를 보고했다.

이번에도 황제는 궐석(闕席)하고 대신들만 모여 있는 회의였는데, 어차피 이들 손에서 제국의 국정이 움직이는 것이니 이런 공개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신들은 이 결과에 대해서 숙의(熟議)하기를 며칠을 거듭했다.

물물교환이 잠식해 있는 현행의 관행을 화폐제도로 완전히 이행시키고 상대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한 지방의 상공업을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현재 조정의 막중한 과제였다.

“화폐를 제대로 보급시킬 관청이 만들어져야 하오.”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 즉, 추밀원의 의장(議長)을 맡고 있는 맹사성이 말했다.

“일전에 이 화폐를 주조하는 임무가 설경수 공께서 호부판서로 재직하실 때에, 호부에서 전담하여 이루어져 기(旣) 성과를 조금 보이고 있는 일이나, 이것이 호부의 기능이 탁지부와 상공부에 나누어 편입되어 그 관할이 모호해진 바가 되었소. 그러니 이 참에 탁지부(度支部)에 조폐청(造幣廳)을 신설하여 보다 지속적인 보급을 꾀하는 것이 어떨까 싶소.”

여전히 내각의 수반인 재상의 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세훈이 말했다.

아들 현도가 그간 조사해 온 결과를 꼼꼼히 살펴본 세훈은 이미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화폐 경제를 정착시키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이미 은광(銀鑛)의 관리와 세수 납입, 화폐의 발행이 모두 이 탁지부에서 시행되나 이 화폐의 보급 관리를 상공부에서 시행해 와 그간에 불편함이 많았나이다. 그것을 조폐청을 신설해 일원화한다면 탁지부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나이다.”

탁지부 상서대신인 김효성(金孝誠)이 읊조렸다. 탁지부로서도 권한이 확대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방의 상공진흥은 어찌하실 요량들이신지?”

정몽주의 문인(門人)으로 지금은 정부의 요직을 거쳐 문부상서대신(文部尙書大臣)을 맡고 있는 하연(河演)이 물었다.

“나상(羅商), 경상(京商), 송상(松商) 등에 비해 성장세가 둔한 함상(咸商), 구상(丘商) 등의 지역 상단을 보조하여 공상(工商)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이들 상단에 세금을 줄여 주고 적극적으로 식산(殖産)하는 사업과 해외로 진출하는 것을 장려한다면 십수 년 내에 눈에 띄는 성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박종우(朴從愚)가 그 안을 내어 놓았다.

내각에서는 이런 의견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거듭한 끝에 전반적인 발전을 도모할 시책들을 내어 놓게 되었다.

우선 이에 따라 상공부의 권한을 탁지부로 일부 이전해, 화폐 및 조세제도 전반을 탁지부가 완전히 관할토록 하고, 이에 따라 조폐청(造幣廳)이 설립되었다.

이때의 연호를 딴 흥정통보(興定通寶)가 주화되어 전국적으로 다시 재차 보급되었고, 화폐의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조폐청의 보조 기관으로 양정국(量定局)이 설립되어 일정량 이상의 순은(純銀)을 항상 보유하고 있도록 제도화되었다.

지방의 산업 진흥 시책도 뒤따라 시행되기 시작해 전국을 황성부, 목포, 제주, 개경 등의 번화하는 읍성(邑城)을 갑등(甲等)으로 분류하고, 나머지를 발전 정도에 따라 을등(乙等) 정등(丁等)까지 나누었다.

이들 지방에는 그 등급의 분류 정도에 따라 지역 상인들에게 세금을 보조하거나 도로를 닦는 일 따위를 우선적으로 지역 관찰사에게 주문하게 되었다.

이 시책으로 인해 현진의 계영양행을 위시한 함상(咸商) 또한 탄력을 받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437년

흥정 5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유현기(劉賢其)는 그저 그런 지방 출신의 사대부였다.

그는 원래 전라도 나주(羅州)의 그럭저럭 내력이 있는 양반가의 사람이었는데, 차남이다 보니 하고자 하는 것이 뜻만큼 잘 이루어지지 않아 물려받은 조금의 가산을 청산하여 상경한 지 어느덧 다섯 해를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학문을 대성할 요량으로 성균관(成均館)의 입시를 보았으나 결국 합격하지 못하고, 차선으로 생각했던 외학원(外學院)의 시험에도 떨어지자 한량 처지가 되었다.

슬슬 생계가 곤란할 지경이 되자 무언가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서 활자와 인쇄기를 갖춘 것이었다.

당연히 값이 엄청나다 보니 그가 가진 자산으로는 턱이 없어 경상(京商)에서 은화 오백 냥이라는 거금을 대출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그의 부친과 안면이 있는 탁지부 관리 정찬(鄭燦)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행히 광통교 근방에 차린 그의 동국서방(東國書房)은 계미자의 보급에 힘입어 황성부를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몇 개 안 되는 민간 출판사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가 주력했던 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격물학 관련의 책이 아니라, 기존의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그동안 배워 왔던 학문이라는 것은 유교의 육서삼경(六書三經)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성부를 중심으로 한 경기(京畿)의 학문적 흐름은 이제 격물학으로 옮겨 가고 있었고, 처음의 활황과는 다르게 경상에서 대출받은 자금을 겨우 갚아갈 즈음에는 다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쯤 되니 유현기는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현기는 이즈음에 틈틈이 정부의 시책(施策)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변혁기를 몸소 체감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시평(時評)을 취미 삼아 써 두고 있었는데, 이것을 우연찮은 기회에 읽어 보게 된 학습원의 물학과 학사 변서두(卞敍斗)가 이 시평을 찍어 내어 팔아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한 것이 돌파구가 되었다.

유현기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광통교 앞에 매대(賣臺)를 설치하고 100부 정도를 찍어 내어 동전 닷 푼에 팔고 팔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 조정이 내어 놓은 화폐제의 전격적인 시행과 지방의 진흥을 골자로 하는 시책에 대한 사실 전달과 짤막한 논평이 그 내용이었다.

제호(題號)도 없고, 그저 논금번시책(論今番施策)이라고 제목만 붙은 열 줄의 짧은 글임에도 불구한 시문(時文)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대의 입지가 광통교 근방, 정부 관청이 줄지어 있는 옛 육조 거리, 즉, 의정로(議政路)에 접한 곳이다 보니 정부 관리들이나 이곳을 다니는 사족(士族)들이 관심을 보이고 사 보게 되었다.

금방 처음 내어 본 이 전단이 섭섭지 않은 반향을 보이자 유현기는 이것을 좀 더 확대해 볼 궁리를 하게 되었다.

“책을 찍어 내는 일이야 자본만 있으면 이제는 누구나 뛰어듬직한 일이오만, 우리는 좀 더 새로운 일을 해 보고자 하니 함께해 보시는 게 어떻겠소?”

조정에 출사하지는 못했지만, 학식이랍시고는 조금 쌓은 황성 안의 빈한한 사족들을 끌어 모아 앞으로 찍어 내게 될 글을 쓰게 한 것이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야 장사도 아니고 사대부가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에, 하고자 하는 사대부는 생각보다 차고 넘쳤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열흘 걸러 한 번 네 쪽짜리 500부가량을 찍어 내기 시작하니, 이내 황성부중에 큰 화젯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유현기는 아주 책을 찍어 내는 일을 그만두고 동국서방의 이름을 황성순보사(皇城旬報社)로 고친 다음에 찍어 내는 전단에도 황성순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야말로 대한제국에서 처음 등장하는 신문이나 한 가지였다.

“함부로 정부의 시책을 운운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겠소?”

“그러게 말이오. 조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일개 유자(儒者)가 공개적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 벽서(壁書)를 함부로 뿌리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당연히 보수적인 관료와 유생들은 이런 새로운 풍조에 대해서 조금 꺼려하며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 황성순보를 가장 많이 보게 된 의정로 일대의 관청에 등청하는 관리들은 오히려 호의적이었는데, 조정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문부(文部)에서도 이 일에 대해 상당히 논의가 이루어져 공보국(公報局)을 설치하여 직접적으로 이런 형태의 공보(公報)를 찍어 내 관청에 회람시키는 일을 하게 했다.

한편, 앞으로 추가적으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이런 황성순보 같은 신보(新報)의 일을 다루게 했는데, 처음으로 공보국에 등록되게 된 신보가 바로 황성순보였다.

유현기를 비롯한 황성순보의 집필진은 조정 시책에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찬동하는 논조로 글을 많이 써 냈는데, 이런 것이 관부(官府)의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 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렇게 조정의 허가를 득해 탄력을 받은 황성순보의 판매는 호조를 보여 광통교 앞의 본래의 매대는 물론이거니와 숭례문, 흥인문, 돈화문의 성문 앞과 왕십리와 용산에도 매대를 설치하여 널리 판매하기 시작했다.

“황성순보요, 황성순보. 금번의 내용은 내각 대신들의 보직 이동과 그 이력(履歷)에 대한 것이오! 길 가는 글 줄 아는 이들은 닷푼을 내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시오!”

매대에는 사람이 하나 상주하며 신보의 내용을 크게 외쳐 알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객하고 했다.

이 신보, 즉 신문을 읽는 풍조는 황성부중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켜 관직에 있는 이들에게만 사흘에 한 번 회람되는 공보와 민간에서 찍어 내는 이 황성순보를 인력거를 타고 가며 읽는 것이 황성의 사대부들에게는 일종의 유흥거리처럼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보에 나온 내용을 보셨소?”

“아, 그렇다마다요. 이미 다 살펴보았습니다. 종 형(從兄)께서 법부에서 봉직하시기에 공보 또한 받아 보았지요. 조만간 공주에서 끊겨 목포로 이어지려다 말았던 호서가도(湖西街道)를 마저 닦을 준비를 한답디다.”

“허어, 순보에서는 자세하게 내용을 다루지는 못했는데, 역시 관가에만 도는 공보는 그 내용이 다르나 봅니다.”

이런 식으로 사대부들이 길가에 여럿이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풍경도 낯설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유학자들이 찍어 내는 황성순보는 한문으로만 집필되었기에 그 접근 대상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알고 교묘하게 파고든 제국신보(帝國新報)가 한문에다가 이제 보급되기 시작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병서(竝書)하고, 한자에는 독음(讀音)을 단 새로운 신보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좀 더 넓은 계층에서 싼값인 두 푼에 이 제국 신보를 사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신보의 내용은 역마차를 이용하여 각지로 전달되어, 황성보다 조금 뒤늦게 같은 내용으로 팔리기 시작했는데, 지역에 따라 송도순보(松都旬報)니, 공주제국신보(公州帝國新報)니 하는 이름으로 찍혀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지방으로 퍼져 나가는 신보들은 활자의 보급과 식자율(識字率)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게 되었는데, 황성을 비롯해 지방 각처에서는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신보를 읽어 주거나 열람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신보당(新報堂)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이것을 읽어 주는 사람을 독보(讀報)꾼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러한 신보들이 처음으로 크게 다루게 된 사건이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 당시에는 누구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흥정 5년, 1437년의 연말을 뒤흔든 소식은 곧 이 신보들에 실려 퍼져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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