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결전지로(決戰之路)
「1405년은 영락제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해 그가 신뢰해 마지않는 환관 정화에게 맡긴 보선단(寶船團)이 처음으로 먼 바다를 향해 출항하였고, 동쪽 조선에서 발생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양영으로 하여금 10만의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간과했던 한 가지 불행이 그와 명나라를 향해 덮쳐 오려고 하고 있었다.
…(후략)…….」
―맹극상(孟剋想), 집사유설(輯史遺說) 중
「…(전략)…….
어느 날 절름발이 티무르가 수십의 족장을 모아 놓고 말했다.
“중국의 황제는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 수가 50에서 60에 이르러 서로 찢겨져 있으니 이제 우리 모두를 다스릴 사람을 뽑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들은 땅에 말뚝을 박게 되었다.
“말뚝이 있는 곳으로 뛴 다음에 누가 가장 먼저 도착하나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다다른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리라.”
그렇게 모두가 뛰기 시작하자 그때 이미 다리를 절던 티무르는 뒤로 뒤처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발로 달려 말뚝에 닿기 전에 티무르는 제 모자를 던져 말뚝에 걸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말했다.
“내가 이제 이 땅을 다스릴 사람이다.”
그러나 아크사크 티무르는 대답했다.
“내 머리가 먼저 들어왔으니 내가 지도자가 될 것이네.”
때마침 늙은이가 지나가다 말하기를,
“지도력이라는 것은 아크사크 티무르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네 다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티무르의 머리가 저기 걸려 있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사람들은 티무르를 그들의 군주로 삼아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토볼의 킵차크 후예들에게 전해져 오는 기록에서
1405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이주현(理州縣).
양영이 이끄는 명의 10만 대군은 요동에서 2주간 군열을 정비한 뒤, 음력 11월의 추위 속에 다시 행군을 시작해 몇 년 전 명나라 여진족을 구슬려 벼슬을 내리고 설치한 건주위의 진영에서 이틀을 머물렀다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이주현(理州縣, 지금의 초산)의 경내로 들어섰다.
이주현은 원래 여진의 땅으로 산양호(山羊湖), 도을한(都乙漢), 봉화대(烽火臺), 등이언(等伊彦) 등을 합쳐 이주현을 설치한 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근간의 서북면에서 계속된 내란으로 인하여 부임해 온 현령도 없고 그저 채 떠나가지 못한 토민(土民)들만이 궁한 삶을 이어 가는 변방의 고을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명군이 강을 넘어 이곳 이주의 성읍을 손에 넣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는데, 오히려 조선군보다 주변의 혹시 모를 여진족의 준동을 걱정할 정도였다.
“조선왕 전하께서 식솔을 이끌고 당도했나이다.”
명군의 동정장군 양영은 막사 안에서 손톱을 다듬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조선 땅 경내로 들어오고 나서 안 사실은 원군을 청한 조선왕 방원의 군세가 이미 몰락지경에 이르러 반군(叛軍)이 이미 청천강 너머까지 이르러 지척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은 이 조선왕의 신병을 확보해야 앞으로의 전투를 할 터이니 탈출했다는 이방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오시라 하게.”
양영이 손톱 손질을 그만두고 자세를 고쳐 앉자 이내 막사의 한쪽 거죽이 열리고 명나라에서부터 동행했던 세자 양녕과 함께 초췌하나 눈빛은 살아 있는 사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양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읍하고서는 사내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비록 그간의 고생에 몸이 상했다고는 하나, 그 기세는 한 나라를 창업하는 것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던 이방원의 그것 그대로였다.
“먼 길에 고로가 많으셨습니다.”
“적당에 패하고 국계(國界)까지 도망친 임금이 이제 와서 무슨 더할 고로가 있겠소. 세자는 잠시 물러가 있도록 하라. 내가 양 장군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느니라.”
“그리하겠나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세자도 밖으로 물리고 나서 이방원은 제독 양영의 눈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양영은 그 기세에 감탄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앞의 사내는 비록 패하고 몸을 살릴 곳을 찾아 이곳으로 들어온 자였으나 한 나라의 국왕이오, 대명의 제후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고서야 이방원은 눈의 힘을 풀고서는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불초한 과인을 위해 이 거병을 보내 주신 황제 폐하의 성은에 과인은 감격하였소이다. 거기에 양 제독과 같은 불굴(不屈)의 장수를 보내 주셨으니 과인이 무엇을 더 바라겠소이까. 양 제독은 반군을 토평하는데 진력을 다하여 공을 세우고 황성(皇城)으로 돌아가기를 빌겠소.”
겉으로는 양영의 공을 비는 말이나 실상은 전심전력으로 한성을 되찾고 조선을 진압하여 왕위로 다시 돌려 놓아달란 말이었다.
양영도 대충 역관(譯官)을 통해 말을 전해 듣고서는 그런 의중을 잘 알아챘다.
“전하께서는 걱정을 하지 말고 계십시오. 폐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온 원정길이니 만큼 신하된 자로서 어찌 패하여 불충을 하겠나이까.”
물론 진력을 다해 맡은 바를 처리하겠으나 그것은 그대, 조선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 대명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고 그 성지를 떠받들기 위해서라는 말이었다.
이방원도 그 말하는 의중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고 앞으로의 행로를 물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양영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의 한쪽을 지시하며 대답했다.
“우선은 안주까지 적세가 들어와 있다 하니 우리 명군은 우선 청천강 맞은편의 정주(定州)로 들어가 남행(南行)을 준비할 요량입니다. 곧 봄이 오나 우리는 만 리 길을 겨우내 달려와 병사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니 속전속결로 평양성까지는 내달려서 그곳의 창고를 손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든 군세를 잃고 몸만 의탁해 들어왔으니 자신이 결정할 권한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그저 한성까지 명군이 뚫어 주는 길만은 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혹시 양 장군만 괜찮다면 우리 세자에게 3천 정도의 병력을 내어 선봉에 세워 줄 수 있소이까? 무릇 한 나라의 왕족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있다가는 구설(口舌)이 많을 터이니, 부족한 세자이나 병사를 지휘할 기회를 주시오.”
양영은 이방원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고 읍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10만 대군 중에 3천 정도를 조선 왕실에 생색내기 위해 내어 주는 것은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뒤로 숨지 않고 스스로 나서겠다는데 그 기백(氣魄)의 이유야 어찌 되었던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뜻하는 대로 하십시오. 기병 1천과 보병 2천을 내어드릴 터이니 세자가 뜻하는 대로 지휘하게 하십시오.”
“고맙소.”
양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군대의 갈 길이 정해지자 명군은 다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군 10만은 한 번에 움직이지 않고 1만의 병력을 지휘첨사(指揮僉事) 주문(周文)에게 내어 주어 이주성을 후방의 거점으로 삼아 지키게 하고, 이곳에 이방원과 그 식솔들인 왕후 민씨, 그리고 효녕, 충녕의 아들들의 신변을 맡겨 두었다.
거기에 아직 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가 있었는데, 이방원은 이주에 도달해서 한숨 돌리고 나서야 군호(君號)를 성녕이라 지어 줄 수 있었다.
다만, 세자 이제, 즉 양녕대군은 동정장군 양영에게 3천의 군세를 내어 받아 동북면으로 들어간 다음, 조사의가 안주로 들어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함주와 영흥의 두 고을을 치기로 하고 먼저 출발하였다.
남은 8만 7천의 군세는 천천히 정주를 향해 향하기 시작했는데, 그 행군이 지나간 뒤에는 땅 위에 풀 한 포기 남지 않았고, 그 발굽 위로 일어나는 먼지가 십 리 밖까지 날렸다고 하니 가히 그 군세의 규모와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406년 정월(正月)
대명국(大明國) 섬서성(陝西省) 감주위(甘州衛).
절름발이 티무르는 올해로 일흔이었다. 서 차가타이한국(汗國)의 속신(屬臣)이었던 그는 스스로 거병하여 일어나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부족들을 무찌르고 사막과 초원과 고원을 누비며 거대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더 늙기 전에 무언가 더 이루어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를 쫓고 있었고, 그래서 작년 20만의 정병을 추려 중국으로 원정을 가려던 때에 몸살이 도져 다시 반년을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을 향해 출정했던 티무르의 병대(兵隊)는 오트라르에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차 사마르칸트에서 반년간 요양을 취한 티무르는 다행스럽게도 건강을 회복했다.
티무르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유일하신 알라께서는 티무르의 꿈속에 나와 창을 든 기병들과 코끼리의 대군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그 꿈을 꾸고 나서 티무르는 몸이 꽤나 호전되어 이제 다시 먼 원정을 시도해 볼 만큼의 건강도 회복했다.
티무르는 한 번도 칸(汗, Khan)의 이름을 취한 적이 없었다. 명목상으로 그는 서 차가타이한국의 칸의 신하였고, 비록 소유르가트미시(Soyurghatmsh)의 아들 마흐무드(Mahmud)의 사후 티무르는 더 이상 칸을 옹립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아직까지 그는 아미르(Amir)였으며 어디까지나 차가타이 칸들의 봉신(封臣)으로서 마와라안나하르의 지배자라는 이름에 만족했다.
그는 스스로 군사적인 지모가 뛰어나지만 정치적인 처세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협하지 않고 정복하고, 부수고, 그의 말발굽 아래에 많은 민족들을 눕혔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제국은 마와라안나하르의 아미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그것이 몽골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숙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징기스칸의 후예인 황금씨족의 일원이 아닌 그는 칸의 칭호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는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정벌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가야 만한다.”
티무르가 어느 날 대소 신료들을 모두 모아 놓고 말했을 때, 어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정해 놓은 뒤 하는 이야기였다. 이제 주름에 묻혀 가는 눈이었으나, 그 형형한 기색은 죽지 않고 뚫어 보듯이 좌중을 일시하고 있었다.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티무르는 중국으로 가는 정벌의 길을 다시 재촉했다.
작년의 원정행을 위해 모아 두었던 군사와 비축해 둔 무기, 식량을 모두 꺼내어 다시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만의 군대는 검은 바탕에 붉은 세 개의 원이 그려진 삼환기(三環期)를 들고 동쪽으로 향했다.
티무르의 속국이나 다름없게 된 동 차가타이한국의 접경에 들어서서는 동 차가타이의 칸 샴 시 자한(Shams―I―Jahan)으로 하여금 직접 길잡이를 하도록 하였다.
타시켄트를 거쳐서 산맥과 사막들 사이의 길을 지나 호탄(Khotan)에 이르렀을 때는 명나라의 국계가 지척이었다.
20만의 대군은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해 새해가 밝아 봄이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섬서성 감주(甘州)성 외각에 이르러 있었다.
감주의 지방관인 동지(同知) 서독(徐篤)은 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파악하기 전에 성문 앞까지 육박한 티무르군을 보고서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난데없이 서쪽 사막을 가로지르고 나타난 20만 대군의 위용에 그저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 감주의 감주위(甘州衛)에 주둔하고 있던 행도사(行都司)의 지휘사사(指揮使司) 장유택(張裕擇) 또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이건 도무지 예기치도 못한 일이라 어이가 없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서쪽의 변경이라 주둔 병력이 3만 가까이 있었지만,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티무르의 20만 대군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싸우지도 않고 패배를 자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감주동지 서독은 파발을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으로 보내어 적의 내습을 알리게 하고, 지휘사사 장유택과 의론하여 성안에서 분연히 맞서기로 결의하였으나, 그 자신은 과중한 부담감으로 인해 몸이 급격히 나빠져 일선을 돌보지 못하고 위중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휘사사 장유택은 오롯이 이 모든 책임을 떠맡아 적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티무르의 군대는 감주성 사방을 둘러싸고 항복하기를 종용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할 일이었다.
티무르의 아들 샤로흐가 앞으로 깃발을 쳐들고 성문 앞까지 육박한 것은 그때였다.
사절로 왔으니 성문을 열라는 종용에 장유택은 우선은 그를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20의 병력을 대동하고 위세 당당하게 감주성으로 들어와서는 몇 가지의 조건을 내걸었다.
이제 서른쯤 된 샤로흐는 상당히 훤칠한 호남으로 공격적인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내였는데, 장유택은 20만 대군을 등에 업은 샤로흐의 기세에 눌려서 자기 성에서 접견을 하면서도 식은땀을 흘리며 하는 말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들, 중국인들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은 단 두 가지요. 항복하고 무슬림이 되던가, 아니면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여기서 지워지던가. 그게 나의 아버지 티무르가 해 온 방식이고, 지난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무너지거나 신하가 되었소.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 내 휘하의 병력은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 이곳은 대명의 땅이오. 나는 함부로 성문을 열어다 바치라고 배우지 않았소.”
장유택은 다리가 벌벌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얼굴을 가장했다.
그는 억지로 용기를 내 거절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의 티무르의 20만 대군도 무섭지만 멀리 응천부에 있는 영락제 또한 무서웠다. 성을 지킬 생각도 않고 항복해 영락제에게 십족멸(十族滅)을 당하나 여기서 티무르에게 맞서다 패배해 참수(斬首)로 생을 마감하나 별 차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막아서다 죽으면 나중에라도 사가들에 의해 쇄신(碎身)하여 충절했다는 평이라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적이오.”
샤로흐는 단지 그 말만을 남기고서는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고해 바쳤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끼리들로 성문을 들이받고 10만 병력이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대며 기어오르니 막는 것이 고역이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는데, 해가 질 무렵이 되었을 때는 성문이 거의 부서지고,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른 뒤였으며, 장유택 휘하의 군사는 겨우 3백도 남지 않았다.
패배가 임박한 느낌이 들자 그는 동지 서독을 찾아갔으나 이미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에 유서를 남기고 목을 그어 자결한 뒤였다.
장유택은 씁쓸하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유택과 남은 병사들은 티무르에게 살아서 끌려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서독이 한 것처럼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키니, 여기서 바로 감주절명(甘州折命)의 고사가 나왔다.
감주의 관리와 병사들의 끼끗한 죽음과는 상관없이, 티무르의 군대는 감주성을 함락시키고 재물을 약취(掠取)한 다음 눈에 띄는 자들이 있으면 토살해 버리고서는 3일을 감주에 머물렀는데, 티무르가 시력이 많이 약해지고 몸이 좋지 않아 잠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감주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거의 2만의 군사를 잃었으나, 개전을 승전으로 이끌었으니 손실쯤이야 크게 눈여겨 둘 게 못되었다.
이제 티무르의 군대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막내아들이자 용장(勇壯)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샤로흐가 거의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만큼 포악하지는 않았으나, 종교로서의 이슬람과 일족의 율법으로서의 몽골 혈통(血統)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이교도의 땅이자 몽골의 대칸을 패퇴시킨 명나라를 정벌할 강력한 동기를 아버지만큼이나 느끼고 있었다.
감숙성은 이제 그 시작일 뿐이었다. 1406년, 명 영락 4년, 음력 1월 4일 정초를 맞이해서 한껏 들떠 있던 감주성은 20만 티무르 대군에 의해 무너졌다. 3만의 감주위 병력이 모두 손실된 것에 비해, 티무르군의 피해는 경미해 겨우 2만 남짓이었다.
삼 일을 감주에서 머무른 군세는 이내 서안(西安)을 향해 말굽을 돌리니 1월 7일의 일이었다. 선봉에는 티무르의 막내아들 샤로흐가 서 있었다.
1406년 맹춘(孟春)
조선국 평안도 안주목(安州牧).
“적의 병세(兵勢)가 강 맞은편의 정주(定州)에 이르러 성을 취하고 주둔에 들어갔나이다.”
척후(斥候)를 나갔던 병사의 보고에 조사의는 침음성을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썩 골치 아프게 된 모양이다.
8만이 넘는 명군의 군세가 정주에 육박했다는 말은 곧 조사의 자신이 있는 안주가 최전방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다.
명군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보총으로 무장한 2만의 제1진위대는 백 리 밖 평양에 있었고, 이곳 안주에 지금 주둔해 있는 동북면의 기마병과 보병들은 안주를 공격하느라 손실을 입어 이제 1만 6천 남짓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적세(賊勢)와는 청천강이라는 자연 방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고, 적군이 강을 넘어오더라도 농성할 수 있는 요건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겨울이 막 물러가는 참이었고, 이 계절의 청천강은 수심이 얕고 물이 적어 마음먹고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진격해 들어올 수 있을 터였고, 겨우 1만 7천의 병력으로 8만이 넘는 군세가 공성을 하고 들어오면 조사의로서는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이빈과 이천우도 겨우 수천의 병력밖에 없었기에 조사의의 2만 병력에 못 이기고 성문을 열고 말지 않았던가. 게다가 안주성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우선은 다른 방책을 강구(講究)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조사의는 변현을 불러다가 전갈을 쥐어 주며 말했다.
“변 공께서는 평양으로 가셔서 고 참장에게 이 형세를 알리고 병력의 지원을 요청하시오. 성이 적들에게 떨어지기 전까지만 이곳 안주에 도달할 수 있으면 될 일이오.”
“알겠습니다. 호군(護軍) 서넛만 붙여 주시면 지금 당장 출발해 저녁 무렵까지는 평양으로 들어가 서찰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소.”
변현은 그 길로 바로 안주성을 나와 평양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두어 고을을 지나치면 바로 평양인지라 쉬지 않고 달리니 변현이 조사의에게 말한 대로 저녁 무렵에는 평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
포와 총으로 성을 두드리며 함락시켰기에 평양성의 외성은 아직도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고 보수를 다 마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변현은 남문(南門)으로 들어서 정령(正領)의 품계를 찍은 목패(木牌)를 보여 주고서는 외성 안에 들어선 진중(陣中)으로 찾아가 고상온을 뵙길 청했다. 안주의 조사의에게서 급보가 왔다기에 고상온은 지척을 두지 않고 바로 변현을 독대했다.
“명군이 이미 정주를 점령하고 청천강을 넘을 시기만 보고 있단 말이오?”
고상온은 생각보다 빠른 명군의 진격에 과히 놀랐다.
이제 막 봄으로 들어섰으니 보급선을 정비하고 북쪽에서 장기전을 수행할 기반을 굳히고 날씨가 풀리면 남쪽으로 진격하리라 생각했는데, 빠른 속도로 진격해 일찌감치 승기를 잡고 전쟁을 끝낼 요량인 듯싶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안한 보급선과 병력의 소모를 계산치 않고 이렇게 행동할 수 없으니 그만큼 조선군을 빠르게 진압하고 이 전쟁을 일찌감치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동정장군 양영이 강수를 둔 것 같소.”
고상온이 미간을 좁혔다.
변현은 숨을 고르고서는 말을 이었다. 먼 길을 말을 달려온지라 아직도 몸이 죄 편치 않았다.
“군세가 들어왔다는 10만보다 준 것으로 보아 분명히 정주 이북에 배후 진지를 하나 구축해 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폐주의 일당이 이미 그곳에 합류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폐주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 없이 거침없이 내려온 것이 설명이 되나이다.”
“변 공의 말처럼 그럴 수도 있겠소이다.”
고상온은 이 변현이라는 자가 지모가 꽤나 뛰어난 편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세훈이 특별히 조사의에게 붙여 주었을 것이고, 조사의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들어다 쓰는 것이다.
고상온은 바로 이 변현으로 하여금 계책을 하나 주어 명군을 상대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평양은 경기와 삼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장 중요한 성읍이라 이곳을 비우고 병력을 쉬이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적어도 강원도의 제2진위대가 출진할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그 준비가 완료되어 제2진위대가 북상한다면 평양성을 인계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책(策)을 쓸 수밖에 없겠소.”
고상온의 말에 변현이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견벽청야의 책이라는 것은 소위 청야전술이라 불리는 것으로 보급선이 길어 곤란한 적이 깊숙이 들어오면 주변에서 혹여 얻을 수 있는 곡식을 모두 파기하고 소민(小民)들은 모두 성채나 산중으로 피신해 들어가 방비가 단단한 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군세를 움직이며 소모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하는 계책이었다.
“이 전란으로 인해 올해의 서북면은 소출을 기대할 수 없게 될 일이니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돌아가시는 길에 각 고을의 판관(判官)들로 하여금 평양 이북에서 안주에 이르는 모든 읍락의 전답과 가택을 비우고 남은 곡식을 충분히 챙겨 주변의 농성 가능한 성이나 여의치 않거든 산중으로 숨어 있으라 하시오. 명군을 막아내는 대로 바로 안전히 식읍으로 돌아오게 조치할 터이니 최대한 철저히 일대를 비워야 할 것이오.”
“옛 글을 보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 술책을 사용하여 우문술(宇文述)을 물리쳤고 전조에서도 거란과 몽골이 진격해 들어올 때 이 계책으로 효용을 보았으니, 모두 지금 명군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서북면의 길이올시다. 지금에 있어서는 고 참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계책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변현은 쉬이 납득했다.
“우선은 평양부중을 함부로 비울 수가 없소. 지금 성의 방비를 마치지 못하고 이곳을 버린 뒤 안주로 가게 되면 혹여 패했을 경우에 뒷일을 전혀 방비할 수 없소. 이곳이 뚫리면 개성까지 명군을 막아설 아무런 군세가 없소이다. 우선은 강원도의 제2진위대가 올 때까지 성벽의 비중을 단단히 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우선 비축해 둔 보총 500정과 천자총통 5문,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숙련된 병사 백여 명도 돌아가는 길에 같이 보내겠으니 우선은 이 계책대로 실행하여 시간을 좀 벌어 주시오.”
고상온의 말에 변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알겠나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의 병세가 강하니 안주성을 감싸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아마 사흘을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고 참장께서도 부디 안주를 염려하여 조정에 상계해 빨리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염려 마시오. 나라의 존명이 달린 일인데 어찌 염려치 않겠소이까. 오늘은 늦었으니 하룻밤 머물고 내일 일찍 출발하도록 하시오.”
“아닙니다. 적이 안주성 지척에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정한 바대로 계책을 행하고 알려야 할 터이니 저는 이만 물러가 바로 출발하겠나이다.”
변현은 단호했다.
고상온은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기에 밤이 다가오는 시간이나 변현을 내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변현은 돌아가는 길에 강서(江西), 증산(甑山), 숙천(肅川), 영유(永柔), 순안(順安), 개주(价州)의 고을들을 들르며 지방관을 만나 이른바대로 계책을 시행하도록 독촉하고서는 서둘러 안주를 향했다.
이 고을들은 모두 적에게 패해 안주를 잃게 되면 곧장 평양으로 향하는 방향에 있는 고을들이라 혹여 이곳에서 명군이 보급을 취하게 되면 전황(戰況)에 좋지 않을 일이었다. 거기에 평야를 끼고 있어 서북면에서 나오는 소출이 거의 이 고을들에서 충당되는지라 적들을 지치게 만들려면 이 고을들을 비워야만 했다.
“강 참장이 이른바대로 돌아오는 길에 조치를 취하고 왔나이다.”
변현이 안주로 500의 보총과 몇 문의 포를 들고 오자 조사의는 기대했던 평양 주둔의 병력은 오지 않았으나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김세훈에게 한성과 개성을 내어 줄 때 이 보총의 위력을 실감했던지라 우선은 수성하는 일에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니 큰일이오.”
그러나 조사의는 과연 자신들의 힘만으로 명군을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는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그 염려하는 마음은 변현도 마찬가지이나 지금은 조사의를 다독여 장기간이라도 버틸 수 있는 의지를 북돋아 줄 필요가 있었다.
“우선 적들이 청천강을 넘기 전에 성 안에 식수와 식량을 충분히 비축해 두시고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성벽을 보강하고 수성하는 데에 만전을 기하면 될 일입니다. 혹여 지원군이 늦더라도 적군은 계속 이곳 안주에 붙들려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성을 포기하고 평양을 향해 들어설 수도 있나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방이 깨끗이 비워졌으니 가는 길에 아무런 식량도 취할 수 없고 평양으로 가면 성벽을 끼고 수만의 보총병과 수십 문의 대포가 기다릴 뿐이니 너무 심려치 말고 이 곳 안주를 방비하는 일에만 신경 쓰시면 될 일이나이다.”
조사의는 그렇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변현으로 참모(參謀)를 삼아 성을 지킬 자세한 계책을 궁리토록 하고, 강현을 불러다가는 고상온이 보내 준 500의 보총을 병사들에게 주어 훈련시키도록 하고, 함께 보내 준 100명의 숙련된 병사들은 포를 만지고 강현의 훈련을 돕도록 지시했다.
조사의 그 자신은 아들 조홍과 함께 동북면에서부터 함께해 온 병사들을 독려하며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안주성에서의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명군도 정주 일대를 단단히 하고 청천강을 넘을 준비를 해 일부는 좀 더 수심이 얕은 상류로 돌아오고, 일부는 부교를 놓아 넘어오니 안주성에서 포와 총을 쏘고, 활을 질러 막아 보려 하여도 명군에게 큰 손실은 끼칠 수 없었다.
이들이 모두 넘어와 안주성 앞에 진을 치고 공격할 준비를 마치니, 이것이 1406년 음력 정월 대보름의 일이었다.
1406년 맹춘(孟春)
대명국(大明國)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
고읍(古邑) 서안은 결국엔 염화(炎火)에 휩싸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퇴로는 보이지 않고 서북으로부터 내려온 강맹한 외군(外軍)은 한 치의 명도 허락하지 않고 서안부 성내를 샅샅이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해 정월, 새해를 맞아 한껏 들떠 있던 서안부중은 감주(甘州)의 변을 듣고서는 그 대책을 구상해 보았으나 죄 헛일이었다.
이미 티무르의 군세는 그 시간 촌각을 아껴 가며 인주, 형양 등의 고을에 설치되어 있던 명군의 위(衛)를 모두 쳐부수고 서안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봉대에 있던 샤로흐가 서안 부중에 경고 차 보낸 것은 이전 오스만의 바예지드 1세와의 전쟁에서 가차없이 천 명의 목을 베어 이른바 천살귀(千殺鬼)라는 별명이 붙은 바미야르(Vamiyr)였다.
전형적인 투르크인으로 예전 일 한국의 궁정에서 벼슬을 살던 공족(公族)의 후손인 바미야르는 티무르의 속하로 들어간 뒤로 잔인한 손속으로 그 이름을 날렸다.
이번에도 서안으로 다가오면서 몇 개의 고을을 함락시키며 읍중(邑中)의 저항하는 이들의 목을 죄 베어다가 줄에 매단 다음, 말의 허벅지에 묶고서 달려왔는데, 수천의 기병이 각기 그 뒤에 수십의 수급을 묶고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들을 질겁하게 만들기에 차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가장 질겁 놀란 것은 서안에 있던 섬서성의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의 수장인 좌포정사(左布正使) 악현승(岳炫昇)이었다.
감주에서 온 장계를 받고서는 응천부의 조정에다가는 그저 변경 오랑캐의 준동 정도로 섬서와 사천, 산서의 병력을 모아다가 방위를 단단히 한 뒤 징계하면 될 것이라고 주청(奏請)했었는데 막상 그 실체를 마주하니 오금이 저려올 정도였다.
그것은 섬서의 군대를 일괄하는 섬서 도지휘사(都指揮使) 정석(鄭晳)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지금 그의 휘하에 5만의 병력이 있다고는 하나 도무지 저 기세등등한 16만의 대군을 보니 막아낼 자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 감주에 들이닥쳤을 때는 20만의 대군이었다고 하나, 감주성 전투와 그 이후 이어진 노략전에서 군세를 조금 잃은 듯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을 끼고 있다 한들 5만의 병력으로 16만을 방어하기는 무리수가 있었다.
악현승과 정석은 급한 대로 안찰사 (按察司) 장익기(張益基)와 참정(參政) 상약(尙躍) 등을 모아다가 급히 회의를 주재해 보았으나 도무지 회의에서 얻은 것은 없고 죄 헛물만 켜다가 결국 파하고 말았다.
섬서라는 성 하나를 맡아 조정에서 출사해 나온 방백(方伯)들이 부끄럽게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우선은 막아 보는 수밖에 없는데 패배는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응천부에다 파발을 날려 조정에서 군대를 내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는데, 상비(常備)로 가용 가능한 병력인 10만의 군세는 지금 조선으로 넘어가 있으니 지방에서 병력을 충원해 이곳으로 올 즈음이면 모든 것은 끝나 있을 터였다.
“결사(決死)로 맞서는 수밖에 없소. 지원 병력에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우선은 막아내도록 합시다.”
도지휘사 정석이 씁쓸한 듯 말했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여 그저 묵언(默言)의 동조만을 보내고 있었다. 야전(野戰)에서 패해 퇴각하는 것은 나중에 도망친 것에 대한 변명거리라도 있으나 성을 끼고 앉아 있다 적에게 놀라 성채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그저 문책감밖에 되지 않았다.
수성하는 자가 어찌 밖의 군세를 겁낸다고 성을 버리고 도망치겠는가. 이제 와서는 다 부질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우선은 최대한 주어진 병력으로 더 이상 내륙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티무르군을 막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첩목아(帖木兒, 티무르)라는 적의 수괴(首魁)는 근래에 들어 서역제방(西域諸邦)에 이름을 떨치고 무릎을 꿇린 괴수라 하오. 그 군세가 막서(漠西) 전역에 등등하더니 그 병력을 모두 이끌고 온 듯하오.”
악현승은 말을 삼키려다 말고 이내 이었다.
“그러니 이곳 섬서의 병력으로 서안을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을 듯하오. 이렇게 뒤늦게 방책을 세우는 우리는 이미 부끄러운 꼴을 면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이곳 서안은 섬서에서도 가장 동남에 있어 이미 적의 군세가 지척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섬서의 주현(州縣)들이 모두 고립되거나 무너졌다는 이야기올시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태는 엄중했다.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하남(河南)과 호광(湖廣)의 수백의 거읍(巨邑)들이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되고 마는 일이다.
“우선은 오늘 여기에 혈서를 쓰고 죽기를 각오해 적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겠소. 우선 악 포정사께서는 상주문(上奏文)을 하나 지어 휘하의 검매(檢枚) 하나로 하여금 황도(皇都)로 이 사정을 알리도록 하시는 게 좋겠소이다.”
안찰사 장익기의 말을 악현승이 가납하여 혈서가 쓰여지고, 파발은 남경 응천부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바미야르를 내어 보내 시위하던 선봉대장 샤로흐가 직접 샴시르[曲刀]를 빼어 들고 감주에서 요구했던 것처럼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조공을 바치거나 몰살을 당하거나의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서안의 관료들과 군대, 백성들은 성 문 밖에 있는 대군을 향해 전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티무르의 본진은 다음 날 성 외각까지 이르렀다.
처음 바미야르가 시위하는 샤로흐가 서안에 도달했을 때는 얼핏 보기에 4, 5만에 불과했으나, 천천히 후방을 약탈해 가며 행군해 온 본진이 다다르자 그 숫자가 물경 20만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부터 끌고 온 대군은 큰 손실 없이 서안까지 이르러 있었다.
“적에게 투항을 권유해 보았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티무르가 도착하여 진을 꾸리자 샤로흐는 지체 없이 아버지를 찾아와 보고했다. 티무르는 장기간의 행군에 지친 듯 노쇠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알라의 말을 섬기지 않겠다는 자들은 필요 없다. 거부를 한다면 늘 그래 왔듯이 그들의 가축과 여자와 물건만 취하면 될 일이다. 소아시아에서 기독교도들에게 했듯이 말이다.”
티무르가 말하는 기독교도들이란 4년 전인 1402년,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와 전쟁을 벌이던 당시 오스만의 도읍 부르사를 약탈하고 소아시아를 휘젓던 중 로도스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 스미르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스미르나의 수사총독(修士總督) 기욤 드 문트에게 그와 스미르나의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죽을 목숨을 사해 주겠다고 티무르가 으름장을 놓았으나, 결국 이들은 저항하여 티무르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오스만 술탄이 7년간 공격 끝에도 얻지 못한 스미르나를 티무르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정복했다. 무슬림들은 신을 찬양하며 성읍으로 들어가 원수의 머리를 감사의 제물로 바쳤다.”라고 평한 이도 있었다.
무함마드 이래의 비교적 온건히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 주었던 칼리프들과는 다르게 이 몽골 혈통의 유목 전사인 티무르는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강요를 아무렇지 않게 피정복자들에게 하는 이였다.
같은 무슬림들이 다스리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소아시아나 러시아에서 기독교도들과 충돌했을 때는 반드시 종교를 문제 삼아 정복의 구실을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델리의 술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관대하다는 이유로 인도로 진격하여 북 인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약탈한 뒤 돌아올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이교도의 본산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경내(境內)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개종을 요구하는 것은 티무르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전쟁 명분이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서안에 행하라고 아들 샤로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도시는 큰 성읍이라 군대로 짓밟으면 저희 또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알라께서는 이유 없는 살인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전장에서는 거침없으나 막후(幕後)에서는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아 오던 샤로흐였다.
그는 굳이 20만 대군을 서안성 하나를 초토화시키는데 필사적으로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티무르는 눈을 부라리며 강경하게 아들을 다그쳤다.
“네놈이 이제 나이가 차더니 그간의 공훈(功勳)을 믿고 아비에게 기어오르는구나! 이것은 내가 해 온 방식이오, 신께서는 지난 40년을 그렇게 내 어깨 위에서 지켜 주시며 내가 하는 일을 모두 허락하셨다! 내가 살아온 것이 신의 뜻을 증명해 주거늘 너는 어째서 내 말에 토를 다느냐! 네가 내 궁중의 건방진 자식이로구나!”
티무르의 벽력성에 샤로흐는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용서하십시오. 말씀하신 바 받들어 한 치 다르지 않게 시행하겠나이다.”
“그래. 그렇게 해야 나의 아들이다. 내게 인정받는 아들들이 내 땅과 유산을 분취(分取)할 수 있다. 너는 너 스스로 내가 성취한 것들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해.”
늙은 티무르의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찌그러져 갈라졌다.
막사 안에서 가죽 담요를 칭칭 감고서 찡그린 얼굴로 술을 들이키는 이가 바로 그 위대한 정복자였다.
샤로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 눈여겨 두고서는 간단한 군례를 취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바미야르, 이제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 이상의 타협 없이 성을 공격하겠다.”
“이제 곧 밤이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초원을 달리던 이들에게 낮눈과 밤눈이 따로 있고 말을 달리다 눕는 시간이 따로 있더냐. 지금 즉시 전열을 가다듬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내 서안성 밖에 진을 친 티무르의 군영 위로 뿔 나팔 소리가 길게 퍼지고, 동물 가죽을 팽팽하게 당겨 만든 북과 구리 나팔의 기이한 페르시아풍의 진군 신호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공성전은 20만의 군세가 서안성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지치지 않고 공격을 하니 이내 채 이틀이 지나지 못해 함락의 조짐을 보였다.
전투의 승패를 가로지은 결정적인 계기는 서안성에서 참정(參政) 상약(尙躍)이 몰래 도망치려다가 바미야르 휘하의 병졸들에게 잡혀 온 것이었다.
샤로흐는 이자를 직접 데려다가 심문했다.
“네가 저 성의 수뇌인가?”
“그렇지 않소. 나는 그저 성 안에서 사무를 책임지던 관리일 뿐이오. 저 안에는 아직도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과 이 지역을 책임지는 높은 관리들이 있소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해 보려 도망쳐 나온 상약과는 달리 악가(岳家)와 장가(張家)는 아직 안에 남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럼 네가 모시는 이들도 아직 남아 싸우고 있는데 너는 홀로 목숨을 부지해 보려 이렇게 도망쳐 나온 게로구나.”
“나, 나는… 그,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시오!”
“목숨이라…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뭐든지……!”
그러나 상약은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할 수 없게 되었다.
샤로흐가 고개를 가로젓자 바미야르가 뒤에서 그의 목을 쳐 버려 더 이상 구명할 생명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샤로흐는 그 시체를 몇 조각으로 나누어 투석기에다 넣고서는 성 안으로 던졌다.
높은 관리가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기세가 꺾일 판인데, 그 도망이 성공하지 못하고 죽어서 몸이 찢긴 채로 성안으로 되돌아오니 그만 서안성의 병졸들은 사기를 급격히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공세였다.
16만 대군이 성벽에 달라붙어 이내 함락시키고 성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니 성 안의 관리들은 이내 샤로흐의 포로가 되어 티무르가 보는 앞에서 처형되고, 성안에 있던 병정들과 남자들도 모두 도륙되었다.
여자들은 겁간당하거나 반항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성내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서안성을 얻는데 티무르 군의 손실은 겨우 3만이었다. 섬서성을 휘젓는 동안 도합 7만의 군세를 잃었으나 그러고도 여전히 13만의 군세가 명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시시각각 진격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3일 밤낮으로 서안성이 불타니, 이 서안성은 곧 옛날의 장안이었다.
이날의 일은 후한 말에 이각과 곽사가 동탁이 죽은 뒤 성으로 난입해 불을 태운 뒤로 그 고도(古都)가 겪은 많은 참화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무수한 전각(殿閣)과 성루(城樓), 당송(唐宋)으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기물(奇物)과 전적(典籍)이 한 줌의 재로 변하니 옛 한당(漢唐)의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처럼 비참한 지경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406년 중춘(仲春)
조선국 한성부.
동정장군 양영이 8만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청천강을 넘어 조사의가 지키고 있는 안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단 소식이 한성까지 들려온 것은 음력 1월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언젠가 소식이 들려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 강원도의 제2진위대는 출정할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평양에서의 병력 교대가 이루어지고 제1진위대가 전방으로 나서 안주성을 돕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세훈은 장계를 잡고 있는 손을 꼭 쥐었다. 갑작스러운 명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준비를 서둘러 진행했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어 안주성이 위기해 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만약에 안주가 뚫리면 평양까지는 지척이었고, 평양마저 내어 주고 나면 한성까지 명군을 막을 군사력이 없었다.
삼남의 진위대들은 명목상 편성에 지나지 않았고, 보총이나 포의 지급도 거의 되지 않은데다가, 이들을 한성으로 불러 모을 때쯤이면 이미 전쟁의 승패가 가늠되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합하. 참모부 대장(大將) 여산백(礪山伯) 송거신(宋居信) 경이 뵙기를 청하고 있나이다.”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나장이 불러 외치자 세훈은 송거신으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였다.
30대 후반의 한창 나이의 호인인 송거신은 거침없이 세훈의 맞은편에 털썩 앉고서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시위대를 보내시지요.”
“시위대를 말씀입니까?”
“이 상황에서는 도성을 따로 방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소이다. 합하께서는 강원도의 진위대가 준비가 되면 평양으로 보내려 하셨소만, 강원도의 군적(軍籍)이 제대로 되어 있질 않아 목표한 병력을 아직 모으지 못했으니 우선은 징집이 완료되고 훈련도 끝난 시위대를 평양으로 보내고 평양의 진위대를 안주로 보내셔야 할 일이외다.”
세훈이 송거신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그른 구석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말 한마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세훈은 이 송거신이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젊음의 기백과 기력은 이제 예전 같지는 못하나,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이제 패기와 지혜를 가득 품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말 한마디 하는 데에도 신중함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송 대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듣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합하께서는 아직 나보다 젊으시니 이런 말씀 드리기가 그렇소만, 사람은 나이를 먹어야 제 구실을 하는 법이외다. 그리고 어차피 강원도는 부족한 병력이나마 이제 뺄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소이다.”
“강원도의 병력을 뺄 수 없게 되었다니요?”
“방금 제2진위대에서 참모부로 온 파발이 전한 바에 따르면, 폐주의 맏이 양녕군이 명군에게서 병사 수천을 받아 동북면을 휘젓고 이제 강원도로 진군하려 한다고 하외다. 조사의가 안주로 들어갔으니 주인 없는 땅을 휘저으며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구휼하는 시늉하며 기세가 등등하다 하오.”
“그렇습니까. 이거 일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모양입니다.”
세훈은 한숨이 나왔다.
물론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놓고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전혀 고려치 못한 의외의 변수들이 허를 찌르고 있었다.
특히 이방원이 탈출에 성공한 것이나, 그 아들 양녕군이 명군에게서 병력을 빌려 동북면으로 진격할 것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사의를 안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동북면을 지키게 한 다음, 평양 쪽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해서 명군이 오길 기다렸다가 그곳에서 맞았을 것이다. 그러면 애꿎은 병력을 전방 너머로 보내 분산시키지 않고도 후방을 튼튼히 해 명군을 협격(挾擊)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사람이 머리를 굴려 본다 하나 세상 흘러가는 흐름을 뒤흔들 수는 없는 노릇인 듯합니다.”
세훈의 푸념에 송거신은 걸쭉하게 웃었다.
“이만한 것도 충분히 잘하셨소. 합하께서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구려. 촉한의 제갈량도 끝내 한중을 넘지 못했고, 지모가 그렇게 뛰어났다는 한신도 제가 팽당할 것은 가늠치 못했소이다. 그 태공망(太公望)마저도 천하를 오시했으나 제 집안은 다스리지 못해 처덕(妻德)이 없었거늘 이만큼 하셨으면 충분하외다. 전쟁은 한 사람의 지모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오늘 이 송거신이가 이렇게 합하께 부족한 머리나마 빌려드리려 오지 않았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말 송 대장이 아니었으면 저는 오늘 패책(敗策)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럼 이 송가의 청 하나만 들어주시오.”
송거신이 느닷없는 제의를 해 오자 세훈은 궁금증이 일었다.
갑작스레 무슨 청을 하려는지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가급적이면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세훈은 오늘 송거신의 머리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위대는 황희가 맡고 있고 그 위의 경사군은 양은계가 책임지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이 애송이들이 도무지 믿음직하지가 못하오. 어차피 비변사에는 합하께서 계시니 내가 직접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가 명군을 맞서려 하오. 부탁이니 합하께서는 이 송가의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정말 가시렵니까?”
“나는 예전 폐주에게 범이 달려들었을 때도 물러서지 않고 이 손으로 때려잡은 사람이외다. 그것이 8만 대군으로 바뀌어도 달라질 것은 없소. 아직 혈기 방자할 나이이니 비변사에 앉아 장계만 들여다보느니 차라리 군세를 이끌고 밖으로 나서겠소. 그냥 장수 하나 전장으로 보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니 합하께서는 윤허해 주시길 바라외다.”
세훈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송거신의 말마따나 비변사의 참모부는 그가 없어도 세훈이 어떻게든 굴려갈 수 있다.
전쟁이 단순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대전처럼 정보 분석을 해 가며 철두철미하게 전략을 짜고 전국 단위로 판세를 조망할 정도의 수고와 인력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계책을 짜내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서는 전방에 뛰어난 장수를 하나 보내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가 주시겠다니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
“폐주가 나를 외척이라 하여 견제를 하니 그에 대한 신망을 잃고 내가 오늘 합하 곁에 남아 있게 되었소이다. 그래서 이렇게 과분한 직책을 받게 되었으니 벼슬 값은 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백(伯)의 자리에 올라 종실을 세웠다 하니 방계 친척들까지 죄 달려와 감읍하고 제당을 지어 주고 조상의 위패를 가져다 모셔 놓고 하는데 그 벼슬 값을 어찌 다 하겠소이까. 이렇게라도 전장에 나가 목숨을 내어 놓고 풀어야 할 일이외다.”
송거신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이내 호탕한 웃음으로 껄껄껄 웃고서는 말했다.
“그럼 이만 이 송가는 물러가 보겠소이다. 합하께서 윤허했으니 따로 금상의 교지(敎旨)는 따로 받지 아니하고 바로 시위대를 이끌고 출발하겠소이다. 경사군의 양은계 부장과 시위대의 황희는 이 송가가 데리고 가도록 하겠소이다.”
“뜻하는 대로 가져다 쓰십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나 확실히 격식 없고 호탕하며 거침없는 사내였다. 그러면서도 행동거지에 신중함이 배여 있으니 세훈은 송거신을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진정으로 같은 내각의 대신 사이가 아니라 수하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렇게 음력 2월 2일, 비변사 참모부 대장 송거신은 경사군 부장 양은계와 시위대 참장인 황희를 대동하고 완전 무장된 시위대 2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다.
송거신은 급한 길을 재촉하여 닷새 만에 평양에 이르렀는데 이미 파발을 받고 준비하고 있던 평양의 제1진위대는 고상온의 지휘하에 안주로 즉시 출격했다.
송거신은 평양에 있지 않고 바로 고상온과 함께 시위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끌고 안주로 함께 나섰다. 그것이 2월 7일의 일이니, 안주성이 공격당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조사의의 군세는 이미 3천여 명으로 줄어 있었고, 지급 받았던 보총 500정은 쉴 새 없이 사용되어 탄약도 이제 다 떨어지고 그나마도 200정 정도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조사의의 동지이자 심복이었던 강현도 적의 활에 맞아 전사하고, 안주성은 오늘 내일 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군은 이때까지도 안주성을 둘러싼 포위를 풀지 않고 있었는데, 한때 서쪽 성벽을 넘어 일단의 병사가 진입하기도 했으나 조사의의 필사적인 방어전으로 결국 포위망을 좁힌 채로 교착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것은 명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이기도 한데, 8만 7천의 군세는 어느덧 공성전 끝에 6만 내외로 줄어 있었다.
이때에 송거신과 고상온이 2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성을 감싸고 있는 명군을 요격하기 시작하니 이내 합전(合戰)이 벌어졌다.
“우선 저 총의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강노(强弩)와 포가 있으니 보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적군을 공격한다!”
양영의 지시에 따라 안주 성 밖 들에서 노출되어 있던 명군은 청천강 하류쪽으로 이동하여 자연적인 엄폐물들 사이로 들어가 강노와 포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송거신이 적이 피하는 방향의 반대를 취하여 고지를 점거하고 포를 설치한 다음 아래쪽으로 포격전을 시작하니, 명군의 포와 조선군의 포가 서로 사정거리는 비슷하나 고지에서 저지로 쏘는 조선군의 포가 상대적인 효율이 우세한데다가, 소포(小砲)의 속도 효율이 좋아 이내 명군의 포가 닿지 않는 이격이 발생했고, 고상온의 계책대로 송거신은 그곳에 보총병들을 3개 열대(列代)로 늘어 세워 교차 사격을 하게 하니 명군은 그 와중에 1만 이상의 병력을 잃고, 양영은 안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미 조사의는 1만 이상의 병력과 강현이란 장수를 잃었으며, 제1진위대 2만과 시위대에서 차출한 5천 병력을 합쳐 안주성을 도우러 출전했던 2만 5천 병력 중 4천여 명이 전사해 도합 2만을 조금 넘기는 숫자만이 명군을 물리치고 안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의가 안주성에서 잘 버텨 주었고, 송거신의 재빠르고 능란한 행동으로 명군에게서 안주성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명군 동정장군 양영은 그렇게 임무를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직 명군은 5만의 병력이 남아 있었고, 양영은 후방이 조금 불안하더라도 더 깊숙이 들어가 평양을 직접 요격하는 길을 택했다. 그로서도 아직 본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그저 조선전(朝鮮戰)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1406년
명(明) 영락(永樂) 4년 중춘(仲春)
대명국(大明國) 경사(京師) 응천부(應天府).
봄이 찾아왔다.
남쪽 바다에서부터 비껴 밀려오는 봄바람이 응천부 성중의 조그만 정원들에도 새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섬서성에서부터 황급히 날아온 소식 때문이었다.
수십만의 병력이 서역에서 넘어 들어와 서안까지 진군해 교전 중이라 하니 황제의 심경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긴급히 영락제가 대전에 대신들을 불러 모아 대응책을 놓고 부심하던 차에 이제는 서안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3일 밤낮으로 성이 불타고 성중에 거하던 백성들은 모두 죽거나 끌려가 사방 백 리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니, 가히 재앙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안의 관료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성을 지키다 죽음을 당했다 했다.
영락제는 그 가공할 만한 위협에 숨을 죽였다. 아니, 두렵다기보다도 감히 천자의 나라에 도전해 들어와 성읍을 휘젓는 그 뻔뻔함에 분이 치솟았다.
“감히 짐을 무엇으로 보고, 그 병력이면 명나라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나를 꿇어앉힐 수 있을 성싶더냐!”
영락제는 분기탱천했으나 티무르는 수천 리 바깥에 있으니 이 분노를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같은 패자(覇者)로서 이 사실을 더 잘 알기에 그렇듯 도발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티무르는 오스만의 술탄과 전쟁을 할 때도 그랬다. 분노한 술탄 바예지드는 이성적으로 판단치 못하고 결국에 티무르에게 패배해 쓴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오죽하면 그 패배로 인해 철창에 가둬져 자신의 애첩이 티무르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고 하겠는가.
영락제의 상황도 지금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도전과 싸워 이겨 오며 산 사람이었다. 때로는 몸을 숙이고, 모자란 척도 하고,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는 척 가장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살아남아 대권을 잡는 하나의 목표로 움직여 온 정치적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조선의 정안공 이방원과도 꼭 닮은, 말 그대로 찬연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삶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이런 티무르의 도전이 썩 달가울 리가 없었다.
살아온 길이 한 길 쉬웠던 적이 없었지만 황제의 위에 오른 뒤로 이런 노골적이고 뻔뻔한 도전에 직면했던 적은 없었다. 방효유조차도 그저 심기를 긁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십만 대군이 이 나라를 노리고 자신의 목을 겨냥해 진군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어찌 분노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이렇게 차가운 분노가 타오를수록 영락제의 머리는 차가워져 갔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패권을 쥐는 자들의 가장 특별한 점이었다.
“내각(內閣)의 학사들을 모두 들라 일러라.”
멀찍이 떨어져 시립해 있던 환관에게 제경(諸卿)의 입조를 일렀다. 이들은 내각 칠경(七卿)이라 하여 이른바 이부상서(吏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형부상서(刑部尙書), 공부상서(工部尙書),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를 일컫는 말인데, 국가 시책에 있어서 중심적인 지위를 맡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해, 영락 4년의 내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부에는 이부 건의(蹇義), 호부 하원길(夏原吉), 예부 이지강(李至剛), 병부 금충(金忠), 형부 여진(呂震), 공부 송례(宋禮), 그리고 좌도어사에 진영(陳瑛), 우도어사에 오중(吳中)이었다.
이중 형부의 여진과 공부의 송례를 제하고 여섯 명의 신료가 영락제의 부름을 받아 그날 저녁 무렵 입궐(入闕)하여 황제 앞에 섰다.
“짐이 나랏일로 근심이 많아 도무지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노라.”
대신들은 그저 머리를 찧고 엎드려 하명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병부상서는 섬서의 일에 대하여 변명해 보아라.”
황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병부상서 금충은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따라 전해져 내려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황제에게 절하고 앞으로 나가 말했다.
“변방의 일이 참람되어 감히 아뢰올 말씀이 없사오나, 다만 섬서의 병력이 적의 기민하고 예측하지 못한 운용(運用)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나 진배없으니, 실로 이 모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단히 방비하지 못한 신의 책임인 줄 아뢰나이다. 신이 병부의 상서를 맡은 것이 올해로 삼 년째에 이르러 충분히 유비(有備)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오늘의 일에 이르렀으니 어찌 죄를 청하지 아니하오리까. 관복을 벗고 백의(白衣)의 뜻으로 엎드리겠사오니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옵소서.”
일이 도무지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책임자로서 옷을 벗고 죄를 받겠다는 이야기였다. 영락제는 도무지 오히려 이런 태도에 역정이 났다.
“짐이 그딴 조잡한 변명이나 듣자고 너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하등 도움되지 않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이 외적을 맞아서 어찌 방비를 해야 하는지 우선 말하라!”
황제의 역정에 병부상서 금충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예부상서 이지강이 앞으로 나섰다.
“우선은 호광과 하남(河南)의 도위(都尉)들의 병력을 한데 모아 적의 군세를 막을 수 있게 해야 하나이다. 서안을 넘어서면 곡창과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고 또한 황도(皇都)에 가까워져 오는지라 적어도 낙수(落水)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하나이다. 하남부(河南府, 낙양)의 동쪽이 흔들리면 국조의 안위가 위험하니 필히 그 서쪽에서 병세를 맞아 격퇴시켜야 할 것입니다.”
“예부상서 이지강의 말이 옳도다. 하나 하남과 호광의 병력을 모두 모아서 대적했다가 혹여 패하고 나면 무슨 병력으로 대체할 것인가? 하남이 넘어진다면 응천부 또한 지척인 일이 아닌가?”
황제의 물음에 이번에는 좌도어사 진영(陳瑛)이 앞으로 나섰다.
부리부리한 수염에 도적 같은 눈매를 지닌 이자는 황제 앞임에도 떨림 없이 간결한 어휘를 사용하여 의중을 고했다.
“회군시키시옵소서.”
“조선에 간 병력을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곳의 병력 10만이면 내지(內地)의 일에 더욱 긴히 쓸 줄 압니다.”
조선으로의 출병은 영락제가 독단적으로 판단해 결정하고 지시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상황이 위급하다고는 하나 물리라고 한 것은 보통 성정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좌도어사 진영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이것을 고해 바쳤다.
황제 또한 그 말에 전연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에 솔깃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조선왕은 어찌하고, 또 그 나라 훔친 도적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황제가 물었다.
그러나 진영은 역시 당황치 않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그 왕은 천조(天朝)로 데리고 와 그 목숨을 구해 줬으니 택은이 될 것이오, 공경이나 대부의 자리를 내려 조그만 식읍을 주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내려 주게 하면 감히 딴소리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변방의 이적(夷狄)의 군왕(群王)은 천조의 준함이 있으면 되는 일이니, 새 왕을 인정하고 책봉하여 천조의 위신을 세우면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될 것이오, 없던 일이 있던 일이 되어 조선은 일단은 천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나이다. 섬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라도 다시 도모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은 내지의 우환을 심려하소서.”
“그렇다. 그 말이 매우 옳도다.”
황제는 진심으로 진영의 말을 따를 요량이었다.
우선은 아쉬운 대로 조선으로 갔던 병력을 다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호광성과 하남성의 병력을 죄 모아서 대응하면 그 수가 대략 10만이 조금 넘었다. 그렇다고 사천이나 산서의 병력을 쓸 수는 없는 것이, 각기 토번(吐藩)과 북적(北狄)을 막아서고 있는 병력들이라 쉬이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병력이 패했을 때가 문제가 되는데 다시 한 번 저지할 병력을 차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을 조금이라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보낸 군대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병부상서는 들으라.”
“하교하시옵소서.”
“동정장군 양영에게 급히 파발을 보내어 긴급히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귀국하라 하라. 본조(本朝)가 지금 촉각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밖의 적보다 안의 적을 먼저 가늠할 때라. 지체 없이 명을 받드는 즉시 귀국하여 서쪽의 적당에게 맞설 준비를 하라 전하라.”
“만세, 만세, 만만세!”
대신들이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가는 긴 파발의 행렬이 도성 밖을 나섰다.
각 고을에 들르는 대로 말을 바꿔 가며 쉬지 않고 달려갈 전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동정장군 양영은 안주에서 손실을 입고 안주성을 포기한 뒤로, 평양성으로 향해 결사적으로 함락시킬 생각으로 행군을 강행하고 있었다.
들이 깨끗이 비워져 볍씨 하나 주워 먹지 못하고 곤궁한 행군이 계속되니 병사들은 지치고 말 또한 힘이 없었으나, 양영이 판단하기에는 이제는 돌아가거나 평양을 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장수로서 명 없이 함부로 회군할 수 없으니 이제는 창고가 넉넉하다는 평양밖에는 길이 없었다.
1406년 음력 2월이었다.
1406년 중춘(仲春)
조선국 평안도 순안현(順安縣).
동정장군 양영이 이끄는 명군의 5만 군세는 안주성을 포기하고 남으로 내닫고 있었다.
환국(還國)하라는 파발은 아직도 국경을 넘지 못했으니 양영은 이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한성으로 진격할까 궁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제는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평양성을 빨리 빼앗던가, 아니면, 그마저도 내버려 두고 보급이 없어 조금 고되더라도 한성으로 가능한 빨리 진격해 가짜 왕을 사로잡고 대신들을 포획해 조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능사였다.
그렇게 된다면 안주고 평양이고 크게 중요해지지 않는다. 조정을 손에 넣는다면 그때는 본국에 좀 더 병력을 요청해도 될 일이었다.
‘고된 길이긴 하나,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한성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들이고 마을이고 죄다 비웠으니 어차피 성을 공략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취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평양성을 공격하게 된다면 군사를 크게 잃고 더 이상 남쪽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크게 화를 자초할 일이다.’
양영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진중의 장수와 책사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양영에게는 이격(李格)이라는 장수가 그 휘하에 있었는데, 그 직책은 도사(都司)로서 높은 직위는 아니었으나, 양영은 그 기재(奇才)를 아껴 중히 쓰고 있었다.
그 이격이 상관 양영의 생각을 깊이 듣고서는 말했다.
“지금 평양을 버리고 한성으로 들어갔다가는 양쪽에서 협공을 맞아 크게 패할 수가 있으니 우선은 다시 청천강을 넘어 돌아가 남겨 두었던 군세를 합쳐 전열을 정비하고, 요동에서 보급을 받은 후에 다시 도모하시는 게 어떠할지요.”
이격의 말은 합당한 것이었으나 이미 전승에 대한 압박을 조금씩 받고 있던 양영의 귀에는 크게 차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그른 말을 한 적이 없는 이격인지라 그 말을 따를까 한참을 고민해 보았으나, 결론은 이대로 군세를 후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적군의 주력은 평양과 안주 사이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 빠르게 이탈하여 한성으로 들이닥친다면 그곳은 병력이 비어 있어 감히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조선군의 정확한 병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양영이었으나 그가 파악한 것만큼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미 도성과 경기를 방어하던 시위대를 빼다가 평양으로 보내 버렸으니, 이미 한성 근역은 지킬 군사가 없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마 이쯤에서 한성으로 진격했다면 양영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것을 얻었을 것이고, 아마 이격의 말을 듣고 군세를 물렸으면 적어도 큰 손실 없이 명나라로 회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패책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평양성 지척인 순안현의 읍에 이르러 그곳에서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군사를 하루 머무르게 한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으니 우선은 하루 머무르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양영의 말에 이격은 불쑥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는지라 우선은 양영의 말을 따라 막사를 꾸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순안현의 읍내는 백성들이 급히 피하느라 마저 못 없앤 양식 따위가 조금 있어 명군의 병사들은 간만에 요기라고 할 만한 것을 입에 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이런 식량도 죄 버리고 빨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식량이란 것도 죄 평양에 남아 있는 양은계가 황희를 시켜 병사를 움직여다 이들이 당도하기 전에 남겨 놓은 것이라는 것을 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배는 부르지 않으나 적어도 간만에 식사를 하게 되면 우선은 진영을 만들게 되고 잠시 유숙하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 잠시 시간을 묶어 두는 것이 양은계의 전략이었다.
이리하여 평양부중에 있던 남은 병력 중 양은계가 1만을 빼내어 순안현 경내의 언덕들 사이에 밤중을 틈타 매복하고, 안주에서도 고상온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 북쪽에서 진입해 들어오니, 이것도 모른 채 명군의 진중은 오랜만의 식량으로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그렇게 허름한 토성으로 없는 것이나 진배없는 순안의 읍성 내외로 주둔한 명군과 이것을 양측으로 감싸오듯이 조여 오는 조선군의 묘한 대척이 깨진 것은 이격의 덕분이었다.
이것은 명군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는데, 혹여나 싶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주변 경계를 이격이 지시하여 병사 수십을 풀어 사방의 십 리를 살피게 했는데, 때마침 좀 더 전진해 매복할 위치를 물색하던 양은계의 병력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양측 모두 본진에서 떨어져 나와 초계(哨戒)를 하던 중이라 서로를 나포하지 못하고, 명군 병사 하나가 목숨을 건져 나와 이것을 늦은 밤 이격에게 전했으니, 이격은 이 사실을 듣고서는 급히 놀라 양영을 찾아가 어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니 태세를 갖추라 종용했다.
이격이 워낙 심각한지라 양영 또한 사태가 급박한 것을 알아채고 병사들을 방비하도록 단단히 일러두고, 그 자신도 무구와 도검을 착용하고 말을 타고 진중을 순시하며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조선군도 상황이 이쯤 된 것을 알자 기습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식량을 깔아 놓은 것도 그 틈을 타 기습을 해 승기를 잡자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전면전으로 상황이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군의 병세는 5만이었고, 조선군은 양쪽을 합쳐 2만이니 과히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것을 노려보는 것은 무기의 우세를 믿는 탓이었다.
그 와중에 양영은 진채를 단단히 하고 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양은계가 나섰다.
남쪽에서 안쪽으로 휜 부채꼴 모양으로 보총대를 앞세우고 선제 사격을 하며 조금씩 군세를 전진시켜 나갔다. 조선군이 하나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적은 아직 조선군이 양쪽에서 협공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양은계는 그 사실이 들통 나기 전에 적의 시선을 한껏 이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요란하게 포와 총으로 적진을 두드리며 천천히 적진을 압박해 들어왔다.
“적은 보총으로 무장했다고 하나 우리는 병력이 우월하게 많다! 겁내지 말고 포를 준비해 적진에 응사하고, 활을 날려 진격을 막아라!”
양영이 크게 소리치며 명군을 다독이자 압박에 조금씩 물러나고 있던 명군이 일세 전열을 가다듬고 응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순안현의 성진을 나와 들 앞에서 회전(會戰)을 펼치려 하고 있는 상황이니, 양영이나 이격이나 도무지 후진은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천자총통으로 진내를 휘저어 놓고, 대신기전으로 화시(火矢)를 날려대나 같이 포를 응사하며 막아내고 있는데, 보총의 사정거리 안으로 진영이 들어오게 되면 일이 힘들어질 것이었다.
양영은 보총대의 진열을 그전에 흩어 버리기 위해 직접 말을 달려 기병들을 끌고 고상온의 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조선군의 가장 앞서 있던 보총대의 진열이 일시에 흩어지자, 명군은 이내 병사들을 전부 돌격시켜 보총의 우위를 흩어 버리고 백병전(白兵戰)으로 전환시킬 계책을 부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에 고상온이 북쪽에서 빠른 속도로 병력을 몰아다가 기병대로 명군의 후진을 뒤흔들며 총포를 쏘아대니 명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지금까지 기세 좋게 앞에서 양은계의 군세를 몰아붙이던 양영과 이격도 그제야 양쪽에서 협격(挾擊)한 것을 알고서는 군세를 재정비하려 애썼으나 이미 늦은 노릇이었다.
승세를 잡은 조선군이 더욱 힘이나 몰아붙이니 명군은 이내 병력수의 우위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크게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거의 적과 맞붙은 곳에서는 백병전이나 다름없어 보총의 우위가 상쇄된 상황인데도, 그 사기가 떨어지고 그간 보급이 부실해 체력적으로도 기력이 쇠한 관계로 명군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우선은 가능한 한 병력을 회수하여 뒤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 지금은 그러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이격이 어렵사리 말을 몰아 양영에게 고하자 양영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디로 물러가야 좋겠는가? 분명히 이대로 군세를 뒤로 물린다면 안주성에 남아 있는 병력이 우리를 매몰하려 들이닥칠 것이다.”
“예전 조선의 세자에게 병력을 내어 준 바 있어, 그가 동북면 일대를 휘젓고 있다고 하니 우선 동쪽의 산세를 넘어 그 병력과 합세해 다시 국경 가까이 철수하는 수밖에 없나이다.”
“지금 계책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다. 그리하도록 하자.”
양영과 이격이 간신히 군사를 한군데 모아 전세를 수습해 보려 했으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기마병 위주로 군세를 수습해 10리 정도 도망치고 나니 남은 군사수가 겨우 4만이 되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1만의 군사를 또 잃고 만 것이다.
그나마 유용하게 쓰던 포를 죄 버리고 포병이나 보병들의 희생이 컸으니 남은 기병대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공성(攻城)도 안 될 노릇이오, 빠르게 도망치는 것밖에는 유용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말을 달려서 개주(介州)의 고을을 지나 영길도로 들어가기 위해 말을 달리니, 다행히도 그곳에는 조선군이 없어 생각보다 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
고상온은 이들 패하고 달아나는 잔당을 뒤쫓을 것을 양은계에게 종용했으나, 양은계는 조선군의 피해도 큰 것을 들어 사양하고서는 평안도의 방비를 단단히 해 다시는 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다독였다.
이 사이에 조사의는 안주성을 나와 건너편의 명군이 비워 둔 정주성을 차지하고, 군세가 다시 꾸려지는 대로 송거신과 함께 명나라의 남은 군세와 폐주가 있다고 하는 이주(理州)까지 진공할 계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명에서 회군을 종용하기 위해 출발한 파발은 이주의 명군 진중에 이미 도착하여 지휘첨사(指揮僉事) 주문(周文)을 만나 이 사실을 전하니, 주문은 도대체 양영과 이격이 군세를 이끌고 패퇴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어 속만 까맣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양영과 이격은 어렵사리 산을 넘어 영길도로 들어서니, 이 행군 와중에도 지친 병사들이 이탈하고 쫓아오지 못해 숨을 거두어 그 군세도 더욱 줄어 있었다.
이렇게 패퇴한 군세를 이끌고 영흥까지 간신이 들어와 그곳에 있던 세자 이제[讓寧大君]를 만났으나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는 깜짝 놀라 그 영문을 살피니 이미 전운이 기울었음을 알았다.
“우선은 제 병력과 합해 이주로 군세를 물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양녕군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는 별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다시 한성을 도모하는 일이 끝나나 싶어 마음은 천 리 벼랑에 서 있는 것 같았으나, 우선은 살릴 수 있는 목숨은 최대한 살려 구명(求命)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양영도 상황이 이러고 보니 더 이상 큰소리치며 적당을 몰아내 주겠노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녕은 병력의 철수를 준비시키고 개마고원의 바깥 둘레를 타고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산도(山道)를 확보하여 살길을 마련했다.
이곳까지 조선군이 들어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늦기 전에 병력만 철수시킨다면 이주까지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렇게 패퇴한 명군과 양녕의 군세가 모아져 산길을 넘어 이주로 돌아가고, 조선군은 승전을 축하하며 전세를 몰아 나머지 잔당을 처리하려 하니 판세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 연대기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