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스파르는 행복했었다.
[뉴토공금] @이히리베루디
가스파르는 행복했었다.
분명 하루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을 터.
그런데 무엇이 제 행복을 이렇게 망그러뜨렸는지,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발점이었다.
가스파르 루 가디테로안.
가디테로안이라는 황족의 성을 가졌기에 누릴 수 있는 권력과, 가져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스파르에게 크게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황제는 하나뿐인 조카를 몹시 아꼈고, 황태자 오르페는 놀 건 다 놀면서도 해야 할 일은 절대로 빼놓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계승 서열은 5위지만 저와 같은 나이대인 가스파르를 약간은 경계하여, 그가 주체적으로 황실의 일을 도맡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스파르, 꼭 그걸 해야겠어? 굳이 네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스무 살이 된 오르페가 웃으면서 그리 말했을 때, 가스파르는 숨은 뜻을 짐작하고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 당연히 안 해도 되지! 그날부로 황실의 일에는 깨끗하게 손을 떼어 버렸다. 사촌이 전혀 욕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오르페는 일꾼을 잃었다며 깊이 후회했으나 이미 배는 떠났다. 덕분에 가스파르는 황족으로서의 이점만 누리며 제멋대로 살 수 있었다.
“가스파르, 잘 지냈느냐.”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며 살던 가스파르에게 두 시간 전, 일이 벌어졌다. 얼굴을 보고 싶다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갈 수 있다는 녹음 정원으로 향했다.
늘 정무에 시달리는 황제가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는 이 정원은, 계절에 관계없이 푸른 이파리와 갖가지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황제는 그 안의 하얗고 작은 저택으로 조카인 가스파르를 데리고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발레리아의 사절단이 왔을 무렵의 일이니, 족히 두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이리 가까이 오렴.”
시력이 좋지 않은 황제가 가스파르를 보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조카의 얼굴을 보면 오래전에 명을 달리한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점점 네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특히 이 머리카락. 아라스의 머리카락은 형제 중에서 가장 밝았지.”
황제가 제 머리를 자주 쓰다듬는 것을 아는 가스파르는 오늘도 그러겠거니 싶었다. 제 정수리 부근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딱 세 사람이었다. 황제, 이발사, 마지막으로 어제 입으로 애무당하면서 제 머리카락을 다 헤집어 놓았던 아일럿.
“…해서, 바로 본론을 이야기해보자면.”
무심코 아일럿에 대한 생각에 잠길 뻔하던 가스파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 엘레노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더구나.”
“엘레노어 님께서…….”
“마땅한 약도 없는 병이니 참으로 힘들 게야.”
발레리아에서 연락이 온 것일까. 엘레노어의 얼굴을 떠올린 가스파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공 엘레노어는 발레리아의 최고 권력자로서, 발레리아 황제의 어머니였다. 자식이 없었던 선황이 동생인 엘레노어의 장자를 양자로서 들인 것인데…… 엘레노어에게는 장자 외에도 아들 하나가 더 있었다. 첫째를 양자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슬픔을 둘째를 기르며 달랬건만, 둘째는 낙마 사고를 당해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죽은 둘째 아들과 가스파르는 퍽 닮아 있었다. 초상화를 보고 나서 가스파르 본인조차 내심 놀랐으니 말이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 이목구비, 하다못해 점의 위치까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열다섯에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열여섯의 어린 남자아이와 만나게 된 엘레노어는 체면도 잊고 큰 소리로 울었다.
후에 가스파르가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에게 동질감마저 느낀 듯하였으나 가스파르는 엘레노어에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안쓰럽기도 했거니와, 서로의 나라를 위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자신에게 아들을 투영하는 엘레노어에게 맞춰 주었다. 그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엘레노어는 존경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었고, 배울 점이 많았으며 그런 부분이 없더라도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대공이 너를 양자로 들이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는구나.”
“저를 많이 아껴 주셨지요.”
워낙 가스파르를 예뻐했던 탓에 열여섯부터 열일곱까지는 발레리아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도 발레리아로 자주 여행을 갔고, 엘레노어도 아프기 전에는 직접 와서 가스파르를 보고 가고는 했다. 양자에 관한 이야기도 그때 나왔다. 가스파르가 외동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쓸쓸히 물러섰지만 엘레노어는 진심이었다. 아마 동생이 한 명만 더 있었더라도 가스파르의 이름 뒤에는 발레리아가 붙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음… 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발레리아를 찾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주겠니? 잘 생각했다. 대공이 기뻐하겠어.”
엘레노어가 건재한 덕에 두 나라의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물론 가스파르도 엘레노어가 걱정되었기에 병문안을 가고 싶었다. 물론 발레리아는 먼 곳에 있지만 나라와 나라를 연결해 주는 이동 마법석이 있었다.
사용에 제한이 있기에 중요한 일에만 사용할 수 있으니, 지금이 딱 적기였다.
“그러고 보니 올기스트가 이제 곧 방학이었던가.”
황제가 물었다. 그리고는 대학의 방학 기간은 어느 정도 되냐고 물어서 가스파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겨울 방학은 정확히 67일이며, 어제가 방학식이었노라고.
“그렇다면 더욱 잘됐구나.”
“……?”
무엇이? 가스파르가 의아한 기색을 띠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발레리아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오너라.”
궁금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스파르는 편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교류회에 대하여 드리는 말씀’ 편지의 서문에 쓰여 있는 글씨가 가스파르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교류회? 왜 저에게 이런 걸 보여 주시는 거죠? 소리 내어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하는 가스파르에게 황제는 악의라고는 전혀 섞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너라면 교류회를 이끌기 충분하지. 그 김에 엘레노어와 함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느냐.”
“제… 가 말입니까.”
“그래, 가스파르.”
교류회라 함은 두 나라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지식을 교류하는 모임이었다. 귀족이나 관리는 물론이고, 예술가, 학자, 기술자, 학생, 마법사, 그들이 모여 서로의 지식을 나누고 받아들이는 두 달 남짓의 기간. 작년에 하지 않았으니 올해 할 것이라고 얼핏 생각하긴 했는데…… 문제는 교류회가 이번에는 발레리아에서 열린다는 사실이었다.
“대공이 많이 위독하다고 하니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일이 없다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렴.”
“예… 에…… 에?”
가스파르의 머리 위로 천둥이 쾅, 하고 내리쳤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저 외에는 달리 갈 사람이 없었다. 차마 가지 않겠다, 아니 못 하겠노라 말을 어찌할까. 저 말고 누가 엘레노어와 깊은 친분이 있으며, 설령 있다 하여도 저보다는 못할 것이다.
가야만 했다. 가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예전 같았으면 흔쾌히 달려갔겠지만 가스파르에게는 이제 아일럿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는, 그래서 어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던 아일럿 바슬레인이.
*
“여기야.”
청천벽력 같은 황제의 명을 듣기 하루 전, 가스파르는 겨울방학식을 치르고 아일럿의 손을 낚아챘다.
“여기로 들어가도 돼?”
“안 되긴 하는데 너랑 나는 돼.”
먼저 앞장선 가스파르가 온실로 향했다. 아일럿은 의아해하면서도 그 뒤를 잘 따라갔다. 겨울방학이니 온실 문도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스파르는 왜인지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아일럿은 그 점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스파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쪽으로 와.”
그가 걸어갈 때마다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까만 망토가 차가운 바람이 날려 펄럭거렸다. 역사가 깊은 학교다 보니 교복도 다소 고전적인 디자인이었으나, 가스파르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행사가 있을 때만 두르는 망토도 그랬다. 보기 좋았다. 지루하던 방학식 도중에, 아일럿은 간간이 학년 대표로 단상 근처에 앉은 가스파르의 얼굴을 보면서 그 시간을 버텼다. 가스파르도 이쪽을 보고 있었기에 아일럿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짓곤 했다. 그리고는 교장의 지루한 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방학식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거야?’
‘아니, 내일 교수님이랑 약속이 있어서… 오늘까지는 자고 갈 것 같아.’
‘잘됐네. 가고 싶은 곳 있었거든.’
‘교내에서?’
물어보니 가스파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내에서 안 가본 곳이 있던가…? 짐작할 수 없었는데, 예상외로 항상 학생들로 가득했던 온실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히 저와 가스파르 둘뿐이었지만… 아일럿은 가스파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바로 짐작했다.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이 꿈질거렸다. 그는 온실 안쪽으로, 더 깊은 안쪽으로 저를 데리고 갔다. 무엇을 할지는 뻔했다. 그래서 잡힌 손을 빼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생각하고 나니 눈 주변이 화끈해졌다.
온실이라 그런지 외부와는 달리 춥지도 않고 따뜻한 데다, 쾌적하기까지 했지만 주변이 다 꽃과 나무였다. 왠지 야외에서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벌써부터 부끄러웠다.
“여기까지만 걸을까?”
온실 중앙이었다. 작은 분수대를 옆에 두고서 가스파르는 자기 망토를 벗어 수풀 위로 던졌다. 이걸 이런 용도로 쓰다니…! 아일럿은 내심 놀랐지만 펼쳐진 망토는 사람 한 명 정도는 넉넉하게 누울 수 있었고, 수풀은 부드러운 데다 푹신해서 불편할 게 없었다. 망토 위에 앉은 가스파르가 자연스레 아일럿을 이끌어, 제 허벅지에 앉혔다.
“너무 지루했어.”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은 얼굴을 보면서 가스파르는 아, 힘들었다 하고 생각했다. 온실까지 오면서 아일럿의 뺨은 겨울바람을 맞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손으로 매만져보다가 꾹 입술을 눌렀다. 왠지 모르게 두 사람 다 웃음이 났다. 이제는 가스파르의 이런 행동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일럿은 몸을 그에게 기대고는, 제 등을 끌어안은 손에 안정감을 느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으응, 맞아.”
“나 계속 네 뒤통수만 보고 있었던 거 알아? 볼 게 그것 말고 없더라.”
정말 그랬다. 재밌는 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일럿의 머리뿐이었다. 갑자기 온 편지만 아니었어도 아일럿의 옆에 서 있었을 텐데. 저 예쁜 게 혹시 뒤를 안 돌아보려나 하고 계속 보고 있었는데 한 번도 돌아보질 않더라.
“동글동글하고. 새털 같은 머리카락은 살랑살랑거리고. 너는 가끔씩 하품하느라 어깨를 들썩거리고.”
그게 못내 아쉬웠던 가스파르는 한동안 아일럿을 보고만 있을까 하다가, 허리 부근으로 손을 내려서 손아귀에 알맞게 들어오는 허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옷 위로, 그러고는 느릿느릿 옷 속으로. 깊게 파인 등줄기를 손으로 누르면서 위로 올라갔다. 아일럿은 금방 반응했다. 앞을 세우게 되면 처음에는 항상 다리를 오므렸으니까.
“옷 단추, 네가 다 풀어봐.”
엄청난 요구는 아닌데 가스파르가 빤히 보고 있는지라 손을 움직이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도 아일럿은 하나씩 단추를 풀고, 마지막 단추까지 제 손으로 풀어낸 다음 가스파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목이 아프지 않게 깨물렸다. 자국을 남기려고 이러는 거였다. 가스파르는 옷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릴 수 있는 부근까지만 자국을 냈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따금은 짧은 입맞춤만 하고서, 이내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모아질 리 없는 가슴이지만 양손으로 끌어모으면 유연하고 말랑한 살이 손에 잡혔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 이제껏 이보다 더 부드러운 것을 만져본 적이 있던가?
“아으… 읏…….”
그 중앙에 있는 부푼 유두가 특히 예뻤다. 매일매일 귀여워해 주고 나니, 어느샌가 빚어 올린 듯한 형태를 하게 되었다. 다 제 손끝과 혀에서 비롯된 거였다. 살며시 튕기고, 약하게 두드리자 모습이 한층 두드러졌다.
“이제 들어가지도 않네.”
“흑…!”
“이것 봐봐.”
“으, 시… 싫어.”
“싫어?”
통통해진 유두를 손끝으로 살금살금 건드리던 가스파르는 바로 앞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럼 안 봐도 돼. 어떤지 알려줄 테니까.”
뜨거운 공기가 닿자 아일럿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반응을 지켜보면서 가스파르는 검지를 느리게 둥글렸다. 그러다 콕 찌르고 나니 아일럿의 몸에 순간이지만 힘이 확 들어갔다. 놀란 탓도 있었고, 찌릿하게 올라오는 듯한 감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일럿이 짧게 헐떡거렸다.
“내가 너무 잘 길들여놓은 것 같아.”
“거기다… 입술 대고 말하지 마아…….”
“아일럿. 그래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아직 들어가.”
“으읏…!”
“그리고 잘 안 나오지.”
하지만 입술로 물면 작은 살점이 빼꼼 튀어나왔다. 입술을 모아서 꾹 눌렀다 떼어도 그랬다. 다시금 고개를 내민 유두를, 가스파르가 혀를 길게 내밀어 핥아 주었다. 넓은 면으로 핥고 지나가다가 혀끝으로 찔러주자 아일럿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 아으…….”
아일럿의 피부는 가끔 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이 그럴 리는 없지만, 심하게 베어 물면 피가 아니라 꿀이 나오는 게 아닐까.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꽉 깨물어 보고 싶었으나 안 될 말이었다. 관계 도중에 깨물어 주면 좋다고 우는 아일럿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가 날 정도로 깨무는 건 말도 안 된다. 차라리 제 팔을 무는 게 나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가… 가스파르.”
“응?”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살결에 아랫입술을 묻은 채로 대답했다. 묻고 나서도 입을 두어 번 더 맞췄다.
“아까부터, 허벅지에… 음.”
“뭘 새삼.”
“너무 세게 닿아.”
표현이 이상했지만 정말 세게 닿는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 큼직한 것이 딱딱하게 세워져 있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바지 속에 수납되는지, 아일럿은 진지하게 마법석을 사용해서 뭔가 조치를 취하느냐고 물을 뻔했다. 지금도 바지의 천이 높게 솟아올라 있었다.
“…….”
빤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일럿의 귀 끝이 붉어졌다. 가스파르는 그 귀를 살짝 깨물어 보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허벅지에 앉아 있던 아일럿이 약간 당황했으나, 가스파르가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신호를 보내듯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잠시나마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더니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리고는, 가스파르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최근 들어 아일럿은 입으로 하는데 부쩍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스스로 가스파르의 페니스를 입에 물곤 했다. 가스파르는 좋은 선생님이었고 아일럿은 노력하는 학생이었기에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다.
“아일럿.”
제 얼굴만큼 긴 페니스를 아래부터 핥아 올리고 있던 아일럿이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약간 젖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정적인 광경인지라 가스파르의 숨결에 열기가 섞였다. 그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아일럿은 페니스를 천천히 입안으로 넣었다. 물론 다 삼키지는 못했고, 제대로 삼킬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반도 못 되었다. 목젖을 지나기 직전까지가 아일럿의 한계였다. 그래도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성장에 몹시 만족했다. 한 번도 다 넣어본 적이 없다는 건 다소 아쉽더라도.
“…너 이제 되게 잘해. 알고 있니?”
끄트머리만 간신히 물고 끙끙거리던 때도 있었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서투른데도 불구하고 아일럿의 입안은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얼굴이 예뻐서 그랬나, 아니면 축축한 입속에 들어 있던 혀가 유독 붉은 탓이었나.
물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제가 아일럿을 보고 지나치게 욕정해서 그런 거였다.
“이제 그만-”
좀 더 하면서 가스파르의 표정도 보고 싶었던 아일럿은 못 들은 척을 했지만, 가스파르가 손을 뻗어서 다리 사이를 움켜쥐자 뱉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스파르는 발기해 있는 아일럿의 것을 손끝으로 길게 쓸었다. 바지 밖으로 꺼내면 예쁘겠지. 굳이 참지 않았다. 가스파르는 손쉽게 자세를 바꿨다. 얼떨결에 일어서게 된 아일럿은 두 다리로 간신히 서서 가스파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가스파르가 옷 위로, 아일럿의 것을 장난치듯 물었다.
“흐…….”
당연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자극적이었다. 헉, 하고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뒤따라 흐르는 숨마저 발발 떨렸다.
“으읏, 흑… 으읍.”
제 경우를 설명해 보자면 열심히. 그러니까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성실한 타입이라면 가스파르는 굉장히 잘하는데, 잘하는 애가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하, 으으으, 흑, 가… 가스파르으…….”
습한 입안에 제 것을 머금고는 혀로 감싸는 게 느껴졌다.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다.
“아…!”
아일럿은 이 자세에서는 가스파르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무심코 한쪽 팔을 들어서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손등에 눌린 입술이 작은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소리를 작게 냈을 뿐이지 쾌감은 몸속에서 이글이글 끓었다.
“흐으윽, 읏, 으으-”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스파르는 머금고 있던 것의 밑으로 혀를 내려 회음부를 건드렸다. 손가락이 예고 없이 불쑥 파고들었다.
“하, 흑…….”
핥아지면서도, 내부를 가스파르가 어떻게 만져줄 셈인지 몸이 먼저 알고 가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응어리진 듯한 쾌감이 빨리 자기들을 내보내 달라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일순 캄캄해진 시야에서 별이 튀었다. 다른 곳은 건드리지도 않고, 가스파르는 한 지점만 빠르게 긁어댔다. 아일럿의 중심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까치발로 버티다가 옆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빠졌음에도 몸은 느리게 넘어갔다.
“조심해야지.”
“…….”
가스파르는 힘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태연하게 아일럿을 망토 위에 눕혀놓고는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을 잡았다. 자세가 바뀌었으니 더 제대로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퍽 만족스러운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린 가스파르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아일럿은 그 매력적인 입술과, 그 안에 있던 혀로 희롱당했다.
“아아…! 흐, 으으읏, 읍.”
사악, 사악, 가스파르의 혀끝에서 자꾸만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아일럿은 망토를 세게 쥐었다. 그는 구멍 위에도 입술을 눌렀다. 물론 이제까지, 셀 수도 없이… 아니, 할 때마다 매번 당한 일이긴 한데, 한 번도 놀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신음하는 아일럿의 몸에 잔떨림이 일어났다. 얼굴을 가리지 못한 아일럿은 여전히 손으로 망토를 쥐고 버텼다.
“흐으, 하, 아으흐… 힛. 으읍, 흑!”
가스파르의 혀가 빼꼼 내밀어져서 주름을 톡, 톡, 건드렸을 때 아일럿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제 가장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는 혀가 무언가를 핥아먹듯 가볍게 움직였지만 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으읍, 하, 아아, 읏… 흐, 하으…….”
아일럿의 몸은 계속 덜걱덜걱거렸다. 평소보다 더 흥분한 탓이었다. 가스파르가 제 것을 받아들일 예쁜 구멍을 정성스럽게 애무해 주다가도, 아일럿의 표정을 살피는 이유이기도 했다. 좋은 반응을 보이는 아일럿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자신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제가 빚어낸 이 야해 빠진 몸을 기꺼이 감당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반대일 수도 있지만.
“흑, 아아아…! 으흐, 읏, 응…!”
입구를 지분거리면서 왼손으로는 아일럿의 페니스를 쥐고, 비스듬히 기울여서 흔들었다. 커다란 손안에 아일럿의 것이 거의 들어찼다. 투명한 액을 질금질금 흘려보내는 것이 예뻐서 간간이 입도 맞춰 주었다. 다소 흉악하게 보이는 제 것과는 달리, 주인을 닮아 모난 곳 없고 연약한 데다 귀엽기까지 한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평생 박을 수 있는 구멍이라곤 제 입안 하나겠지.
물론 그걸로 아쉬워할 일은 없으리라 자부했다. 내 입이면 충분하지 뭘? 가스파르는 선단을 재차 입술로 물고서 혀의 밑 부분으로, 움푹 파인 부분을 문질렀다.
“……!”
아일럿의 눈이 확 커졌다. 공중에 떠오른 두 발도 곱아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쾌감이 들이닥치자, 무심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너무 자극이 강했다. 순식간에 사정까지 몰리는 찰나, 가스파르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아일럿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하나 당황과는 별개로 놀라지는 않았다.
“너, 또…… 심술 부리지…!”
애를 태우려고 그러는구나. 약간 흐려진 시야로 가스파르를 바라보며 앓는 소리를 내는데, 그가 눈앞으로 손을 뻗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안경테를 조심히 잡아서 들어 올린 가스파르는 천천히 손을 떼고, 선명한 시야 속에서 미소 지었다.
“나 제대로 봐줘.”
비뚤어졌던 안경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가스파르가 아주 잘 보였다.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놀라서 크게 뜨고 말았다. 손가락이 체내로 들어와서 바로 약한 부분을 찔렀다. 갑자기 절정까지, 하지만 미처 닿지는 못하고 굴러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아, 하, 흐으… 읏.”
가라앉았던 몸은 가스파르의 손끝에서 다시 솟구쳤다. 단순히 제 것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움직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일럿이 못 견디는 부분을 집요하게 쓸어올렸다. 허리 아래를 튀듯이 움찔거리던 아일럿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크게 소리를 내었다. 참지 못해 나온 소리가 온실 안에서 울리는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으, 흑…!”
안면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 기는 이내 가슴까지 번졌다. 손가락을 빼낸 가스파르가 아래를 맞대고는, 비좁은 내부를 단숨에 치고 들어갔다. 아일럿은 얕은 통증을 느꼈지만, 익숙한 아픔이 이후에 따라오는 쾌감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으… 하으으, 읏, 흐… 가스파르…… 아…!”
“…아일럿, 우리 어제저녁에도 하지 않았었나?”
녹진녹진하게 풀어진 뒤에 삽입하는 것도 좋았으나, 제 페니스를 받아들일 만큼 느슨해지지 않은 내부를 파고드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가스파르에게도 그랬고, 아일럿 또한 마찬가지였다.
“흐윽, 읍… 하으…….”
제 위에 있는 사람의 등을 꽉 붙잡은 아일럿은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발끝을 세웠다. 잠깐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몸으로 전해지는 감각만 남아서 신체를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제게 일어난 일을 추스르지 못한 아일럿은 더운 숨을 토해내고, 힘이 바짝 들어간 발로 망토 위를 긁었다. 그 발은 가스파르의 다리 어딘가에 턱, 부딪쳤다.
“아일럿.”
그것마저 귀여워서 가스파르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렇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제가 한 질문의 대답은 들어야겠다.
“대답해야지.”
“흑, 아으읏!”
재촉하면서 아래를 찍어눌렀다. 다 빠져나갔던 것이 안을 꽉 채우자 아일럿의 눈이 커졌다. 뭘 대답해야 하는데?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물어본다. 토끼 같은 표정을 보고서 가스파르는 자비 없이 아래를 짓쳐댔다.
“흐아, 아흐으, 읏, 으읍, 흑!”
묵직한 데다 길기까지 한 물건을 거칠게 사용하자 아일럿의 배 속은 쿵쿵 울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던 아일럿이 다급하게 가스파르의 어깨를 잡았다. 움직임이 뚝 멈추고, 똑같이 상기된 얼굴을 한 가스파르가 눈을 맞췄다.
“두 번 말 안 해. 네가 기억해봐.”
“그으… 게, 뭐, 뭔. 아. 하읍. 으, 핫…!”
정답은 어제저녁에도 한 게 맞다는 거였다.
마지막에 빼냈을 때, 둥글게 벌어져서는 정액을 뻐끔거리며 흘리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밤에 있었던 일이 다 꿈이라고 말하는 양, 빠듯해져 있는 것이 어쩐지 야속했다.
“그거… 아, 안, 흐, 흑, 아… 다 빼고, 너, 넣는 거 그마, 안. 아… 흐으으윽!”
어쩔 수 없지. 오늘도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게 해 주는 수밖에. 턱이 뻐근해지도록 힘을 준 가스파르는 말없이 아일럿의 아래를 사납게 쳐올렸다. 귀두가 거의 다 빠져나오려다가 안을 쑤시고 들어가면, 제 배에 문질러지는 아일럿의 페니스가 눈물을 쏟아냈다. 마주 보고 있는 빨간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애원하는 눈이 쾌감에 일그러지고 있는데, 입으로는 그만, 그만하고 힘겨워하는 소리를 낸다.
“멈추면 더 울 거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인 가스파르는 제 몸에 고여 있던 흥분을 아일럿의 몸속에 마저 쏟아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이 예쁘고 좋은 것과 어떤 겨울방학을 보낼까 하고.
여름방학도 그렇게 즐거웠는데, 겨울방학은 얼마나 즐거우려나? 이전부터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제 겨울 별장으로 초대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풍경도 예쁘고, 날도 많이 춥지 않은 데다, 여러 진귀한 물건들이 있어 아일럿과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는 발레리아의 대공, 엘레노어에게서 선물 받은 여러 귀중한 고서들도 있었다.
분명 아일럿도 좋아할 터였다. 선물해준 엘레노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일럿이 원하는 책이 있으면 뭐든 넘겨주게 될 것 같은데 어쩌지?
……제게 닥칠 미래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과거의 가스파르는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
[아일럿.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지게 돼서 미안해.]
그리고 오늘의 가스파르는, 한숨을 눈물처럼 쏟아내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 없었고, 거절하고 싶은데 거절치 못하는 일인지라 아일럿을 거절…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왜 내가 아일럿을 거절해야 하지?
“…….”
차오르는 분노에 펜을 집어던질 뻔했던 가스파르가 가까스로 펜을 붙잡았다. 편지에 잉크가 튀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으므로 다시 편지를 써야 했다.
[아일럿. 갑자기 연락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쓰려니 묘한 기시감이 든다. 과거에 가스파르는 편지를 써야 하는 아일럿의 허리를 잡고 뒤에서 박아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일럿은 고생 끝에 편지를 완성했는데, 그 벌을 지금 받나 보다. 좀 쓰다가도 갑자기 화가 나서 글자가 엇나갔다. 하여 집사를 시킬까 하다가 아일럿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한 글자씩 꼭꼭 눌러 썼다. 그렇게 겨우 편지가 완성되었다.
“학교에 있는 아일럿에게 전해줘.”
“네, 주인님.”
편지를 차분하게 쓸 여유마저 없어서 달리는 마차 안에서 펜대를 잡은 처지였다. 가스파르의 뒤로는 수많은 마차가 따라왔다. 발레리아로 함께 가는 관리들과 엘레노어에게 보내는 선물들을 실은 마차였다. 그것들이 뒤에서 덜걱거리는 소리마저 가스파르의 심기를 거슬렀다. 물론 가스파르는 도중에 마법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서너 명의 측근과 함께 빠르게 발레리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람의 몸이 마법석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다면, 틈이 날 때마다 어떻게든 돌아와 볼 테지만…… 애석하게도 마법석을 사용해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주기는 2개월에 한 번 정도였다. 그 기간을 지키지 않으면 과한 마력을 받게 된 몸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는데. 이 기분으로 발레리아에 가서 과연 일을 잘하고 올 수 있을까.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
“……무슨 일이시죠?”
아일럿은 문을 열기는 했지만 몸을 뒤로 빼고 얼굴만 삐죽 내밀었다. 물론 가스파르의 집사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불편했다. 특히 황태자 오르페라거나…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던지라, 조금 안절부절못하자 집사는 빠르게 편지를 건넸다.
“가스파르 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예?”
“자세한 건 거기에 적혀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셔서 읽어 보시고,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나와서 물어봐 주십시오. 없으시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아… 예.”
편지를 쥔 아일럿은 토끼굴로 들어가는 토끼인 양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집사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아일럿을 기다렸다. 편지를 바로 읽는다면 얼마 안 가서 그가 튀어나오리라고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커다란 눈을 한층 동그랗게 만든 아일럿이 급하게 달려 나왔다.
“가스파르가 바, 바, 발레리아로 갔다고요?”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집사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아일럿은 편지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날벼락이 연달아 가스파르의 머리를 내리쳤듯이, 이번에는 아일럿의 머리를 내리쳤다.
“편지를 보내 주시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답장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후로 집사는 몇 마디 더 말을 했지만 아일럿의 귀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중요한 것은 기나긴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자마자 가스파르가 사라졌다는 거였다. 깊게 허리를 숙인 뒤 돌아가는 집사를 보면서 아일럿은 망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몇 시간 후,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으면서도 똑같았다. 그저 멍했다. 너무 큰일이 닥치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아일럿의 상태가 딱 그랬다.
[교류회는 두 달 정도 진행돼. 그보다 일주일 정도 더할 수는 있지만, 덜하지는 않아. 아마 겨울방학이 끝날 즈음에 귀국하게 될 것 같아…….]
평소 같지 않은 필체였다. 그만큼 가스파르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 것일까.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쓰렸다. 두 번, 세 번,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거듭 읽어 보던 아일럿이 한숨을 푹푹 내쉬다 편지를 집어넣었다.
가스파르와 굳이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한 침대를 썼다. 제가 주목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가스파르는 바깥에서는 거의 아는 척을 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둘만 있는 시간에는 보상을 받으려 했다. 때문에 혼자 있어야 할 시간에는 자연스레 가스파르가 함께였다.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반년간은.
“아일럿, 어서 오렴.”
“아버지.”
“짐부터 풀어놔야지?”
“…네.”
아일럿은 제 방 침대에 홀로 주저앉은 그 순간부터. 몰려오는 적적함에 머리가 멍해졌다. 하필 가스파르가 자고 간 적이 있는 침대여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가스파르의 집사가 내일 방문하겠다고 했으니, 그전에 답장을 쓰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예고도 없이 두 달이라니. 예전에도 가스파르가 갑자기 저를 놓아주면서 그와 떨어진 적이 있었던 아일럿이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스칸다에서 있었을 때는 적어도 가스파르의 몸만 익숙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도 익숙했고, 일상생활 곳곳에 그가 스며들어 있었다. 식사도 그와 마주 보고 했고,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시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반년인데, 그 반년이 너무 컸다. 저도 모르게 비어 있는 옆자리를 지켜보던 아일럿은 가볍게 현기증이 났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비척비척 침대 앞으로 걸어가,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은 아일럿은 스스로에게 계속 그렇게 되뇌었다. 문제될 게 뭐 있겠어? 괜찮아.
*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아일럿은 충혈된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눈만 감아도 가스파르의 얼굴이 떠오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게 좀 가라앉나 싶으면, 몸이 거짓말처럼 달아올랐다. 그로 인해 잠도 설치고, 낮에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밤에는 마음이 심란해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째가 된 오늘. 아일럿은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 하여 늦은 밤 침실을 나와, 금화 몇 개를 들고서 홀연히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막 마구간에서 말들을 씻기고서 들어갈 준비를 하던 룹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등불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귀하고 고운, 이 저택의 도련님이었다.
“룹. 룹, 거기 있어?”
“아이구, 도련님. 여기까지는 웬일로.”
“그게…….”
“……?”
“그게, 있지.”
“아일럿 도련님?”
요즘 따라 어쩐지 퀭해 보였는데, 오늘은 더 심했다. 척 보기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기에 룹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일럿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아일럿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술 마시러 갈까…?”
“예? 아니, 뭐 저야 좋지만.”
“어디 조용한 곳으로.”
“맡겨 주십쇼. 이 나라에서 가장 조용한 주점으로 모시겠습니다.”
스칸다에서도 아일럿과 술을 마시러 갔던 룹은 곧장 마차를 꺼내왔다. 그때도 도련님이 중간에 잠깐 사라졌던 것만 빼고 아주 좋았었다. 술도 잔뜩 마신 데다, 아일럿이 함께 있었던 술자리였기에 집사인 데거에게 술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룹은 곧장 마차를 몰았다. 저택 근처에 있는 주점이라면 룹이 모르는 곳은 없었다.
도련님이 조용한 곳을 원하시니 가장 조용한 곳으로 모셔 가야지.
마차가 도심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경비병들도 자주 돌아다니는 길이어서 치안은 좋은 곳이었다. 룹은 그 근처에서 말을 멈췄다.
“도련님, 여기입니다.”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아일럿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마차에서 내려, 답답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룹과 함께 온 것이 조금 후회도 됐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술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데… 그래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되잖아. 애써 그렇게 생각한 아일럿이 룹의 뒤를 따라서. 술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가스파르 오늘부터 판매]
가스파르를… 오늘부터 판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아일럿이 홀린 것처럼 벽에 붙어 있는 종이로 다가갔다.
“술 이름이 가스파르라고?”
뒤늦게 글씨 밑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술병이었다. 아무래도 술의 이름이 가스파르인가 보았다.
“이름이 독특하지요? 술맛이 그렇게 깊다고 합니다.”
“…깊…… 깊구나.”
룹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가, 홀린 것 같은 표정이 된 아일럿을 보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음…? 왜 그러세요, 도련님?”
“아니, 아냐.”
조건반사였다. 가스파르라는 글자를 보기만 했는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왜 하필 술의 이름이 가스파르인지… 술에 고상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술의 이름이 가스파르라고 하니 왠지 저 술을 먹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일럿은 앞장서서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차림만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손님이었던지라, 점원이 급하게 달려와 좋은 자리로 아일럿을 안내했다. 룹은 어떤 술을 제 도련님에게 추천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 아일럿이 먼저 주문했다.
“가스파르로 드릴까요? 요즘 가장 잘나가는 술입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어요? 꽤 독하다고 하는데.”
“괜찮아.”
가격 때문에 마셔보지 못했던지라 룹은 기대되었고, 아일럿도 다른 의미로 기대가 되었다. 그 뒤로 5분쯤 기다렸을까. 간단한 안주와 함께 하얀색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건 일반적인 술병의 모양과는 조금 달랐다. 가느다란 원통형이었고, 윗부분이 좁혀져 있어서 술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자, 도련님. 먼저 한 잔 하십시오.”
“고마워.”
벌떡 일어난 룹이 아일럿의 잔을 채워 주고는 제 잔도 채웠다. 이내 첫 잔이 두 사람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수가 높은 술이 금세 목구멍을 달궜다. 잠깐 움찔했던 아일럿은 깨끗하게 비워진 잔을 내려다보았다. 룹의 말대로 상당히 독한 술이었다. 가볍게 취기가 돈 아일럿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후 석 잔쯤 마셨을 때는 머릿속이 몽롱하고 생각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 가스파르는 깊게 들어오고, 술인 가스파르는 맛이 깊구나 하고 생각하던 아일럿은 킥킥 웃었다. 그러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감정 기복이 심해져 금세 울적해했다.
“…가스파르…….”
무심코 중얼거리고 나니 술로 붉어진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오르고, 뜨거워졌다. 볼 근처에 손을 대기만 해도 후끈후끈하다. 아일럿은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굵고… 크고… 되게 긴데…….”
다행히도 룹은 이 부분을 듣지 못했다. 멍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아일럿은 술병을 쥐어 보았다. 술병은 두툼했고, 가스파르의 것은 좀 더 두툼했다. 아무래도 가스파르들은 다 두툼한가 보다. 그리고 술의 맛도 아주 좋았다. 혀에 남은 단맛을 음미하던 아일럿은 눈을 끔뻑거렸다. 단것도 좋지만. 물론 좋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입에 넣고픈 마음이 컸다.
“사실 입으로 자주 하고 싶었어…… 요즘 들어서 계속 그랬는데 못 하게 될 줄도 모르고.”
저번에도 더 못 해서 아쉬웠다. 그게 한동안 마지막이 될 걸 알았다면, 좀 더 했을 텐데. 아쉽고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났다.
“입에 꽉 차.”
“도련님?”
“그리고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그거, 기분 좋아.”
“술이 목까지… 들어오지요?”
“어어. 목 여기까지. 그러면 좀 아파. 아픈데 숨이 좀 막히게 되면 좋아서.”
룹은 제 도련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알아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인으로 일해오며 생긴 눈치라고 해야 할까. 본능의 경고라고 해야 할까. 하나 도련님이 말하고 있는 와중에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속에 콸콸 술을 쏟아부었다.
“하고 싶다. 흐…….”
도련님 저는 귀가 없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굵고, 길어.”
그리고 눈도 없죠. 룹은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취기가 돌자 아일럿이 중얼거리는 말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크니까… 좋아.”
아일럿은 한동안 술병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정도 길이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힝힝거리거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를 회상했다. 정말 끊임없이 들어오던 가스파르의 것. 그의 것을 입으로 할 때면, 가스파르도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서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입안으로, 그의 것이 어디까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목까지 들어와서 턱, 막히고 나서야 깨달을 정도로 가스파르는 제 혼을 쏙 빼놓곤 했다.
“…….”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립다. 그런데 아일럿이 그리운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짓궂어지지만 다정한 말투, 기분이 좋을 때면 나른해지는 표정. 가끔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까지. 그 시선을 받고 있다가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양,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리웠다. 어떤 부분이 그리운지 말해 보라고 한다면 쉼 없이 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가스파르의 전부가 그리운 모양이었다. 결론을 내리고 홀로 술잔을 채우던 아일럿은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켰다. 취기가 오른 탓에 숨이 뜨거웠고, 기분은 낮게 가라앉았다.
결국 아일럿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새벽이 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술에 떡이 된 상태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룹에게 부축을 받다시피 하여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침대에 눕고 나서도 아일럿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더 이상 참다가는 머리가 펑,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든 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일 터였다. 아일럿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것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마자 식탁에서 말을 꺼내 버렸기 때문이다.
“저, 발레리아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나름대로 충격적인 선언에 부모님의 눈이 둥글어졌다. ‘아일럿, 뭐라고…?’ 가까이 앉아 있던 아버지가 눈으로 되물었다. 아들에게 여행이라곤 여름에 스칸다로 피서를 가는 것뿐이었는데 그런 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발레리아로 여행이라니. 차마 말을 쏟아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는 부모님을 보며, 아일럿은 마저 할 말을 했다.
“보내 주세요.”
당황하긴 했으나 원체 성격이 무덤덤한 어머니는 짧은 고민 끝에 허락했고, 아버지는 애간장을 태웠다. 왜? 갑자기? 혹시 침대에서 같이 잠들어 있던 남자와 연관이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 애가 발레리아로 가기라도 했니? 질문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평생 해외로 여행 한 번 안 가보고 국내만 떠돌아다녔던 아일럿이 방학을 맞이해, 외국으로 나가보고 싶다고 하니 반대할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몇 시간을 고민하던 아일럿의 아버지는, 그 여행에 룹을 비롯하여 여러 하인을 동행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발레리아에서 머무는 것을 딱 2주로 제한했다. 기간도 짧고 하인도 너무 많이 보내는 것이 아니냐고 부인이 핀잔을 주었지만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 의견을 고집했다.
“대체 왜 그러는데? 아일럿 나이가 몇 살이야. 해외 나가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것도 발레리아인데.”
“뭔가 불길해서 그래.”
“불길하긴 뭐가.”
“왠지 큰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 요새 꿈자리가 뒤숭숭했어. 갑자기 무슨 일이 팍 생길 것 같았다고. 말 같은 데서 떨어지면 어떡해.”
“마차 타고 갈 텐데 무슨 소리람. 겨우 그런 꿈 때문에-”
“어머니, 어머니, 전 괜찮아요.”
아일럿은 아버지의 뜻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불안했던 부친은 룹에게도 아일럿이 위험한 곳으로 빠지지 않게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아내는 뭘 모르고 아일럿이 만나는 사람이 적다며 걱정하고 있었으나, 차라리 적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괜히 심란하게만 만들까 봐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있었던 밀수 사건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가문이 살짝 휘청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불쾌한 거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사촌 중에 자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있는데, 혹시 아일럿과 차 한잔할 수 없겠느냐 묻더군.’
이런 식인 건 그나마 정중한 편에 속했다. 어떤 자는 대놓고 아일럿을 자기 살롱으로 오게 해달라고 말하는데, 더러운 의도가 뻔히 보였다. 차라리 다 망해서 시골로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일럿을 여름마다 스칸다로 피서 보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햇빛에 약한 탓도 있었지만, 사교 시즌을 맞이하여 수도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눈에 아일럿이 띄게 된다면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분명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게 뻔한데 그래서 좋을 게 무엇이던가. 파티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사교계와 엮이는 것도 꺼리는 아일럿이었다. 더욱이 모르는 사람들은 어려워하는 아이이니, 부디 별 탈 없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소박하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들이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과 진득하게 엮여 버렸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
“주인님. 아일럿 님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스파르가 손부터 내밀었다. 집사는 다른 편지와는 달리 봉투를 뜯지 않고 주인에게 건넸다. 제 주인이 봉투를 뜯는 과정마저 즐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이프를 든 가스파르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서 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냈다. 오후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이 그 순간에 겨우 부드러워졌다.
얼마 전, 발레리아에 도착한 가스파르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이왕 오게 되었으니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일단 엘레노어는 크게 아프지 않았다. 그의 건강 상태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 상태 그대로였다. 적어도 지병이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저를 발레리아로 데려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보고 싶다 말씀하셨으면 좋았으련만. 왜 굳이 들통날 거짓말을 하셨는지. 제가 오자마자 거짓말처럼 호전됐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가스파르는 애써 눈치채지 못한 척,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교류회에서는 생각보다 할 일이 더 많았다. 발레리아는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인지라 교류회 외에도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때마다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행사 하나가 있을 때마다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차라리 행사에 시달리다 피곤함에 곯아떨어지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느긋한 밤을 보내는 것이 더 괴로웠다.
아일럿. 아일럿이 없으니까.
제 팔을 베고 누울 사람이 없어서, 그게 너무 허전해서… 저도 모르게 팔을 옆으로 두고 베개를 올려보기도 하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익숙함이라는 게 이리도 무서웠다. 잠자리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고, 마음 한구석은 적적했다.
아일럿도 이럴까?
아니, 제가 이 상태이니 아일럿 또한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도 제 빈자리를 여실히 느끼길 바랐다. 낮에도, 밤에도, 제가 그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면 좋겠다. 저를 떠올리며 끙끙 앓는 아일럿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입이 근질근질해졌다. 콱 깨물어 주고 싶어서. 예뻐해 주고 싶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건 저 혼자만은 아니겠지? 가스파르는 아일럿이 새롭게 보내 준 편지를 읽기 전,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편지들을 꺼냈다.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은 아일럿의 편지를 읽을 때 정도였다. 교류회에서 재능 넘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결국은 일이다 보니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와 대화하는 것도 조금 낫다 뿐이지 어느 정도 긴장을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혹시나 엘레노어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웬만하면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그건 결국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이 될 터였다. 속 편하게 놀기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다음 편지는 언제쯤 받게 될까. 가스파르는 아일럿이 한 자 한 자 고심하며 썼다는 걸 눈치챘기에,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꼴로 편지를 받고 있으니, 답장도 굉장히 빠른 편인데 욕심을 내면… 왜 안 되지?
잘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튀어 버린 제 상념이 우스웠다. 하나 그도 그럴 것이, 절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는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심지어 편지 한 장마저 아껴 읽어야 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이 편지 한 장이 가스파르에게는 생명수 한 모금과 같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펼쳤다.
[가스파르에게]
첫 문장을 보고서 가스파르는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안녕, 아일럿?
[가스파르. 내가 발레리아에 가면 널 만날 수 있을까?]
조금씩 조금씩 읽으려고 했던 다짐이 순식간에 박살 나 버렸다. 두 번째 문장을 보자마자 시선이 절로 밑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에게 여행 허락을 받았어.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지만…… 가는 길에 숙모님도 만나 뵈어야 해서, 육로로 가게 될 것 같아. 별일이 없다면 내일 출발하겠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일럿에게서 온 편지를 거듭 읽어 본 가스파르는 넘쳐나는 기쁨을 견딜 수 없었다. 본인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건만 무심코 되묻는다. 정말? 혹시나 제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여 한 번을 더 읽어 보았다. 그런데 제가 본 게 맞았다. 아일럿이… 아일럿이…… 졸지에 마법석을 아끼게 되어 얼떨떨했다.
이동 시 사용하는 푸른 마법석은 워낙 귀한 물건이기에, 황족이라 하여도 사용할 수 있는 개수가 매년 제한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그걸 아일럿과 편지를 나누는 데 쓰고 있었고, 돌아갈 때 쓸 것만 남겨두고는 다 써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오겠다고? 발레리아로?
가스파르라고 해서 아일럿을 데리고 올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레리아의 해는 너무 뜨거웠고, 괜히 여러 사람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발레리아에 저 같은 놈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누구든 아일럿을 제대로 본다면 손을 뻗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막상 아일럿이 저를 위해 발레리아까지 와 준다고 하니, 한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금세 들뜬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둥글게 부풀었다. 본인이 와주겠다는데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 있을까?
제가 노력하여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고, 햇빛이란 햇빛은 모조리 가려주면 그만이다. 무심코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막으려 입술을 깨문 가스파르는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뚜렷하게 드러난 행복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후에 엘레노어를 만났을 때 그 또한 가스파르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다소 의아해했다.
“가스파르?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구나.”
“엘레노어 님.”
한껏 기분이 좋아진 가스파르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해맑게 웃기까지 하니 주변이 다 밝아지는 듯했다.
“제 친구가 발레리아까지 와 준다고 해서요.”
“…응?”
“와 줄 거라고 생각을 전혀 못 해서… 그렇게 티가 났나요?”
되묻는 엘레노어의 시선이 가늘어졌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살피지 못한 가스파르는 활짝 미소 지었다. 마침 가스파르를 찾는 사람이 있어, 엘레노어를 두고 가봐야 했다. 인사를 하고 멀어져 가는 가스파르의 뒷모습을 보며 엘레노어는 주름진 입가를 묘하게 끌어올렸다. 정말 친구인지는 모르는 일이나, 적어도 가스파르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 보였다.
“이런, 좋지 않게 되었구나.”
가스파르에게 있어 엘레노어는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였다. 엘레노어에게도 그랬다. 문제는, 엘레노어의 감정이 더 깊으며, 깊다 못해 가스파르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양자로 들이는 건 가스파르가 독자인지라 실패했지만, 금세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친척 중에 가스파르가 좋아할 만한 아이를 고르고 고른 것이다. 그중에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가 있다면 양자로 들이고, 빠르게 두 사람의 혼사를 추진할 속셈이었다. 가스파르의 백부인 황제로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터였다. 제가 은근슬쩍 의사를 내비치자 동의하는 뉘앙스로 답장을 보냈으니 말이다. 단, 가스파르가 원한다는 가정하에. 그건 엘레노어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가족이 되고 싶다 해도 가스파르가 원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원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친척 중에 설마 가스파르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게다가 발레리아의 황가는 대대로 미인이 많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가스파르가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던 엘레노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 가스파르의 눈에 띄는 아이가 있을 터였다.
*
[아일럿에게
만약 그 말이 농담이라면, 난 지금 당장 돌아가서 며칠 동안은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가스파르는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더욱이 아일럿에게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 더 그랬다. 아일럿은 편지를 열자마자 여실히 전해지는 가스파르의 감정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였다. 한 장 가득 채워진 내용을 요약하자면 ‘나는 네가 와 준다니 기뻐서 미치겠다. 당장이라도 널 만나러 가고 싶어서, 내가 먼저 탈주할 판이었는데 네 쪽에서 와 준다니 정말 다행이다. 하루라도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 였다.
역시 나 혼자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편지를 잘 접어서 서랍에 정리해 넣은 아일럿은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 사이로 흐흐흐, 하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빨리 입을 다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방인지라 다른 사람이 있을 리도 없는데 괜스레 찔리는 기분이 든다.
어쨌든 가스파르도 동의했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일럿은 예정대로 일찍 출발했다. 도중에 숙모와 사촌들을 만나, 하루 정도 머문 다음 다시 출발하면 되는 것 외에 특이사항은 없었다.
문제는…… 예상보다 더 더운 발레리아의 날씨였다. 하필 발레리아는 여름이었다.
“…아, 더워.”
“괜찮으세요, 도련님? 여기, 물 좀 드세요.”
“고마워어.”
아일럿은 도착했을 때부터 발레리아의 후끈후끈한 열기에 현기증이 났다. 국경에 흐르고 있는 스타이스 강을 넘은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겨울이 여름이 되었다. 발레리아라는 나라가 그랬다. 땅이 넓으니 날씨가 꽤 서늘한 곳도 있었으나 아일럿이 갈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잠깐, 괜히 온 걸까 하고 생각도 해 봤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그나마 시원해졌으니 버틸 만했다. 그래도 저녁에는 꽤 서늘해진다고 하니 낮에는 실내에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고개를 들고 파란 하늘을 잠시간 올려다본 아일럿은 금방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신이 내려다보는 나라라고 일컫는 발레리아의 태양은 몹시 뜨거웠다.
“도련님, 마차를 구해왔습니다. 이쪽으로 옮겨 타세요.”
“으응.”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바닥을 바라보던 아일럿이 룹에게 이끌려 마차에 탔다. 두어 시간 동안 말을 타고 왔던지라 지쳐 있던 몸이 마차 안에서 금방 늘어졌다. 그리고 나서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잠들고 말았다. 날씨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기력이 조금씩 깎이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더웠더라면 몸이 녹는다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거의 반쯤 죽어 있던 아일럿은 마차가 숙소에 멈춰 섰을 즈음, 힘겹게 눈을 떴다.
“아일럿 바슬레인 님. 어서 오십시오.”
저 멀리서 녹색 마차가 보인 순간부터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과하게 아일럿을 맞이해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는 것이 익숙한 아일럿이었으나 모든 직원이 나와 있는 모습을 보니, 지친 와중에도 당혹스러웠다. 그 사람들의 뒤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보니 더더욱.
“어… 으음.”
숙소는 가스파르가 정해준 곳이었다. 해서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호화스러웠다.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라고는 하는데 이런 곳에 평범한 여행자가 머물 수 있을까? 들어가도 좋은 건지 잠시 고민하던 아일럿은, 저를 마중 나온 직원에 의해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또한 외부 못지않게 화려했다. 넓은 로비와 커다란 샹들리에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반짝임에 눈이 시렸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함께 오신 분들은 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철저하기도 하지.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하인들에게도 좋은 방을 잡아 주었지만 거리를 끝과 끝으로 배정해 놓았다. 우물쭈물하던 룹은 어서 가보라고 손짓하는 아일럿을 보며 좌측 복도로 향했다. 아일럿이 머물 방은 우측에 있었다.
“침대 옆에 줄이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아… 네.”
직원을 따라가긴 하는데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낯설고 과하게 화려한 공간을 아일럿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밖과는 달리 시원한 것 하나만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마법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지 공기도 쾌적했다. 가스파르는 그것 때문에 저를 이곳에 머물게 해 준 것일까? 오는 동안 내내 햇살에 그을린 듯하여 썩 좋지 않았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몸을 씻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기력도 금세 회복되었다. 마차에 타고 있을 때는 더운 바람만 불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딱 하나만 충족되면 완벽할 것 같았다. 가스파르.
언제쯤 만날 수 있게 될까? 괜스레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던 아일럿은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인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바로 나타나다니. 대체-
“아일럿.”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새벽부터 기다렸어.”
아일럿은 걸어갈 필요가 없었다. 침착한 표정과는 달리 가스파르의 걸음이 굉장히 빨랐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가스파르는 아일럿과 가까워지자마자 바로 입을 맞췄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일럿은 둘 곳 없는 손을 꿈질거리다가 어설프게 가스파르의 팔을 붙잡았다. 미처 감기지 못한 눈꺼풀이 옅게 떨렸다.
“…아일럿.”
“흐, 읍.”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때, 이름을 짧게 속삭이고서 다시 닿았다. 이번에는 길고 더 진득했다. 뒤따라온 집사는 문을 닫고 나가는, 자신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고 방 안에는 금세 둘만 남게 되었다. 한동안은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렇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가스파르는 한 마디를 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나… 여기도 좋아. 시원하고.”
“너무 멀잖아.”
“네가 있는 곳이랑 멀어?”
마차로 10분 거리이긴 해도 그것도 먼 거였다. 엘레노어 등, 보는 눈만 많지 않다면 제 옆에 두었을 텐데… 하나 아일럿도 그건 어렵다고 했다. 첫 해외여행인 탓에 부친께서 하인을 너무 많이 붙여 주셨다고 했던가. 물론 가스파르의 입장에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 뭐하면 돈으로 매수하거나, 적당히 협박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흐… 흣-”
“아일럿. 아일럿. 나 봐봐.”
그렇지만 이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일럿이 10분 거리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이 순간에 충실하기로 한 가스파르는 저를 마주 보는 두 눈동자 위에 입을 맞췄다. 오늘 하루는 교류회도 없으니 온전히 아일럿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고 아일럿이 도착하는 오늘을 위해, 필사적으로 일정을 맞춘 것이 아니었던가.
“오느라 고생 많았어. 갈 때는 마법석을 줄 테니까 그걸 써. 꼭. 알았지?”
“그 귀한 걸? 아냐, 같이 온 사람도 많고-”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아일럿뿐이었다. 나머지는 힘들게 돌아가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다. 오랜만에 보는 아일럿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던 가스파르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고 말았다. 호선을 그린 입술 그대로 아일럿에게 키스했다.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끌어 내렸다. 다만 능숙한 가스파르에 비해 아일럿은 서툴기 그지없어서, 셔츠 단추를 몇 개 푼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일럿이 입은 셔츠의 단추는 다 풀어지고 바지와 속옷은 허벅지에 걸쳐졌다. 발기해 있던 성기는 가스파르의 손에 희롱당했다. 손가락을 모으고서 뿌리부터 선단까지 쓸어 올리고, 손바닥으로 끝을 둥글렸다. 까치발을 선 아일럿이 띄엄띄엄 신음 섞인 숨을 토해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했어?”
“몰…라.”
“기억 안 날 정도로 많이 한 거야?”
“아니, 아냐아. 읏, 흡… 아, 거기 누르, 누르면… 아흐윽!”
“벌써 젖었잖아.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얄밉게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방에 들어온 가스파르를 보았을 때부터 아랫배가 울리고, 뻐근했다. 제 페니스를 지그시 눌렀다 뗀 손가락 끝에 투명한 액체가 길게 묻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스파르가 애무해 준다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사정해 버릴 게 뻔했다.
“…….”
무심코 상상해 버린 아일럿은 아래로 내린 주먹을 꾹 쥐었다.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야?”
“나… 나흘?”
발레리아에 오기 위해 이틀, 발레리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또 이틀. 사실은 그보다 더 되었을 수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뭔가 생각을 해 보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다행히 가스파르는 정확한 답을 원하지는 않았는지, 혀를 입술 밖으로 살짝 내밀었다가 도로 넣었다.
“그럼 일단… 입으로 한 번 빼줄까.”
그의 한쪽 무릎이 굽혀졌다.
“하아, 흐… 으, 가스파르, 으… 하…….”
나도, 나도 하고 싶은데! 아일럿은 입에 가스파르의 손가락이라도 물고 빨아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저를 세워서 벽에 밀쳐두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가스파르는 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불평을 할 여유는 없었다.
“으응, 으읏, 아, 아아아…!”
오른쪽 다리가 가스파르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한쪽 다리로 서게 된 아일럿은 부르르 떨었다. 가뜩이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발이 하나만 남게 되었으나, 가스파르가 워낙 단단히 받쳐 주고 있는지라 옆으로 넘어갈 일은 없었다.
“흐아… 흑!”
새된 소리를 터뜨린 아일럿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체내로 들어온 손가락이 입구를 살살 긁어대다, 훅 치고 들어왔다. 어느 한 부분을 비비지 않고 안에서 손끝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절로 가쁜 숨이 터졌다. 아일럿이 참지 못하고 제 어깨를 잡았을 무렵, 가스파르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물어 자국을 남겼다. 단맛이 나는 듯한 하얀 피부가 입에서 녹는 기분이었다.
“가스파르…….”
깨물어 준 뒤에 핥아주는 걸 못 견디게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 자리 그대로 혀로 할짝거리면서도 가스파르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깨물린 순간부터 이미 절정 직전까지 몰렸던 아일럿은 더는 견디지 못했다. 때를 맞춰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페니스 끝을 입술로 감쌌다. 익숙한 체액이 혀를 적셨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거부감도 없이 아일럿의 정액을 삼킨 가스파르가 마지막 한 방울마저 제 혀로 핥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억울하고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내 입에 싸버릴 수가 있어?”
“……뭐?”
얼떨떨하게 되묻는 것 때문에 꾸며낸 표정이 바로 무너졌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가스파르는 여운에 헐떡이는 아일럿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대신 묻는 것처럼 보였다.
“공평해야지. 나도 네 안에 똑같이 해야겠는데.”
가스파르가 일어나면서 아일럿의 허벅지를 잡았다.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던 바지와 속옷은 발아래로 추락하고, 아일럿을 가뿐하게 안아 올린 가스파르는 만족스럽게 그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오랫동안 공들여 잡아먹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흣…!”
사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일럿은 가스파르의 손길이 닿자마자 아래를 세우고 말았다. 그게 조금 부끄러워서 다리를 오므렸으나 무릎이 잡혀, 양옆으로 벌어지고 숨기려던 곳을 들켰다. 벌써 세웠느냐는 가스파르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아일럿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으응… 흐, 읏…….”
오랜만에 봐도 변함없이 큰 가스파르의 것이 제 페니스를 짓눌렀다. 묵직하기도 하거니와, 닿는 감각은 손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자극적이어서 아일럿은 밭은 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손이 성기 두 개를 동시에 쥐고서 비비며 흔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금욕이 길었기에, 사정은 평소보다 빨랐다. 그 와중에도 가스파르는 아일럿보다 나중에 하기 위해 이를 갈면서 참다가, 먼저 절정에 달해서 민감해진 아일럿의 성기를 놓아주지 않고 흔들었다.
“너, 너어. 흑, 아아아… 안 돼, 지, 지금, 너무, 그렇게, 아…!”
아일럿이 참다못해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즈음, 그는 매끈하고 하얀 배에 제 정액을 떨어뜨렸다. 내내 앓고 있던 아일럿은 제 아래를 보고는, 시트를 세게 붙잡았다. 상기된 얼굴로 가스파르를 올려다보니 그도 저 못지않게 붉어진 얼굴이었다. 열 오른 이마가 맞닿았다. 달아오른 서로의 숨결이 서로를 달구는 기분이 들었다.
“…….”
잠시 후, 아일럿은 슬그머니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려서 가스파르의 발목 어딘가를 건드렸다. 잠시 절정의 고취에 푹 잠겨 있던 가스파르가 뒤늦게 눈치채고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가스파르가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일럿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파란 눈동자가 쳐다보고 있는 입술이 달싹였다.
“가스파르, 이제-”
“…주인님.”
“응?”
하마터면 아일럿이 저에게 주인님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이거 괜찮은데…? 순간 들떴던 가스파르는 주인님이라는 소리의 근원지가 다른 곳임을 알아차렸다. 홀린 것처럼 아일럿을 바라보고 있던 가스파르는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정말로 제 주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집사가 문밖에서 제 주인을 부르며,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재차 들려오는 소음에 아일럿은 놀라서 시선을 돌렸으나 가스파르는 듣는 척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무슨 말을 하든, 못 들은 척 하던 걸 마저 하려고 했는데-
“엘레노어 님께서 주인님을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이 있어, 함께 읽어 보고 싶으시다고… 빨리 입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까지 끈적하던 두 사람의 기류가 차게 식었다. 헐떡거리던 아일럿은 제 위에 있던 가스파르가 입술을 강하게 짓씹고는, 입꼬리를 비트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굉장히 화가 나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스파르. 가, 가봐야 하지 않을까.”
“나도 알아.”
말하면서 가스파르는 다급하게 아일럿과 입술을 겹쳤다. 다른 걸 하면 아일럿을 두고 갈 수가 없을 테니 입맞춤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물론 쉬이 떨어질 수가 없었다. 혀가 얽히는 키스를 멈춘 뒤에도 짧게 입술을 맞대고 떨어졌다. 그러다 더는 미룰 수 없을 즈음, 겨우 입맞춤을 멈추고 아일럿의 뺨을 감싼 가스파르가 애가 닳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빨리 올게.”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응.”
그건 아일럿도 다르지 않은지라 겨우 대답을 했더니, 그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여서 아일럿의 뺨과 귀 부근을 어루만졌다.
“먼저 자면 안 돼.”
“안 잘게.”
“좋아.”
그 말을 들으니 가스파르는 겨우 떨어질 수 있었다. 몸을 뒤로 물린 가스파르가 옷매무새를 대충 정돈하곤, 아일럿의 뒤처리를 해 주려 하는데 단추 하나 잠그지 못한 아일럿이 기어 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에 내가 자고 있으면… 자고 있을 때 해도 돼.”
“…….”
“잠깐. 잠깐. 잠깐만. 가스파르!”
제 셔츠 단추를 잠그던 가스파르의 손이 그대로 아일럿에게 향했다. 눈이 확 돌아 버린다는 게 이런 것일까.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통째로 꿀꺽 집어삼키고 싶었다. 다행히 그렇게 되기 전, 집사가 재촉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 덕에 그 손은 어렵사리 아일럿의 단추에 닿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풀어헤쳐 버리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하나씩 끼워 넣을 때마다 가스파르는 이를 악물었다.
금방. 금방 해결하고 오면 되니까.
무슨 일이 더 있든지 간에.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날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일정을 마친 가스파르에게는 고작 다섯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자고 있는 아일럿을 보고 있노라니 가스파르는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는 하루 정도 밤을 새워도 가뿐하지만 아일럿은 그게 아니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대답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묻고서 가스파르는 웃었다. 편히 눕지도 못하고 침대에 앉아 있다 잠들었는지,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얼굴이 몹시 피로해 보였다. 저를 만나기 위해 발레리아까지 와 주었는데 여독을 풀 시간도 없었을 터였다. 해서 그냥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일럿을 편히 눕혀준 뒤에 가스파르는 그 옆에서 잠을 청했다. 이후, 아침이 되기 전 짧은 편지를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낮에는 교류회를 진행해야 했고, 저녁에는 엘레노어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저녁 8시 이후부터는 시간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럼. 괜찮고말고.
어쨌든 발레리아에 아일럿이 있었다. 그것도 고작 10분 거리에. 유일한 희망을 거듭 되뇌며 가스파르는 제게 쏟아진 일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일이 끝나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제와 같은 일이었다.
“가스파르,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 곳이 있단다.”
“예…?”
“지금부터 시간은 괜찮지? 교류회도 끝났으니 말이다.”
어제야 처음이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같은 일이 두 번째가 되니 알아차리고 말았다. 대공 엘레노어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물론 어제 불려 나갔을 때는 정말 백부의 서신이 온 게 맞았다. 황제께서 보낸 서신을 읽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걸 정성 들여 읽고 나서 아일럿에게 돌아가려 했더니 엘레노어는 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다며 연회장으로 저를 데리고 갔다. 가스파르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엘레노어에게 이끌려, 발레리아 연회장 내의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이쪽은 전에도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니? 내 조카인 리쉬란다.”
“물론이죠. 4년 전에 만나 뵙고 인사를 드렸었지요.”
“절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지금도 그랬다. 오늘은 특히나 그 의도가 무척 명백했다. 어제는 제 결혼 상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섞여 있기도 했는데…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니 조바심이 나신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레노어 님께, 가스파르 공작님에 대해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이걸 어쩌나. 엘레노어가 직접 소개해 주는 사람들은 다 제 나이 또래의 미인들이었다. 만나게 된 미인의 수가 다섯이 되었을 무렵, 가스파르는 속으로 쓴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번에 말하기보다는, 일단 모른 척을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라 여겨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열심히 웃으며 사람들을 대했다.
“오늘 좋은 시간 보내고 가시길 바랄게요. 가스파르 님.”
“감사합니다. 그럼 교류회에서 또 뵙겠습니다.”
제아무리 엘레노어가 저를 아들처럼 아낀다 하더라도 그는 황제의 어머니이자, 이 나라의 대공이었다.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엘레노어에게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황실의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는데, 그 자리를 피한다면 크나큰 실례가 될 터였다.
더욱이 가스파르와 말을 섞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엘레노어에게 소개를 받은 사람 외에도 많았다. 대공인 엘레노어가 자식처럼 예뻐하는 가스파르와 친분을 다져서 나쁠 게 없기도 했거니와, 예전에 가벼운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람들 또한 그의 아래에 달린 흉기를 잊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가스파르는 정중하고 상냥했다가, 어느 순간 짐승처럼 돌변했고 그 예쁜 얼굴로 온갖 음탕한 말을 쏟아냈다.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가스파르의 아래에서는 모두 숨 가쁘게 울기 바빴다. 절벽까지 매도당하다가 구해지는 감각을 잊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서성였다.
그리고 가스파르는 그 하이에나를 잡아먹는 강인한 사자였다가, 도리어 쫓기는 사자가 되고 말았다. 푸른 눈동자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허공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간간이 엘레노어와 말을 섞는 게 다였고, 대체로 연회장 내의 공기에 필사적으로 시선을 뒀다. 그 모습은 몹시도 태연하다 못해 무심하게 보였지만, 겉껍질과는 달리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나한테는 이렇게 소비할 시간이 없는데.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제 속도 모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엘레노어가 조금 많이 미워지고. 아일럿을 가까이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 이따금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아냈다.
괜찮아. 설령 오늘은 무리라고 해도 나한테는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도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참, 가스파르.”
“예, 엘레노어 님.”
“이틀 뒤가 풍년제로구나. 가스파르는 이번이 발레리아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풍년제지?”
“예…… 예?”
있었는데, 생각하자마자 없어지고 말았다.
“마침 때가 맞아서 다행이구나. 너와 뜻깊은 행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말이야.”
“예, 저도, 기쁩니다…….”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는, 발레리아에서 건국제 다음으로 큰 행사였다. 때문에 내일은 전야제가 있고… 전야제가 있으니 아일럿을 길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간과하고 있던 가스파르는 저도 모르게 휘청했다.
*
“도련님, 제가 이겼습니다. 보세요. 딱 50. 수가 맞지요?”
혼자 남은 아일럿은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나 마냥 즐거웠다. 원래는 다른 방문객을 받기도 하지만 가스파르가 통째로 빌린 덕에 한가로이 넓은 저택 안을 구경할 수 있었고, 룹과 카드 게임을 하거나 창밖을 지켜보기만 해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애초에 외출을 즐기지 않는 아일럿이었기에 저녁에 가벼운 산책만 해도 충분히 여행을 온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아냐, 잠깐만. 봐. 이건 7이잖아. 49야, 룹. 50이 안 됐어.”
“네?!”
“그리고 난 지금 50이 됐지. 봐, 내가 이겼지?”
“아아아아니…!”
이 여행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스파르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좋았다. 카드 게임에서 승리한 아일럿은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수거했다. 물론 이긴다고 해서 하인인 룹에게 돈을 받거나, 그 외에 다른 것을 받을 수는 없지만 이기는 건 역시 좋은 거였다. 그리고 더 좋은 건 가스파르를 보는 것이겠지. 합이 50이 된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아일럿은 카드를 내려놓았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아이고, 다음번에는 마지막 판까지 꼭 이길 겁니다.”
“그래, 그래.”
반쯤 건성으로 대답한 아일럿이 카드를 챙기는 룹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약간은 멍한 기분이었는데 똑똑,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
그것이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튀어나오듯이 달려나갔다. 찾아올 만한 하인은 룹뿐인데, 룹은 지금 함께 있으니 문을 두드릴 사람은 가스파르밖에 없었다.
“가스파르…!”
그리고 그게 맞았다. 발레리아의 예복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보자마자, 그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룹이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대신 눈짓으로 룹을 내쫓는 가스파르였다. 룹은 카드를 정리할 틈이 없었기에 다 두고서 빠르게 몸을 피했다. 가스파르의 집사가 그렇듯이 룹이 해야 할 일은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는 거였다. 주점에서 들었던 ‘굵고… 크고… 되게 긴데…….’ 라는 발언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룹은 빠르게 고개를 흔들며 객실에서 멀어졌다.
“시간이 딱 한 시간 정도 있어.”
“응?”
“…가봐야 해. 정말, 정말 끔찍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꾸역꾸역 밀어 넣은 가스파르는 눈썹을 들썩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었다. 이 시간마저 또 방해를 받는다면… 한숨을 내쉴 뻔하던 가스파르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고는, 아일럿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옷을 벗을 수가 없어. 어떻게 벗는다 쳐도 다시 입는 게 문제고.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서 입혀준 옷이거든.”
“그러고 보니까 옷이-”
아일럿도 그제야 가스파르의 옷에 시선을 두었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낯선 의복은 사치스러움의 극치였다. 거의 모든 부분에 세심하게 수가 놓여 있는 것도 그랬고, 어깨와 소매는 특히나 화려해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에 입는 옷이라는 말을 듣자 그제야 납득이 갔다.
“이대로는 화장실도 못 가. 진짜 끔찍하지?”
“무지…….”
발레리아의 전통 복식이다 보니 겹겹이 입은 옷의 매듭은 단단히 조여져 있었고, 그 모양도 예법에 따라 무척이나 섬세했다. 제대로 차려입는 데만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그만큼 튼튼하기에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흐트러질 일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난 다른 게 급하거든.”
“뭐, 뭐 하려고?”
가스파르는 대답하지 않고 아일럿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는 손길이 아일럿의 허리에 닿아 미끄러졌다.
“잠깐만! 너, 넌 아무것도 못 하잖아. 하… 하지 말자.”
“내가 못 하다니?”
“응?”
“내가 못 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가스파르를 보며 아일럿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못 한다는 게 아니라, 넣을 수도 없고. 그… 만질 수도 없잖아. 나만 즐거워서 뭐 해…….”
“너 못 만지는 게 더 힘드니까 가만히 있어.”
“와, 와악.”
화들짝 놀란 아일럿이 가스파르의 허벅지에서 반 뼘 정도 튀어 올랐다가 다시 붙잡혔다. 목을 앞니로 살짝 긁은 가스파르는 제 허벅지에 앉은 아일럿의 옷을 손쉽게 벗겼다. 날이 더워서 하늘하늘한 퍼프소매에 얇은 바지 하나만 입고 있던 아일럿이었다. 옷을 벗기는 건 쉬웠다. 어쩔 수 없이 가스파르의 허벅지 위에서 혼자 알몸이 되어 버린 아일럿은,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제 몸을 타고 올라오는 손가락 때문에 신음했다. 그러다, 제 페니스 위에 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굳혔다.
“뭐… 뭐야?”
“옷에 튀면 곤란하잖아.”
“으-”
예복에 튈 수도 있으니 아일럿의 페니스를 미리 손수건으로 감싸두었다. 다 벗었는데 그곳만 가리고 있으니 더 부끄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아일럿은 가스파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가스파르는 왠지 모르게 더 귀여워진 아일럿의 아래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곳만 예쁘게 포장해 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흐으으.”
다른 소리는 다 가려져도 가스파르의 웃음소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귀까지 빨개진 아일럿이 끙끙 앓기 시작하자, 손수건과 페니스를 한꺼번에 그러쥐고서 가스파르는 손을 움직였다.
“부끄럽니? 그러면 손수건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네 정액을 옷에 묻히고 행사에 가길 바라는 거구나.”
“아냐,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손수건을 치우는 시늉만 했다. 눈앞에 드러난 하얗고 매끄러운 몸이 자기를 먹어달라고 하는데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잘 애무하지 않았던 어깨에 입을 댄 가스파르는 제 흔적을 남겼다. 넣지 못하는 대신 제 것이라고 자국이라도 마구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학만 하면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에도 자국을 남길 생각이었는데. 다음 방학에나 할 수 있으려나.”
“…부모님한테 들켜 버려.”
“안 들켜. 난 너 납치하려고 계획도 다 세우고 있었거든. 핑곗거리도 만들어뒀는걸.”
속삭이면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동시에 한쪽 손은 허리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골을 지나서 구멍 주변을 지분거리는 손끝이 자연스럽게 제가 들어갈 자리를 찾아냈다.
“아무것도 안 넣어주면 서운하지?”
“하아, 으읏… 응…….”
“그럼 손가락이라도 잘 물고 있어. 너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도 좋아.”
손가락 하나를 바싹 조여오는 내부는 믿을 수 없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학기 중에는 저로 인해 항상 부풀어 있던 유두도 그랬다. 다만 집요하던 괴롭힘이 사라진지라 불그스름하지 않은, 연한 색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쉬워서 애무에 서서히 익숙해지게 만들지 않고, 혀로 핥아 올리기가 무섭게 힘껏 빨아들였다. 작은 유두가 입안에 가득 차진 않기에 주변의 보드라운 살까지 가스파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히, 흐읍… 읏, 아, 흐앗…!”
손가락 하나에도 신음하던 아일럿이 새된 교성을 내면서, 들이닥치는 쾌감에 가스파르의 팔을 붙잡고 버티다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발끝이 허공을 긁다가 굽었다. 무심결에 가스파르를 서너 번 정도 부른 아일럿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푹 젖어서 입 밖으로 나온 유두는 붉게 반질거렸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똑같은 행위를 할 거란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중지에 이어 약지가 내부로 밀려들어 오면서 왼쪽 가슴이 빨렸다.
“하으…… 앗, 흐 윽. 아!”
가스파르는 저에게 길들여진 반응을 보이는 아일럿이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신체적 쾌감은 일절 느낄 수 없음에도 이 정도로 여흥을 즐길 수도 있다니. 관계를 주도하는 본인이 더 신기했다.
“으읍, 흣, 하… 아읏.”
제 위에서 바르작거리던 몸을 옷 너머로만 느껴야 하는 것은 물론 아쉬웠다. 그런 만큼 달라붙어 있는 곳은 한층 진득해졌다. 아일럿의 유두가 가스파르의 입 밖으로 나왔을 때, 두 가슴에는 모두 새빨간 울혈이 새겨져 있었다. 가스파르는 그것이 제 작품이라도 되는 양 달궈진 살 위에 거듭 입술을 누르고, 위아래 입술을 모아 삐죽 나온 유두를 잡아당겼다.
“아아아… 으, 흐, 그거어…… 아, 안. 흡…!”
쥘 것이 없어 허공을 긁던 손이 가스파르의 머리카락을 잡았으나, 세게 잡아당기지는 못했다. 가스파르가 떼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자극하는 꼴만 될 뿐이었다. 파란 눈동자로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일럿을 쳐다보면서, 길게 혀를 빼어 핥았다. 끄트머리에서 혓바닥까지 유두를 전부 훑으며 지나가자 손가락을 물고 있는 구멍도 조여들었다. 체내에서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그것만으로도 아일럿은 거의 절정까지 달했다. 띄엄띄엄 새어 나오던 메마른 숨이 일순 멈췄다. 다시 이어졌을 때는 야릇한 교성이 뒤섞여 가스파르를 즐겁게 했다.
“흑, 아으, 흣, 으으응… 흡… 하아, 아… 읏…….”
마지막까지 여운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서 손가락을 세차게 쳐올렸다. 항상 들어오던 그곳까지는 아니었으나 아일럿의 몸은 금방 쾌감에 무너졌다. 등줄기가 휘고, 상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허벅지는 얕게 경련했다. 길고 투박한 손끝에서 헤집어진 속살은 빠져나가려는 손가락을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졌다. 가스파르는 그런 반응마저 제가 길들여서, 만들어낸 결과 같아서 절로 우쭐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손수건이 젖었어.”
아직도 숨을 고르던 아일럿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얼룩진 손수건의 안쪽은 정액으로 끈적했다. 제가 사정한 줄도 몰랐던 아일럿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짧게 웃음을 터뜨린 가스파르는 손수건과 함께 페니스의 아랫부분을 쥐고서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만져주면 제 손안에서 금방 발기해 버릴 걸 알지만, 또 세웠다가는 제가 안 보이는 곳에서 아일럿이 혼자 처리해야 하겠지. 그건 싫었다.
“새 손수건도 없고, 시간도 없네.”
새 손수건이야 얼마든 가져오게 하면 그만이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더 지체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지금도 충분히 늦춘 시간이었기에 조금 걱정이 됐지만 아일럿을 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쓸데없어졌다.
“아일럿?”
“…….”
“아일럿, 나 좀 봐. 얼굴 보여줘.”
제 목을 끌어안은 아일럿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삼 부끄럽기라도 해?” 약하게 도리질을 치는 몸이 따끈따끈했다. 이 좋은 걸 안고 있는데 그 사이에 옷이 있다는 게 아쉽고, 애가 타서 가볍게 숨이 막혔다. 다물린 가스파르의 입술 사이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새었다.
“가기 싫다.”
진심을 툭 털어놓고 나니 한층 간절해졌다.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안겨 있던 아일럿이 그제야 저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도, 눈 주변도, 뺨도, 붉게 물들어 있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추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놈의 풍년제 때문에.
물론 발레리아의 풍년은 타국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기에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지금 가야 하는 것은 풍년이 아니라 그걸 기원하는 풍년제였다.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저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걸 두고 다른 곳에 가야 한다니.
“정말로 가기 싫어.”
아쉬운 마음만 고스란히 드러내며 가스파르가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그것에 아일럿도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응했다. 한동안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질척하게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와, 서로에게 닿는 숨결마저 자극적인지라 아일럿은 무심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움츠러들었다.
“흐.”
가스파르가 저를 살피는 시선이 매서웠다. 눈도 감지 않고, 제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시선에 아랫도리가 저릿했다. 저를 빤히 들여다보는 파란색 눈동자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일 만나자.”
“응.”
“꼭 만나.”
애틋한 손길이 서로를 향했다 떨어졌다. 내일 만나자고 문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 말대로 두 사람은 내일이 되어 만날 수는 있었다.
정말 잠깐.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만났다가, 키스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져야 했다. 멀어져 가는 상대방을 보며 망연자실해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아일럿은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했지만 가스파르는 아니었다. 속에서 지옥 불이 활활 끓고 있었다.
처음에 한 번. 처음이니까 기꺼이 넘어갈 수 있다.
이어서 두 번. 여기서부터 인내할 수 있는 선을 슬쩍 넘어가기 시작했다.
오늘까지 해서 세 번. 아일럿을 만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드디어 생긴 세 번째 기회가 황제가 주최한 만찬회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만찬회는 단순히 식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죄 참여하는 자리였고, 그곳은 파티에서 보았던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졸지에 가스파르는 상하좌우로 고귀한 신분의 미인들에게 둘러싸였다. 뒤늦게 가스파르가 남성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엘레노어는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까지 만찬회에 참석하게 했다.
웬만하면 엘레노어와는 작은 갈등도 만들지 않으려 했던 가스파르의 인내심은 드디어 산산조각이 났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엘레노어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차라리 지척에라도 없다면 모를까. 가까이에 있는데 손을 댈 수가 없다. 아니, 대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방해를 받는다. 그게 벌써 세 번이 되자 가스파르는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다른 사람의 유혹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찬회에서 내내 미소 짓고 있던 가스파르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일럿이야.”
“예, 주인님.”
“아일럿이라고.”
제 주인의 눈은 파란 부분과 흰 부분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고, 색도 무척 맑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눈동자가 벌겋게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낯선 모습인지라 집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가 원하는 게 이미 정해져 있는데, 왜 그게 내 앞에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해도 가스파르가 원하는 걸 집사가 가져다줄 수는 없었다. 가까이에 있어도 한없이 멀기만 했다.
“…….”
차분한 표정으로 성을 내던 가스파르는 결단을 내리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미세하게 흐트러진 의복도 완벽하게 정돈했다.
그 이후. 만찬회장에 돌아갔을 때는 웃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반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한없이 간략하게 대답했으며 인사에는 똑같은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끝내 버렸다. 유일하게 가스파르가 긴 대답을 해 주는 것은 발레리아의 황제와 엘레노어뿐이었다.
그쯤 되니 엘레노어는 먼저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놓고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가스파르는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만찬회가 끝났을 때 엘레노어는 먼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스파르를 불렀다. 순순히 따라온 가스파르는 몸이 불편해서 오래 서 있지 못하는 엘레노어를 에스코트했다. 먼저 의자에 앉은 엘레노어가 제 앞에 서 있는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가스파르. 오늘 만찬회 말인데, 혹시 다른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엘레노어 님.”
기다렸다는 양 입을 연 가스파르가 의자에 앉아 있는 엘레노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가스파르!”
아들처럼 생각하는 아이가 깍듯하게 예를 갖추자, 놀란 엘레노어는 손을 내밀었지만 가스파르는 그 손을 잡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절 신경 써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려요.”
“난…….”
“그렇지만 굳이 뭔가로 이어지지 않아도, 저는 엘레노어 님을 제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하겠어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가스파르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가 정말 엘레노어를 어머니처럼 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적어도 엘레노어가 그만큼 소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일럿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저와 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엘레노어를 가스파르는 이미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이 정도로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가스파르…….”
“학교를 졸업하면 자주 찾아오도록 할게요. 약속드리겠습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서 가스파르는, 황태자 오르페가 ‘웨에엑. 엄청 가식적이라 기분 나쁘니까 내 앞에서는 그렇게 웃지 마.’라고 했던 어리고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어 있던 엘레노어의 표정은 그제야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도 소개해 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요.”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없게 꽁꽁 숨겨뒀다는 그 미남 말이로구나.”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가스파르는 딱히 놀라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아일럿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외출할 때마다 가스파르는 온갖 유난을 떨었다. 혹시나 발레리아 황실의 누군가가 아일럿을 보게 될까 봐.
“특별히 엘레노어 님만 몰래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볼까?”
다정하게 마주 웃고 나니 가스파르도 참고 있던 화가 풀렸고, 엘레노어도 미련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
“하아.”
더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나온 가스파르가 마음속에 묵직하게 고여 있던 숨을 내쉬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교류회는 앞으로도 있을 테지만, 저녁에는 내내 아일럿과 함께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저와 아일럿의 사이를 막을 장애물은 없다. 가슴 부근에서 희열이 끓어올랐다.
졸지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는 금지된 사랑을 한 기분이었으나, 결국 승리했으니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과거는 미화되어 즐거움을 줄 뿐이었다. 아직 7시였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8시 이전에 아일럿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황제의 정원 밖으로 나가는 가스파르의 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그리고 한순간 못이 박힌 양 멈춰 섰다.
“주, 주인님…….”
입구에 서 있던 집사가 저를 보고는 창백해졌다. 방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사람이었던 가스파르는 넘실거리는 불안함에 미간을 좁혔다. 집사는 이제껏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워낙 성격이 차분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저에게 안 좋은 소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해.”
그 한마디를 하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고.
“아일럿 님께서 마법석을 사용하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죄송합니다.”
“이유가 뭐야.”
그걸로는 감당되지 않는 충격이 가스파르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아버님께서 크게 다치셨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말에서 떨어지셨는데… 무척 위중한 상태여서, 아일럿 님께서 소식을 전해 받으시곤 급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한 시간 전입니다.”
“아, 하아.”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생전 처음으로 긴 현기증을 느낀 가스파르가 휘청였다. 이내 근처에 있던 나무를 짚고 스스로 섰다. 멍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기를 수차례,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연락을 해서… 내 전속 의사를, 치료사를 그쪽으로 보내라고…… 해.”
띄엄띄엄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얕게 떨렸다. 상황이 믿기지 않는 와중에도 조치를 취하라고 말한 가스파르는 원래 제가 가려던 대로, 아일럿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아니, 머물렀던 숙소였다. 그를 위해서 통째로 빌렸기에 마냥 한적한 숙소에는 마법석을 사용하지 못한 아일럿의 하인들이 아직 남아, 급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사이에서 아일럿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 버렸다.
기껏 와줬는데. 이 더운 나라까지. 저를 위해서.
그랬는데 아일럿과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마중을 나가지도 못했다. 이제는 엘레노어도 막지 않으니, 지금부터야말로 같이 있을 수 있는데…… 돌아가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일럿 없이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한 달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헤아려 보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한 달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길었다. 생에 가장 긴 한 달에 갇힌 가스파르는 하루에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