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혼자서 잠들지 못하고 (15/17)

3. 혼자서 잠들지 못하고

“가만… 또 챙길 게 있던가.”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붙어 있던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었다. 기숙사 사감이 노트와 함께 물에 빠져 버린지라, 금요일에 자리를 비운 사람들이 벌점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즐거운 소식을 들은 아일럿은 약간 들뜬 상태였다. 어쩌다 벌점 1점 정도 받아도 학교생활을 하는 것에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왕 문제없이 살았으니 졸업할 때까지 완벽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음.”

자신의 생활 기록부만큼이나 말끔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집에 두고 올 물건들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방을 챙기고서 기숙사 밖으로 향했다. 미리 불러둔 마차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마중을 자청한 가스파르도.

“잘 다녀와, 아일럿.”

오묘한 표정이었다. 웃고는 있는데 그렇게 좋아 보이는 건 아닌지라, 아일럿은 내심 기뻐하면서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원래는 가스파르도 이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파티에 참석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앞당겨져서 이틀 전에 외출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은 가스파르가 학교에 혼자 있어야 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월요일에 보자.”

마부가 문을 닫으려 하는데 가스파르가 그걸 턱 잡아서 닫지 못하게 했다.

“날 안 보내 주려고?”

아일럿이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소리 없이 물으니 가스파르의 입술 끝이 삐죽거렸다.

“보내 주긴 해야겠는데……. 그새 보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꿈에서라도 만나야 하나.”

“…그거 좋네.”

보내지 말아 버릴까. 마음 저편에서 이는 충동을 가라앉힌 가스파르는 제 손으로 문을 닫아서 아일럿을 보내 주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보내 주어야겠지. 아일럿의 집안은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안다.

제 손으로 이름을 쓸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작위를 받아, 루 가디테로안 공작이 되었던 가스파르는 찾아 뵐 부모님이 없었다. 두 분 다 전염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을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전해 들은 게 다였다. 생전 부모님의 부재로 인해 슬픔이나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마침 황태자인 오르페가 외동이었기에 어렸을 때는 황실에서 함께 시종들의 손에 자랐고, 열다섯이 되었을 때는 물려받은 저택에서 줄곧 혼자 살았다.

굳이 가족을 찾아보자면 남매 같은 사이의 황태자가 있었고, 조카를 어여뻐 해준 황제가 있긴 하나 일반적인 가족 형태와는 크게 다르다.

현존해 있는 나라의 태양을 마냥 편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머지않아 그 자리에 앉게 될 오르페도 언젠가는 어려운 사이가 될 터였다. 물론 그 때문에 아일럿을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누릴 대로 누리며 산 주제에 평범함까지 욕심을 내는 것은 과욕인 것을 잘 안다. 왜인지 다소 감상적이 되었을 뿐……. 벌써 빈자리가 느껴지는 탓이리라.

“어떻게 할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가스파르는 땅에 남은 바퀴 자국을 보다가 학교로 시선을 돌렸다.

*

“비가 와서 땅이 많이 젖은 것 같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네, 알겠… 허억.”

좌석에서 엉덩이가 반 뼘가량 떠올랐다. 원래도 그렇게까지 잘 정돈된 길은 아니었는데, 길이 진흙 바닥이 된 데다 돌덩이라도 여기저기서 굴러왔는지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아일럿은 손잡이를 잡고서도 여기저기로 몸이 튕겨 나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으, 아…….”

계속 부딪친 엉덩이가 아팠다. 살이 있는 곳뿐만이 아니라 그사이도. 어쩔 수 없이 가스파르를 속으로 원망하면서 손잡이를 꼭 붙잡았으나, 사실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가 회초리를 가지고 왔을 때는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고, 못 견디겠으면 그만해 달라는 말을 하라고 하였는데도… 참느라 정신이 없는 척을 하며, 다 맞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엉덩이를 맞았을 때도 그랬다. 가느다란 자국이 남은 곳을 그의 손으로 맞는 게 좋았다. 따끔따끔한 피부 위를 후려친 직후의 홧홧함이 남는 것도.

차마 더 해달라는 말은 못 하고 몸만 내밀었던 걸 생각하니 부끄럽-

“하, 끄으으읍.”

아니야. 역시 가스파르가 원망스럽다! 그 커다란 흉기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

돌부리를 지난 마차가 튀어 올랐다. 아일럿은 길게 원망을 이어가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은 손의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엉덩이가 아픈 건 제 탓이라도, 구멍이 욱신거리는 게 훨씬 아팠다.

“저 앞부터는 더 험해지는군요. 머리 안 다치게 꽉 붙잡으십시오.”

…끔찍한 것은, 포장되지 않은 산길이 가는 길의 거진 절반이라는 사실이다. 마차가 거친 길을 벗어나는 동안 아일럿의 고통은 계속되다 수십여 분 뒤, 돌로 포장된 길이 나오고 나서야 끝났다. 평탄한 길에서 마부가 속도를 높이자 아일럿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부터는 가끔 덜컹거리기만 할 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얼마 안 가, 산 아래에 있는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파서 앓는 동안 그래도 많이 오긴 했구나.

안도를 해야 하는 부분인지는 모르나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한 시 정각에 출발했으니 두 시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마차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왕복 두 시간은 시간 낭비라는 어머니의 의견이, 내심 아들의 통학을 바랐던 아버지를 이기고 말았다.

후에 모든 학생이 기숙사를 써야 한다는 교칙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어차피 아버지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더라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겠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1학년 때부터 쭉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이틀, 시험 기간에도 2, 3주에 이틀씩은 꼬박꼬박 집에 머물렀는데 이번에는 무려 한 달간 집에 가지 않았다.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독립을 할 나이였을 거라며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만 아버지가……. 게다가, 편지로 말한 일도 있어서 어떻게 추궁하실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부디 유연하게 넘길 수 있어야 할 텐데.

‘누구 소개받을 거 아니지.’

‘머, 뭐… 어?’

‘내가 있는데 누구랑…….’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는 가스파르의 반응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점에서 있었던 일을 들키고 난 이후의 상황도.

‘저기, 가스파르… 아까 못 들었을까 봐 다시 말할게. 미안해.’

‘알면 됐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그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하지 않는 것은 포기했다. 다만, 가스파르와 떨어져 있을 때는 그와 관련된 생각을 덜 하려 노력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종일관 생각하게 될 것이 뻔했으므로.

“……하.”

한숨을 쉰 아일럿은 버릇처럼 입술을 만졌다. 이를 세우지는 않고 아랫입술을 손으로 만지거나 비틀고 있으면, 키스 직전에 가스파르가 입술을 만지던 게 떠올랐다. 원래도 자주 입을 맞추곤 했는데, 예전에는 약간 방식이 달랐다.

‘그때 이 입술을 한 번도 못 빨아본 게…….’

주점에서 만났던 남자가 그렇게 말했던 걸 들은 이후인 게 확실하다. 애태우는 걸 좋아하고, 기어코 저를 보며 앓는 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던 가스파르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격렬하지 않을 때에도 입맞춤을 퍼붓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제는 제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남자에게 과시라도 하는 걸까 싶다가도, 눈을 마주치면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가스파르의 눈 안에 담겨 있는 건 저 하나였다. 제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조바심을 낸다.

‘피하지 마.’

오묘한 간질거림, 입을 맞추면서도 목과 뺨을 만지는 가스파르의 손이 따뜻했다. 단순히 열기를 품은 것만이 아니라 제 피부 위를 지나면서 열을 심어 놓는다. 그렇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 속부터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좀 더 원하게 되어 입을 벌렸을 때 스며들었던 것들이 선명하다. 숨마저 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으읏…….’

떨어지면 나른하게 쏟아지는 숨결이 기분 좋았고, 닿는 순간에는 상대방의 온기에 녹아내리듯 침식이 된다. 얽혀 들어오는 혀가 입술 위에서 젖은 소리를 내면, 자연히 그다음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입술에서도 질척이는 음을 만들어냈던 가스파르는, 제 다리 사이에서도 같은 소리를 만들어낼 터였다. 받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던 말대로, 입으로 제 속옷을 벗기고서는 곧장 입술을 묻을 가스파르를 생각하자-

“흐, 안 돼.”

…다리 사이에 반응이 와 버릴 것 같았다. 아일럿은 마부가 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유리창에 머리를 쿵쿵 박아 버렸다.

그만 생각해야지, 그만. 집 근처에 심겨 있는 나무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로 부모님을 뵙고 싶지 않았다. 길게 호흡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서 머릿속에 둥지를 튼 상념들을 떨어뜨렸다.

*

“도련님, 다녀오셨습니까!”

“페트릭.”

막 정원을 치우고 있던 페트릭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와서 인사를 했다. 아일럿도 페트릭에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돌진하다시피 걸어오는 탓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일럿, 어서 오렴!”

“아버지, 그동안 잘 계셨……던 것 같네요.”

힘이 좋은 아버지의 품에서 짜부라졌던 아일럿은 거기서 벗어난 뒤에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녀석. 편지는 어제 받았다. 혹시 내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 아버지의 네 번째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아일럿은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구나. 딱히 빨리 결혼을 했으면 했던 건 아니란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 예전처럼 빨리 결혼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아. 다만 네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여서 걱정이 좀 됐지 뭐니.”

“하, 하하… 네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집에 가서 말하겠다고 편지에 썼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버지에게 딱히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냥 단순한 걱정이셨던 건가? 싱글벙글 웃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2층에서 발견한 아일럿의 어머니, 엘라 마저리는 잠시 하던 일을 내버려 두고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일럿이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일을 하고 계시는 와중에 서재로 찾아가지 않는 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때문에 예전 같았으면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한동안 집에 찾아오지 않은 효과에 아일럿은 다소 얼떨떨했다.

“왔구나. 너도 참, 집이 학교랑 가까운데 더 자주 들르지 않고.”

“죄송해요. 시험 때문에 좀 바빠서.”

“그럼 어쩔 수 없지.”

속정은 깊으셔도 아버지와는 달리 겉으로는 무심한 면이 있으신 어머니는 별말이 없었다. 오기 귀찮아서 안 왔다고 말해도, 다 컸으니 어쩔 수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달랐다.

“그럼 아일럿, 시험은 언제 끝나는 거니? 다음 주나 다다음 주면 끝나는 건가?”

“끝났긴 한데요. 이번 학기에는 과제가 너무 많아서요.”

“당신도 참, 애가 바쁘면 못 올 수도 있지.”

“그치만.”

“피곤하지? 저녁 먹을 때까지 쉬고 있으렴.”

“네, 어머니.”

시험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가스파르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마음속에 숨기고서 하인에게 가방을 건네곤,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름휴가를 간 것도 아닌데 오랜 시간 집을 비웠다. 여름에 사용했던 푸른 커튼이,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는 감색으로 변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놓였다.

*

“말도 마렴, 아일럿. 네 아버지는 일주일 전부터 저 이야기만 하는구나.”

“정말 엄청났다니까. 그렇게 많은 물건들이 오가는 줄 몰랐지. 당장 내일이 재판인데, 그 창고 안에 있는 것들이 너무 신기해서 말이야. 내 머리만 한 눈을 가진 오징어도 있었어. 심해에서는 그런 게 잡힌다구.”

“어련하시겠어.”

“정말 그런 게 있다구요?”

“그럼! 촉수 괴물이 배를 침몰시켰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란 걸 알았어. 그런 놈들이 떼거지로 배에 달라붙으면 괴물처럼 보이지. 그렇고말고. 나중에 꼭 함께 가자꾸나. 이번에 우연찮게 티켓을 얻었는데 한 장뿐이어서-”

“당신 혼자 홀라당 다녀왔지. 나는 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

“아, 아, 아니, 엘라. 당신이 비린내 나는 곳은 질색이라고 했었잖아.”

“내가 언제? 언제 그랬더라.”

이어지는 식사 시간은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다. 아버지는 얼마 전 참여했던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모험담처럼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어머니는 같은 내용을 수없이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을 들어 주셨다. 아일럿도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기에 경청하는 것이 즐거웠다.

뿐만 아니라 식탁도 평소보다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일럿을 위해 주방장은 요리에 한껏 힘을 주었고, 그동안 할 이야기가 많았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참, 학교에서 뭐 다른 일은 없었고?”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가 물었다.

“네. 새로운 과목을 듣게 되긴 하는데, 별로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별일 없다니 다행이구나. 얼마 전에 집에선 난리도 아니었어.”

“예?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게… 놀라지 마렴. 룹이 말한테 걷어차였거든.”

“예에?”

“자기가 걷어 차 놓고 말도 놀라서 얼마나 정원에서 날뛰었는지 몰라. 그 말은 룹밖에 다루지 못하는데, 결국 걷어차인 룹이 다시 일어나서 말을 마구간에 집어넣었지.”

“그럼 룹은 지금-”

“병원에 있단다. 팔이랑 다리뼈가 부러졌어. 그만한 게 천만다행이라더라.”

“아…….”

“선물 받은 것만 아니었더라도 진즉에 팔아치웠을 텐데. 혈통만 좋았다뿐이지 여러모로 사고뭉치야.”

어쩐지 룹이 안 보이더라. 그 좋아하는 술도 못 마시는 신세로 병원 안에서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좋아. 그럼 첫 잔은 가엾은 룹을 위해서.”

“아, 와인…이죠?”

“이런 좋은 날에 안 마실 수가 없지.”

어딜 가셨나 했더니, 와인 저장고에 직접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졸지에 와인잔을 들게 된 아일럿은 조르륵 흘러내리는 와인을 보고서, 어젯밤에 술 냄새를 풍기다 못해 사방으로 뿌리고 들어오던 가스파르를 떠올렸다. 그런 주사가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나 없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었어? 아래에서도 떠드는 소리가 들리던데.”

“룹 이야기밖에 못 했어. 하려던 참에 당신이 들어왔고.”

“아하, 그랬구만. 그럼 어제 있었던 일은 아직 말 안 했지?”

“예, 예에?”

“얼마 전부터 말이야. 자꾸만 말려놓은 장작이 사라진다고 윌이 이상하게 여기더라고. 몇 조각 안 되는 양이라서 이상하게 생각을 안 했는데, 한두 개 없어지던 게 갑자기 대여섯 개가 되니까…….”

“그, 그으런 일이 있었군요.”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가스파르와 보낸 어젯밤 일을 떠올리던 참이었다. 잔을 떨어뜨릴 뻔할 만큼 놀란 얼굴을 천만다행으로 두 분 다 보지 못했다. 속으로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길 수차례, 아일럿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태연해진 표정과는 달리 심장이 달음박질처럼 콩콩대고 있었다.

*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렴, 아일럿.”

이후로도 위기는 찾아왔으나, 대부분이 아일럿이 지레 겁을 먹어 발생한 일이었다. 모든 두려움은 전부 제 마음속에서만 존재했다. 두 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제가 학교 기숙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무엇보다 가스파르의 존재와 저를 엮지도 못하실 것이다.

먼저 말하지 않는 한은.

“맞다. 이불 잘 덮어야 한다? 잘 덮고 자는지 새벽에 가서 확인해 볼 거야.”

“당신도 참.”

두 분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아일럿도 위층으로 올라갔다. 밥도 먹었고, 산책도 했고, 개운하게 목욕도 했으니 잠이 잘 올만도 한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머리가 점차 맑아졌다. 그런데도 눈을 감고서 버텼더니, 네가 이래도 안 일어날 거냐는 식으로 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다.

뭔가 부족하다. 부족함을 깨닫고 나니 점점 더 부족해진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옆이 허전하다는 것이리라.

‘토요일에 하루치를 더 해야 일요일에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별다른 욕구가 솟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일 테지만, 그것이 허전함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엎드려 보고, 양옆으로 뒤척이고 나서야 아일럿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허할 일인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을 여느 때보다 실감했다. 가스파르가 없어서 잠을 못 자는 거다. 밤이 되면 관계를 가지지 않는 날이 없다시피 했고, 끝나면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옷을 입으려 해도 가스파르가 입지 못하게 하는 터라 셔츠 한 장 혹은 바지만 입은 채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형제도 없고 부모님도 일찍이 아일럿을 혼자 재운 터라, 평생 누구와도 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던 아일럿이지만 가스파르와 자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잠버릇 없이 곤히 잠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손발이 차가운 저와는 달리 어디를 만지든 따끈따끈해서 실로 이상적인 베개이자 애착인형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과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으니 잠이 안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일럿은 제 감정을 그렇게 정리하고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 안은 고요했고 사방이 한결 캄캄해졌는데 잠이 멀었다.

열 시, 열한 시 반… 열두 시를 넘긴 걸 확인한 무렵부터는 시계를 그냥 저만치로 치워놓았다. 시간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짜증만 나서 머리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침 수업이 있으니 빨리 자지 않으면 내일 학교에 가는 것이 꽤 힘들 텐데.

눈꺼풀을 닫고서 양을 세는 일도 부질없었다. 하지만 양을 372마리 정도 헤아렸을 무렵에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옷이라도 다 벗고 누우면 좀 비슷해지지 않을까. 알몸으로 이불속에서 자는 게 익숙해져서, 잠옷을 다 갖추어 입고 자니까 불편해서 그럴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고 나자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일럿은 몸을 좌우로 뒤척이며 고민하다 슬그머니 단추를 풀었다. 다 벗는 건 무리고 상반신만이라도 벗고서 자면…….

“…….”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리가.

단추를 다 풀고서 잠옷을 아래로 내리던 손이 멈춰 섰다. 제 꼴이 약간 한심스럽기도 했거니와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지 않아서 실내가 상당히 쌀쌀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방에 있다가, 살짝 더운 것 같아서 물을 부어 버렸는데 이렇게 추워질 줄 알았으면 내버려 둘 걸 그랬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하인에게 장작을 가져와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도로 단추를 잠그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창문이 덜걱거렸다.

“어?”

바람 때문에 나는 소리와는 많이 달랐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경계하던 와중, 무언가가 창문을 열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둑인가?! 바로 옆에 있던 베개들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읽다가 만 책까지 던지려는데,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 들어왔다. 마법석으로 만들어낸 불빛 속에 가스파르가 있었다.

“아일럿. 아일럿. 나야.”

“가스파…르?”

“쉿, 조용히. 부모님께서 깨어나시겠어. 여기까지 조용히 들어왔는데.”

커졌던 목소리가 바로 작아졌다. 하마터면 날아오는 책에 맞을 뻔했던 가스파르가 아일럿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양장본인 데다 두툼하기까지 하니 맞았으면 제법 아팠으리라. 베개도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온 탓에 살짝 아팠다.

“넌 위기상황에는 폭력적이 되는구나. 기억해둬야겠어. 갑자기 뭘 던지는 건가 했네.”

“가스파르. 너, 왜 여기. 뭐지? 꿈인가?”

“맞아. 이거 꿈이야.”

“꿈이라니.”

“안 속을 거면 왜 물어봐?”

방금 전에 부모님이 깰 수도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했으면서? 어리둥절한 아일럿을 보며 가스파르는 답지 않게 소년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따지려던 말도 고스란히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쓸데없이 상큼했다.

“꿈에서 보려고 했는데 꿈을 꿀 수가 있어야지.”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아일럿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가스파르가, 아예 침대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누워 버리더니 한쪽 팔을 펼쳤다. 그의 팔베개에 어느샌가 완벽히 적응해 버린 아일럿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팔을 베고 말았다. 밤길을 달려온 그에게는 밤공기 특유의 시원한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담은 어떻게 넘었어? 보통 높은 게 아닌데.”

“마법석 몇 개면 쉽지.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어.”

“내일 나갈 땐 어떡하려고.”

“네가 타고 갈 마차에 미리 앉아 있을 테니 자리만 마련해줘.”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럼 됐네.”

말끝을 흐리는 아일럿의 코를, 가스파르는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이제야 실감이 좀 난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아일럿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스파르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일럿 바슬레인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있어서. 만져볼 수 있어서. 한 번 더 코를 집어 보려다가 아일럿에게 손을 붙잡혔어도 손을 잡아서 좋았으니 중증이었다.

“오늘 하루쯤은 떨어져 있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밤이 되니까 그게 아니더라.”

“응?”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영 안 오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찾아왔어.”

방금 전에 그 사실을 깨달은 저와는 달리 적어도 한 시간 전에 알아차렸다는 뜻이 된다.

“너도 그랬잖아. 내가 없으니까 잠이 안 오지?”

물어 보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자신만만했다. 내가 그랬으니 너도 당연히 그랬으리라는 걸 확신하는 표정. 밉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일 아침 수업이 있으면서도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는데 무슨 변명을 할까.

“그런데 아일럿.”

“…응?”

“잠옷 단추가 다 풀려 있는데.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었던 건가?”

……앞섶을 풀어헤치고 있던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밑을 내려다본 아일럿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으나, 마법석의 불빛이 그다지 밝지는 않은 관계로 가스파르는 알지 못했다.

“어… 음… 으응. 가, 갈아입은 거야.”

옷을 갈아입기는커녕 벗으려고 했다. 벗다가 멈추지 않고 아래까지 벗었으면 정말 어쩔 뻔했을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아일럿이 엄청난 속도로 단추를 꿰고 나서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왔으니 잘된 일이다. 그가 있으니 푹 잘 수 있을 터였다. 빨리 잠들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아.”

예상외로 아일럿이 한 몸처럼 달라붙으니 무방비했던 몸이 긴장을 한다. 이건 좀 곤란한데, 갑작스러운 난관에 부딪힌 가스파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를 안고 있던 아일럿은 금세 위화감을 알아차리고 팔을 슬금슬금 거두었다.

“…내 방 하나도 방음 안 돼.”

“뭐?”

“밖에서 바로 들린다구.”

그런 말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은 마주한 시선이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나서는 베개 하나를 들고 저만치로 물러난 아일럿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차하면 가스파르를 이 방에서 재우고 저는 객실이나 소파로 갈 작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하다 보면 분명, 거절하지 못하게 될 걸 아니까. 방음이 안 되는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일럿, 그거 아니야.”

칼 같은 차단에 미약한 양심을 깊게 찔린 가스파르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려고 온 거 아니야. 너랑 하는 건 항상 좋기는 한데…….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알겠어. 그치만 정말 아냐.”

“못 믿겠어.”

“이리 와. 아무 짓도 안 할게. 안고만 잘 테니까.”

말해도 오지 않는다. 금요일에도 동종 범죄를 저지른 전적이 있는 전과범인지라 가스파르도 할 말이 없어, 얼떨결에 세상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방법으로 약속을 했다. 어설프게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자, 약속. 지키지 않는다면 스칸다에 있는 내 영지를 전부 너한테 줄게.”

“…….”

“가디테로안이라는 이름에 걸고 맹세해.”

공증을 받은 건 아니지만 가스파르는 황실의 사람이었다. 저 정도로 말하면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아일럿은 머뭇거리다 한 걸음만 내딛은 뒤 멈춰 섰다.

“왜?”

“안고만 자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야 돼.”

“물론이지.”

“내가 먼저 졸랐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도 안 돼. 조르게 만들지 마.”

“치밀한 걸. 그런데 그 생각은 못 했어.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뻔했네. 나만.”

생각도 못 했지만 지극히 제가 할 법한 일이었다. 아일럿이 언제 이렇게 저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는지, 내심 감탄한 가스파르가 옆자리를 재차 통통 두들겼다.

“알겠으니까 들어와. 네 요구 조건은 무조건 수락할게. 이러니까 네가 아니라 내가 이 침대 주인 같잖아.”

아니면 내 손목을 묶어 버릴까? 가스파르가 앞으로 두 손을 내밀고 장난스럽게 흔들어댄다. 그걸 보고서 몇 초간은 정말 묶어둘까 진지하게 고민한 아일럿이었다. 그러나 마땅히 묶을 만한 것이 없어서 포기하고, 살금살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뭘 걸었으니 약속을 지키겠지. 침대 앞으로 다가오기가 무섭게 손이 쑥 뻗어 나왔다. 아일럿은 빨려 들어가듯이 가스파르의 옆에 눕게 되었다.

“…….”

잠이 안 왔던 게 거짓말 같다. 가스파르의 신체가 제 어딘가에 닿아 있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노곤함이 솜이불처럼 쏟아져서 몸을 덮는다. 사정이 다르지 않던 가스파르도 나른하게 하품을 하곤 아일럿의 이마에 제 볼을 대었다.

“난 이제 너 없으면 잠은 어떻게 잘까 몰라…….”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뭐라고 말했는지 맞혀봐.”

벌써부터 잠이 올까 말까 하던 상태였던 아일럿은 가스파르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물어보았더니, 시선이 상당히 묘한 각도에서 마주쳤다.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인다면 입을 맞추기 딱 좋은.

“아, 그렇게 보지 마. 방금 스칸다에 있는 영지가 네 것이 될 뻔했어. 키스할 뻔했다구.”

선물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기껏 진지하게 한 약속을 깨고서 주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먼저 뒤로 물러난 가스파르가 눈을 감아 버렸다. 키스까지는 괜찮다고 하려던 아일럿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키스가 괜찮아지면 그다음엔 만지는 게 괜찮아질 거고. 그러면 그다음엔…… 아일럿이 애써 상상을 닫았다.

“큰일 나기 전에 빨리 자야겠다. 잘 자, 아일럿.”

“잘 자, 가스파르.”

그렇지만 허전하던 자리는 온전하게 충족되었다. 어쩐지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맞다. 이불 잘 덮어야 한다? 잘 덮고 자는지 새벽에 가서 확인해 볼 거야.’

오르덴 바슬레인은 새벽에 깨어난 김에 졸린 눈을 비비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냥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사소한 일에도 걱정할 나이는 훨씬 전에 지났다지만 부모에게는 언제까지 어린 아들일 뿐이다. 워낙 더위를 잘 타는 아이라서 추운 날씨에도 종종 이불을 차내고 자 버리니, 감기에 걸리기 일쑤여서 몰래 들어가 이불을 덮어준 적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고마워. 자네도 이만 들어가서 쉬지 그러나?”

“에휴, 자고 일어난 겁니다. 나이를 먹으니 밤잠만 없어지는군요.”

“그랬군. 그럼 아침에 보자구.”

“예, 주인님. 들어가십쇼.”

간 김에 벽난로에 불까지 지펴 줄 생각으로 장작과 불씨도 챙겼다. 조용조용 방문을 열고, 까치걸음으로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새벽이라 실내는 푸르스름했지만 여전히 어두웠던지라 벽난로에 불씨를 넣고 나서야 조금 밝아졌다. 오르덴은 벽난로 안의 장작을 부지깽이로 잘 뒤집어 놓고는 침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먼저 봐버린 것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다리 네 개였다. 두 개는 내 아들 것인데, 두 개는 누구의 것인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가까스로 소리는 삼켰다. 오르덴은 시선을 천천히 위로, 위로 올렸다.

“앗… 아, 아니…….”

다리가 네 개인 것처럼 팔도 네 개. 머리도 두 개였다. 두 사람의 팔이 덩굴처럼 얽혀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오르덴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오, 오, 세상에. 신이시여. 생전 믿지 않던 신을 찾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발의 남자. 아무리 봐도 아일럿의 또래로 보이는데 만일 친구라면 객실을 내버려 두고 굳이 한 침대에서 잘 리가 없을 터였다.

차마 그 자리에서 아들을 깨워,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할 수는 없었던 오르덴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 안에서 빠져나왔다. 아들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긴 했어도 걱정이 되어 떠볼 겸 했던 말일 뿐, 여전히 어리다 생각하였던 아이가 갑작스레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일럿의 애인이 남자라니. 상상도 못 한 정체에 침실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미처 자고 있는 사람을 생각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오자, 누워 있던 엘라는 남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당신. 새벽부터.”

“아니… 그게…….”

여보, 아일럿이. 아일럿의 방에 낯선 남자가-

“뭔데.”

“그러니까.”

혀끝까지 튀어나온 말이 막상 입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절했다. 제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아들의 사생활인데, 아내에게 줄줄 이야기 해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고, 침대에 앉았다.

“미안. 조용히 잘게.”

“그래. 자.”

피곤함에 한층 무신경해진 아내가 등을 돌렸다. 오르덴은 소리 없이 끙끙 앓다가 아침이 다 되어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나 때마침, 아들의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을 티 나지 않게 살짝 걷고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으나 아들의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분명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었던 남자일 터.

단 하루도 떨어지지 못하여 방까지 들인 사이라면 여간 깊은 사이가 아니라는 것인데, 대체 어느 집 자식인 걸까. 사교계에는 관심이 없는 아들이니 같은 학교의 학생일 가능성도 컸다.

앞으로 한 달 내에 아들을 또 볼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아들을 배웅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도망치지 못할 만큼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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