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아일럿을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 ① (13/17)

1. 아일럿을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 ①

 [뉴토공금] @이히리베루디

가을에서 겨울로 이미 넘어간, 선선하다 못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항상 자식의 건강을 걱정하는 부모님이 보내 주신 질 좋은 외투를 교복 위에 입은 아일럿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뜨끈뜨끈했다.

“새 학기 들어서는 성적도 더 좋아졌고. 열심히 하는구나, 아일럿.”

“네, 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단다.”

“예, 교수님.”

등줄기를 따라서 올라온 쾌감이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 때마다 몸 곳곳으로 열이 퍼져나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이번 학기부터 정치 수업도 같이 듣지? 어려운 건 없어? 워낙 암기할 게 많으니 처음 들을 때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닌데.”

“아…. 음. 책이 무거운 것 말고는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필사적이 된 아일럿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교수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나 교수가 저를 보지 않을 적이면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고, 목과 이마에는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했다.

“……!”

아, 안 돼. 가스파르.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닐까. 연구실 안에 있는 건 교수와 저, 단 둘뿐이었으나 어디서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타이밍에 작동을 시킬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가스파르랑 친하게 지내더구나. 어떻게 알게 된 거야? 학교에서 접점이라도 있었던가?”

“아뇨. 여름 휴양지…에서, 만나게 돼서요. 그때 친해졌습니다.”

“아하. 여름 휴양지였구나. 아일럿이 더위를 많이 타던가?”

“네, 좀. 많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닌데, 아일럿은 제가 똑바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래쪽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에 배 속이 울렸고, 머리는 자꾸만 흐리멍덩해져서 아무리 붙잡고 끌어당겨도 저만치로 가는 기분이었다. 이 방에 혼자이기만 했다면 당장 테이블에 엎드려서 다리 사이를 만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혹시 지금도 덥니? 얼굴이 빨간데.”

“아, 저. 감기… 기운이, 흐, 있어서요.”

“응? 어쩐지, 목도 좀 잠긴 것 같더라니. 차라도 한 잔 줄까?”

“네…! 가, 감사합니다. 큼. 흠. 흐으.”

“마침 잘됐네. 좋은 찻잎이 들어왔거든.”

어느 순간 아래가 찌르르해지자 발끝이 저절로 섰다. 입술을 만지는 척, 소리가 새지 않게 입을 틀어막은 아일럿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릴 적마다 의자와 부딪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때마침 찻주전자를 꺼내려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가려지긴 하였으나, 이제 문제는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으…… 읍.”

“내 정신 좀 봐. 이쪽 창문이 열려 있었네.”

열려 있던 창을 닫기 위해 교수가 등을 돌렸을 때,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표정이 무너졌다. 방에 사람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신음이 입 밖으로 줄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바람이 벌써 서늘하구나. 이번 겨울은 춥겠어.”

“네, 네, 흐. 그렇겠죠.”

교수가 뒤돌아서기 전에 간신히 표정을 관리한 아일럿이 애써 웃어 보였다. 다행히 진동이 약해져서, 차를 마시는 동안은 참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사레가 들렸을 게 뻔했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아일럿, 혹시 그때 기억하니? 학교에 발레리아의 교환학생들이 왔을 때 말야.”

다만,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분이 아니셨는데 오늘따라 너무 말을 많이 하셨다. 주제 하나가 끝났으니 슬슬 끝낼 때다 싶어서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를 말해 보려고 하면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갑자기 비품이 부족해질 줄이야. 그땐 여러모로 큰일이었지.”

저도 큰일이에요! 마음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동이 약해지기만 했을 뿐이지, 여전히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꾸준히 자극을 받은 터라 교수의 앞에서 사정을 해 버릴 것 같았다.

“시간 좀 봐.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아, 아니에요. 교수님.”

“요즘 학생들만 보면 왜 이리 이야기가 나누고 싶은지 모르겠어.”

끝나려는 건가? ‘아니에요.’라고 웃으며 말하면서도, ‘한가하면 좀 더 떠들어도 될까?’라고 교수가 대답할까 속으로 벌벌 떨었다. 다행히 교수도 다른 일이 있었는지 대화가 끝날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일럿은 그제야 안심을 했다.

“가만, 아일럿은 이제 어디로 가니? 기숙사? 도서관?”

“아니요. 저, 3 별, 별관에 일이 있어서 거기로-”

“잘됐다. 가는 길에 이것 좀 알토비어스 교수님한테 전해 줄래?”

사람 살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울상을 지을 뻔했지만, 절망하는 마음과 달리 사회성을 갖춘 입꼬리가 불상사를 막아 주었다. 약간 무거운 서류뭉치를 건네받았다.

“네, 교수님. 그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자.”

하필이면 알토비어스 교수님이었다. 학생한테 좀 무관심하시면 좋을 텐데, 너무 사람이 좋은 분이다보니 학생이 자기 연구실에 오면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는 분이다. 그걸 알고서 알토비어스 교수의 연구실로 걸어가는 아일럿의 걸음은, 마치 올가미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아, 들어와요.”

3 별관 옆에 있는 2 별관으로 향한 아일럿이 문을 두드렸다. 계시지 않길 바랐던 희망이 다 부질없었다.

“음? 아일럿이구나. 무슨 일이니?”

“네, 저 메이와 교수님께서 이걸 전해…… 헉. 우읍.”

“아일럿?”

“헙.”

이럴 때 진동을 세게 하면 어떡해! 어딘가에 있을 가스파르에게 고함을 치면서 아일럿이 문을 붙잡았다. 다리에는 힘이 풀리는데 기구를 물고 있는 구멍만 오므라들면서 한층 더 심한 쾌감을 제공했다.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아니, 저, 저.”

연구실에 찾아온 제자가 얼굴이 창백해졌다 붉어지고, 문고리를 잡고서 뻣뻣하게 굳어 있으니 교수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알토비어스 교수가 급하게 다가오자 아일럿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그게, 그게요. 저, 이거 전해 드리려고. 메이와 교수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아일럿, 너-”

“괜찮습니다. 오다가 허리를 삐끗해서요. 그것 때문에 좀. 바로 보건실로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 어쩌다가… 혼자 갈 수 있겠어?”

“그럼요. 시, 실례했습니다.”

황급히 서류를 건네준 뒤에 아일럿은 절뚝대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가스파르는 3 별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으니, 거기에 가야만 이것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아일럿이 있는 힘을 다해서 3 별관 2층에 도착했을 때 가스파르는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가스파르마저 없으면-

“가스파르… 어딨어.”

복도에 아일럿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단은 어디에라도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벽을 짚고서 벤치로 향하는데, 몸속에서 기구가 이동을 했다. 아, 설마? 하는 순간 더욱 확연하게.

“헉-”

걸으면서 위치가 바뀐 것 같다. 자극하는 부위가 달라지자 안경 너머에 있는 아일럿의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거긴, 거긴……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하다 간신히 벤치에 앉는데, 앉는 것만 편했지 무게가 실려서 안쪽의 자극이 심해졌다.

“하아, 후, 흐으. 으읏.”

몸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둥글게 휘어 있고 끝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기구였다. 마법문자가 새겨져 있는 탓에 멀리서도 조종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아일럿은 가만히 넣고 있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끝부분이 조금 두껍긴 했지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아일럿, 손 내밀어봐.’

손바닥 중앙에 기구가 닿자마자 작동했다. 약한 진동일 때도 흠칫했는데, 강한 진동으로 넘어가자 손바닥이 금세 저릿저릿해지고 떨어진 이후에도 얼얼함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에 대고만 있어도 이 정도인데 이런 걸 안에 넣고서 교수님을 만나라니? 아일럿이 주춤주춤 물러서자 가스파르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두 번만 세게 켜둘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나선 바로 끌게.’

거짓말쟁이. 이게 두 번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끄지도 않았어!

“아, 아…….”

손등을 깨문 아일럿이 눈을 가늘게 떴다 꽉 감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복도에서 사정까지 해 버리는 게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고, 이성이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몸이 그 사실에 안도했다. 소리를 더는 참기 어려웠다.

“으응…!”

사람이 있어도 참지 못할지도 몰라. 목 안쪽에서 울린 소리가 높게 울린 것에 움찔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기구가 좀 더 기분 좋은 곳에 닿았다. 여기서 살짝만 더 깊게 들어가면, 가스파르가 항상 손가락으로 거칠게 쑤셔주던 곳이다. 그걸 깨닫자 제 몸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아, 흐아…….”

다리가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고, 허리가 들렸다. 등을 벽에 기대다시피 한 채로 계속 허리를 들썩여대던 아일럿이 입을 벌렸다. 아래에 손을 대지 않고 벤치를 붙잡고 있는 건 최소한의 이성이었으나,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거의 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조금만.

“흡.”

진동이 뚝 멈춰 버렸다. 약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완전히.

“…….”

어이가 없어서 열도 빨리 식었다. 자극당하고 있던 곳은 자극을 더 원한다고 몸을 괴롭혔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눈을 한 번 꽉 감고서 입술을 깨물기를 몇 번,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어딨어, 가스파르. 나와.”

“여기.”

갈색 종이봉투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가스파르가 손을 흔들었다. 제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눈치채었으니 더 숨을 필요가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빛을 하고 씩씩대는 아일럿의 기세가 매서웠다. 진동을 끄지 말 걸 그랬나?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리를 굽히고 시선을 맞춘다.

“다 들리겠어. 그렇게 소리를 다 흘리면 어떡하니.”

“못 참게 해놓고는…!”

“그렇긴 하지.”

연구실에서 나오던 무렵부터 멀지 않은 곳에 숨어서 아일럿을 따라오던 참이었다. 애써 태연하게 걷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자리에서 덮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길 수차례. 아일럿과 만나기로 했던 별관 2층은 애초에 드나드는 사람이 적은 데다, 수요일은 아침에 청소를 하는 인원 외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체크했다. 해서 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가까운 방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못됐어. 진짜 못됐-”

“다시 켜면 용서해 줄 거야?”

기구가 안에서 진동하기 시작한다. 가스파르가 아일럿의 앞에 서서 진동을 켜자 잠시나마 느슨해졌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으읏… 하…….”

“다른 곳에서 방금 전처럼 소리 내진 않았지? 교수님 앞에서라든가.”

“아. 안 그랬어…. 힘들었는데, 겨우 참았어.”

“좋아. 넌 거짓말은 안 하니까.” 

“으…. 앗, 잠깐. 잠깐만.”

제 흥분에 이기지 못한 아일럿이 무릎을 맞닿게 한 채 바들거렸다. 기구에서 소리는 나지 않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만큼 그것을 제 몸속에 다 쏟아붓고 있는 기분이다. 쾌감이 물결치듯 몸을 적시며 올라왔다.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면서 아일럿이 가까이로 다가온 가스파르의 팔을 꽉 붙잡았다가, 그가 마법석을 매만져서 진동을 멈추어주자 잡고 있던 팔을 아프지 않게 쳤다.

“가스파……. 흐, 아으으읏…….”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솜방망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퍽, 퍽, 두드리고는 원망스럽게 쏘아본다. 

“으, 읍.”

그대로 팔 위에서 미끄러지는 손을 가스파르가 붙잡아주며 웃었다.

“아일럿. 그렇게 좋았어?”

“너무, 너무해. 연구실에서도 두… 두 번만 쓴다고 했잖아.”

“아, 내가 그랬었니? 언제 그랬더라.”

“그것만 지나면 계속 약하게 둘 거라고 했으면서……. 아!”

가스파르의 손에 일으켜 세워진 아일럿은 서는 시늉만 했을 뿐, 무릎이 접혀서 제대로 서질 못했다. 허벅지 안쪽이 약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품에 기대서 안절부절못하다 거의 우는 소리를 내며 가스파르를 붙잡았다. 기구를 껐다 켜길 내내 반복하였으니 내벽이 한결같이 저릿저릿하고 근질거렸다.

“나, 못 참겠어. 더는… 이, 이거, 이제 빼줘.”

“저쪽으로 가자. 가끔 상담실로 쓰는 방이 있어.”

뭐…?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일럿이 멍하니 고개를 들다가 가스파르의 손에 잡혀 끌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몇 걸음을 걸었다.

“거… 거기서 빼 주려고?”

“그럼 이대로 기숙사까지 갈까? 네가 갈 수 있으면 그래도 되는데.”

말하면서 가스파르는 손으로 아일럿의 다리 사이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참지 못할 걸 알면서 부러 저렇게 말하는데, 어느새 그의 말버릇에도 몸이 흥분을 했다. 버릇이 든 탓이다.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그가 무엇을 해 줄지.

“어떻게 할래?”

아일럿이 머뭇거리다 가스파르의 팔을 잡으면, 그것은 무언의 동의였다. 어렵사리 한 걸음씩 내딛는 동안 그가 말한 상담실이 가까워진다. 그럴수록 점차 성기가 젖는 것이 느껴졌다. 페니스는 물론이고, 그 밑까지.

“하… 으읍!”

상담실에 들어오자마자 등이 벽에 닿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힌 아일럿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파란 눈과 마주치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가스파르도 그 반응을 알아차리고서는 아일럿의 붉어진 입술을 문지르며 웃음을 흘렸다.

“네 손으로 벗어봐.”

“…응.”

“천천히.”

말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버클을 풀고서, 속옷과 함께 내리지는 못하고 바지부터 아래로 내리는데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가 제 하반신으로 시선을 두었다는 것을 깨닫자 바지를 무릎 아래로 내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이어서 속옷. 딱 붙는 속옷 위로도 불룩하게 솟아 나온 것이 보였다. 귀두가 슬그머니 모습을 보이고 나니 가스파르는 참지 않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윗부분을 둥글렸다.

“흡…….”

속옷이 허벅지 중간에 걸리자 페니스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고, 매끄럽기 그지없는 데다 색은 뽀얗고 예쁘지만 자극을 주면 금세 불그스름해진다. 지금도 그렇다. 이미 열이 올라서 붉은색을 머금은 것을 보며 가스파르가 핥는 시늉을 하자 아일럿은 흐- 하고 소리를 냈다. 아직 제대로 만져주지도 않은 참이었다. 기둥을 타고 내려간 손이 원래라면 그곳에 없어야 할 것을 더듬었다.

“사실 아까 너 보내고 나서 후회했어. 여기도 하나 더 넣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한쪽에만 넣어줬을까…….”

오므라들어 있던 매끌매끌한 살집을 벌리고 들어가니, 손에 물기가 어린 공간이 닿았다. 가스파르는 그 좁고 예민한 곳을 쓸어 올렸다.

“하지만 양쪽에 다 넣었으면 넌 못 견뎠겠지?”

“가스… 파르, 거긴, 왜, 왜 만지는. 흣.”

“그래야 좀 더 밑으로 갈 수 있잖아.”

아일럿이 어깨까지 힘을 주면서 바들바들 떨게 되니 한 번 더. 아주 섬세한 작업을 하듯 같은 행동을 여러 번 하고 난 이후에는 주변까지 제법 젖어 있었다. 손을 떼어내니 투명한 점액이 달라붙었다가 끊겼고, 가스파르는 묻어나온 액을 고스란히 페니스에 묻히다가 귀두를 슬며시 움켜쥐었다.

“왜 이렇게 젖었을까.”

“하, 아으으, 읏.”

당연하지만 선단에서도 선액이 맺혀서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잡아주고 있던 손으로 움푹 팬 곳을 누르자, 아일럿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츠렸다. 가스파르에 의해 요도가 자주 괴롭혀지긴 했어도 여전히 이런 자극을 견디기에는 버거운 곳이었다. 그런 반응을 자세히 감상하던 가스파르는, 다시 여성기를 매만졌다.

“여기도 그래. 끈적끈적해. 벌려서 살펴보면 얼마나 젖어 있을지 모르겠어.”

“하윽…. 으, 읏, 아아아…! 아, 아으, 하, 거기. 거긴. 으읍.”

“좋아하지?”

“으, 응…. 조, 좋아. 흐.”

상담실에 들어가기 한 시간 전쯤에 가스파르가 준 약을 먹고서 생겨난 곳. 곧게 뻗은 페니스 아래에 생겨난 여성기도 끈적끈적하게 젖어 있으니, 손가락이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간다. 두 손가락으로 가위질을 하듯 벌리고서 구멍 주변을 세심히 문지르자 아일럿은 허리에 힘이 풀렸다. 손바닥으로는 요도만큼이나 약한 음핵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곳이 만져지면 쉴 새 없는 절정이 몸을 마구 두드리는 것만 같아서, 도저히……. 안 돼. 안 돼. 부러 손바닥에 힘을 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마구 고개를 저었다. 쾌감이 너무 강해서이기도 했지만 이 감각을 몸이 기억하다 못해 새겨질까, 아일럿은 두려웠다. 

“아, 흣… 으응… 읏, 흐으으으. 아-”

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그 자리가 핥아지거나 만져지기만 해도 여성기가 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낄 지경이었다. 가스파르도 그것을 알고서 고환 사이나 회음부를 간혹 집요하게 매만지곤 했다.

“흐아, 아… 으…….”

밑으로 내리긴 했어도 이 이상 젖으면 교복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래에서 흐르는 액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질 안으로 중지가 한 마디 정도 들어갔다. 더 넣지는 않고 손가락 한 마디로 입구를 갉작이는데,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지라 그마저도 과하게 느꼈다.

“하, 아, 아, 으으…. 흡, 거기, 그. 그만. 흐. 아. 가스파르…. 읏, 빼기만 하는, 앗, 흑…….”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싸게 안 해 주면, 네 여기가 너무 불쌍하잖아. 아까부터 이렇게 우는데.”

울고 있다는 곳이 어딜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에 몸이 다 무너져 내렸다. 한 마디에서 고작 두 마디. 그런데도 내벽이 빈틈없이 달라붙어서 그 형태마저 기억하려는 듯했다.

“아일럿,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말해 봐.”

“으, 읏. 서… 성적 좋아졌다고 하셨-”

“그리고?”

“몰라. 흐. 으으……. 아!”

방금 들은 말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더 말을 하셨던가? 떠올려 보려 하는데 가스파르가 다른 손으로 마법석을 꽉 쥐었다.

“하, 아, 너, 너, 으읏.”

힘을 준 만큼 구슬이 심하게 진동하니 아일럿이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내벽을 때리면서 구슬이 진동하고 배 속을 울렸다.

“성적이 좋아졌다고 하신 것뿐이야?”

“응. 으읏… 응…….”

“대답하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린다.

“어쨌든 성적이 좋아졌다니 잘됐네. 더 올라가지 않는다고 걱정했잖아.”

“흐아아… 아, 으, 읏-”

“다음에 또 같이 공부할까.”

“응, 응, 흐, 으으읍…….”

솔직히 도리질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저보다 성적이 더 좋은 가스파르는 좋은 선생님이었고, 남을 가르치는 것에도 익숙했지만.

“또… 아, 안 그러면.”

“또 뭘?”

“요도에, 그거, 꽂아두고서… 바로 뽑는 거.”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면 스스로 움직이는 가느다란 은색 막대가 요도에 꽂혔다. 끄트머리에 루비가 달려 있는, 그의 별장에서도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며 아일럿을 괴롭히는 동안, 가스파르는 손가락 하나만 사용하여 얕은 곳만 괴롭혀 주었을 뿐이다.

‘문제 푸는 속도가 좀 느린 것 같아. 이러면 후반부에 있는 문제들은 너무 급하게 풀게 되니까 좋지 않아.’

정해진 시간 안에 10페이지를 넘게 풀어야 두 손가락으로 쑤셔 주고, 그다음 과제까지 완수해야 요도에 박힌 마개를 뽑아 준다니. 하다 보니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가스파르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읏… 으, 하으으으…!’

‘좀 더 해 봐, 아일럿. 응? 잘할 수 있어.’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애원해 볼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노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적당히 상을 주었다.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빠르게 풀다 보니 10페이지를 넘기고 말았다. 그다음 과제도 똑같이 정해진 시간 안에 10페이지를 푸는 것이었으나 아일럿은 그걸 어떻게든 해내고 말았다.

‘…우, 흐읍…….’

전부 다 주관식이었기에 쓰는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마지막 점을 찍자마자 펜을 내팽개쳤다.

‘우으, 읏, 하, 하아, 흐… 다, 다 풀었어, 가스파르, 다 했, 헉, 아읍…!’

마개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란 기쁨은 찰나였다. 저를 쳐다보는 아일럿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은 가스파르는 루비 장식을 세게 눌렀다.

‘빠… 빨리, 뽑아, 줘, 아, 아아아, 힉… 우으읏!’

‘응. 방금 뽑았어.’

아일럿이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가장 깊은 곳에 있을 때 뽑아 버렸다. 마개가 요도를 깊은 곳부터 긁으면서 뽑혀 나오자 통증보다 앞선 예리한 쾌감이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좋아했으면서.”

“으…….”

그때 생각을 하는 걸까? 짓궂게 웃은 가스파르가 아일럿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차마 싫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일럿이었다. 너무 지독해서 두려웠을 뿐, 가스파르에게 또 당한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다 젖는 기분이 들고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게다가 그때를 떠올리게 되자… 집사가 급한 일로 찾아와서 끝까지 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가스파르와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여기는 사람이 없는 별관이라고는 하나 상담실이었다. 가스파르와 하려면 둘 중 한 명의 기숙사로 가야-

“가스파르?!” 

빼 주겠다는 기구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서, 가스파르가 제 바지를 내리는 걸 보고 아일럿이 무심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난 벗지 마?”

“여기 상담실이야!”

“괜찮아, 문 잠갔고 오늘 여기 쓸 사람 없어.”

“그치마, 읍.”

더 말하기 전에 키스를 했다. 가스파르의 입술이 빈틈없이 제 입술을 막아 버리자, 말은커녕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젖혔다.

“안… 흣…….”

애초부터 기구를 빼 주기만 할 마음은 없었던 거다. 다리 사이에 닿은 가스파르의 것이 여느 때처럼 흉기 같았다. 그걸로 아래쪽의 여성기까지 문질러대자 입술이 막힌 아일럿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푸웁, 하으아…!”

셔츠 위로 손이 기어 올라온다. 단추를 풀지는 않고 천과 함께 가슴을 잡는데, 다소 거친 면에 문질러지는 감각에 입이 말랐다.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초조함을 알았지만, 한동안 옷 위로만 몸을 만지고 나서야 중간부터 단추를 풀었다. 부러 맨 위에 하나만 남겨두고는 다 풀고 나니 셔츠 안에서 가슴을 감싸고 있는 하네스가 두드러졌다.

“하네스가 잘 어울려.”

교복 때문에 목 부분을 조이지 못하는 대신, 어깨와 가슴 아래를 강조하고 위로도 얇은 줄이 하나 더 지나간다. 살짝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가 놓아주고는 셔츠와 하네스 사이로 드러낸 맨살을 쓰다듬었다. 아예 다 벗겨 놓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딱 여기까지만.

“하, 아… 읏…….”

검지로 유륜을 두어 바퀴 굴려대니 유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예상보다 조금 더 커서 그게 야하다. 이렇게나 야한 걸 속에 숨겨 놓았으니 말이다. 아일럿의 얌전해 보이는 얼굴까지 보면 금상첨화였다. 옷을 벗겨 놓아도 정숙할 것 같이 생겨선.

“이것 봐, 아일럿. 여기 딱딱해진 거.”

“읏, 하-”

“아래보다 여기가 더 딱딱할지도 몰라.”

흥분에 잘 익었기 때문일까. 탱탱하고 둥글둥글한 유두가 식욕을 돋우는 색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 아일럿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이런 걸 보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매일 맛을 보는데도 몸이 떨어지면 다시 식욕이 생겨났다. 가스파르는 아일럿이 몸을 뒤로 기울이게 하고서 습한 입술로 유두를 덮었다.

“으으읏…….”

제 유두를 빨고 있는 가스파르의 머리 너머로, 시야에 들어온 [상담실 이용규칙]이 아일럿을 자극했다. 이런 곳에서 하면 안 되는데, 그런 마음 때문에 오히려 그와 색다른 장소에서 했을 때처럼 흥분이 된다. 그리고 가슴에서 나는 소리마저도.

“아하, 읍, 흐으… 응. 흐으, 웃-”

살을 빠는 소리가 한쪽에서 계속된다.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아일럿의 표정을 계속 변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서 더 해 주었으면 좋겠고… 또.

“가스파르… 으.”

말랑했던 곳이 가스파르의 손과 입속에서 형태가 잡히면서 딱딱해졌는데, 다른 곳은 여전히 함몰된 상태였다. 한 곳은 전혀 애무해 주지 않으니 서서히 다른 쪽도 해 주길 바라게 된다.

“흡.”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하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아일럿은 그제야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 다른 쪽도.”

“난 이쪽만 예뻐해 주고 싶은데.”

말하고서 혀끝으로 핥으며 튕기자 높은 교성이 가스파르를 즐겁게 했으나 방금 전에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두 개를 동시에 물고 빨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아쉬운데. 다만 스스로 유두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아일럿의 손을 끌어당겨, 다른 쪽 가슴에 올려두게 했다.

“여기는 네가 만지고 있어 봐.”

“흐으, 읍.”

“내가 해 주는 것처럼.”

그렇게 덧붙이지 않아도 아일럿이 제 몸을 만질 때는 가스파르의 손길을 흉내 낼 수밖에 없었다. 여름방학부터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공들여서 몸을 길들인 것은 가스파르였고 쾌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가르친 것도 그였다. 하여 어디를 애무하든지 아일럿은 그의 방식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근처를 배회하다, 마치 아래와 연결된 것처럼 그곳마저 찌릿해질 때가 되어서야 두 번째 손가락으로 유륜을 더듬는다.

“아흐… 으읏, 하, 으앗…!”

하네스 덕분에 가슴이 모여 있으니 나머지 손가락으로는 주변의 살을 쥐었다 놓으면서 함몰되어 있는 곳을 지분거렸다. 손길을 따라 하긴 해도 완전히 능숙한 것은 아니기에 유두가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대봐.”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서 가스파르가 입술을 실룩였다. 소리 없이 앓은 아일럿이 가슴을 꼭 쥔 채로 그의 입술 앞으로 가져가니, 얼마 안 있어 가스파르의 혀끝에서 유두가 흔들렸다. 이어 혀의 넓은 면으로 핥고 지나가면서 허벅지 사이에 손을 대는데, 얼마나 축축한지 액이 방울져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우으…….”

찔꺽찔꺽, 젖은 부위에서 소리가 나면서 액이 고여 있는 곳으로 손가락이 진입한다. 중지가 하나 들어갔는데 손등을 따라,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이 있었다. 아일럿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교복에, 묻, 어… 흡.”

“그럼 저쪽으로 가자. 바지랑 속옷만 벗어서 이 자리에 둬.”

그가 가리킨 곳은 테이블 앞이었다. 저 앞에서 하게 되는 걸까. 아일럿이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린 채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속옷과 발목까지 내려가 있는 바지를 다 벗어서 바닥에 놓았다. 차라리 다 벗었다면 모르겠는데, 상의는 비록 단추가 다 풀리긴 했더라도. 재킷까지 챙겨 입은 상태였다. 셔츠를 잡아당겨서 아래를 좀 가리면서 걷는 체하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빠르게 걸어서 테이블을 등지고 가스파르의 앞에 섰다. 대놓고 웃지는 않았어도 그의 만면에는 이미 웃음이 가득했다.

“이게 더 부끄러워.”

“응. 그런 것 같네.”

거칠 것이 없으니 바로 만져주던 곳에 손을 대었다. 본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게 아니니, 손가락만 사용해도 전부 감쌀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곳이다. 조금 전에 물기 어린 틈새를 매만지던 것과는 다르게 양옆의 살을 모으고는 살살 주물렀다. 잇따라 옆에서 비비는 걸로 음핵을 압박하자, 아일럿은 참지 못하고 가스파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그러나 그 예쁜 얼굴을 놓칠 가스파르가 아니었다.

“숨지 마. 얼굴 좀 보여줘. 네 얼굴 보고 싶어.”

“아, 읍… 으으……. 너무, 보지 마. 흐.”

민감한 부분에서 거듭 전류가 올라온다. 얼굴을 숨기지 말라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는 들고 있는데, 소리를 참으려 하니 도리어 가스파르를 더 흥분시켰다. 참고 있는 것이 보이면, 아예 소리를 참을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아일럿. 어디에 넣을까.”

“흐… 너어…….”

“여기? 아니면 여기?”

두 구멍을 한꺼번에 범할 수 없는 게 아쉬워서, 위와 아래로 번갈아 움직이는 손이 아일럿의 대답을 종용했다. 어느 곳에 넣어도 좋은 소리로 제 귀를 즐겁게 해 줄 것을 알기에 가스파르는 어느 곳이든 좋았지만, 아일럿은 어떨까.

“읏. 흐읍.”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엉덩이골 사이로 빠져나온 줄을 슬쩍 들었다 놓았다. 그러자 당황한 아일럿이 허벅지를 살짝 좁혔다 다시 벌리고는, 그제야 결정을 했다.

“이쪽…에.”

제 손으로 눈앞에서 발기한 페니스를 쥐었다. 눈을 꼭 감고서 귀두를 가져다 댄 곳은 기구가 들어 있지 않은 여성기였다. 아무리 뒤로 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해도 저만한 기구를 넣고 페니스까지 받는 것은 어려울 터.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겠지만 양쪽에 다 박히고 싶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저 스스로도 제 요구가 더없이 음란하게 느껴졌다.

“여기… 너, 넣고 싶, 으, 우으으… 흣, 아흐윽!”

대답을 다 듣지 않고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녹진녹진해진 입구가 안으로 들어온 것을 살살 녹여 먹는 양 움직이니, 가스파르도 사정감을 참아내야 했다. 받아들일 때는 정말 한없이 녹녹한 곳인데 나갈 때는 잔뜩 조여서 끌어당긴다. 그것만은 두 구멍이 똑같았다.

“오랜만이네, 여기로 하는 건. 그치.”

“아아, 으, 읏, 응… 흐응.”

힘겹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일럿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버거워하면서도 키스를 하고 싶어 하면 곧잘 응했다. 겹쳐진 입술이 서로의 입술 위에서 미끄러졌다. 아직 능숙하지 못한 아일럿이 숨을 쉬는 것을 버거워 할 때까지 몰아붙이는 과정이 즐거움이었다. 안면이 맞닿도록 서로의 입술을 탐내다, 잠깐 떨어지고 나서 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달라붙어 숨결을 불어넣으면 피부의 떨림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아일럿의 숨은 자연히 가스파르를 따라왔다.

“프흐……. 읏…….”

입술에만 온 신경이 몰려 있었다. 거기에서 피어나는 황홀감만을 쫓는다. 감긴 눈을 떠볼 여유 한 점 없는 아일럿은 교복 재킷이 벗겨져서,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는데도 알지 못했다.

“아, 흐핫-”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가스파르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몽롱하게 풀어진 얼굴을 보니 하염없이 키스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서로의 치골이 맞닿고 아일럿의 페니스가 눌리도록 쑤셔 넣었다가 빼냈다.

“왜, 아, 하으… 우으읍, 하…!”

갑자기 그의 손에 의해 몸이 뒤집혔다. 키스를 하다가 멈추고 자세를 바꾼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테이블을 붙잡은 제 뒤에 바짝 몸을 붙인 가스파르 때문에 비명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하, 아아, 앗, 흡, 아아… 아, 거기, 안 돼, 흐, 굴리, 는 거, 아, 안 돼. 응…….”

박으면서 만지는 건 너무하잖아, 마음속 애원이 신음으로 변하며 흐트러졌다. 세차게 움직이면서 만지기까지 하니 전율이 끊임없이 그 부근에서 퍼져 나왔다. 발끝은 곱은 채로 펴질 줄을 몰랐다.

“제발, 아, 아, 제발… 더느은, 아아아아… 흐으, 흡.”

흠뻑 젖어서 미끌미끌할 텐데도 가스파르는 음핵을 솜씨 좋게 손끝으로 굴렸다. 굴리다가 손끝으로 쳐주고, 문지르며 누를 때는 눈물이 고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흣, 아, 아아, 힛…!”

노골적인 손짓에 실로 지독한 천국이 생겨난다. 그것을 피하려 허리를 뒤틀면 질벽이 자극되었고, 가만히 있으면 손가락이 음핵 주변의 아주 여리고 약한 살을 비틀었다. 좁은 공간에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일반적인 크기보다도 작은데 나름대로 한 겹 덮여 있기는 했다. 그걸 조심히 밀어내고서 숨어 있는 곳을 건드렸다.

“아아, 하아, 읏……. 흐브, 으, 흐급.”

“하…. 아일럿. 아일럿. 좋아.”

질벽이 바싹 맞물리는데 액은 어디서 새어 나오는 것일까. 가스파르가 즐거운 고민을 하면서 아일럿의 귀 뒤를 느리게 핥으며 손을 멈췄다. 저번처럼 실신할 때까지 매만져 버렸다가는 약을 당분간 보지도 않으려 할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

과한 쾌감을 주던 손이 떨어져 나갔으나, 마냥 안심을 하지는 못한 아일럿이 불안한 숨을 골랐다. 몸부터가 제 것이 아닌 듯했고, 호흡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몰아치던 쾌락의 잔해가 의식을 놓아주지 않았다.

“히……. 흐으, 으… 후으. 흑.”

테이블을 짚고서 엎드린 아일럿의 무릎이 서로 닿았다가 벌어지길 반복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스파르는 낭창한 허리를 다시금 붙잡았다. 만져달라는 것처럼 잘 팬 보조개를 엄지로 쓸어주고 나면, 상대의 행위에 익숙한 아일럿의 몸은 지친 와중에도 어떤 기대를 했다.

“흐읍, 아, 흑, 후으… 우으으읏…….”

유일하게 잡고 버틸 수 있는 테이블이, 두 사람이 흔들리는 대로 심하게 덜컹거렸다.

“아, 아, 아… 하아, 아-”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데, 이러다 부서지면 가스파르가 해결해 줄까…. 테이블 위에 제가 남긴 손톱자국과 더불어, 내내 아래에 있던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림자인 줄 알았다가, 교복에 달린 황금색 단추가 반짝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으… 아, 으읏…? 어, 어…?”

왜 교복 재킷이 발밑에 있지? 분명 제 손으로 벗은 건 바지와 속옷뿐이고, 재킷과 와이셔츠는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밑에 있었다.

“가스… 아, 아흐……. 하, 가스파르. 내 교복!”

“이제 알았어? 아까 키스하면서 벗겼는데.”

이대로 사정해 버리면 교복에 묻어 버릴 텐데.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것을 가스파르도 알았다. 해서 부러 저 자리에 교복 재킷을 놓아둔 거였다.

“헉, 으으… 읏. 아…!”

맺혀 있던 선액이 뚝 떨어졌다. 운이 좋게 교복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졌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경악하는 사이에도 선액은 흘러내렸다. 아슬아슬하다. 당장 질질 싸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급한 대로 왼손을 내려 페니스를 잡아 봤지만, 엄지로 요도를 막기는커녕 문지르는 꼴만 된다.

“힉. 으……. 우으, 흐윽. 흐, 또… 떨어져… 어.”

뒤에서 추삽질을 하는 가스파르에게는 아일럿이 겨우 쥐고 있는 곳이 보이지 않지만 여성기로 인해 허벅지 사이마저 젖은 지 오래였다. 앞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다.

“흐으으… 아, 후……. 읍. 안 돼. 나, 나 진짜, 해.”

“잘 참잖아. 할 수 있어.”

“그, 흣-”

이건 참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었다. 격렬히 움직이면 불꽃이 튄다. 연달아 내리꽂으면서 안을 다 뒤흔들어 놓는 주제에 참으라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일럿은 흐느끼고, 메마른 숨을 토해내다 압박감에 몸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페니스를 쥐는 척도 할 수가 없었다.

“못 참, 으읏. 할 것 같단 말야아…. 흐, 아아… 앗……!”

할 것 같아. 아니, 해 버렸어. 새된 신음을 내지르는 동안 저항감은 산산이 부서지고 정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바닥에, 그리고 교복에, 까만 교복 위에 희고 진한 액체가 아로새겨진다.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페니스를 쥐어 위아래로 쓸어줌으로써 그 행위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왔다.

“가, 흐, 가스, 파, 아, 아, 아, 으으으… 흐읏-”

음핵을 애무할 때와 같다. 안을 짓쳐대면서 이번에는 페니스를 흔들어서 정액이나 오줌이 아닌 것을 질질 싸게 만들 작정이다.

“힉, 끄흐… 우, 으, 아아, 아, 제발, 아, 아아, 헉, 흐아아아… 아!”

계속돼. 멈추지 않아. 멈추지 마. 시야가 점멸하고 이성은 암전되었다. 한 번 더럽혀진 것을 더럽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참아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한 지 얼마 안 된 몸이, 다리를 죄 적시며 무너져 내렸다.

“너… 아, 아직-”

“……위험하긴 했어. 네가 너무 조여서.”

그러는 사이에도 아일럿은 제 몸속으로 들어온 성기가 여태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아래에서 찔러 올렸다.

“왜 참는, 흐, 읏, 으응…!”

손바닥이 엉덩이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지난밤에 간단한 유흥으로 회초리를 들고 나서 남은 자국이다. 그게 아직 남아 있는데, 심하진 않은 걸 보니 적어도 이번 주말 안에는 사라질 것이다.

“읍, 흐, 앗… 우으읏.”

그것이 다소 아쉽게 느껴져서 손을 들었다. 만지고 있으면 신기할 만큼 반들반들한데 때릴 때는 손바닥에 감기는 듯하다. 때렸던 자리를 꽉 쥐었다 놓자 앞에서 등줄기가 떨린다.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것처럼 아일럿이 우는 소리를 냈다.

“하아… 아!”

엉덩이를 더 내미는 모습으로 보이는 건 가스파르의 착각이 아니었다. 희고 매끄러웠던 살결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고서 다시 손을 든다. 뒤에 있던 가스파르는 보지 못했지만 발기해 있던 아일럿의 성기에서 끈적한 물이 떨어져 바닥을 더럽혔다. 아일럿만이 그것을 알고서 부끄러움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멈추려 애썼다.

“아흐으, 흣…!”

다만 그 노력은 끈 하나를 열심히 물고 있는 애널을 가스파르가 엄지로 더듬으며, 입구를 간질이자 수포가 되었다. 별로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기대감으로 오므라드는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기구를 사용하면서 젤을 넣어준 덕에 잘 풀려 있는 데다 질척해서, 곧장 삽입해도 무리 없이 삼키고 조여 댈 터였다. 

“마지막에는, 후으… 여기서 하고 싶어.”

“응. 흐으… 읏… 하, 으으읍…….”

“괜찮지, 아일럿…?”

안 괜찮은 일도 괜찮게 만들어 버릴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달착지근했고, 거기에 대놓고 유혹을 하자는 마음까지 담기면 속수무책이었다.

“괜찮… 아, 아…….”

아일럿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스파르는 원하는 것을 받아내자마자 한 단계 위의 것을 요구했다.

“그럼 해달라고 졸라봐. 여기에 듬뿍 싸줄게.”

“아흐…!”

“싸고 나서는 손가락으로 다 긁어 줄 테니까…. 그리고 앞도 입으로 해 줄게. 다 삼키고 혀로 핥아 주면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여기도 같이 핥아 줄 거야.”

손으로 콕 집어 건드린 곳은 약으로 인해 생겨난 음핵이었다. 정액이 들어찬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고서, 두 성기가 동시에 핥아진다고 생각하자 흥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하, 아-”

그 절정에서 가스파르가 성기를 질에서 빼내고는 엉덩이골 사이에 문질렀다. 여전히 기구가 들어 있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일럿은 제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발갛게 변한 그곳을 드러내어 가스파르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너, 넣어줘어, 싸도… 돼. 전부, 다, 하, 아아아앗… 흐읏, 아, 흐으읍!”

끈을 잡아당겼다. 저 혼자만 들어가기에도 좁은 구멍을 고작 기구에게 할애해 줄 수 있을 리가. 제가 넣어둔 기구이지만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다급하게 파고들었다.

“아핫, 아아아, 아… 좋아아……. 흐으, 후, 으으읏… 응…….”

기구를 빼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다디단 교성이다.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한 차례 강하게 깊숙하게 치고 들어온 뒤에, 빠르고 짧게 쳐대다 이번에도 직전에 멈추고 아일럿의 목을 뒤에서 잡아 시선을 고정했다.

“하읏, 흐… 흣-”

가쁜 숨을 감당치 못해 턱을 미세하게 치켜들었을 뿐 시선은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눈으로 상대방에게 매달린다. 이 순간의 아일럿이 가스파르에게는 가장 독하고 잘 듣는 흥분제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눈앞의 상대에게 저 자신을 온전히 쏟아내려던 참이었다.

“아……. 후아, 아, 아… 하아, 가스파르, 으… 흐… 읏-”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일순이 지나는 동안에도 가스파르의 얼굴만은 더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이 강물에 반짝이는 색을 끌어다 물들인 듯한 금발을 지나면, 살면서 본 어떤 푸른색과도 다른 눈동자에 닿게 된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친 뒤에야 알았다. 한번 가까이에서 보면 다신 잊기 어려운 색이라는 것을. 그 눈을 감싸고 있는 눈매는 섬세하다가도 저를 뚫어지게 향하는 게 매서웠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이어지는 단단한 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웃을 수 있는 입술, 잘 다듬어져 있는 턱, 그 아래로 내려오면 시종일관 여유 있었던 태도와는 달리 희미하게 땀이 배어 있는 목과 가슴을 만나게 된다. 아일럿은 그 부근에서 기이한 황홀함을 느꼈지만 감정을 오랫동안 반추할 수는 없었다.

“서. 못 참겠으면 내 어깨 잡아.”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아일럿은 가스파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다리를 굽히는 거지? 끝난 게 아니었던가? 하고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다, 중지와 약지가 갈고리 형태를 하고 나서야-

“지그, 지금, 하게? 잠깐만, 가스파, 하, 거기 아직, 아냐, 아, 아, 흐앙…!”

가스파르의 의도를 깨닫고, 그건 안 해줘도 괜찮다고, 지금은 아니라고 소리를 쳤으나 공허한 울림이었다. 아일럿은 가스파르가 제 음핵을 입술로 넘기는 줄만 알았다. 방금 정액을 사정한 곳임은 애초에 신경 쓸 거리가 아니었다. 정액을 긁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약으로 생겨난 여성기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까지 좁은 틈새를 혀끝으로 귀여워했다. 가스파르의 위에서 새로운 절정에 쫓기던 아일럿은 얼마 안 가 붙잡혀 버렸다.

*

“아……. 읏……. 흐아…….”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되어 의식이 조각조각 났다. 그리고 수백 마리의 새들이 날아와 그 조각들을 물고서 저 멀리로 날아간다.

비유해 보자면 그런 기분이었다. 아득함을 넘어선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맸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가스파르가 입술을 통해 물을 먹여주고 나서야 한 스푼의 현실감이 생겨났고, 흐려져 있던 감각이 하나둘 돌아왔다.

“아일럿.”

녹초가 된 저와는 달리 쌩쌩한 가스파르의 모습인 익숙하면서도 신기하다. 어떻게 저러지? 굳이 따지자면 받아들이는 쪽은 저였는데, 제 정기를 끌어가는 곳은 저쪽일지도 모른다. 두 명분의 에너지를 받아먹고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거라면, 저 광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어. 아프진 않니?”

아직 목이 메여 있어서 아일럿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동안 착용하고 있었던 가죽 하네스의 잠금 장치가 가스파르의 손끝에서 풀리고 제 몸에서 떨어진다.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피부에는 빨간 줄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다행인데.”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몸에 손을 댄다는 자각도 없이 피부 위의 흔적을 쓰다듬었다. 어깨, 겨드랑이와 가슴 사이, 가슴 아래, 그리고-

“읏. 흐-”

유두와 가까워지자 아일럿이 움찔거렸다. 워낙 반응이 격하다 보니 ‘이런, 나도 모르게 아일럿을 또 만지고 있었잖아?’ 하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지만, 유두와 손가락 사이의 거리는 1cm도 채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만지지 않고 지나갈까? 유두가 안으로 쏙 말려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는 주변에서 원을 그렸다. 분명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모습을 드러낼 테지.

엄지로 유륜을 슬며시 올려주니 가스파르가 예상한 모습이 되었다. 아직 파묻혀 있긴 해도 조금만 더 만져주면 될 것 같아, 함몰된 부분에 대고 직접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니 아일럿이 제지했다. 이 이상했다간 제 발로 상담실을 걸어서 나갈 수 없으리라.

“그… 그만 만져. 나… 또…….”

“또 할까? 난 그래도 좋은데.”

“…해야 할 일 있어. 중요한 거야.”

“으음.”

손가락을 접었다 펴기만 해도 움츠러드는 아일럿이 남은 힘을 짜내어 가스파르를 밀어냈다. 더 붙어 있다가는 혹해서 넘어갈지도 모른다. 가스파르와 함께한 많은 나날이 그러했듯이.

“마무리해야 할 과제가 있어. 내일 비스타일러 교수님 수업 발표날이라서.”

“아, 그건…… 도와줄 수도 없는 거네, 하필.”

필수 과목을 담당하는 비스타일러 교수의 악명은 대학 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과제를 내는 횟수는 다른 수업에 비해 현저히 적었지만, 평가 기준이 무척 악랄했고 과제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표를 시키고 나서 수없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학생들의 필체를 일일이 기억하시는 분이니……. 다행히 아일럿은 이번 과제를 어렵지 않게 준비한 것 같지만, 발표 전날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빼앗을 수는 없었다.

“양심이 찔리는걸. 비스타일러 교수님 수업은 도와줄 수 없지만 도와줄 다른 게 있을까?”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어.”

“기꺼이. 열심히 써먹어 줘.”

떨어져 있던 안경을 주워 쓴 아일럿이 가스파르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교내에서는 저렇게 웃는 경우도 거의 없다. 새삼스럽지만 저런 웃음마저 자신이 독점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근질거렸다.

“근데…… 나, 교복…….”

셔츠만 입고 재킷은 들고서 기숙사까지 가야 하나. 그래도 이상하진 않을 테지만, 가는 길에 알토비어스 교수님을 만날까 걱정이 되었다. 허리가 삐어서 보건실에 가겠다고 했는데 엉망진창인 꼴로 마주치게 된다면……. 셔츠도 심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이제 와서 탁탁 펴 봐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망설이다 단추를 잠그려 하는데, 가스파르가 처음부터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멀쩡한 교복을 한 벌 꺼냈다. 아일럿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어?”

“새 걸로 입어야지. 그러고 가려고 했어?”

“미리… 준비해둔 거야?”

“그럼. 바닥에 떨어졌던 옷을 다시 입게 할 수는 없으니까.”

교복에 묻히지 않기 위해 참으려고 끙끙 앓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미리 준비까지 해둔 거였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아일럿을 보며 가스파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하는 행동이랑은 다르게 미소만은 청량하기 그지없는 그였다. 최근 들어 저 미소에 자주 얼이 빠지게 되는 아일럿이 또 멍하게 있는 사이, 가스파르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옷을 벗기는 건 물론이고, 입히는 것까지 가스파르에게는 마땅한 자신의 몫이자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재미였다.

“…….”

하지만 목 부분의 단추 하나를 빼고는 다 풀어져 있는, 입지 않느니만 못한 와이셔츠를 벗겨주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막상 해 주려고 하니 자제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다 벗겨놓았던 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단추 하나를 풀고서, 와이셔츠를 아래로 내리는데 괜스레 입안에 침이 고였다.

옷을 벗기고 나면 하던 일이 떠올라 버려서. 방금 전까지 몸을 섞었던 것은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내… 내가 할게.”

신체적인 반응은 단순히 입맛을 다시는 것뿐이 아니었는지라, 가스파르의 변화를 눈치챈 아일럿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파란 눈동자가 얼마나 이글거렸는지 모른다. 더 가까이에 있다가는 단번에 제 목에 입을 맞추면서, 셔츠를 밑으로 끌어내렸겠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도망치는 거야?”

중요한 일이 있다는 아일럿의 말을 거듭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은 가스파르가 짓궂게 물었다. 아일럿은 상기된 얼굴을 한층 더 붉히고는 급하게 단추를 꿰었다.

“내일… 수업 끝나면 네 방으로 갈게. 할 말도 있고… 사감이 새벽에 인원을 확인하는 날이라서 아침까지는 못 있을 거야.”

“응. 좋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한 가스파르였지만, 다음날이 되었을 때 먼저 상대방의 방을 찾아온 것은 그였다. 두 사람이 완전히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금요일은 가스파르의 수업이 두 시간 더 일찍 끝났다. 아일럿이 제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으나, 교과서를 방에 두고 가야 하니 곧장 찾아오지는 못할 터. 그럴 거면 차라리 제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라 여겼다.

‘누, 누구. 가스파르?’

깜짝 놀라는 아일럿의 얼굴도 볼 겸,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가스파르는 테이블 앞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리는 동안 가지고 온 책이나 읽을 생각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일럿.]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니? 네 나이도 벌써 스물넷이란다. 내가 네 어머니를 만난 나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거기까지 읽고 나서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존재마저 싹 잊고 말았다. 어쩐지 조금 거칠어 보이는 필체였다. 급하게 쓰신 걸까. 아니면 감정이 격해졌을 수도 있다. 단순히 아일럿의 아버지가 악필인 것이지만, 가스파르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필체마저 확대 해석을 하고 말았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대학에 다니고 있기는 해도 그런 쪽에는 전혀 말이 없으니 걱정이 돼서 그래. 혹시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외가 어른들이 소개해 주신 분을 만나 보는 건 어떻겠니?]

편지의 바로 밑에는 아일럿의 편지가 있었다. 답장을 쓰다가 밖으로 나간 것인지 문장이 중간에 뚝 끊겨 있다.

[아버지께]

[지금은 다른 일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졸업 이후에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요.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선박 운영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고, 저는]

안심을 해야 할까. 직접적으로 거절을 하기보다는 말을 돌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올바른 선택이다. 그걸 알면서도 가스파르는 편지를 읽고 난 이후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황제께서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데 감히 누가?

하지만 아일럿의 경우에는 어떨까. 누구와 이야기가 오가든지 제가 못 하게 만들면 그만이겠지만, 아일럿을 두고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엮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일단 외가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볼까.

왠지 아일럿의 얼굴을 모를 것 같지 않다는 합리적 의심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틀림없이.

‘가스파르, 나 오늘 나만의 그 사람을 찾은 것 같아.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야, 네가 데려온 사람이지. 대체 누구야? 설마 네 애인은 아니지?’

‘저 사람… 이름이 뭐야?’

파티장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아일럿에게 관심을 보냈던 일을 떠올린 가스파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찾아내서 어떻게 조치할지 생각해 보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

방의 주인인 아일럿이라면 노크를 할 리 없으니 다른 사람일 텐데. 이 시간에 청소부가 들어올 리도 없으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문을 연 가스파르는, 문밖에 서 있는 집사를 보고서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급한 편지를 보내셨기에 알려드립니다. 주인님께서 바로 확인을 하셔야 한다고-”

“오르페가 그러는 게 한두 번이던가. 나중에 열어 볼 테니 내버려 둬.”

만사가 귀찮아졌다. 등을 돌린 채로 가스파르가 손을 휘젓는데, 집사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편지를 내밀었다.

“발레리아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는 파티에 관한 편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왜. 이틀 뒤로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군.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성의 없이 뜯어낸 가스파르는 흐린 눈으로 오르페의 편지를 읽고서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싫은 표정을 지었다.

“사절단이 지금 도착했다고…?”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가스파르. 사절단이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했어.]

……

[이 편지를 읽는 대로 준비하고 들어오도록 해.]

미쳤군.

[그 미남도 데리고 오면 좋고. (내가, 아마 발레리아의 손님들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갑자기.”

다 읽은 편지를 차마 구기지는 못하고 여러 번 힘주어 접은 가스파르가 눈을 감았다.

원래 사절단이 오기로 했던 이틀 뒤에는 아일럿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사전에 말했던 날이었다.

빈 시간에 파티를 가는 것이니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절단이 벌써 도착했다니? 일정이 갑자기 어긋나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 아일럿과 보내려던 계획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거였다.

“안 갈 수는 없겠지.”

가스파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는 것을 보고 집사가 급히 눈치를 보았다.

“주인님. 아시겠지만, 이번에는-”

“알아. 성으로 가서 준비하지. 가서 폐하께 문안도 드릴 겸…….”

여러모로 중요한 파티인 건 잘 알고 있었다. 답지 않게 푸념처럼 해 본 말이었기에 한숨을 쉬며 눈꺼풀을 닫았다. 하필이면 아일럿에게 온 편지를 보고 난 이후에 계획까지 어긋나게 되자 기분이 순식간에 아래로 가라앉았다.

*

“전하. 가스파르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때맞춰서 왔군. 그런데 혼자 왔나?”

“예. 혼자서 오셨습니다.”

“비싸게 굴기는.”

내심 아일럿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황태자 오르페는 혼자서 왔다는 말에 실망했다. 물론 가스파르의 뒤를 좀 밟아 보면 금방 정체를 알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들켰을 때 무슨 생각이냐며 길길이 날뛸 테고…….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건가? 사촌을 푹 빠지게 한 미남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오르페는 낙심한 채로 파티장으로 향했다. 가스파르가 늘 그렇듯 생글생글 웃으며 미리 도착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겠거니 싶었는데, 웬일인지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웬일이야?”

“……?”

오르페가 다가와서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표정이 더 안 좋았다. 생전 파티장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뭐가.”

“아니,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빼어나지 않은 외모를 찾는 것이 힘든 황실에서, 단연 군계일학의 미모를 가진 가스파르는 이런 파티 자리에서 어김없이 자신의 외모를 뽐내곤 했다. 달리 하는 것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한자리에 있기만 해도 파티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물론 밤이 새도록 계속되는 일이다보니 퍽 피곤한 일이기는 하나 가스파르에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저 잘난 것을 알고 있으니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본인을 칭송하는 것을 퍽 즐겼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가 있으면 웃음 한 번으로 침실에 데려가곤 했다.

“흐음.”

파티에서 오르페가 딱 한 번 만나본 검은 머리의 미남과 어울리게 된 이후로 그런 일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파티장에서는 항상 접대용 미소를 잃지 않던 가스파르였다. 오르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한없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촌은 와인만 연신 들이마셨다. 벌써 한 병은 마셨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오늘은 웬 일이람. 오르페가 거듭 물어도 답하지 않던 가스파르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볼 아파 보이게 생글생글 웃고 있더니만.”

“웃을 기분이 아니라서.”

“네가?”

그러더니 고개를 대충 끄덕거리고는 또다시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사이에 불그스름한 입술을 앞니로 두어 번 씹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착잡해 보이는 표정인지라, 오르페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잡해 보이는 가스파르 덕에 실실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우습니.”

“그 미남이랑 싸웠구나.”

“미남인지 어떻게 알아? 얼굴은 보지도 못했으면서.”

“미남은 턱만 봐도 알아. 거기에 입술이랑 눈동자까지 봤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아주 괜찮은 얼굴이겠지?”

“그만해.” 

“내가 잡아먹는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얼굴인지만 좀 보겠다는데 그걸 이렇게 싫어하다니.”

오르페는 봤다. 제 이야기를 듣던 가스파르의 미간에 아주 잠시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걸.

“좋아. 아무튼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랑 싸웠어?”

생전 저랬던 적이 없는 사촌은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돌렸다. 그러고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서 저를 보았다.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양 어찌나 화사하게 웃던지, 주변이 다 환해졌다.

“아니. 우린 아주 잘 지내. 갑작스럽게 여기로 끌려오지만 않았으면 지금도 한 침대에서 붙어 있었을 테니까 그런 말 마.”

“오, 그러세요?”

“그럼.”

알았다. 싸운 건 아니어도 관련된 일이기는 한가보다. 정답을 어느 정도 맞혔다고 생각한 오르페가 낄낄 웃었다.

“좋아. 그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한 잔 더 쭉 들이마시고 기운 내.”

“그래야지.”

“곧 귀한 손님들이 오실 텐데.”

가스파르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잔을 받아들었다. 괜히 오르페에게 티를 내어 좋을 것이 없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인데, 건수를 잘못 잡히면 그걸로 몇 년을 우려먹을지……. 달착지근한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서 겨우 표정을 유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거의 한 병 반째였다. 너무 많이 마신 게 아닐까, 몽롱한 머리를 손끝으로 꾹 누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 사절단들이 막 의복을 갖추고 들어올 시간이었다.

“아, 저기 오는군. 예의 바르게 맞이해 주자구.”

이국의 손님들은 가장 먼저 황태자 오르페에게 인사하고, 그 옆에 있는 가스파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도착하기 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몇몇은 그의 외모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아예 입을 벌리고서 닫지를 못하는데, 예전 같으면 즐겼을 시선들이 썩 달갑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한 탓이리라.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루하다. 왜 즐거운 일을 내버려 두고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여러 손님들과 이야기할 때는 청산유수였지만 잠시 혼자 있을 때면 무료함에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많이 대화에 참여하던 도중, 어떤 불길함이 하나 솟아올랐다.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엘레노어 님은 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가디테로안 공작님께서 염려해 주시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고 전해 달라 말씀하시더군요.”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엘레노어 님의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손님들과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가스파르는 그것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생각이 날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거는 탓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는데, 그게 무엇이었을까.

잊고 있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는 가스파르의 입으로, 독한 술이 한 모금 흘러 들어갔다.

*

“…인님. 주인님?”

“으음……. 어?”

“주인님, 기숙사에 도착했습니다.”

자정은 족히 된 시간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더 되었는지도 모른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가스파르는 술에 찌든 숨을 길게 뱉어냈다. 과음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만취하기 직전까지 마신 뒤에야 파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창을 열어둔 덕에, 찬바람을 쐬면서 머리는 맑아진 듯하나… 몸은 그러지 못해서 마차에 올라탈 때나 내려올 때 모두 집사의 도움을 받았다.

“어지러워.”

땅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마차 안에서도 그러더니 역시 아직도 어지러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을 들은 집사가 걱정스럽게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여차 하면 주인을 업고서라도 기숙사의 계단을 올라갈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야. 정말 괜찮으니까 이만 가봐.”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막상 계단을 올라갈 때는 도움을 받을걸, 하고 후회했다. 술을 너무 마셨다. 새로운 사람과 인사를 할 때마다 한 모금씩 마시고, 한껏 들뜬 오르페가 자꾸만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런 와중에 사절단이 귀한 술을 가지고 왔다기에 그 자리에서 마시지 않을 수가 없어서 몇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그전에도 혼자서 한 병을 넘게 마셨으니, 병으로 치자면 세 병? 네 병? 헤아려 보던 가스파르는 뒤늦게 의미 없음을 깨닫고, 계단 옆의 손잡이를 잡으며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드디어 방문. 평소라면 느꼈을 인기척이지만 술에 취해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가스파르는 어느 때보다 크게 놀랐다.

“아일럿. 왜 내 방에… 있어?”

“으음.”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깨어난 아일럿이 꼬물거렸다. 잠을 못 깨겠는지 베개 위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흘러내린 안경을 찾기 위해 가슴팍과 머리 주변을 더듬거린다. 그 와중에도 잠을 깨지 못했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게 못 견디게 귀여웠다. 대체 저 귀여운 게 내 침대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멍하니 생각하던 가스파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닦아서 건네주었다.

“가스파르…… 지, 지금 몇 시야? 왜 이렇게 어두워?”

몰라. 네가 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차마 그렇게 대답은 못 하고 침만 꿀꺽 삼키는 가스파르의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어떡해. 너 기다리다가 그냥 자버렸나 봐. 으.”

“날 기다렸다고.”

“어, 어. 응.”

“날 기다려…….”

여러 일이 있어서 잊고 있었다. 술에 찌든 머리가 어렵사리 제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던 아일럿의 말을 떠올렸다.

“어디 갔었던 거야? 찾았는데 안 보여서.”

“파티. 그게, 갑자기 앞당겨져서 황실에 다녀왔어.

“그랬구나. 금방 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렸는데… 아, 너무 잤다.”

아, 세상에. 이 방에서 날 기다린 데다가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구나. 아일럿의 말을 되새기면서 가스파르는 크게 감격했다. 방에서 기다리려면 찾아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가슴이 뻐근할 만치 뛰고 있었다.

“으음.”

반면에 아일럿은 아직까지 잠이 깨지 않은 탓에 눈을 비비다가,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 못했다.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정욕이 실체화해 나타난다면 가스파르의 주변에는 붉은색 우주가 펼쳐져 있을 거였다.

“가만, 물이 어딨지.”

대체로, 어쩌면 항상. 가스파르는 눈앞에 있는 아일럿이 저를 보며 숨만 쉬어도 덤벼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술까지 마신 직후라 이성은 평소보다 흐리고 본능은 가까워진 채였다. 안 그래도 아일럿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자극을 받는데, 절 기다렸다는 말을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황홀하니 어지러웠다.

“가스파르.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술 마셨어?”

“어……. 좀.”

“으아, 술 냄새.”

아일럿이 제 방에 있다. 목이 마른지 몇 번 헛기침을 하다가 물컵에 물을 가득 따라서 마시는데, 왜 이렇게 야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살짝 붓고, 조금 더 하얀 얼굴. 울대가 움직이고 있는 목, 편하게 풀어헤쳐진 셔츠… 컵을 쥐고 있는 손과 바로 아래 손목까지.

“물 좀 마셔.”

까만 머리카락까지 야해 보일 정도면 심각한 건가? 가스파르의 불같은 시선이 제 몸을 샅샅이 훑고 머릿속으로는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몸까지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그걸 눈치채지 못한 아일럿은 물을 가득 따른 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

힘이 한껏 들어가 있는 성급한 손길에 끌어당겨지면서, 물을 고스란히 제 가슴이나 허벅지 위에 쏟고 말았다.

“가스파. 르. 잠깐. 왜 이…… 하려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버둥대던 아일럿의 두 발이 위로 한 뼘쯤 들렸다. 가스파르의 한 팔에 허리가 안긴 채 붕 뜬 채로 침대까지 향하다가 얼떨결에 그의 어깨를 붙잡았는데, 가스파르는 그것에마저 자극을 받고 말았다.

“와, 와악.”

침대에 두 사람의 몸이 함께 쏟아졌다. 아프지 않게 눕혀졌지만 가스파르의 얼굴이 가슴에 닿고, 손으로는 축축해진 피부를 더듬대고 있으니 아일럿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아아, 안 돼. 나, 새벽에, 기숙사 사감이 검사한단. 아으으윽.”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하으. 우읍.”

“괜찮아, 괜찮아.”

“괜찮기, 느은! 사감이, 검사할 때 없으면 벌점, 아!”

바지가 속옷과 함께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아래와 가스파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아일럿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전에 교내 호수 같은데 빠뜨려 놓을 테니까 걱정 마.”

“무슨, 너 뭐라고 말했, 흐아… 왁?!”

취했어. 너 취했다고! 아일럿의 눈동자가 다급히 말했어도 가스파르에게는 닿지 않았다. 와이셔츠를 잡고서 양옆으로 잡아당기니 사방팔방으로 단추가 튀었다. 그렇게 드러난 살결 위로 가스파르는 거침없이 입술을 묻었다.

“아, 안 돼. 흐… 정말-”

마침 목이 말랐는데 아일럿의 위에 물이 쏟아졌다. 아일럿을 물고 빨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입술이 맨가슴을 희롱하고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판판한 가슴을 손으로 그러쥐어 모으고, 약간 부풀어 오른 곳을 입술로 문질러 눌렀다. 살결 위에 맺혀 있던 물기가 혀를 타고 목을 미약하게나마 적셨다. 그게 좋아서 더욱 욕심을 낸다. 혀로 앙가슴을 핥고 지나가자 아일럿이 숨을 들이켰다.

“가스… 흣-”

살면서 한번쯤은 벌점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의 행동에 아일럿의 흥분도 넘실거렸다. 도저히 가스파르가 놓아 줄 것 같지도 않고……. 이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미미했던 저항을 그만두고서 어렵사리 다리를 벌렸다. 그곳이 제 자리라는 양 파고든 그가, 아일럿을 보고서 잠깐 미소 짓고는 바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 읏. 으응…….”

유륜을 엄지의 중간 마디와 검지가 시작하는 부분으로 모아서, 꾹꾹 누르며 자극하니 함몰되어 있던 것이 금세 솟아올라 머리를 보인다. 가스파르는 제 입술이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왼쪽부터 혀를 내밀어 핥았다. 그러다 다시 안쪽으로 밀어 넣을 것처럼- 혀끝으로 누르고는 주변을 자극해서 빼낸다. 그의 손과 혀에 함몰 유두는 거의 교정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하, 아, 읏… 으읍… 하!”

반대쪽을 다소 거칠게 손가락으로 비볐다. 약간 아픈데, 그게 딱 좋을 만큼 아파서 아픈데도 좋았다. 한쪽은 상냥하게 다루어지고, 다른 곳은 따끔따끔한 쾌감이 튀자 아일럿의 숨은 한층 더 달아올랐다.

“흐읍, 하으, 흐… 가스파르, 으흐, 응…!”

좋아, 좋아, 머릿속의 울림이 황홀경에 빠진 아일럿을 감쌌다. 나른한 듯 기분 좋으면서도 자극이 타닥타닥 튀었다.

“기분 좋, 아…….”

그래, 정말로 좋았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 기분 좋던 것이 안달 나는 마음에 다 가려져 괴로움으로 변했다. 가스파르는… 핥아도 너무, 끈질기게 제 몸을 핥아대었다. 심지어 삽입 당하는 일도 없이 두 손이 가스파르의 한 손에 잡혀진 채로 옴짝달싹도 못 하고, 온몸이 핥아지고 만져지는 것을 고스란히 당해야 했다.

“힛… 아, 아, 흐으읏. 흐, 그만, 핥… 아… 아아!”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가스파르의 표정이었다. 애가 다 타서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정작 삽입을 하지 않다니. 아일럿은 허벅지 어딘가에 비벼지는 것을 제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만 하고, 너, 넣어줘, 나, 나, 네 거, 아, 아윽.”

평소에는 이렇게까지만 말해도 급하게 삽입을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술에 취해서 넣는 걸 까먹기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내내 아일럿의 몸에 입술을 묻고 있던 가스파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일럿. 네가.”

“흣, 흐악…!”

“너무 신기해.”

“아, 아앗, 윽, 흐… 그만… 그마, 안!”

말하고서는 또 핥는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유두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희롱당했다. 말을 하면서도 유두를 통째로 빨아들였다가 혀로 굴리고, 입술을 모아서 비볐다. 부족하다 싶으면 입을 크게 벌려서 빠는데 그것이 벌써 한쪽에 대여섯 번이었다.

“입안에 넣으면 이렇게 단데. 왜 안 녹고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

“무, 무으, 슨, 소리… 야, 아으윽.”

“빨면 빨수록 맛있어지면 어떡해. 없어져야지.”

“뭐어?”

“아니야. 내가 실언했어. 없어지면 안 되지. 그런데 네가 너무 다니까 좀 무서워.”

피부 곳곳에서 단맛이 났다. 목, 가슴, 심지어 어깨까지 달다. 가스파르에게는 그랬다. 베어 물면 피가 아니라 꿀이 쏟아질까 어떤 의미로는 두려웠다. 그래서 더 필사적이다.

“으… 아…?!”

핥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피부는 물론이고 살내음에도 도취된 가스파르가 멍하게 눈동자를 굴리는데, 아일럿은 그 모습에 기겁하고 말았다. ‘어쩌면 좋지, 이 자식 맛이 갔어…!’ 잡혀 있던 손이 풀렸는데도 얼음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너무…… 달착지근해.”

“너, 얼마나 취한 거…야, 아아읏… 아, 안 돼, 핥지 마, 하, 읏.”

중얼대던 가스파르는 혀로 길게 살결을 훑으며 올라갔다. 목덜미를 타고 귀…. 아일럿은 귀도 약했다. 윗부분의 연골을 잘근잘근 씹고서는 혀를 밀어 넣으니 곧장 반응이 왔다.

“기, 기다려봐!”

“어?”

이런 반응이 아닌데. 예상치 못한 아일럿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는 찰나, 가스파르는 뒤로 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입으로 할래. 계속 너만 하잖아. 입으로 할 거니까. 가만히 이, 있어 봐.”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가스파르가 미리 한 번이라도 사정을 하면 그나마 덜 짐승 같을지도 모른다. 방해되는 안경을 벗어서 내려두고, 과감하게 그의 바지를 잡아 끌어당겼다. 비싼 옷 같아 보이니 구겨지면 안 될 것 같지만 가스파르는 신경 쓰지 않겠지. 재빨리 발목 아래로 잡아당기고서 이번엔 속옷이었다.

“으, 으악.”

속옷을 내리다가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하마터면 페니스에 얼굴을 맞을 뻔하다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물렸다.

“왜 이렇게… 섰어.”

부끄러움에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점차 기어들어 가듯 작아졌다. 그렇게나 거친 전희 과정을 거친 직후인데 발기를 하지 않으면 당연히 싫겠지만, 가스파르의 페니스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몹시 민망했다. 세우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아도, 열감이 느껴지도록 발기해 있는 것을 보니 이걸 어떻게 입에 넣을지 걱정도 앞섰다.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처음 할 때면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처럼 되어, 비슷한 고민이 생겨났다.

“하으… 음.”

이, 일단 해 볼까. 선단을 입에 물고서 바로 밑은 혀로 핥은 아일럿이 얼굴을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잘해 보려고는 하는데, 긴장이 되어 혀가 부드럽게 움직이지 못하고 마냥 굳어 있었다. 할짝대기만 하면 부족할 것 같아서 입안에 담고서는, 정작 코로 숨을 쉬지 못해서 입으로 허덕였다.

“우, 흡, 후으…….”

호기롭게 입으로 해 준다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니었다. 했던 발기도 풀려 버리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입으로 했던 게 언제였지? 생각해 보니 대체로 늘 받기만 했을 뿐, 입으로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마차 안에서 화가 난 가스파르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서 구음을 시도했을 적에도 입을 맞춰본 게 다였다.

“…끅.”

모름지기 배운 것은 복습을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법이다. 페니스가 목젖을 제대로 건드렸고, 요령이 부족한 나머지 목이 계속 건드려지면 참으려 해도 생리적인 눈물이 났다.

어째 더 커진 기분도 들고.

“우, 푸후, 흐, 읍.”

“……하아.”

잘은 못 해도 열심히 하는 중인 작은 머리를, 가스파르가 쓰다듬으면서도 자신 쪽으로 더 깊이 끌어당기지 않기 위해 힘을 들였다. 바라는 정도는 큰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목이 불룩해질 정도로 박아대도 부족한데, 아일럿은… 아일럿은-

“읏, 하… 흐우…….”

쏙 팬 볼 위로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가스파르는 턱이 뻐근해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다고 하니 내버려 두고 싶은데 이건 봉사를 받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참는 행위였다. 저를 구음하도록 시키는 게 아니라 아일럿을 통째로 입안에 넣고 핥고 싶었다. 혀가 닿지 않는 곳 없이 핥고, 상처가 나지 않게끔 깨물고, 체액을 남김없이 삼키고, 또 삼킨 만큼이나 흘리도록 만들고.

“아일럿…….”

제 행동이 그의 욕망을 달래주기는커녕 부추기는지도 모르고 열심인 아일럿이 눈을 위로 굴린다. 안경을 사이에 두고 보나, 직접적으로 보나 다 좋은 붉은색 눈동자에 물기가 아른거린다. 양손을 내밀어서 뺨을 쥐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

닦아 주긴 하는데, 아무래도 제 마음은 더 눈물이 번지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아일럿은 몸이 들리는 바람에 입으로 하던 것을 멈추었다. 삽입을 하려는 줄 알고, 가스파르의 것을 손으로 잡으려 했으나 두 손목이 뒤로 잡혔다. 앉게 된 곳은 허벅지 위. 기대감에 찬 아일럿의 눈을 보고서도 가스파르는 단호했다.

“안 돼.”

“왜, 왜애. 아. 앗.”

잡힌 손목이 잡아당겨지면서 가슴을 더 내밀게 된 아일럿이 가슴을 벌벌 떨었다. 여기서 더 얼마나 핥을 작정이란 말인가.

“오늘은 좀 더 시간을 들여서…….”

“뭐,어… 흡, 으읏, 으으…!”

이미 충분하다 외치는 아일럿과 다르게, 가스파르에게는 애피타이저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래오래 이 좋은 걸 맛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입을 너무 바쁘게 사용한 나머지 제대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아니지, 말 한 마디를 할 시간에 아일럿의 살결을 더 깨물고 싶었다. 밤이 새도록 하얀 피부 위를 입술로 기어 다니고, 다 찾아냈다고 생각한 성감대를 새로이 찾아내 예뻐해 주고 싶었다.

“너, 거, 거기만, 계속.”

“응. 좋은 거지?”

같은 자리만 할짝할짝 거리는 가스파르는 유두에 이어, 가슴 전체를 개발하기라도 할 셈인지 너무할 정도로 물고 빨고 핥았다. 살 곳곳을 통째로 입에 넣어 빨아댈 적에는 눈앞이 빙글빙글거렸다.

“흐아아…….”

혀끝으로 유두를 짓누르고 있다. 탱글거리는 살덩이가 혀끝에서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으니,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면 입술로 물면 그만이지만 가스파르는 조바심이 났다.

“너무 핥지 마아…!”

난잡하게 빨아대는 것을 못 이긴 아일럿이, 유두를 빨기 쉽도록 가스파르가 자세를 바꾸려 하던 차에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고는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노려보는데, 눈앞의 광경이 그에게는 과하게 선정적인 것이었다. 가린다고 가렸는데 팔 사이로 비죽 솟아오른 유두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모르는 걸까.

“읏……. 아……. 뭐, 뭐야, 어?”

맥없이 안에서 사정해 버리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넣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아일럿은 당황한 나머지 상대를 올려다보았으나, 가슴을 지키고 있던 손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가스파르는 제가 조루처럼 사정해 버린 것보다도, 아일럿이 가슴을 가리고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아일럿, 계속 그대로 있어.”

“뭐라구?”

굉장히 야했다. 뒷골이 찡하게 울릴 정도로 야하다.

“…나 또 선 것 같은데.”

“왜, 왜… 왜?!”

“그러고 있으니까 더 야해. 나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

“우와, 앗, 안 돼. 안, 으아아-”

괴력이었다. 저와는 그다지 큰 차이도 나지 않는 듯한 팔 두께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 나오는 것인지. 저를 안아 올릴 때도 그랬지만 팔을 양옆으로 고정시키는 힘이 바위에 눌리는 것 같았다.

‘아일럿.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운동도 해야지.’

어머니 말을 들었어야 했다. 어른들 말은 틀린 게 없다더니. 책상에만 내리 앉아 있었던 제힘으로는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가스파르가 술을 마시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야지, 기숙사로 찾아오면 차라리 창문에서 뛰어내려야지…….

“아으, 으, 안 돼… 나, 흑. 아, 아아아아……. 흑!”

제가 빨아서 퉁퉁 불고, 밖으로 빠져나온 채 도드라진 유두가 어느 때보다 만지기 좋았다. 엄지로 튕기다가 꾹 눌러주고, 유륜을 따라서 빙글빙글 굴려주니 아일럿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인다. 고여 있던 눈물도 동시에 흘러내렸다. 상대의 모든 것이 달게 느껴지는 가스파르에게 아일럿의 유두는 잘 익은 열매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열매를 훔쳤다.

“넌 이것도 달아.”

“아으, 읏.”

더 이상 핥을 눈물이 없으니 물줄기가 지나간 자리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관자놀이, 뺨, 눈 위, 코. 갈수록 그냥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입술이 남은 자리마다 어떤 색이 남았다면, 아일럿의 얼굴은 온통 그 색으로 뒤덮였으리라.

“빨리. 너. 넣어.”

“안 넣으면 어떻게 해 줄 건데?”

반은 놀림이었고, 반은 궁금한 마음이었다. 섹스에 능숙하지 못하고 체력마저 부족하여 가스파르를 겨우겨우 따라오는 아일럿은, 상대를 쥐고 흔들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해서 가스파르가 되물으니 아일럿도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사람은 한계에 몰리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힘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주말마다… 집에 갈 거야.”

“…….”

내내 취기가 올라 있던 가스파르의 머릿속이 한순간이나마 맑아졌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머리보다 앞서 사태를 파악한 몸이 아일럿의 손목을 놓아주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읍, 읏…….”

이제야, 드디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안도하는 아일럿의 머리 위에서 가스파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속임수였다.

“너, 너, 너… 너어!”

귀두만 밀어 넣고서 들어오질 않는다. 더 들어오는 것도 없이 거기서 딱 멈춰 버렸다.

“아일럿… 흐……. 이것도, 넣은 거지? 그렇잖아.”

“넣기느으, 하윽. 으으으… 으핫-”

“이대로 있을까? 얕은 곳도 너 좋아하잖아. 넌 모르지? 안쪽은 좁게 휘어져 있고 스치기만 해도 달라붙는데, 바깥쪽은 네 혀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운 거.”

쾌감에 머리가 곤죽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도 아일럿은 기가 막혔다. 저를 보면서 애타 죽겠다는 표정이라니. 지금 누가 누구 애를 태우고 있는데! 누가 보면 제가 위에서 능란한 솜씨로 가스파르를 애태우고 있는 줄 알 것이다. 안쪽까지 넣을 듯 말 듯, 입구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쳐대는 건 가스파르 루 가디테로안이었다!

“흐아아… 아, 윽-”

발을 써서 끌어당기는데도 요지부동이고, 몸을 내려서 넣으려고 하면 그만큼 물러섰다. 아일럿은 최후통첩을 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그냥, 기숙사 말고 집에서 학교 다닐, 아, 아흐으으으… 응, 흐읏!”

“그건 절대 안 되지.”

말을 다 하게 두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다. 그것도 연달아서. 가스파르는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다 빼내고서 빠끔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짓누르고 박아댔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아일럿의 얇은 뱃가죽이 안에 페니스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듯 들썩이게.

“히… 이, 히윽, 읏, 흣, 아, 아…? 빼, 아, 아, 빼주, 으브, 흡-”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 들어왔음에도 강한 자극에 몸이 먼저 경련을 일으켰다. 추스르지 못한 상체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세상에 하얗게 번져서 가스파르의 얼굴마저도 흐렸다 선명해지고 있었다.

“으응, 읏, 후, 앗, 아… 하아, 아, 아, 아……. 우으, 흐…!”

좋아, 너무 좋아서 눈물이 다 났다.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이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온몸 전체가 끓는 기분을.

“안 돼, 깊어, 깊어어, 흑, 아아……. 므, 무리야, 아, 하으으?!”

“아니지. 이제 여기 괴롭히는 거에 많이 익숙해졌잖아.”

“아니야. 아, 안 익숙. 흐. 아윽. 끝까지, 닿아, 아, 끝에. 하, 흐으, 헤, 우윽-”

어떻게 익숙해져. 이렇게까지 매번 다른데. 들어오는 물건은 매번 같은데 항상 자극적이다. 더 들어와서, 다 채우고, 굽혀진 곳까지 들어오면 구멍마저도 스스로 조일 수 없었다. 숨을 쉬라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길 거듭한다. 몸이 꿰뚫리고, 몸이 열렸다. 뜨겁고, 아프고, 아픈데 좋아.

“아, 히이이… 응읏, 끅, 후으, 흐, 읍, 우…….”

아픈데도 좋다는 걸 깨달은 찰나 절정이 들이닥쳤다. 두 사람의 배에서 비벼진 아일럿의 페니스는 이미 흥건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액을 토해내고 나서도 절정이 멈추지 않았다.

“후아앗, 아, 아, 흑-”

파괴적인 감각이 영영 제 몸을 지배하며 찍어 누른다. 신체를 통과하고 지나가는 희열은 시간을 멈추고 아일럿의 몸을 감각의 통제 하에 놓아두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사라졌다. 결장까지 범하던 페니스가 물러나자 뚝 멈추어 버렸다. 쾌감의 빈자리에는 제어할 수 없는 상실감만이 남았다. 거기서 가스파르가 또 물러나려 하자, 그만큼씩 더.

“빼지, 마, 아앗…!”

방금 전까지 감당하기 괴로워 울고 있던 것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튀어 나갔다.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아, 아, 읏, 우으…….”

“이만 뺄까? 어떡할까.”

“…….”

아일럿이 욕을 했다. 입을 다물고 있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린 것은 틀림없이 욕이었으리라. 가스파르가 못 견디고 웃으며 뺨에 입술을 눌렀다.

원하는구나. 그럼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

“뭐…하는. 으. 하, 잠깐. 잠, 잠깐. 잠깐만!”

삽입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가스파르에게 몸이 들렸다. 그가 저를 안아 든 적은 제법 있었으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삽입한 상태인데 몸이 떠오르고, 팔로는 간신히 그에게 매달릴 수 있었어도 다리는 그렇지 못했다. 내리찍던 것이 위로 쳐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무릎 밑은 그저 힘없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서 온몸이 다 들썩인다. 띄엄띄엄 내쉬던 숨도 가스파르가 치고 올라오면 뚝 끊기고 말았다.

“이거, 흐, 흐아아, 읏, 아 안 돼, 이거 뭐야, 아, 아, 흑!”

생전 처음 해 보는 체위였다. 이렇게 들려서 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아일럿은 외줄 하나에 몸을 맡긴 느낌이었다. 가스파르의 것이 들어오고, 그 안쪽에 연달아 짓찧는 감각에 배 속이 심하게 울렸다.

“허으으, 읏, 우으으으……. 헉, 으으, 웁. 히… 읏, 힉… 아, 아, 싫어, 가스파르, 흐, 이거 싫. 아, 싫……. 무서…어, 아, 아, 흐앙…!”

“계속, 해달라고 했잖아. 너.”

“흡, 우, 으으으, 흐아, 아… 아……. 으, 히, 히잇.”

“다 해 줄게, 내가 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마.”

“흐, 억, 으으읏.”

“지금 여기까지 들어온 거, 알겠어? 아일럿? 응? 나만 꽉 차 있잖아. 안에서 내 걸 얼마나 짜내고 있는지 느껴져? 절대 잊지 마.”

목소리는 상냥한데 몰랐다가는 평생 기억시켜줄 기세였다. 아일럿은 거의 생존하기 위하여 머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처음 여기까지 들어갔을 땐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봐. 나도 이렇게 안을 줄 알고.”

“아흐… 아, 아, 읏, 흐으으으… 오, 오늘 대… 흑, 대체, 왜, 왜 이… 아아아…!”

연결 부위를 내려다보는 눈이 진득진득, 애정 같은 것이 뚝뚝 묻어 내린다. 감격스럽다는 눈을 하고 아래를 계속 보는데, 아무리 봐도 가스파르가 미친 것 같았다. 술을 먹은 게 아니라 미쳐 버리는 약을 먹고 온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흡, 흐아아, 아, 응, 으, 힛… 거기, 제발, 아냐, 안, 아, 아, 히으.”

그와의 성교에는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 생각이 완전히 부정당했다. 가스파르가 작정하고 덤비면 속수무책이었다. 몸이 그의 아래에서 수십 번 무너지고, 또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다음 그의 입맛대로 몸이 열렸다.

“앗… 흑!”

기절을 했나? 아니면 기절 직전에서 끝났나. 아일럿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침대 위로 몸이 떨어졌다. 별로 위험한 높이도 아닌데, 떨어뜨릴 때 머리가 세게 부딪치지 않게 손으로 감싸주는 배려심을 발휘할 거였으면, 아래로도 배려를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가스파르는 허리 위로만 상냥했다. 눈앞에 있는 아일럿의 두 다리를 모으고는 발목을 크게 물었다. 아프게 물지는 않았는데, 그 뒤에 혀가 달라붙는 게 너무 질척했다.

“하, 하, 아, 왜. 으… 왜애.”

한계다. 한참 전에 한계를 지났는데, 정말 넘으면 안 될 곳을 넘어서 최후 방어선마저 넘었다. 닫힌 주름을 밀어젖히면서 성기가 안을 그득 채웠다.

“대체, 왜, 왜 그래…! 오늘. 하, 으으흣!”

이유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다보니 아무 말이나 흘러나왔는데 그게 오늘 왜 그러냐는 말이었을 뿐이다. 다만 취기가 오른 와중에도 마음에 담아둔 것이 있었던 가스파르에게는 달리 들렸다. 사납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어… 어?”

쏟아지던 쾌감이 갑자기 멎으니 당혹스러워진 아일럿이 눈을 굴렸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제가 조르도록 온갖 일을 해 버리는 그였기에 다가올 일에 겁을 먹었다. 뭘 또 어떻게 하려고?

“누구 소개받을 거 아니지.”

“머, 뭐… 어?”

이것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소개…?

“내가 있는데 누구랑…….”

“가스… 흐, 으으, 거기, 으으, 읏, 힛…!”

아버지한테 온 편지를 본 건가. 읽고 나서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왔으니 가스파르가 그걸 발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안 받아. 안 할. 소개 안 받. 웁. 프으으으. 흐읏. 흐.”

“내가… 하아, 있잖아. 그치.”

“으응, 응, 있… 너, 너 있. 아. 흐끅.”

“그래. 그러니까……. 넌 허튼 생각 마. 그러면 안 돼.”

“히… 아, 안 돼, 안 돼, 아, 안 돼, 지금 싸면, 아, 아, 으, 으흑… 나. 주, 죽을 것 같흐아, 윽. 으읏…….”

추삽질을 하다 절정에 치달았을 때의 신호가 나왔다. 저를 더 몰아붙일 셈이다. 이걸 지금 당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깨무는 거, 아, 앗, 흐아아, 아, 아, 히으읍-”

소개를 받지 말라던 가스파르는 저를 죽여서 소개를 받지 못하게 하려는 중이었다. 사인이 복상사라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그것만은 안 되는데,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아-”

자각하기도 전에 눈이 감겨졌다. 의식에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이후, 아일럿은 짧은 평온에서 건져 올려졌다.

“윽. 흐… 읏…!”

초점 없는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까만 천장을 떠돌다가 제 두 다리를 붙잡고 있는 가스파르에게 닿았다. 동시에 잊고 있었던 쾌감이 날카롭게 몸을 관통했다. 머리, 팔이나 가슴, 정확히는 가스파르가 닿지 않은 부분의 감각은 다 먼 곳에 있는데 그가 닿아 있는 곳의 감각은 선명하니 가까이에 있었다. 특히 안쪽. 그런데 그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끝났…어?” 

내벽이 축축했다. 배에 약간 힘을 주자 정액이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가늘게 떠 보니, 발기하기 전이나 후나 흉흉한 그의 페니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하.”

끝났다. 정말 끝난 거야. 여기서 더 할 수 있을 리 없어. 다 끝났어……. 멍하니 생각하는 아일럿의 숨이 나른하게 쏟아졌다.

“아일럿.”

흐릿흐릿해진 시선의 끝에 머물던 가스파르가 다가온다. 안경이 없어서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얼핏, 그도 전력질주를 하고 난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은 알았다. 천천히 숨을 고른 그가 자꾸만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아…….”

지친 와중에도 아일럿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수려한 얼굴인데 이마를 드러내니 얼굴에서 빛이 났다. 잘생긴 사람은 얼굴을 드러낼수록 멋지다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넋을 놓고 감상해 버렸다. 가스파르의 기세가 어딘지 모르게 위험하다고 느꼈을 때 도망을 갔어야 했는데-

“뒤처리는 해야지.”

“아냐, 하, 아냐, 아냐, 내가 해도… 헉-”

얼굴에 홀린 죄를 이렇게 받는다. 아냐, 아냐, 하지 마. 안 해도 될 것 같아. 침대 위에서 휘저어지던 발이 가스파르에게 붙잡혔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끌려가서 허리가 들린다.

“아흐아아아, 너어, 흣. 아, 아흐으, 응, 으하…!”

다른 방보다 유달리 방음이 잘 된 방 안에서 아일럿의 긴 신음이 밤새도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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