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외전: 주점에서 있었던 일을 가스파르가 알아 버렸어
개학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아일럿은 제 방의 침대보다 가스파르의 방에 있는 침대가 더 익숙해지고 있음을 어렴풋 느꼈다. 하루에 한 번꼴로, 어쩔 때는 두 번꼴로 시트를 갈아서일지도 모른다.
아일럿은 햇살의 냄새가 남아 있는 시트 위에 뺨을 비볐다. 막 관계가 끝난 뒤에는 온몸이 나른하고 잠이 왔다. 그래서 끝나기가 무섭게 번번이 기절하기 일쑤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격한 관계 후에도 어떻게든 눈을 뜨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적응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한참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온 가스파르가, 방 안으로 돌아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
자연히 궁금해질 수밖에. 뒤늦게 아일럿의 시선을 눈치챈 가스파르가 미간을 좁히며 장난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이내 미소 지었다.
“파티 초대장이야. 개학했다는 핑계로 너무 안 나갔더니…….”
다른 편지에는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친구들의 원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붙어 있으면 아일럿과 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스파르로서는, 많은 귀족들이 그러하듯 파티에 나가서 밤새 즐기는 것보다는 밤새 아일럿을 괴롭혀 주고 싶었다. 그편이 한층 제 인생에 행복한 기억을 남기게 될 텐데 왜 굳이? 그러나 방학 내내 의도치 않게 은둔 생활을 했던 가스파르였다. 처음에는 할 일이 많아서, 이후에는 아일럿을 만나게 되어서.
[친애하는 내 친구 가스파르]
[얼굴 안 보여 줄 거면 다른 자식 친구 해.]
[죽었니? 살았니? 잠적해 버린 가스파르 루 가디테로안을 찾습니다.]
때문에 얼굴 좀 보여 달라는 친구들의 요청까지 쉬이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고민하던 가스파르는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일럿을 내려다보았다. 저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지, 하얀 시트 위에 펼쳐져 있는 나신이 걸작이었다. 군데군데에 제가 칵 깨물어 남긴 흔적을 달고 있는 몸이 야했다. 절정에 달하기 직전에, 세게 쳐올려 주면서 자국을 남겨주어서 그렇다. 구멍을 세게 조이면서 울음을 터뜨리던 아일럿의 목소리가 선연했다.
난 알지. 이제 네가 그걸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도.
아일럿에게 하고픈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매끈한 피부 위를 기어 다니고 싶어 하는 손가락을 안쪽으로 오므렸다. 또 손을 대었다가는 파티고 뭐고, 내일은 수업도 없겠다 아일럿과 내내 뒹굴어 버리고 말 터였다.
……아, 정말 싫다.
가스파르는 한참을 고민하다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서 바닥에 앉아, 엎드려 있던 아일럿과 시선을 맞추었다. 파티에 함께 간다면, 싫은 마음이 그나마 사라지게 될까.
“파티에 같이 갈래, 아일럿?”
나른한 표정이던 아일럿이 금세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파티라니, 설마 저번에 갔던 파티는 아니겠지. 붉은색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며 가스파르는 어렵지 않게 아일럿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저번이랑은 달라. 그냥 사교 파티야. 평범하게 춤추고, 이야기하는, 그저 그런.”
설명을 덧붙여 주었음에도 아일럿은 쉬이 함께 가겠노라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파티를 즐기지 않는 탓일까. 아니면 몸 때문에? 힘들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찰나, 아일럿이 미약하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가서…… 다른 짓만 안 하면.”
“글쎄, 어쩔까.”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니. 가스파르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스릴이야 있겠지만,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감당을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감히 제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는 못할 테지만, 그네들과 비슷한 신분인 아일럿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해 볼게.”
말만 그렇게 했다. 추문이 아일럿의 뒤를 따라다니게 하고 싶지도, 그로 인해 고통 받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난처해하는 표정이 좋아서 괜스레 그리 말하고는 말랑한 뺨에 입을 맞췄다.
“잠깐만 쉬고 있어. 금방 답장을 보내고 올게.”
“으응…….”
자리에서 일어난 가스파르가 상당히 경쾌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더 이상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아일럿은 손등으로 그가 입을 맞추었던 자리를 꾹 눌렀다. 오늘로 입을 맞춘 것이 딱 열 번째라는 것을 알까. 가스파르는 최근 들어서 자주 입을 맞추었다. 관계를 가질 때는 세기가 힘들 정도고, 가만히 있다가도 입술을 뺨이나 이마에 눌렀다.
그러다 어떤 때는 입술을 겹치는데, 숨을 쉬고 있는데도 스스로가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 위로 혼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지만 키스를 하는 것도 실로 가스파르다워서, 한참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도 갑자기 몸을 뒤로 물리고서 새가 쪼는 것처럼 맞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제 애를 태우는 것이다.
“…….”
지금도 애가 탄다. 생각을 하던 도중에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스파르의 계획은 정확하게 맞아 들어서, 이따금은 그가 없는데도 입술이 근질거렸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체온, 고막을 건드리는 젖은 소리. 그 모든 것이 기다려진다. 아일럿은 눈을 한번 꽉 감았다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이러고 있다가는 겨우 가라앉았던 몸이 재차 뜨겁게 익을 것만 같았다.
*
“미안해, 아일럿. 금방 다녀올게.”
“응.”
그날 저녁에 열린 파티는 규모가 꽤 컸다. 거기에서 만나게 된, 수도 제일의 파티광이자 가스파르의 절친한 친구라는 후작은 아일럿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냈다. 하필 가스파르가 다른 친구들에게 끌려갔을 때 다시 아일럿을 찾아온 후작이 눈을 빛냈다.
“이런 분을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파티에 참석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아니, 어째서요.”
“어…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저도 복잡한 걸 싫어하… 지는 않는데. 그러시다면-”
“네. 네?”
제가 왜 그리도 파티를 싫어했는지, 오랜만에 온 파티에서 새삼 깨달았다. 귀찮게 자꾸 말을 걸어서. 모여서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절한데다 이것저것을 같이 하려고 하는 게 부담스럽다. 파티장에 가면 어딜 가나 이렇게 외향적인 사람투성이인지라 점차 가지 않게 되었다. 아일럿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후작을 피해, 사람이 그나마 적은 곳으로 도망쳤다.
금방 다녀오겠다던 가스파르가 빨리 돌아오기를. 가스파르의 파트너로 온 것 때문일까.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헤어져 버려서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너.”
불편해 죽겠는데 누군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맞네. 밝은 데서 보니까 확실해.”
상대방이 그렇게 말하며 제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아일럿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덩치가 큰 남자. 그가 무슨 목적으로 저에게 다가오는지, 왜 초면에 무례하게도 ‘너’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당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까이에서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우리 구면이지 않아?”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그때 그렇게 가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아……. 어…….”
주점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가스파르의 저택에서 나온 뒤, 달아오른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던 제 앞에 나타났던 남자. 아디트 출신이라던 그가 왜 수도에 있는 걸까. 수도에 올 수 있다 쳐도 어떻게 이 파티에서 딱 마주칠 수 있는지. 갑작스러운 우연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남자는 아일럿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며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수도에 오면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했어.”
“실례지만, 무, 무슨 말을 하시는지.”
“날 보고 놀랐으면서 거짓말 하기는.”
“놀라지 않았-”
“지금은 찾으러 올 하인이 없지?”
얼굴은 불그스름하지 않았지만 술 냄새가 진하게 나고, 말을 할 때마다 더 짙어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밀쳐내려던 차에, 남자의 뒤에서 익숙한 금발의 남자가 가까워졌다.
“무슨 일이야, 아일럿?”
“스칸다에서 못 했던 거 마저 할까? 내가 그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네가 하인만 찾아 나서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다 했을 텐데.”
“아니, 아니, 그게.”
“너처럼 피부가 부드러운 사람은 찾을래도 찾을 수가 없더라고. 아디트에 가서도 네 생각이 났다니까?”
“…….”
“가스파르.”
“그때 이 입술을 한 번도 못 빨아본 게…….”
마침 가까운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아일럿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발로 차서 그 연못 안에 빠뜨려 버리고는, 제가 저지른 짓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어 가스파르와 눈이 마주쳤다.
“어푸, 웁, 푸우우우, 퉵.”
“이건 그러니까…!”
“일단 다른 곳으로 가자.”
“으…. 으응.”
술에 취한 사람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얕은 연못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서 두 사람이 함께 타고 온 마차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볼래?”
침묵에 괴로워할 틈도 없이 가스파르가 바로 물어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아일럿은 길게 침음을 내다 입술을 달싹였다.
“그…… 으게.”
“말해.”
“그러니까.”
처음부터 취객이 헛소리를 하는 거였다고 속였으면 좋았을 텐데, 상대를 능숙하게 속일 실력이 없어서 모든 카드를 보인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전부 들킨 마당에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 나? 아일럿은 가스파르의 소리 없는 재촉에 떠밀려 입을 움직이면서도, 이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 나도 취하고… 정신이 없어서.”
“유혹하는 대로 넘어갔다고?”
“……응.”
“어디까지 했어?”
“그것까지 말, 으, 으악.”
다리 사이가 붙잡혔다. 당연하게도 가스파르의 손에. 손바닥과 천 밑에서 짓눌린 예민한 부분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오면서, 아일럿은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레 바지 속으로 손이 밀려들어 왔다.
“가스… 흣, 아……. 아파, 아…….”
힘이 약해졌음에도 여운 같은 통증이 남아 욱신거렸다. 그러나 가스파르의 손이 기둥을 잡고서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가자, 이내 느리게 퍼지는 쾌감이 아래에서부터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몇 번 쓸어준 것뿐인데도 거의 발기할 뻔하던 아일럿은, 얼마 안 가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말해 봐. 그 놈이랑 어떻게 했는지. 난 다 알아야겠어.”
“흡-”
선단을 엄지로 짓누르는 찰나, 가스파르는 다른 손으로 바지 윗부분을 잡고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 버렸다. 이어서 무릎 아래로. 속옷과 바지는 금세 발목 근처까지 떨어졌다. 금세 하반신을 드러내게 된 아일럿은 허벅지를 오므렸지만, 가스파르는 무릎을 잡고서 양쪽 다리를 활짝 벌리게 했다. 발기해 버린 페니스가 끄트머리에서 맑은 액을 눈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으, 읏…….”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된 곳에, 가스파르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무릎을 잡고 벌린 손에 힘을 조금 더 주면서, 거듭 이야기할 것을 종용했다.
“주점 근처에 있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그, 그 사람이.”
버티지 못한 아일럿이 입을 열었다. 하나, 딱 한 문장을 말하자마자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얼굴과 목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고, 목이 메어서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던 가스파르가 재촉하듯 귀두를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리기 시작하자, 울다시피 하며 말을 이어야 했다.
“내 몸을, 무… 물고 빨게, 놔뒀-”
“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몸이 달아서 하고 싶었다. 가스파르의 저택에서 갑자기 나오게 된 뒤, 절절 끓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만난 놈이 그놈이었…….
“으, 흐악!”
어렵사리 달싹이던 입술이 닫혀 버리자, 가스파르는 네 손가락 끝을 모아 입구 주변을 긁어내렸다. 손가락을 넣지도 않았는데 미리 들어올 것을 반기듯 주름이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액만 나오지 않았을 뿐, 군침을 흘리는 입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가스파르의 엄지손가락이 입구 주변에 닿았다. 처음에는 저려오는 회음부를 만져주고 밑으로 내려가 세심하게 주름을 매만졌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아일럿이 입을 다물고 있는 내내 지속 되었다는 것이다.
“하아, 흐, 으읏… 아……. 읍.”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긴장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릴 때까지만 입구를 만져 주고는, 몸이 노곤하게 풀리면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안으로 곧장 손가락을 삽입해서 부풀어 오른 성감대를 손끝으로 기어 찾아갔다. 그러고는 한껏 휘저어 주고 사용한 젤이 바깥으로 죄 흘러나올 정도로 안을 헤집거나 추삽질을 했다. 잠깐이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한참동안 계속 되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 가스파르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던 몸은 자꾸만 어색함을 느끼며 아쉬움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말하지 않으면 가스파르는 언제까지고 애만 태울 것이다. 무심하게 제 아래를 만지고 있는 그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띄엄띄엄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택에서 나오고 나서, 몸이… 이상, 해, 해져서, 읏. 흐아, 아…….”
아, 그때였던가. 가스파르의 표정이 미세하게 유순해졌다. 서서히 쾌감에 익숙해진 아일럿이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알고서 부러 내보냈을 때. 그때라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보내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손가락을 한 마디쯤 넣어서 점막을 건드리다 안으로 미끄러뜨렸다. 내벽이 힘 있게 손가락을 물어댔다.
“그런데, 만지, 만지라고 했, 했는데. 그 사람이. 자기 걸.”
“…….”
“너무… 자, 악.”
“음?”
마저 말하라는 신호라 여기고서 아일럿이 입을 열었다가 몇 마디 말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제 것이 작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부끄러움에 차마 다음에 이어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큰 것이 좋다는 뜻이고, 큰 것은 가스파르. 매일 밤 침대 위에서 좋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작아서 하기 싫어져서, 어…….”
그 한마디를 하다 아일럿은 죽을 뻔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상대방의 입술 사이에서 풉, 하는 소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한 가스파르였지만 저절로 웃음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빨갛게 익은 얼굴을 앞에 두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가스파르는 웃는 얼굴을 하고 아일럿과 눈을 맞췄다.
“그럼 컸으면 했다는 소리겠구나.”
“아니, 그건. 그건… 그게.”
“아니기는. 여기 긁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흐. 으으읍…….”
“갈 것 같을 때는 다리로 날 감싸고 안 놓아 주면서.”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오나 싶었다. 이미 음부가 다 드러나도록 벌어져 있던 다리를, 발끝을 꿈질거리며 더 벌렸다. 가스파르가 들어올 것을 기대한 몸이 자연스레 들썩였다. 그러나 아일럿이 바라마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벌이야. 오늘 하루는 삽입하지 않을 테니까 내 몸에 손도 대지 마.”
고작 오늘 하루라니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얼떨결에 다리를 오므리고 나니, 가스파르는 맞은편에 앉았다.
“…….”
죄인은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바지를 입기 위해서 손을 아래로 내리는데, 발목에 걸쳐져 있었던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내 옷은…?”
물어보니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이는데, 아일럿은 가스파르가 그새 제 바지와 속옷을 숨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이대로 기숙사까지 가자고? 경악했으나 가스파르는 마부를 불러오지도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지, 다른 곳을 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아일럿은 벗은 아래를 가릴 생각도 못 하고서 엉거주춤 가스파르의 앞으로 다가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은 대지 말라고 하였으니 몸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굳어 있던 입꼬리가 약하게 실룩거렸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서 바지 끈을 입으로 풀어서 끌어내린 아일럿이 가스파르를 올려다보면서 옷 위로 입술을 문질렀다. 아직 발기 전인데도 오른쪽 허벅지 한쪽을 꽉 채우는 물건을 입술로 더듬으며 내려가다, 끝 부분에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표정을 살폈다.
옷 위에서 머금는 시늉을 하고 뺨을 천천히 문지르니 물건에 열이 오르고 점차 딱딱해졌다. 슬슬 밖으로 빼주고 싶은데, 본인도 불편할 텐데,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혹시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던 건가? 정말 화가 나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건데 저 혼자 착각했던 것이라면……. 불안해하면서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정성스럽게 옷 위로 애무하는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서 ‘아일럿.’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으응. 응. 드, 듣고 있어.”
“일어나서 뒤돌아봐.”
뒤를 돌면 도드라지게 될 곳은 뻔했다. 마차 안에서 허리를 완전히 펼 수 없으니, 앞으로 굽힌 채 아일럿은 가스파르에게 등을 보였다.
“허리 숙여.”
“어?”
여기서 더? 시키는 대로 허리를 숙이자 당연하게도 엉덩이를 점차 가스파르에게 내밀게 되었다.
“더.”
몸을 굳힌 아일럿이 머뭇거리자 뒤에서 뻗어온 팔이 앞쪽으로 다가와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중심이 앞으로 기울었다. 졸지에 맞은편 좌석에 손을 대고서 엉덩이를 치켜든 아일럿은 다리를 일자로 두지도 못하여, 부끄러운 곳을 그에게 온전히 보이고 말았다. 뒤로 한 적은 많았지만, 그건 서로의 하체와 하체를 맞닿게 할 적의 일이었다. 이런 자세는, 게다가 침대도 아니고 마차 안에서라니. 두 다리로 서서 그에게 성기를 보이고 있으니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다.
“흐아, 읏… 아, 으으읍…….”
회음부에 숨결이 닿았다. 일부러 바람을 불어넣은 건 아닌데 그저 숨이 닿기만 해도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하아, 으…!”
“아직 핥아 주지도 않았어.”
꼬리뼈가 있는 곳이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젖은 선을 가볍게 그리고 지나갔는데, 아일럿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예고 없이 두 손가락이 단숨에 깊게 찔러 들어오자, 상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일럿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서 목 안쪽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상반신을 무너뜨렸다. 가스파르가 다시 자세를 잡으라고 하자, 팔로 다시금 몸을 지탱하는 데 무척 어설펐다.
“손가락만 넣어줘도 이렇게 자지러지면서, 큰 게 좋았어?”
“아, 아아아… 아, 앗!”
아일럿이 알고 있는 행동이다. 안에서 요동을 치는 손가락 때문에 상체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펄떡 튀었다가 웅크리고, 무너져 내리고,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떨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랫배에 붙다시피 한 성기는 맑은 액을 오줌처럼 흘려, 마차의 바닥을 적셨다. 싸기 일보직전까지 몰린 아일럿은 아래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두 손가락일 뿐인데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내벽을 통째로 흔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아니라 가스파르의 것이 들어오면 더 기분이 좋다는 걸 수 없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것이 가지고 싶다. 구멍이 다물어지지 않을 때까지 쑤셔주고, 또 배 속에 정액을 가득 담아주길 바라서 미쳐버릴 듯했다.
“넣어줘, 흐, 네 거, 큰 걸로… 찔러줘, 하으으…….”
“오늘은 삽입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시, 싫… 어, 어, 넣어줘어…. 흐으, 아으, 읏, 아, 아, 흑. 가스파르, 거, 아래로… 머, 먹고 싶어어……. 잘 조일 테니까, 흑, 아!”
“…안 돼. 손가락으로만 만족해.”
조르는 방법을 잘 터득한 아일럿에게 넘어갈 뻔했던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성기를 잡아, 더 이상 액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땀에 젖은 낭창한 몸은, 보는 사람의 성욕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하나, 아직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이제 싸고 싶지?”
“읏, 아… 으, 읏, 싸고 싶, 어. 이제, 아, 안 돼애, 흐아, 앗-”
“아직 안 돼.”
퍽 여유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성기를 잡아당겼다. 용케도 두 다리를 펴고 몸을 지탱하고 있던 아일럿이었지만, 그렇게 되자 발은 같은 자리에 둔 채 점차 무릎이 가까워지려 했다. 다리는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상기된 얼굴은 감각을 주체하지 못하여 지독히도 음란하게 변해 있었다.
“하고 싶으면 어떻게 말하라고 했더라.”
“갈 것 같… 아, 내, 내가, 싸는 거, 자, 잘 봐줘어. 흑.”
평소 같으면 망설이다 겨우 내뱉을 말도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정말 잘 봐달라는 것처럼 스스로 허벅지 사이로 한쪽 손을 넣어, 붙잡기까지 했다.
“힉, 끄, 흐으읏. 하아, 흐, 윽……. 아, 아, 아아아… 아!”
성기에서 손이 떨어지자마자 액이 터져 나왔다. 절정이 온몸을 두드렸다. 앞으로 주저앉을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가스파르에게 붙잡힌 아일럿은 거칠고 탁한 숨을 내뱉으며 가슴팍을 들썩였다. 쾌감이 너무 강하고 깊어서, 안경을 쓰고 있음에도 앞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의 품에 기대어 안긴 후에야 간신히 맑아졌다.
“하아. 하……. 후, 으…….”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난 이후에야 쾌감의 여운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나, 눈을 마주했다. 가스파르는 가냘프게 숨을 뱉는 입술을 보며, 조만간 찾아내서 어딘가로 팔아 버릴 예정인 남자가 ‘그때 이 입술을 한 번도 못 빨아본 게…….’ 라고 중얼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 불쾌한 한 마디가 떠오르자,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빨아 주고 싶었다.
이 예쁜 걸 누구한테 내어 줄까 보냐, 이글거리는 독점욕에 못 이겨 입술을 겹치려는데 아일럿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가스파르, 미안해.”
“…….”
가스파르는 생각했다.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이건 아일럿한테 주는 벌이 아니라 제가 받는 벌이 아닐까?
“안 되겠어.”
“아… 안 된다니?! 가스파르, 정말 미, 아, 으악!”
오늘은 삽입 안 할 거라면서! 막 사정을 하고 나른해진 채 헐떡이던 아일럿은 여유 없이 아래를 맞대는 가스파르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렸다. 바닥에 제 윗옷을 깔기가 무섭게 아일럿을 눕히고, 급하게 허리를 꺾어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가스파르는 그 어느 때보다 조급했다.
“잠깐만, 가스파, 아……!”
녹진한 입구에 닿았던 성기가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서로의 피부가 철퍽, 부딪치는 소리가 났을 때 아일럿은 그것만으로도 재차 오르가즘을 느낄 뻔했다가 간신히 상대를 붙들었다. 깊게 스며든 쾌감이 아랫배를 뜨겁게 달구고, 부족했던 부분이 온전히 채워지는 순간,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
“…마부를 다시 불러와야 하긴 하는데.”
나직한 목소리로 제 바로 옆에 누운 가스파르가 속삭였다.
“그냥 이러고 있고 싶어.”
“나, 나도.”
“알아서 올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아?”
“괜찮아. 달리 할 일도 없고, 과제는 어제 다 했으니까.”
새삼스럽지만 마차 안에서 해 버렸다는 사실이 머리에 콕 박혔다. 이게 몇 번째더라. 헤아려 보다가 가스파르를 슬쩍 쳐다보았다. 마차 안이 넓은 것이 다행이었다. 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어도 충분한 자리가 있으니까. 여러모로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깔끔하게 넘기고 있었던 가스파르의 머리가 엉망이었다. 아마 저도 못지않으리라. 아일럿은 조심스럽게 가스파르의 이마 근처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서 정돈해 주니 가스파르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눈을 감았다.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아일럿은 얼른 사과를 했다.
“저기, 가스파르… 아까 못 들었을까 봐 다시 말할게. 미안해.”
“알면 됐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아일럿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가스파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연히 그래야지.”
화가 다 풀렸나? 가스파르의 품 안에 들어온 아일럿은 마음이 편해진 나머지 고양이처럼 골골거렸다. 그러나 막상, 아일럿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가스파르는 생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여, 나름대로 마음이 심란해졌다.
‘가스파르, 같이 온 사람 누구야?’
‘같이 온 사람?’
‘어디서 알게 됐어? 처음 보는 얼굴이라 외국에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억양을 들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응?’
‘……그건 왜.’
‘뭐긴, 뭐겠어. 너도 알다시피 나 연애 쉰 지 오래 됐잖아.’
‘…….’
‘으, 그렇게 보지 말고 나 좀 도와주라. 잘되면 꼭 사례할 테니까.’
그뿐이던가.
‘같은 학교 사람이야? 이름 좀 가르쳐줘.’
‘그렇게 생겼으면 어딜 가서든 눈에 띄었을 텐데. 어디 숨어 살았대?’
아일럿은 햇빛과 더위에 약해서 여름마다 스칸다로 피서를 갔다고 했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가스파르는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7월에서 8월까지 이어지는 여름은 사교파티의 계절. 평소에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던 귀족들도 여름에는 수도로 올라와 밤새도록 파티를 즐겼다. 순진한 아들을 꼬드기려는 귀족들을 피해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낸 것은 아닌지……. 덕분에 제 입안으로 굴러들어왔지만.
“이만 돌아갈까, 아일럿?”
“응. 기숙사로 가자.”
아일럿이 파티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손을 대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두긴 했으나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모르는 남자와 하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크지 않기 때문인 것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성격이 조심스럽고 얌전하니까, 혼자 달래면서 끙끙 앓기만 할 줄 알았는데 다른 남자를 불러들이다니.
아일럿은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더 그렇다. 얼굴도, 몸도 보고 있을수록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여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건 손을 대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일럿의 어딘가를 만지거나 입을 맞추는 것이 좋았고, 시간이 지나니 더욱 좋아졌다. 매료와 중독, 둘 중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일럿과 기숙사에 함께 틀어박혀 나오고 있지를 않으니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어느 한쪽에 더 가까웠다.
그런 아일럿이 요즘 들어서 조르는 것도 능숙해지고, 가르쳐 준 것도 곧잘 하게 되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스파르는 미래가 조금 걱정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역으로 아일럿에게 휘둘리게 것이 아닐까.
지금도 ‘가스파르, 하고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지는데.
<도망치지 못할 만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