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모든 것은 가스파르의 탓 (9/17)

8. 모든 것은 가스파르의 탓

“오, 아일럿, 어쩜. 세상에.”

“숙모님, 잘 지내셨… 웁.”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숙모의 통통한 손에 뺨을 잡힌 아일럿은 눈을 끔뻑거렸다. 갑작스레 양쪽 뺨이 눌린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거니와 숙모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혹시나 그럴 리가 없지만-

“왜 이렇게 말랐니! 전보다 살이 더 빠졌어. 아니 분명해.”

들킨 줄 알았다.

응접실로 오면서, 눈치가 좋은 룹이 가스파르의 별장에서 머물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마을로 내려갔다는 식으로 숙모에게 둘러댄 것을 전해 들었지만, 완전히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에요. 살은 별로 안 빠졌. 으, 으아.”

“허리도 이렇게 얇아지고.”

“숙, 숙모님. 숙모님 잠깐.”

이번에는 허리가 덥석 잡혔다. 셔츠 위를 잡은 게 아니라 베스트 위를 잡았으니, 가죽끈이 직접적으로 만져지지는 않을 테지만 너무 가까웠다. 유두에 매달린 장식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올까 두려워,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얘도 참. 뭘 부끄러워하니?”

“아뇨, 그게.”

어린 시절에는 숙모의 저택에 자주 맡겨졌기에, 숙모는 여전히 아주 어린 아이를 대하듯 스킨십을 하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혹시 어딘가 불편해 보이면 덥석 붙잡고서 다급히 살펴본다거나.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일럿은 몸을 사리면서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좀 빠지긴 했는데 여름이라 그래요. 저 여름만 되면 입맛이 없어서 금방 살 빠지고 그러잖아요. 스칸다는 시원하지만 그래도 여름이다 보니까… 겨울이 되면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넌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어휴, 정말 걱정이구나.”

“괜찮아요.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에요.”

“겨울에 꼭 노메인에 들리렴, 아일럿. 특산물 맛을 잔뜩 보게 해 줄게.”

“감사합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숙모가 다시 제 몸에 손을 댈까 두려워, 급하게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니 그제야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저, 일단 차부터 한 잔 드시겠어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숙모님.”

“어머, 얘는. 너 만나러 오는 게 무슨 고생이니?”

간신히 담소가 이어졌다. 하나 약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작은 위기가 발생했는데, 방울 소리를 의식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아일럿을 숙모가 오해해 버린 탓이었다.

“아까부터 좀 불편해 보이는데.”

“에, 예?”

“아일럿, 혹시 허리 아픈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이제 예전처럼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른 자세가 허리에 좋다고 해서 그래요. 정말로 아픈 곳 하나도 없어요.”

의심으로 눈을 가늘게 뜨는 숙모가, 탁자를 넘어서 제 옆으로 올까 봐 어찌나 두려웠던지. 무심코 다리를 오므렸던 아일럿은 가죽끈이, 특히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가죽끈이 바싹 조여 오는 듯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함이 어느샌가 묘한 간지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괜찮은 것 같아도 혹시 모르니까 개학 전에 한 번쯤은 꼭 의사를 만나 보렴. 숨겨진 병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 건강한 것 같아도 혹시 모르는 거야.”

“네, 그럴게요.”

“그러면……. 이만 슬슬 가봐야겠네.”

“네? 벌써요?”

“더 있다 가고 싶지만, 잠깐 들른 거라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수도에 가서 할 일이 잔뜩 쌓였지 뭐니.”

평소 같으면 숙모가 하룻밤을 묵지 않고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일럿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오늘 나가지 않았다면 숙모님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후후,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그럼 겨울에 꼭 노메인으로 오는 거다. 자, 약속!”

“네. 꼭 찾아뵐게요. 살펴 가세요.”

숙모님, 고맙습니다. 마음속으로 거듭 인사하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숙모를 바깥까지 배웅한 아일럿은 겨우 숨을 돌렸다. 응접실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잘랑거리는 방울 소리 때문에 덥지도 않은데 몇 번이나 땀을 흘렸던가.

“후우.”

자, 이제는… 멀어져 가는 숙모의 마차를 보다, 몸을 돌린 아일럿은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스파르는 집에서 도착할 편지를 받아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아니, 아니, 가지 않아도 된다.

“…….”

한 박자 느리게 생각을 정정하면서, 별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 아일럿이 문득 주먹으로 제 머리를 두드렸다. 노크를 하는 것처럼 몇 번. 그렇게 하다 손을 아래로 내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잠시나마 가스파르의 별장을 돌아갈 곳이라고 정해두었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체적 불편함으로 인해 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의자에 앉아 집에서 올 편지를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잠깐 동안 어떻게 생각을 돌렸다가도, 5분에서 10분 사이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각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일럿은 저녁이 될 때까지 그 일을 마냥 반복하다가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다른 상념들이 모조리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사랑하는 내 아들 아일럿.]

[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혹시나 가스파르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첫 문장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재판에서 아버지가 무죄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 과정에서 선원들의 여죄가 밝혀지고 당장 내일부터라도 정상적으로 선박을 사용할 수 있으리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

마지막 문장까지 쉬지 않고 읽어내린 후에야 아일럿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당장이라도 부모님이 계신 수도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 분 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까. 안도를 하는 동시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머릿속에 바늘처럼 파고들었다.

가스파르가 약속한 6일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

*

“왔어?”

문을 열고 집사와 함께 들어온 아일럿을 보며 가스파르가 미소를 지었다.

“편지는 잘 확인했고?”

“으응.”

“잘됐네.”

아일럿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집사가 문을 닫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저를 쳐다보는 상대방의 시선에 두 번 놀랐다.

“거기 서서 뭐 해? 이쪽으로 안 오고.”

가스파르는 읽고 있던 책을 가까이에 있던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아일럿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의자에 안 앉을 거면 내 무릎에 앉아도 되고.”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의자에 주저앉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지만 솔직히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대놓고 웃으면 모처럼 홍조 없이 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변해 버리겠지. 가스파르는 웃음을 삼키며 제 근처에 앉은 아일럿을 바라보았다. 방으로 들어올 때부터 조금 이상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그게-”

벌어졌던 입이 이내 딱, 하고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말을 하려 열었던 입술이 긴장 때문에 자꾸만 제 의지를 벗어나, 소리를 내며 닫히고 말았다. 아일럿은 끈적끈적한 침을 한번 모아서 삼켰다. 말을 해야 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일단 저질러 보자는 심정으로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밖으로 꺼냈다.

“네가 별장에 있으라고 했던 6일은 벌써 지났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마주 보고 있는 파란 눈동자가 ‘그래서?’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집에 가게 해줘.”

“집안일이 잘 해결되니까 나한테는 볼일 끝났다는 거야?”

어느 때보다 날이 선 목소리로 가스파르가 물었다. 평온한 표정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그런 거 아니야. 넌, 얼마든지 지금 판결을 뒤집을 수도 있으니까.”

가스파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일럿의 말을 기다리고만 있을 작정인지 입을 다물고서 말없이 응시했다.

“약속했잖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말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터. 마음을 먹고, 별장으로 오는 내내 마음속으로 되뇌던 말들을 하나씩 쏟아내었다.

“그리고 너무 오래 별장을 비웠어. 하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부모님에게 고자질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혹시 모르는 거고…. 그러니까, 다만 며칠만이라도-”

“처음 말했던 기간이 지나긴 했지.”

“…….”

“가도 좋아.”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외의 반응이기도 했다. 아일럿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진심이야?”

“응. 그렇지만 언제 다시 부를지 몰라.”

“그럼-”

허락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버린 아일럿이, 어색하게 자리에 도로 앉으려 하는 모습을 보고 가스파르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가도 돼. 밖으로 나가서 집사한테 말하면 마차를 준비해 주겠지.”

마차에서 내내 고민하고, 가스파르의 앞에 서서 용기를 끌어올린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쉬운 대답이었다. 6일 동안 별장에 있으라고 했던 말은 애초부터 본인이 한 말이었으니 허락을 예상하긴 했으나, 그 과정이 너무 쉬웠다.

“……가볼게.”

“조심히 가.”

오늘 밤까지는 머물고 내일 아침에 가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리고 밤에는, 도저히 아침에 일찍 출발할 수가 없을 만큼 몰아붙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말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별장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저기.”

“네, 아일럿 님.”

“별장으로 돌아가려고요. 마차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방 밖으로 나와, 아직 근처에 있던 집사에게 말을 걸고 나서 초조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길 몇 차례 반복했다. 가스파르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 지금 보내 주는 건 너무 재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제 손을 잡고 다른 방으로 끌어당기거나… 바닥에 짓누르고 그대로 올라타는 일.

상상과는 달리,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마차 안에도 가스파르는 없었다. 텅 비어 있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던 아일럿은 고개를 돌려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스파르가 있던 방의 불이 그새 꺼져 있었다. 그걸 보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누가 보면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돌려보내는 줄 알겠구나. 마차가 출발하자 두 손을 모아서 세게 쥐었다.

“…젠장.”

영양가 없는 생각이 하나 더 머릿속에서 퍼져 나갔다. 덜컹 거리는 마차 안에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 생각 하나가 머리를 빠르게 잠식했다.

‘응. 그렇지만 언제 다시 부를지 몰라.’

언제 다시 부를지 모른다는 그 뜻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부를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면? 돌연, 그의 말을 떠올리고 나니 처음 짐작했던 의미와 완전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언제 부를지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몇 주 뒤일지, 아니면 몇 달 뒤일지.

가스파르가 날 찾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는 물론이고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별장에 도착했는데도, 그가 자신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설과 그것에 충격을 받고 있는 스스로를 마주하니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도련님? 도련님이세요?”

“룹…….”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이제 별장에서 지내시는 건가요?”

룹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기는 했어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마차 안에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린 척, 룹의 부축을 받은 아일럿은 비틀거리며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

“입욕제를 좀 더 넣을까요?”

“아니, 지금이 딱 좋아.”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목욕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좋지 않은 안색을 보고는 데거가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쉴 것을 권했다. 시간도 제법 늦었으니 데거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아일럿은 욕조 속으로 들어가 몸을 깊게 담갔다. 심란했던 마음이 뜨거운 물에 쉬이 녹아 버릴 리는 없으나, 조금 차분해진 듯한 기분은 들었다.

“도련님. 어깨가 많이 뭉치셨어요.”

“어?”

“좀 주물러 드릴까요?”

“응, 고마워.”

입욕제가 담긴 바구니를 욕조 아래에 내려놓은 데거가, 등 뒤로 다가와서 목 뒤에 따뜻한 수건을 올려 주었다.

“참, 내일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룹이 연어를 잡아 왔는데, 어찌나 크던지. 구워 드릴까요, 찜으로 요리해드릴까요?”

“찜이 좋을 것 같아.”

“그럼 주방장한테 그렇게 말해 두겠습니다.”

“으응. 알았……. 아.”

“여기가 아프세요?”

“어, 어, 조금.”

가끔 있는 일이었다. 앉아서 책만 읽어댔던 탓에 자주 어깨가 결리거나 뭉쳐 있는 것을 알고, 목욕을 하면 데거가 등 뒤에서 어깨를 힘 있게 주물러 주곤 했다. 이전에는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받아들이곤 했었는데, 지금은 목에 손이 닿으면 등줄기에서 전류가 일었다.

“으… 읍.”

한번 그걸 의식하고 나니 멀쩡히 주물러지던 승모근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가스파르가 자주 이로 깨물고 핥던 곳이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데거!”

가뜩이나 따뜻한 데거의 손이, 가스파르가 자주 내뿜던 숨결처럼 그곳에 다가오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일럿은 몸을 앞으로 굽히고는 거칠어졌던 숨을 삼켰다. 

“고, 고마워. 이제 나 혼자 씻을 테니까 이만 나가봐.”

“예? 더 있지 않으시고요?”

“피곤해서 그런지 졸려서… 그만 씻어야겠어.”

“네. 필요하시면 다시 불러주세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리 사이에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만지지 않았지만 살짝 묵직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입욕제가 짙은 분홍색이니 발기를 한다고 해서 보이지는 않을 터였으나, 흥분을 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길게 한숨을 쉰 아일럿은 데거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해면으로 마구 몸을 문질렀다. 피곤하니 차라리 잘 되었다. 침대로 들어가면 금방 눈이 감기겠지. 가스파르를 떠올리면서 발기한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한순간 굳게 먹은 마음과는 달리, 아일럿의 금욕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보낸 하루. 그리고 당황하면서 보낸 이틀이 차례로 지나자, 몸이 주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흣.”

몸에 둘러져 있던 가죽끈과 장식은 서랍 한구석에 처박아 둔 지 오래였으나, 그것과 몸의 반응은 별개였다.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던 아일럿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 유두를 개발 당했을 때처럼 유두가 부어올라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깃털펜이 언뜻, 가슴 근처를 쓸고 지나가자 쾌감이 확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도련님?”

하필이면 같은 공간 안에는 서재를 정리하고 있던 하인도 있었다. 아일럿의 신음 소리를 듣고서, 혹시 뜨거운 차를 쏟은 건 아닌가 걱정하며 달려온 그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쥐, 쥐가 났어. 발에. 살짝.”

“아, 그러셨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한 자세로 오래 있었나봐.”

이러한 일은 옷을 입거나, 몸을 씻을 때는 물론이고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일 때도 일어났다. 더 큰 문제는…… 유두에 자극이 느껴지면, 아래쪽에서도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페니스가, 아니 엉덩이 사이의 구멍이 당기는 듯 욱신거렸다.

“…흐, 우읍.”

하인이 문을 닫고 나가기가 무섭게 아일럿은 가랑이 사이에 손을 대고 말았다. 꾹, 꾹, 참아 눌러오던 것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으. 읏.”

어떡하지. 무언가 내부의 간지러움을 달래줄 것이 없을까 급하게 책상 위를 살펴보던 아일럿은, 잉크를 쏟아서 다 쓴 편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맙소사.”

잉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이긴 했어도 편지 하나를 다 적시기엔 충분했다. 까맣게 물들어 버린 편지를 보니 수치심에 얼굴에 확 불이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바지 위로 윤곽을 드러내려 하는 앞섶이 원망스러워서, 어떻게든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띈 것이 근처에 있던 두꺼운 책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눈앞에서만 안 보이면 된다는 생각에 책을 허벅지 위에 놓고 힘껏 눌렀다.

“…….”

이것마저 기분이 좋을 줄은 몰랐다. 아예 상상도 못 했다.

“아, 아… 흐으, 읍!”

금욕으로 인해, 온몸이 작은 쾌감도 크게 반겼다. 해서 묵직한 책을 힘껏. 다시 힘껏 누르고 나니 책에 눌려 압박당한 성기가 저릿해졌다. 이러려고 누른 게 아니었는데, 실수로 책이 기울어서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자 아일럿은 길게 신음했다. 무심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니 면적이 좁은 막대로 안쪽을 콕, 콕,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윽.”

몸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고 나서 다리를 살짝 더 벌렸다. 어차피 다 읽은 책이니 상관없었다. 두꺼운 책의 모서리를 약간 더 아래로 내리고는 허리를 움직였다. 위로, 아래로.

“읏… 아, 아아……. 흐.”

옷 위로 하는 데다 주변을 지분거리는 정도밖에는 되지 못하지만, 책등 부분에 성기가 함께 미끄러지자 애가 타서 끓어오르던 몸에는 단비 같은 쾌감이 이어졌다. 한 손으로는 책을 잡고, 다른 손은 옷 속으로 밀어 넣어 깃털펜이 닿았던 유두를 누르고 비틀고 있으니, 절정이 머지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 이제 곧-

“가스파르. 좋아… 흑, 아!”

깨물고 있던 입술이 앞니 사이에서 해방이 되고, 아일럿은 단숨을 쏟아내며 잠시 앞으로 굽혔던 몸을 의자에 온전히 기대었다. 기분 좋은 탈력감이 온몸으로 나른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몇 분 후에 깨달았다. 오르가즘을 느끼며 내지른 교성에 가스파르의 이름이 자연스레 섞여 있었다는 걸.

*

“아이구, 도련님. 도련님!”

“어. 어어?”

“그쪽으로 가시면 말똥이에요. 가지 마세요.”

마구간지기인 룹이 급하게 아일럿을 붙잡았다. 멍한 상태로 앞으로 걸어가다가 그대로 말똥을 밟을 뻔했던 아일럿은 뒤로 한참 물러섰다. 계속 걷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니 말똥의 냄새가 제법 지독했다.

“미안. 고마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위를 하면서 가스파르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 적잖이 충격인 나머지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걸었으나, 걷는다 하여도 머릿속에서 그 일이 깨끗하게 지워질 리 없었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또-

“도련님. 얼굴이 빨갛게 익-”

“감기 걸려서 그래!”

감기에 걸린 사람 같지 않은, 무척이나 맑은 목소리로 아일럿이 쏘아붙이자 룹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룹이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좌우로 고개를 저어대던 아일럿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심란하니, 눈앞에 있는 룹에게라도 집중하고 싶었다.

“……평소랑 옷차림이 다르네?”

“예?”

“어디 가려고?”

“예? 아… 오늘 할 일도 끝났고 하니, 마을이나 내려갔다 올까 하고요.”

“마을에? 데거가 뭐 사오라고 시키기라도 했어?”

“그게 아니라. 음, 도련님께서는 올해 한 번도 마을에 안 가 보셨지요? 괜찮은 주점이 생겼답니다.”

아일럿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혼자 가면 제 돈을 사용해야 했지만, 아일럿과 함께 가면 데거에게서 술값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실 사람도 생기게 된다. 룹은 후후, 낮게 웃으며 아일럿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도련님도 가서 한 잔 같이 하시겠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이번에는 아일럿의 눈 모양이 동그랗게 변했다.

“고작 술 한 잔일 뿐인데 대체 어떻게 숙성을 하는지, 술맛이 아주. 어휴. 말도 못 할 정도랍니다.”

“그 정도야?”

“예. 삼킬 새도 없이 술술 넘어간다니까요? 안주고 뭐고 필요 없이, 크으읏.”

가게에서 돈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룹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술맛도 좋고, 가게도 시원하니 탁 트여 있고, 멀지도 않아서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금방 돌아올 수 있다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제 몸과 씨름하며 가스파르를 떠올리기만 하던 아일럿에게는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까.”

“그러실래요?”

“응. 같이 가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도련님!”

아일럿은 술을 마시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기껏해야 와인을 식탁에서 몇 달에 한 번꼴로 반 잔씩 마셨을 뿐이다. 하지만 룹이 저렇게 추천을 하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을로 가서 술이라도 끼얹으면 아까 있었던 일을 지울 수 있겠지. 귓속에 남은 소리를 털어내고 싶은 마음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귀를 탁탁 두들기던 아일럿은 룹이 끌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올 때도 마차를 타야 하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니, 일말의 걱정이 어른거렸으나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룹의 말대로, 새로 생긴 주점의 술맛이 아주 좋았던 탓이다. 커다란 잔에 담아 주는 술은 시원하게 목을 탁 트여 주면서도, 달고 쓴 맛이 적당해서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게다가 의외로 도수가 낮은지 마셔도 마셔도 크게 취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아구. 도련님. 죄송합니다.”

“내가 그러게. 어. 적당히 마시랬지.”

“아구구구.”

“이제 우리 어떻게 가. 어? 마차도 못 끌고 가. 너 이렇게 취해서.”

쉬지 않고 마시다, 룹은 취해서 테이블에 콩콩 머리를 찧어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택에서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내가 널 왜 해고하니? 멍청한 놈.”

“멍청하지만 해고는 하지 말아 주세요. 허엉. 헝.”

그렇게 말하는 아일럿도 만만치 않게 취해 있었지만 테이블에 엎드려서 고개를 못 드는 룹은 훨씬 취해 있었다.

“아, 덥다…. 룹. 나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을 테니까. 술 마시지 말고 물이나 좀 마셔.”

“네, 넵.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더 마시기만 해 봐.”

“물만 마시면서 술을 깨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쇼, 도련님!”

납작하게 엎드린 룹의 등을, 팡팡 두들긴 아일럿은 비틀거리며 주점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근처에 있던 분수대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서 벤치까지 걸어가는 것이 한계였다. 끙, 한번 앓는 소리를 내고서 어깨를 두들기는데 옆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좀… 잘생긴 남자였다. 고개를 돌려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해 본 아일럿은 그렇게 생각했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는, 그냥 척 봐도 잘생긴 덩치 큰 남자. 나이는 저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을까.

“마을에서는 못 보던 얼굴인데.”

너무 전형적인 대사에 아일럿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똑같은 취객이겠거니 싶어서 고개를 한번 끄덕였더니, 남자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아일럿의 근처로 불쑥 다가왔다.

“스칸다에 휴양이라도 왔어?”

“아, 뭐. 그렇지.”

사람이 근처에 오니 주변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취기가 돌았는데, 덩치가 큰 남자가 가까워지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묘한 긴장감이었다. 어쩐지 가스파르와 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에 심장이 마구 쿵쾅 거렸다.

“햇빛을 싫어하나 보네.”

“응, 별로.”

“그럼 피부도 하얗겠어.”

그 때문에, 남자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물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다. 가스파르가 자신에게 성적인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오직 가스파르 한 사람뿐이었던데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아주 유별나고, 이상하고, 그리고-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남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가스파르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 상대를 향해 시선을 두었던 아일럿은 그새 더 가까워진 그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난 아디트에서 왔는데, 넌?”

“나는…….”

말을 이으려던 아일럿은 대답하지 못하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가깝다 싶더니, 그가 제 허리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실수로 닿은 것이 아니라 대놓고, 손바닥을 허리에 대더니 등줄기를 훑었다.

“지, 지금 뭐한.”

“응?”

벤치 뒤에는 딱딱한 벽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만질 리도 없는데. 아일럿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실감하지 못해 얼떨떨해 있는 사이, 남자는 아예 허리를 바싹 잡아서 끌어당겼다.

“아. 으.”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무릎 아래에 손을 대고는 손끝으로 천천히 올라오는데, 오금이 스치자 무심코 허벅지를 좁혔다.

“하지… 마.”

“여행객들끼리 친해지자구.”

“하지 말라니까…….”

취기가 돌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 와중에 닿은 타인의 손길은 다디달았다.

“스칸다는 여름에 시원한 것 빼고는 영 재밌는 게 없지.”

“…….”

“심심하지 않았어? 그래서 마을로 온 건가 싶었는데.”

만져지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금에서 허벅지 아래로 들어왔을 때는, 까치발을 서서 그의 손길이 더욱 수월히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는 그것에 대한 보상처럼, 다리 안쪽을 길게 훑어주다가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읏, 흐-”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 한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상황에서, 남자는 아일럿의 몸 곳곳을 지분거렸다. 매끄러운 목, 옷 속에 숨겨진 쇄골, 그리고 어깨. 거기서 팔을 타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거… 거기는.”

“왜?”

불식간에 유두를 손가락으로 찔리고 말았다. 아일럿이 더듬이가 찔린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자 남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유두가 민감한가 보구나. 어찌나 몸이 예민한지 어디를 건드려도 앓는 소리를 내더니만 유두를 만져주자 눈에 띄게 반응이 컸다.

“가만히 있어 봐.”

도망치듯 뒤로 빼는 몸을 붙잡고서, 옷 위에서 유두를 찾아내 문지르고는 작게 둥글렸다. 약점을 알아낸 남자의 손길은 한층 집요하게 변했다. 아일럿의 유두가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했으나, 좀처럼 딱딱해지지를 않으니 가슴 전체를 주물러대다 마침내 튀어나온 것을 손끝으로 쥐었다.

“하아, 하으, 윽.”

그 순간 터져 나온 쾌감이 어찌나 크고 아찔하던지. 내내 신음을 참으려 애쓰던 아일럿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급하게 이를 악물었다. 실내라면 모를까, 언제 사람이 나올지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그만해. 그만!”

“응?”

아일럿이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사람들이 볼… 거야.”

“아무도 없어.”

“언제 나올지 모르고.”

“그럼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갈까?”

“안 띄는 곳이라니.”

여기서 어디를 가겠다고? 물기가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두 발로 걷기조차 어려워진 아일럿을 부축하여 남자가 데려간 곳은 주점의 뒤편이었다.

“봐. 나쁘지 않지?”

그의 말대로 사람은 없었고, 다른 사람도 쉬이 올 것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깥이라는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일럿을 두고, 남자는 겉옷을 급하게 벗어 흙바닥에 깔았다.

“흐, 잠깐… 만.”

거기에 등을 대고 눕게 된 것은 당연히 아일럿이었다. 바로 공원으로 이어지는 탓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남자는 아일럿의 몸 위로 올라타서 한번 입맛을 다셨다. 이제는 거리낄 것도 없으니, 옷을 가슴 위로 걷어 버리고서 갈비뼈 근처에 입술을 대었다.

“앗…… 아!”

굶주림 끝에 먹는 음식이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남자의 서툰 애무도 굶주린 몸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진득이 한 곳을 애무하면서 다른 곳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곳저곳을 마구 만져대는 것이 영 불편했다.

“흐으, 읏…….”

입술도, 손도 그랬다. 더 원하게 되나 싶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을 만지다, 금세 다른 곳으로 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서 숨을 헐떡이고, 더 해 주길 바라게 되면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묘하게 머리 한구석이 냉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으, 으음…?”

가스파르는 좀 더.

아니야, 가스파르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남자와 술김에 하는 것이긴 해도 차라리 이쪽이 정상적이었다. 가스파르는, 그놈은 온갖 변태적인 일을 시키는 놈이었다. 그런 관계보다 차라리 이편이 나아. 가스파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지 않으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부디 안전하게 연을 끊을 수 있기를-

“손 이리 줘봐.”

“어…? 어.”

상념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아일럿은 눈앞에 있던 남자가 바지를 벗은 것도 몰랐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어도, 손을 달라고 하여 손을 주었더니 하반신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무엇을 해달라는 건지 그 의미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만져 보았다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당황했다.

“아.”

어……. 음.

아일럿은 뒤에 이어지려던 말을 삼켰으나, 언뜻 손끝에 스친 살덩이의 무게에 열기로 가득했던 머리가 차게 식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지? 뭘까. 저게 들어온다고 해서, 얼마나 안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차례로 머릿속을 메웠다.

저와 비슷한 크기이긴 했어도, 아일럿이 늘 당연하게 마주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물론 이게 일반적이고 가스파르의 것이 흉악할 만큼 거물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머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하여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왜 그래?”

“아니, 그게.”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자위를 할 때는 이 정도 크기의 딜도로 했었지만, 도구를 사용한 자위와 실제 사람과 하는 것은 달랐다. 실제 사람과 할 때는 항상 이렇지 않았는데.

이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도련님. 도련니임!”

말문이 막혀서 얼음처럼 굳어 버린 아일럿의 귀에, 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급히 돌아보고는 위로 말아 올린 옷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도련님. 어디 계세요? 저 이제 술 다 깬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셔야죠!”

“하인이 찾으러 왔나 봐. 이만 갈게.”

남자가 잡을 틈도 없었다. 그가 잡지도 못하게 사이로 쏙 빠져나온 아일럿은, 근처에서 저를 부르고 있던 룹을 향해 내달렸다.

“도련니이임.”

그런 사정을 모르는 룹은 애타게 주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주점의 주인이 내어준 얼음물을 마시고, 술이 조금이나마 깨고 나니 제 도련님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바람을 쐬고 돌아오는 줄 알았더니만 어찌 된 일일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아일럿이 보이지 않으니, 마을 경비병에게 도움이라도 청하려던 참이었다.

“룹, 나 여기 있어.”

“아이구 깜짝이야!”

아일럿이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가기 전에는 마냥 단정했던 모습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기에 룹은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련님, 하도 안 돌아오셔서 혹시 어디서 쓰러지셨나 하고.”

“그렇게까지 안 취했어. 이만 돌아가자.”

“넵, 알겠습니다.”

어딘가에서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알 바가 아니었다. 룹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아일럿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도망쳐 나올 때는 제법 급박한 상황이었고, 별장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옆에 룹이 있어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는데, 침실에 혼자 남게 되니 몸이 근질거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예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어중간하게 만져지고서 예정되어 있던 것도 들어오지 않으니, 달아오른 몸이 성을 냈다.

“…….”

손으로 만져지는 걸로 만족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전희는 충분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 원하는 건, 안을 꽉 채워줄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좁힌 아일럿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해 버릴 걸 그랬나 싶다가도, 그랬다가는 더 괴로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평소에 들어갔던 것보다… 너무 작으니까.

“아, 아으. 젠장.”

거기까지 생각해 버린 것이 괴로워 베개에 퍽퍽 얼굴을 박아대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실 안에는 예전에 선물로 받았다가 그대로 장식용품으로 전락한 술이 몇 병이나 놓여 있었다. 그중에 그나마 달착지근해 보이는 술의 마개를 뽑은 아일럿은, 잔도 사용하지 않고 사정없이 들이마셨다.

“…끄, 윽.”

술을 잔뜩 마시고 잠속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모금, 또 한 모금. 거의 반을 비우고 나서 해롱해롱해진 상태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간 아일럿은 잠깐이나마 가스파르를 잊고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가스파르가 있었을 줄은…….

*

‘뭐… 뭐야, 이게?’

꿈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가스파르의 별장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아일럿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말도 안 돼.’

인지를 하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꿈이어야 했다. 깨어나고 싶어. 아니면 적어도 내 별장으로 돌아갈래! 아일럿은 꿈속에서 열심히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가스파르는 보이지 않아도 여긴 그의 침실이었다.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급히 문을 향해 달려 나가려다, 멈칫했다.

왠지 문을 열면 가스파르가 있을 것 같았다. 문밖에서 제가 먼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아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럼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떡해야 하지? 주변을 둘러보자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꿈이니 저기서 뛰어내리는 게 무엇이 대수일까. 허겁지겁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뛰어내렸는데, 어째서 침대인가.

‘아, 안…….’

‘안 돼?’

침대에 앉아 있던 그가 물었다.

‘뭐가?’

나긋하게 물으며 그가 제 허벅지 위에 손을 대었다. 옷이 피부에 밀착하면서 가스파르의 손끝과 함께 미끄러지자 아일럿은 흐으으, 하고 목 안쪽에서 억눌린 신음소리를 냈다. 주점에서 만났던 남자가 수십 번 만져대던 것보다 지금 한순간의 기분이 더 좋았다. 아주 지독하리만큼.

‘만족할 정도로 빨리지도 못했었지? 내가 항상 물고 빨고, 예뻐해 주던 곳인데.’

‘아아, 으…  하으, 읍…….’

‘맞다. 깨무는 것도 잊으면 안 되지.’

허벅지에서 올라온 손이 배와 갈비뼈를 지나 이윽고 유두에 닿았다. 가스파르는 옷을 벗기지 않고 부러 위에서, 아일럿이 입고 있는 얇고 하얀 셔츠와 함께 유두를 물었다. 한쪽을 집요하게 빨아준 이후에는 함몰되어 있던 유두가 불룩하게 솟았다.

‘흐앗… 읏! 흐윽, 우으으읏!’

유륜에 비하면 조금 크다 싶은 유두를 가스파르가 혀끝으로 굴리다가 입술을 좁혀 빨아들이자, 시트를 움켜쥐고 버티던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사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쾌감이다 싶었는데, 그의 무릎으로 짓눌리고 있던 아래가 어느샌가 축축해져 있었다. 가스파르는 그것을 알고서 무릎을 조금 더 올려서.

‘하… 으…….’

젖은 페니스를 쓸어 올리고 다시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고환을 약간 아프게 짓눌릴 적에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가스파르는 금세 아픔을 쾌감으로 보답했다. 셔츠는 풀어헤쳐 지고, 바지는 발목 아래로 내려갔다. 아일럿은 딱 어깨너비였지만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서 가스파르를 반겼다. 허벅지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리고….

‘아, 아윽… 흐.’

몸이 화끈거렸다. 그 열기가 머리로 올라가자 뇌도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가스파르가 몸을 겹칠 때 느껴지는 무게마저도 부족했던 것을 채워주는 요소였다. 무심결에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안으니, 제 품 안에 안긴 그는 웃음소리를 내며 갑작스럽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으, 읏……!’

그것에 놀랄 틈도 없었다. 가스파르의 두 손이 제 허벅지 아래를 붙잡고는, 무릎이 어깨에 맞닿게 해 버렸다. 이제까지 다 헤아리기도 힘든, 다양한 수치를 겪었다고 해도 부끄러운 일이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지라 아일럿은 그를 끌어안았던 것도 잊고 미약한 반항을 했다. 종아리를 잡고 버티는 힘이 압도적인지라 발목을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새빨개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젖을 리가 없어야 하는 구멍인데, 왜 이렇게 흠뻑 젖었을까.’

가스파르가 구멍을 핥는 시늉을 했다. 혀가 닿지도 않았지만 아일럿은 힉,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스파르의 말대로였다.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는 곳으로 그가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고, 보란 듯이 저에게 보여줄 때는 차라리 눈을 꽉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 위해서 미리 준비하기라도 했어?’

‘아냐, 아니……. 흑.’

‘만나자마자 바로 박히고 싶었던 거지, 아일럿?’

유두를 혀끝으로 찌를 때와는 달리 혓바닥 전체로 그곳을 길게 핥았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쾌감도 그 뒤를 자연히 따라오면서, 아일럿은 가스파르의 혀가 오가는 동안 제대로 된 신음도 내지 못하고 끅, 끅, 괴상한 소리를 냈다. 입구를 혀로 핥을 때면 안쪽도 함께 움찔거렸다. 내벽이 서로서로 맞물리면서 안쪽을 짓누르고서 들어와 줄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 아흐으… 읏, 우, 흐으으…!’

더 이상은 무리였다. 주점에서 만났던 남자와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쾌감이라 하여도, 계속 달구기만 해 버린 몸이었다. 가스파르가 해 주지 않으면……. 아일럿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쾌감에 달아오른 몸이 한계에 달했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대로 어떻게 할까. 난 이렇게.’

‘우, 읏-’

‘여기, 얕은 곳만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쑤셔줘도 즐거울 것 같아. 알고 있어? 이쪽이 어떤 느낌인지.’

벌벌 떨리는 아일럿의 손을 제 아래로 끌고 간 가스파르는 그의 말대로 얕은 곳을 스스로의 손가락으로 쑤시게 했다. 손가락이 안쪽을 긁으며 오갈 적마다 찔꺽찔꺽, 젖은 소리가 울렸으나 아일럿은 부끄럽다고도 생각하지 못하고 손끝을, 이윽고 손 전체를 움직였다.

‘항상 잘 조여주잖아. 살짝만 괴롭혀줘도 움찔거리고. 부드러운데도 달라붙으면 빠듯하지. 좁아서 넣기도 힘든데 잘 풀어주면 더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아.’

‘흐, 아으… 아흐읏… 읍. 흐.’

‘넌 어때?’

가스파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따금 아일럿의 몸을 어루만졌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듯하여, 그가 어디를 만지든 기분이 좋았지만-

‘어떤 기분인지 말해 봐.’

‘조, 좋아. 아. 좋아아…….’

‘혼자 만지는 것도 좋아하지?’

‘그… 그래도.’

‘응.’

‘이제, 너… 넣어줘. 네 거……. 여기에.’

어설픈 부탁을 중얼거렸다. 안쪽이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가스파르가 조금 더 뒤로 물러서자 아일럿은 양쪽 엉덩이를 손으로 잡고서 방금 전까지 쑤시고 있던 구멍이, 그의 눈에 잘 들어오도록 잡아 벌렸다.

‘……넣어줘.’

차마 가스파르를 보고서 말할 자신은 없어서 눈을 꾹 감고서 속삭였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떴더니, 글쎄.

“…….”

꿈이 거기서 끝나 있더라.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아일럿은 눈을 몇 차례 더 깜빡거리다가, 이불을 걷어서 아래를 확인해 보고, 주변을 둘러본 뒤 아래층에 있던 하인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자신의 별장에서 맞이한 숙취 가득한 아침이었다.

“아… 하, 하하. 하…….”

자는 동안 혼자 옷을 벗기라도 했는지 바지는 저 밑에, 윗옷은 가슴 위까지 들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양쪽 유두가 삐죽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보고서, 헛웃음을 터뜨리던 것도 잠시 아일럿은 재차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악, 악, 몇 차례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지르자 룹이 찾아와 문을 두들겼다.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아무 일도 아냐. 괜찮으니까 혼자 내버려 둬.”

“네?”

“나 좀 내버려 두라니까!”

룹은 귀가 어두웠기에 문 너머로 들려오는 아일럿의 목소리가 선명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었다는 것은 알았다. 도련님이 대체 무슨 일이실까, 울상이 되어 룹이 돌아가는 것을 알 리 없는 아일럿은 베개 위에 열심히 이마를 찧었다. 숙취 때문에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팠지만, 저지른 일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베개가 납작해지도록 머리를 휘두른 뒤에는 허겁지겁 욕실로 들어가서 끈적끈적해진 몸을 씻었다.

물론 몸을 씻는다고 해도 기억까지 씻을 수는 없는지라, 아일럿은 욕실에서도 돌연 괴성을 지름으로써 하인들을 놀라기 했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나 마음과는 달리 깨끗하고 뽀송뽀송해진 몸으로 걸어 나왔다.

“도련님.”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온 페드릭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일럿을 바라보았다. 뺨에서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운 차림으로 멍하게 서 있던 아일럿은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벅벅 문지른 뒤에 한숨을 쉬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호수에 좀 다녀올게.”

가스파르의 집으로 직접 찾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해 본 게 호수였다. 혹시 가스파르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거기에서 만난다면 어쩌면… 하는 생각 반. 마차도 타지 않고 호수로 떨리는 발걸음을 이어간 아일럿이 마주한 것은 결국, 예전에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아무도 없는 호수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인기척은커녕, 바람 소리 한번 들리지 않아 고요하기 그지없는 호수는 탁 트여 있었지만 보고 있을수록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

무엇을 기대하고 온 것이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할 필요도 없었다. 가스파르가 여기에 있을 것을 기대하고 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못처럼 박히자, 그가 했던 말도 자연히 그 뒤를 따랐다.

언제 다시 부를지 모른다고.

가스파르와는 여러 차례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 관계는 대부분이 평범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혹시 나한테 질린 건가?

할 만큼 했으니 더 이상 볼일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가스파르는 변덕스러운 성격이었고, 변덕을 부려서 우연히 만난 저를 별장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질리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다음 타깃으로 잡을 수도 있다. 당장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원한다면 어디에서든 새로운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게 가스파르였다.

그러니…… 저에게서 관심이 떨어졌다면 다행인 일인데.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론에 온몸의 피가 마르는 듯했다. 아일럿은 호수를 다시 바라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별장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몸이 욱씬거렸다. 특히 가슴, 다리 사이. 아니, 가스파르에게 만져졌던 곳이 전부.

‘넌 이렇게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일럿.’

별장으로 걸어오는 동안, 마치 꿈이 연이어 이어지듯 그와 가졌던 관계들이 환상처럼 머리 위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유두가 빠져나와서 희롱 되었을 때라든가, 가스파르의 손아귀에서 사정했을 때라든가…….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선명하던지. 벗어나려 고개를 흔들어도 도무지 사라지지를 않아서, 별장 앞에 나와 있던 룹을 마주했을 무렵에는 온몸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바깥에 마차도 없던데.”

당연히 정신도 온전치 않았다. 아일럿은 넋이 반쯤 나가 버린 상태였다. 누가 옆구리를 찔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인지라, 룹의 말에 무심하게 중얼거리고는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도, 도련님.”

그렇게 별장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안절부절못하는 룹의 표정을 발견했다. 고요한 듯 심란하게 흔들리고 있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누가 왔는데?”

“가스파르 루 가디테로안 님이십니다.”

“가스파르라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가스파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두 다리가 이유 없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긴장으로 가슴팍이 뻐근해졌고, 무심코 손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차분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나열했다.

가스파르가 저를 만나러 왔고, 지금 응접실에 있다. 룹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 없다.

지극히 단순한 상황임에도 머리가 빨리 굴러가지 않는 탓에, 벌어진 일들을 다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어느 때보다도 빨리 응접실을 향하고 있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지 못하고 응접실로 달려간 아일럿은 문을 열어젖혔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혹시나, 가스파르가 없을까…….

“호수에 다녀온 거니?”

분명 겁을 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보는 가스파르의 얼굴을 보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두려움이 선연해졌다. 없을까 봐. 가버렸을까 봐. 더 이상은 저를 찾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다.

“아일럿.”

자리에서 일어난 가스파르는 평소처럼 웃고 있어서, 그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길었던 며칠간의 시간이 통째로 삭제된 것만 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얼굴과 표정을 하고서, 저를 보며 두 팔을 과장스럽게 벌렸다.

“응접실 문을 잠그고 이쪽으로 와.”

그 말에 아일럿은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려 문을 잠가 버렸다. 하지만.

“왜 그래, 문까지 잘 잠갔으면서.”

정작 문을 잠그고 나서 가스파르의 앞에 가지는 못하고 등을 돌린 채 벌벌 떨었다. 물론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숨을 한번 흘리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으므로.

“나 안 보고 싶었어?”

문을 잠가 버리고 얼굴을 보여준 순간 이미 아일럿의 패배였다. 그럼에도 문고리를 잡고서, 제 구원줄이라도 된다는 양 버티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가스파르는 자연스레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옛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지, 아마? 잠시 과거를 더듬는 동안, 아일럿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좋아서 우는 게 아니라면, 울 이유가 있어?”

“왜. 왜 온 거야.”

“음?”

조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가스파르가 고개를 기울이자, 문고리를 쥔 아일럿은 젖은 숨을 집어삼켰다.

“왜. 왜 왔냐고.”

“네가 찾아오고 싶어도 먼저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내… 내가, 왜 너를.”

아,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호수에 갔었다는 말을 듣고 가스파르는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아냐. 아니라구.”

아일럿은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마치고 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아니야. 내가 이렇게 할 리가 없어. 바라고 있는데도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도 함께 머리를 메웠다. 혼란스럽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건. 이건 전부 가스파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흐… 우읍.”

이를 악물었음에도 볼이 뜨끈뜨끈해졌다.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내내 마음속에 고여 있던 말을 꺼내 버렸다.

“너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된 건… 그게 아니면, 내가. 흐.”

“……그래.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해.”

어느샌가 가스파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가와서 다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어서 두 팔을 뻗으니 아일럿은 도망을 칠 틈도 없었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스파르의 품 안이었다.

“진심이야. 난 얼마든지 네 변명이 되어 줄게.”

등은 응접실 문에 막히고, 앞은 가스파르에게 안겨서 막혀 버렸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기꺼이 변명이 되어줄 마음이 차고 넘치거든. 앞으로 얼마나 더 협박해 줄까?”

아랫배가 서늘해졌다. 그의 손이 불쑥 옷 속으로 치고 들어온 탓이었다. 아일럿이 몸을 비틀었지만 두 손은 태연하게 미끄러져 들어와, 안쪽에서 옷을 들어 올리고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온전히 밀착될 만큼 강하게. 참으려 했어도 그 순간에는 입 밖으로 환희에 젖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응? 아일럿.”

묘하게 사나운 목소리가 달착지근했다. 아일럿은 옷 속에서 제 가슴과 유두를 사정없이 주물러대는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며 신음을 흘렸다. 주점에서 만난 남자의 손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게 자극적이고, 기다렸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만했다.

“아…!”

그러나 돌연, 손이 옷 속에서 빠져나갔다. 아일럿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가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에 더 놀라 버렸다. 가스파르가 셔츠의 윗부분을 쥐고는 단추를 다 뜯어 버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을 아래로 젖혀 버린 탓이었다.

“대답해야지.”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무심코 움츠러들던 아일럿의 두 팔이 가스파르에게 붙잡혀 응접실 문에 고정되었다. 등 뒤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하인들이 가까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일럿은 숨을 죽였지만 가까워진 가스파르를 보니 저절로 입술이 떨려서 그마저도 하기 힘들어졌다.

“집안으로 협박은 한 번 했으니, 다음엔 뭘로 해 줄까.”

“무슨… 소리야.”

“학교? 아니면 저번에 오셨다는 숙모님?”

맨몸을 천천히 눈으로 쓰다듬었다. 시선이 형태가 되어 나타날 리도 없건만 가스파르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달아오르는 듯하여 아일럿의 몸에서는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가스파르도 그것을 알았기에, 문에 짓누르고 있던 두 손을 놓아 주고는 아일럿과 바싹 몸을 밀착했다.

“하… 아. 읏.”

“뭐든 말해 봐. 네 친구나 하인을 납치해 줄 수도 있어.”

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고서, 유륜 주변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맴돌던 가스파르는 엄지손가락으로 함몰되어 있는 부분을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유륜은 이미 딱딱해져 있었기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지르자 쉽게 모습을 드러낸 유두가 보기 좋은 색을 띠고 있었다.

“흐으읏…. 읍, 응…!”

“혼자서 했지?”

“읏…. 아. 흡, 으윽…….”

“안 그러면 이렇게 쉽게 나올 리가 없는데.”

검지가 접히는 부분과 엄지손가락의 끄트머리로, 빼꼼 튀어나온 유두를 살살 굴려대니 아일럿은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스파르가 듣기 좋은 소리로 울었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이니만큼, 한껏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내뱉는 대답도 듣고 싶었다.

“아…. 아침에, 흑.”

“오늘 아침?”

아일럿이 새빨개진 얼굴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인지 거짓말도 쉽게 하지 못해서 물으면 곧이곧대로 술술 불어 버리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가스파르는 방금 전에 조금 아프게 만들었던 유두를 손가락 첫 마디의 도톰한 부분으로 둥글리듯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아침에, 해… 했어, 읏…. 자, 잠에서 일어나 보니까. 아… 아!”

“무슨 꿈을 꿨는데?”

다정스레 묻던 가스파르는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 아일럿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손끝으로 유두를 튕겼다.

“흐, 앗.”

“저번처럼 네 하인들이랑 붙어먹는 꿈은 아니었겠지?”

“아니야, 아니야, 네가… 읍.”

입을 다물었어도 이미 늦었다. 가스파르는 꿈의 주인공이 자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말해 봐.”

“흐…….”

“말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이번에는 차마 말하지 못해서 우물쭈물 거리는 아일럿의 손목을 낚아챈 가스파르는, 응접실의 긴 탁자에 아일럿을 눕히고 허벅지를 잡아 끌어당겼다. 한순간에 서로의 다리 사이가 맞닿자, 몸이 달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아일럿은 헉- 하고 긴 숨을 토해냈다. 묵직한 것이 비벼지자마자 혼자 했을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 찌르르하게 올라왔다.

“어디서 했어?”

“…네, 네, 별장. 침실. 흑.”

“내 침실에서?”

“읏… 으응, 거, 거기.”

띄엄띄엄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아랫도리를 문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스파르는 유두를 안달이 날 정도로 느리게 매만졌다.

“하으으으…….”

“어디부터 만져줬는데.”

신음이 나오는 통에 아일럿은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대신,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하자 가스파르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입으로… 빨아줬어. 오, 옷 위에서.”

“아, 옷을 괜히 벗겼구나.”

가스파르가 몸을 앞으로 숙여서 아일럿의 유두 근처에 입술을 가져갔다. 처음에는 쇄골 바로 아래, 그리고 서서히 입술을 내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위에서 혀를 내어 선을 그렸다. 그렇게 혀가 유륜 근처에 다가가자, 가스파르는 피부 위에 가볍게 이를 세우는 시늉을 하고는 속삭였다.

“계속 말해.”

단단하게 솟아오른 유두가 가스파르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츄우웁, 질척한 소리와 함께 예민한 곳을 애무 당하자 아일럿은 탁자보를 힘껏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쾌감은 강했지만, 말을 꺼내기는 무서웠다. 말해 버리면 분명, 가스파르는.

“깨, 깨물었. 흐아, 윽!”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유두에 이를 세울 것이 뻔했다. 힘을 주지 않고서 턱을 움직여 유두에 이를 닿게 하는데, 바르작거리기는커녕 헉, 헉, 밭은 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아, 아아아….”

눈이 풀린 채 헐떡거리던 아일럿은 오르가즘에 가까운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스파르의 재촉에 간신히, 한 마디를 내었다. 그다음에는 혀로 굴려주고, 입술을 좁혀서 빨아 주었다고. 가스파르는 아일럿이 말한 일들을 고스란히 그 몸에 돌려주었다.

“아래는 안 건드려줬어?”

“해… 해 줬어. 무릎으로, 누, 흑, 눌렀… 흐아, 응.”

“무릎으로만? 아, 벌써 젖은 것 같은데.”

바지를 잡고서 단숨에 무릎 아래로 내렸다. 속옷을 들춰서 살펴볼 것도 없이, 보기 좋게 발기해 있는 성기가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커다란 손 전체로 성기를 한 번에 쥐고서 위아래로 쓸었다.

“읏, 아흐…. 읏!”

적당히 손에 쥐기 좋은 물건이 속옷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퍽 귀여웠기에 괴롭히고 싶어졌다. 어쩔까, 고민하다 귀두를 몇 번 손으로 잡았다가 놓아주길 반복하자 솜털이 보송보송한 귀마저 붉어지고 말았다.

“자, 그다음에는?”

“어… 어어?”

“계속 말해야지.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내가 여기만 성의 없이 건드리다 말지는 않았을 텐데.”

“…….”

물론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다 어떻게 말하라고. 아일럿이 붕어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 글로 써 보라고 해도 쓸 수가 없어서 반나절은 걸릴 것 같은데, 그걸 말로 할 수가 있겠어? 나름대로 애원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보는 사람은 다른 생각을 했다.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얼굴은, 꿈속에서 도저히 말 못 할 일까지 했다는 걸 일러주는 꼴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렇기에 가스파르는 더욱 궁금했다. 대체 무엇을 했는지.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나중에 다시 부르길 바라는 거니?”

“다음에…?”

아일럿을 애무하면서 가스파르 또한 못지않게 흥분하고 있었으나, 아닌 척 몸을 뒤로 물리려 하니 불그스름했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정말 놀리는 재미가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창백해졌다가도, 자기가 하려는 말을 떠올렸는지 또다시 얼굴에 홍조를 띤 아일럿은 앓는 소리를 냈다. 끙, 끙, 몇 번을 앓고는 입을 열었다. 있었던 일을 다른 것으로 꾸며낼 만한 상상력이 아일럿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내 무릎이, 어깨에 닿았…. 으, 읏, 시… 싫어. 이거, 흑.”

역시나였다. 꿈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몸을 반쯤 접어서 치부가 제 눈에 죄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구멍이 좁게 움츠러드는 것이 그에게도 보였을 것을 생각하자, 눈앞이 빙빙 돌았다.

“이 자세로 어떻게 해줬을까.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자, 말해야지.”

답을 알면서도 묻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왜, 왜 묻는 거야. 아일럿은 속으로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흥분으로 인해 소리를 내는 기관이 오그라드는 듯 저렸다.

“거기… 핥아주고, 손가락으로… 흐, 읏, 아… 아아, 잠깐만. 아…!”

꿈으로 충실히 재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꿈속에서 그랬듯이, 혓바닥 전체로 주름을 길게 핥은 가스파르는 훨씬 집요했다. 아일럿은 수차례 의식이 끊겨져 나갈 뻔했다. 퍽퍽 박히는 것과는 또 다른 쾌감이 한계를 넘나들면서 몸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저를 찍어 눌렀다.

“아, 아, 아아아…. 안 돼, 아, 아, 흡, 그만. 그만. 가… 가스파르. 흣.”

작은 혀가, 그보다 더 작은 곳을 할짝거리는데 쾌감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었다. 수치스러운 자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더, 더, 제 스스로 허벅지를 붙잡아 벌린 아일럿은, 가스파르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우으, 흐… 아, 으읏…. 흑. 앗…….”

손으로 잡고 있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사정감이 치솟는 찰나, 아일럿은 그곳에 입술을 묻고 있는 가스파르의 얼굴을 보았다. 차곡차곡 쌓였던 자극은 입을 통해 큰 소리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힉, 읏… 아, 아, 흐읏… 하으… 윽!”

그와 동시에 참지 못하고 사정을 해 버렸지만, 정액이 아일럿의 얼굴을 더럽히는 일은 없었다. 귀두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던 가스파르는, 입술을 떼고서 정액으로 진득해진 손을 방금 전까지 핥고 있던 곳에 가져가 문질렀다. 애초에 혀로 녹진녹진하게 풀려 있던 곳이니만큼, 손가락이 스며드는 양 내벽을 긁으며 들어왔을 때에도 이물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여기도 만졌어?”

“아니, 안 했, 어, 흡.”

“어떻게 안 하고 버텼어? 만져 주면 못 견뎌 하면서.”

“앗, 흑. 으으읏…!”

꿈과는 달리 얕은 곳이 아니라 곧바로 깊숙한 곳을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은, 내부를 손쉽게 자극했다. 정액으로 안이 젖어 든 탓에, 찌걱찌걱 들려오는 물소리가 예전에 있던 일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거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하고 가스파르의 손끝에서 부서져 버렸다. 안에서 휘어버린 손가락이 그 상태로 추삽질을 시작하자 아일럿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렇게 좋아하잖아. 얼마나 맛있게 물어대는지, 여기가 입이었으면 넌 침을 줄줄 흘렸을 거야.”

“흣…. 으으, 하…. 아윽…….”

“그렇지?”

손으로 하는 추삽질을 멈출 때나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으나, 흥분이 몸을 조였고 잔조각처럼 남은 쾌감이 몸을 괴롭히는 건 여전했다. 뜨거워진 머리로 그만큼이나 달아오른 숨결을 내뱉던 아일럿이 젖은 눈꺼풀을 들어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저도 모르게 응, 응,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그 대답에 굉장히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아.”

천 너머로 문질렀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맞닿았다. 쾌감에 온몸이 푹 젖어서 나른한 신음을 흘리던 아일럿은 귀두가 아래쪽으로 내려가, 구멍을 문지르기 시작했을 무렵에나 살짝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하, 하려고?”

“응?”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실컷 해놓고, 갑자기 단추를 여민 다음 침실로 걸어갈 생각인가? 가스파르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제가 말려야 하는 일이었다. 응접실에 있으면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꼴로 가스파르를 침실로 데려간다면… 혹여나 가스파르가 이제 와서 침실로 가자고 해 버릴까 봐, 초점이 맞지도 않는 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데굴데굴 이리저리 굴러갔다. 가스파르는 웃음을 삼키며 눈꺼풀 위에 입술을 눌렀다.

“다른 곳에서 할까? 어디?”

“아니, 아니야, 여기서 해.”

하지만 내심, 조금 더 문과 떨어진 곳으로 가길 바랐다. 응접실 앞을 지나가거나,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도 부탁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해서 근처를 맴도는 하인들이 있을까 봐. 애타게 가스파르가 들어오길 기다리면서도, 얼굴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들킬까 봐 무서워?”

어쩌면 이다지도 솔직한 얼굴인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제 물음에 눈으로 대답을 하는 아일럿에게, 가스파르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애매한 진실을 일러 주었다.

“네가 문 잠갔잖아. 아무도 못 들어와.”

“우으, 읏…….”

“네가 소리만 참으면 아무도 못 듣고.”

소리를 참는다면 눈치를 못 채겠지. 그러나 아일럿이 소리를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가스파르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들어갈 입구를 귀두로 슬슬 만져주던 가스파르는 단번에 뿌리까지 자신을 쑤셔 박았다.

“윽…. 히익, 끄, 흣…!”

살이 퍽,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일럿의 눈앞에 섬광이 하얗게 터졌다. 안이 꽉 채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속의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페니스가 극단을 찍고, 또 한 번 찍었다.

“그… 하으으윽…….”

둥글게 꺾인 허리를 가스파르가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연달아 빠르게 쳐올리자 아일럿의 엉덩이는 금세 얼굴만큼이나 새빨갛게 익었다. 거기에 한 겹, 색을 더하려는 것처럼 가스파르는 제 손으로 붉어진 피부 위를 내리쳤다.

“흑, 아으… 으읍……!”

따끔한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돌아오는 탓에 눈물이 고여서, 이윽고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자비 없는 허릿짓은 계속 되었다. 눈이 뒤집히도록 박아주고, 한계까지 몰고 갈 작정으로 움직여대고 있으니 신음을 참는 것은 불가능했다. 살덩이가 밀려들어 올 때면 아랫배가 불룩해졌다가, 살덩이가 빠져나가면 다시 납작해졌다. 작열하는 것 같은 쾌감도 그때마다 내부에 꽂히는 듯했다.

“가스파르… 아, 우읏…!”

몸부림을 치는 아일럿의 입술을, 가스파르는 대뜸 손바닥으로 막고 몸을 붙였다. 넘쳐흐르는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아일럿은 흡, 하고 손바닥 아래에서 숨을 들이켰다.

“발소리 들려?”

움직임이 뚝 멈췄다. 정말 그의 말대로 바닥이 콩, 콩, 울리면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옆방이거나 아니면 문밖. 아일럿의 시선도 문이 있는 곳을 향했다.

“밖에 누가 온 것 같은데.”

나직하게 속삭이던 가스파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술 사이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아일럿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흐, 이 와중에 왜 더 조이는 거야? 끊어져 나가는 줄 알았잖아.”

“아, 우으읏… 윽.”

“흥분 돼?”

부정하는 것이 꼴사나울 만큼, 가스파르와 자신의 배 사이에서 짓눌린 성기는 물론이고 아랫배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룹이 가스파르의 저택을 찾아왔을 때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만약 룹이 아니라면, 귀가 밝아서 응접실 안의 사정을 다 눈치채 버릴 터였다. 그리고 그때처럼 신음을 참거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윽… 하으. 읍…….”

더욱이 이제 곧, 곧이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그래도 조금만 참아. 들키면 안 되잖아.”

손바닥에 입술이 눌린 채로 커다란 눈을 애처로이 깜빡인다. 살짝 손을 떼어주자마자 아일럿은 젖은 숨을 재차 들이켜다가 가스파르의 허리를 붙잡고서, 어설프게 골반을 움직였다.

“싫어, 흐… 해 줘, 해 줘, 가스파르.”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 밖에 있는데도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거만하게 아일럿을 내려다보는 가스파르의 시선이 그리 말했고, 아일럿은 거기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몸 안을 가득 채워주던 페니스가 빠져나가는 것이 싫어, 울 듯한 표정을 짓던 아일럿이 스스로 엉덩이를 벌려서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구멍을 드러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여기. 쑤셔, 주…… 흑. 우으으읏…!”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입을 막아주지 않았다. 교성은 여과 없이 입 밖으로 쏟아졌고, 언뜻 들려오던 발소리가 우뚝 멈춰 섰음을 두 사람 모두 알았으리라. 룹이라면 듣지 못할 텐데, 밖에 서 있는 사람이 그이길 바라다가도 누군가 가스파르에게 자신이 범해지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자 기이한 쾌감이 번져 나갔다.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지금 붙잡고 있는 쾌감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 아으으으… 읏, 아, 아윽!”

탁자와 함께 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금욕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일럿뿐만이 아니었다. 가스파르의 조급한 몸짓이 아일럿의 위로 쏟아졌다. 빠져나갔다가 연달아 퍽퍽 찍어대면 문밖의 일은 말끔하게 지워졌다. 저에게만 매달리는 아일럿을 칭찬하는 것처럼, 가스파르는 내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흐으윽, 흣… 으, 흐, 아아아…!”

교성을 참지 못한 아일럿은 이내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저릿함에 부르르 몸을 떨고 나니 눈꼬리가 축축해졌다. 담지 못한 쾌감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자 아랫배가 바싹 조여들면서, 가스파르의 짧은 움직임을 달게 받아들였다.

“또 먼저 가 버리고.”

“하, 윽, 으읏…….”

“밖에 하인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했던 거지?”

“읏… 흐으… 아, 우으읍.”

아니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일럿은 안쪽의 성감대를 뭉근하게 훑고 지나가는 귀두 때문에 다시 한번 사정할 뻔했다. 안에서 움직이면 그대로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흐, 아, 읏… 힉.”

커다란 손으로 아일럿의 가슴을 그러쥔 가스파르는 손가락 사이로 유두를 집어서 잡아당겼다. 통통한 유두가 아일럿과 함께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

날카롭게 번뜩이는 통증과 쾌감에, 올라가는 그의 손을 따라 가슴을 위로 올리면 언제 그랬냐는 양손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한번 강하게 쳐올리자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던 아일럿의 발끝이 확 곱았다. 신음도 내지 못한 입술이 안쪽으로 오므라드는 것을 보며, 가스파르는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으, 흐으으… 읏, 흑!”

“더 반응이 좋아졌네. 이러고 참기 힘들었을 텐데.”

“아아, 으… 가스파르, 흡.”

“이 몸을 하고서 하인들이랑 안 붙어먹었어?”

감각에 절여져 있다시피 했던 아일럿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내심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가스파르가 아일럿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그곳에 자국을 남기는 데 열중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으리라.

“으응…….”

“그 말을 믿어야 할지.”

“…….”

운이 좋았다. 고개만 끄덕이면서 대답하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하인들과 붙어먹지는 않았지만, 하인이랑 같이 갔었던 주점 앞에서 만난 생판 처음 보는 남자와 숲으로 들어가서 하려고 했었…….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일럿은 고개를 들려고 하는 가스파르의 머리를 무심코 끌어안았다.

“가스파르, 이대로… 하, 하고 싶어. 몸 붙이고서. 어.”

“아일럿.”

얼굴을 보면 들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가스파르는 잠깐 멈칫하다가 기어코 품에서 벗어났다. 들킨 것일까. 방황하는 손을 허공에 띄운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아일럿의 얼굴 위에서, 가스파르가 고여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진작 혼자 좀 내버려 둘걸 그랬어.”

들키지는 않았다. 다만 감당할 수 없을 만치 거세진 움직임을 온전히 받아내게 되었을 뿐. 흉흉하게 솟은 페니스가 몸을 열었다. 몸을 빈틈없이 밀착시킨 상태에서도 가스파르는 잘도 움직였다. 아일럿의 몸 곳곳을 쓰다듬으면서, 혹은 입을 맞춰 자국을 남기면서.

“아, 아, 너무, 흐, 흑, 너무 깊… 으, 아, 흐악!”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가스파르를 뜯어내려고 하면, 흥분으로 달뜬 눈을 한 가스파르가 아일럿의 입술을 잡아먹었다. 걸러지지 않은 흥분이 입술을 통해 쏟아지는 듯했다. 숨을 쉬어야 하는 타이밍을 잡지 못한 아일럿이 헐떡거리면, 포악한 입맞춤이 바로 붙었다 떨어지는 입맞춤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잠시였다. 다시 질척하게 달라붙은 입술 사이에서 혀가 엉겨 붙었다.

“후아, 으… 읍.”

“입 다물지 말고.”

투명한 실이 다물어진 입술 아래로 흘러내렸다. 키스만 하는 것이 아닌 탓에 아일럿이 자꾸만 입술을 닫으려 하자,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양 뺨을 단단히 틀어쥐고는 입술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혀의 끄트머리가 빨갛게 튀어나오자 가스파르는 입을 맞추며, 입안의 여린 살을 부드럽게 희롱했다. 아일럿은 가스파르에게 신음마저 집어삼켜져,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정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가스파르도 함께. 그렇지만 허릿짓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흣… 아, 으읏…….”

입술 주변까지 적시고 나서야 떨어진 가스파르는 살짝 부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던 아일럿이 영문도 모르고 손가락에 입술을 문지르는 행동에 자극을 받아, 이성이 흐려질 것만 같았다. 해서 숨을 고르고는, 힘을 주어 쑤셔 박았다.

“으읏… 아, 우으…!”

녹초가 된 아일럿의 내벽은 가스파르의 것도 이제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페니스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뜨겁게 녹아내릴 듯 살덩이를 감싼 내벽이 진득하게 오물거렸다. 그 안을 깊게 찌르고 들어가면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뺨에 입을 맞췄다.

“흐윽, 아아… 앗, 아!”

“아일럿.”

“읏, 으… 응.”

반쯤 쉰 목소리로 아일럿이 짧게 대답 같은 것을 했다. 입술을 조금 더 옆으로 옮긴 가스파르는 몸을 틀어서 자세를 바꿨다. 내내 탁자에 등을 붙이고 있던 아일럿은 얼떨결에 허벅지 위에 앉게 되었다.

“어…?”

“아일럿, 이렇게 해 봐.”

“뭘 어떡, 으읏.”

예전에도 비슷한 자세를 해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일을 요구하는 듯했다. 아일럿이 움찔거리자, 가스파르가 땀으로 미끈거리는 동그란 엉덩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고, 스팟을 자극당한 아일럿은 길게 교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엉덩이를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게 했다. 정액으로 질척해진 입구에서 부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 으… 흐, 앙!”

“자, 여기. 기분 좋지?”

“…흐으… 응, 응, 좋아.”

“천천히 아래로 내려봐…. 그래, 잘하네. 방금 닿았던 여기에만 닿게 해.”

기승위는 처음이었다. 부모님 몰래 보았던 야한 책에 그려진 삽화로나 보았기에, 정상위나 후배위와 마찬가지로 방법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위에 올라타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던 아일럿은, 하던 도중에도 얼굴을 붉히고 멈추었다가 유두를 톡톡 건드리는 재촉에 허리를 다시 움직였다.

“가만히 있지 말고.”

“아, 흑… 읏, 흐으으… 아, 앗.”

가스파르의 말과는 달리 그의 물건이 너무 커서, 어떻게 움직여도 닿았기에 요령 같은 것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 어깨를 붙잡고서 위아래로 찧어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읏, 아아… 흡.”

그렇지만 힘겹게 움직이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앓는 소리를 흘리는 입술이 퍽 귀여워서 가스파르는 차근차근 가르쳐 주자고 생각했다. 욕심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아일럿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여름방학이 남아 있었다.

*

“저… 도련님.”

“아, 왔구나.”

다른 하인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서 밖으로 달려 나온 데거가, 마차에 앉아 있는 아일럿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벌써 마차의 문은 닫혀 있었고,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일럿의 얼굴은 어쩐지 마냥 멀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과 응접실에서 함께하며, 반나절 동안 차 한 잔도 부탁하지 않았던 주인이 그 손님의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그게, 있잖아.”

“네, 네, 말씀하세요.”

“응, 으응. 그게.”

들어갈 때도 좋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철야를 한 사람처럼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머리 모양도 달라져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부분을 꼽아보자면 셀 수가 없을 정도인지라 데거가 당혹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사이, 아일럿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가까이 있는 가스파르만이 그 끝에 섞인 떨림을 알아차렸다.

“나, 나 오늘부터. 다시 가스파르의… 별장에서 지내기로 했어.”

“예? 다시 그쪽으로 가신다구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일럿이 지낼 공간은 충분하니까.”

데거에게 말하면서 가스파르는 아일럿의 다리 사이를 자연스레 주물거렸다. 옷 위로 만지고 있었지만, 아일럿이 다리를 오므리려하자 옷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속옷은 입지 못한 상태였다.

“무, 무슨, 일이. 생기면. 사, 사람 보낼……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네, 알겠습니다.”

“지… 집에서 편지 오면, 가져다줘. 그럼. 갈게.”

마차가 출발했다. 바로 창문을 닫아버린 가스파르는 옆에 앉아 있던 아일럿을 제 위에 앉혔다.

“귀족가 도련님이 속옷도 안 입고, 이게 무슨 추태인지.”

“흐으… 으읏.”

“바지가 다 젖었어. 이걸 어쩔 셈일까?”

아랫도리가 맞닿게 된 아일럿이 끙끙거리다 가스파르에게 매달렸다. 정작 그 속옷을 입지 못하게 한 것은 가스파르, 본인이었다. 오늘 아침에 새로 입었던 속옷도, 하인 몰래 가지고 온 속옷도 지금은 가스파르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을 터였다. 바지를 아래로 내려서 희고 동그랗게 드러난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놓은 가스파르는, 제 손자국이 남은 곳을 세게 후려쳤다.

“하아, 으으읏…!”

“하인한테 말하다가 갈 뻔했잖아.”

“아냐, 아냐, 아, 앗!”

“아니긴. 내가 거기서 조금만 더 만져줬으면. 넌 소리도 참지 못했을걸.”

금세 빨갛게 열이 올라온 살결 위를 문지르고, 골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여전히 정액으로 젖어서 부드러워진 곳을 건드렸다.

“아, 아… 읏…….”

엉덩이 아래로 내려갔던 바지가 얼마 안 가서 발목 밑으로 내려갔다.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제 위에 앉혀놓고는, 뒤에서 가슴을 움켜쥐고서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충분히 했기에, 못다 한 것을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추삽질은 처음처럼 거칠었다.

“별장으로 가면.”

“흐으, 읏, 아, 앗… 읏. 흑!”

“아일럿, 네 여기에.”

“읏, 으… 응. 으읏.”

유두를 잡아당겼다. 딱딱하게 솟아 있는 곳을 아플 만큼 쥐고 흔들다 손가락으로 굴리는데, 눈물이 찔끔 솟으면서도 가스파르의 손길을 더 바라게 되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손끝을 세워서 다른 쪽 가슴을 느리게 긁고 지나갔을 때는 좋다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가고 말았다.

“달아주고 싶은 게 많아. 그 상인이 다시 찾아왔는데.”

“하, 으… 흑, 아아…!”

“얼마나 재밌는 물건들이 많던지.”

상인이라는 말에 아일럿이 신음을 하면서도 멈칫했다. 가스파르는 부러 움직임을 멈추고는, 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면서 붉어진 귀를 이로 물었다.

“그 약도 좀 더 사놨어. 네가 먹고 싶어 했잖아.”

“마, 맞… 아, 흐윽.”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니 열심히 입으로 그렇노라고 답했다. 가스파르가 말하는 약이 무엇인지는, 대답을 하고 나서야 짐작했으나 알았다 하더라도 다를 것은 없었으리라. 그가 하려는 게 무엇이든 다 좋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쾌감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아, 아… 아아아……!”

배 속이 쿵쿵 울리는 듯했다. 손에 잡히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고 버티려 했지만, 가스파르는 아일럿이 저 외에 다른 것을 잡고 매달리는 꼴을 볼 수 없었다.

“힛… 아, 으읏… 가스파…. 흐악, 읏!”

해서 두 팔을 뒤로 모으고, 한 손으로 꽉 붙잡은 채 허리 아래를 움직였다. 그로 인해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 아일럿이 납작하게 엎드린 채 흔들리게 되었으나 그 모습이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잘 다듬어진 교성을 내지도 못하고 온전히 날것의 소리를 흘리는 입술이, 새빨개진 코끝이,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눈이.

누군가가 제 취향을 전부 알고 조각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나 완벽할 수가 없었다.

“……아일럿. 이쪽으로 고개 돌려봐.”

마차 안에서 벌어지던 정사가 별장에 도착할 무렵이 되어 끝이 났을 때, 가스파르는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아일럿의 옷을 다시 입혀 주고는 얼굴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 흔들리는 벽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아일럿은 약하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의 말에 따랐다.

“혀 내밀어.”

“…….”

입을 벌리는 건 쉬웠어도 혀를 내미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망설이던 혀끝이 아랫입술을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한 마디의 반 정도 빠져나오자, 가스파르는 다소 급하게 뒷목을 부여잡고 혀로 입술을 빨아들였다. 혀를 내밀기까지 어떻게 기다렸는지. 갈증을 채우는 듯 깊게 파고드는 행동에, 아일럿은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 묘한 신호가 오는 것을 느꼈다.

이다음은 별장 안에서일까.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스파르, 빨리-”

“듣기 좋으니까 더 졸라봐.”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면서 가스파르가 말했다. 별장이 코앞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