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여름+협박+조교 (2/17)

2. 여름+협박+조교

밖으로 나오면 땀이 절로 나고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는 여름이 시작 되었다. 아일럿 바슬레인은 원체 태어나길 피부가 약했던 탓에, 더운 계절에 취약했다.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여름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여, 아일럿의 아버지는 서둘러 그를 서쪽 끝에 있는 스칸다에 세워진 별장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급한 준비에는 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아일럿이 아는 이유는 그거 하나였다.

“놓고 가는 건 없지?”

“그럼요,”

“혹시 부족한 게 있으면 도착해서 바로 연락하고.”
“네, 그럴게요.”

스칸다는 여름에도 날이 덥지 않고 밤에는 서늘한데다, 공기가 좋고 햇빛 또한 강하지 않은 시골이어서 많은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인 곳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저를 반겨줄 생각을 하니 아일럿은 벌써부터 즐거워졌다.

“잘 다녀오렴.”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담백하게 배웅했고.

“도착하면 꼭 편지하고. 덥다고 찬 것만 먹으면 안 된다. 시원하다고 해서 낮에 너무 나가고 그러면 안 돼. 바람만 시원하게 부는 거지 여기나 거기나, 햇볕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야.”

아직까지 아들을 혼자 보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아버지는 안절부절못하며 배웅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바로 편지 보낼게요.”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함께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는 혼자 피서를 가게 되었다.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오른 아일럿은, 늘 그렇듯 잔뜩 챙겨온 책을 보며 퍽 만족스러워졌다. 여름 방학에는 항상 스칸다에 가서 밀렸던 책을 읽었다. 다른 것은 하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해도 두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은 빠르게 사라져 버리곤 했다.

아마 이번 여름도 그렇겠지.

눈을 붙이기 위해 몸을 뒤로 기대면서, 수도와는 달리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올 스칸다의 여름을 떠올렸다.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시원할 테지. 호수의 물도 여전히 맑고 차가울 것이다. 작년에 심었던 꽃과 나무들은 얼마나 자랐을까.

스칸다의 여름을 떠올리며 잠에 들었던 아일럿은, 스칸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가는 동안 내내 잠을 자려고 일부러 밤까지 새었는데, 엄청난 마차 소리가 잠을 깨운 탓이었다.

“무슨 일이야?”

어디서 전차라도 몇 대 지나가는지, 마차 소리가 땅이 울릴 정도로 진동을 해대는 탓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안 가 마차가 멈춰 섰다. 커튼을 젖혀 보니 막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하인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도련님,”

제가 타고 있는 마차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서너 대의 마차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저런 게 달려가고 있으니 이렇게 시끄럽지. 아일럿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그들이 가는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이쪽 길로 가는 것이면 목적지도 겹치거니와 나중에 누구 하나는 양보를 해야만 갈 수 있는 길도 있는 탓이었다.

저 정도로 빠르게 가는 것이면 안에 사람은 없고 짐만 담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황금색 사자가 그려진 문양은 왕가의 상징으로, 평생을 조용히 살고 싶은 아일럿으로서는 일생 거리를 두며 살고 싶은 곳이었다.

아일럿은 스스로 이미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종종 생각했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건강하시며 선대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대형 선박들과 적지 않은 유산, 황족들의 것 못지않은 훌륭한 저택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크게 부족한 점이 없으니 예전부터 원하였던 대로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일 없이.

부모님은 왕실 사람들과 엮여 봤자 좋을 것이 하나 없다고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말씀하셨고, 아일럿 본인도 거기에 동의했다. 매혹적이고 가진 것이 많으면 무얼 하나, 사교계에서 간접적으로 알게 된 그들은 하나 같이 변덕스럽고 위험했다.

하여, 국내 최고의 명문 학교를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몇몇의 황족들과 마주치긴 해도 절대로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동기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들이 명확한 목표와 야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같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슬슬 출발할까요?”

“응.”

황족의 마차가 멀어지자 아일럿은 다시 커튼을 쳤다.

이번에는 스칸다에서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잠에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난 아일럿은 그 소소한 바람대로 스칸다의 별장 앞에서 눈을 떴다. 작년에 심어두고 간 꽃과 나무는 몰라볼 만큼 자라 있었고, 특히 나무의 경우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도련님, 안에서 쉬지 않으시고요?”

“괜찮아. 마차에서 계속 잤으니까 나갔다 올게.”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뭐 언제는 같이 갔다고.”

과일을 몇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가지고 온 책들도 챙겼다. 하인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스칸다에 올 때마다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던 호수로 향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책 세 권을 전부 읽기는 딱 적당한 시간이지.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는데……. 늘 자신만의 장소이던 곳에 선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물 밖으로 나와서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남자를 보고서, 아일럿은 말문이 막혔다. 제발 잘못 본 것이길 바랐으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는 가스파르 루 가디테로안이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얌전하게 살고 있는 저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 황족, 게다가 그 황족들의 우두머리.

아, 젠장.

그에게 붙은 수식어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해 보던 아일럿은, 혹여나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세 걸음, 일곱 걸음, 그러다 적당히 떨어졌다 싶었을 무렵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보지 못한 척 가 버리자. 난 여기에 안 왔던 거야.

호수에 왔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던 아일럿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 심장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우리 같은 학교 다니지 않니?”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먼 곳에서 눈을 가늘게 뜨던 그가 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래에만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던지라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던 아일럿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학교에서 널 몇 번 본 것 같은데.”

“그게…….”

“이름이 뭐야?”

“아, 아일럿 바슬레인.”

“가스파르 루.”

뒤에 달려 있는 성은 당연히 알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느낌이 묘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모르겠나, 황족의 성인데.

“너도 스칸다로 피서를 온 거니? 난 이번이 처음이야.”

“난 여름마다 스칸다에 와서-”

“그렇군. 아, 지금 저쪽으로 수영하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그… 그으럴까.”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아일럿은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세 권의 책과 주머니가 불거져 나오도록 챙겨온 과일이 보이지 않는 걸까. 수영이라니! 하지만 가스파르의 말에 아니라고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눈에 띄었다면 괜히 거슬리지 않는 편이 좋을 터.

“…….”

내일부터는 가스파르가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절대로 별장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

거듭 다짐하며 겉옷만 벗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위에는 딱 붙는 재질의 다소 두꺼운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저택에서 출발하던 새벽에, 날이 조금 쌀쌀해서 안에 민소매를 받쳐 입었던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옷을 잘 개어 책 옆에 놓아두었다.

“돌이 많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그는 다행히 제 복장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긴, 위에 민소매 정도는 입을 수도 있는 거니까……. 가스파르에게 제 비밀을 들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냥 안도하며 호수에 첫 발을 들이민 아일럿은.

“업푸컥컥!”

“아일…….”

들어가기가 무섭게 발이 미끄러져서 호수 바닥에 엎어졌다. 평생 운동은커녕 책만 읽었던 아일럿은 지나치게 약골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가스파르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긴 했지만, 넘어지면서 머리를 수면에 제대로 부딪친 탓에 가벼운 뇌진탕이 생겨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정신이 드니?”

“…….”

“음, 살면서 이런 말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는데.”

가스파르는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아일럿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는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방금 의사가 다녀갔어. 큰 이상은 없을 거래. 열도 내린 것 같아.”

“…폐를 끼쳐서, 어떻게 사과를 해야 될지.”

“같은 학교 학생끼리 뭘.”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보았던 장면을 기억한다. 가스파르의 하인도 아니고 무려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하인들에게 담요를 비롯해 이것저것을 지시하던 것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무려 가스파르가 사용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말 미안해.”

“아픈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아일럿은 머리가 몽롱하고 얕은 곳에서 넘어진 탓에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아파왔으나 가스파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편견을 가지고서 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단지 학교 동기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잘해주다니.

‘너무 황족들한테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가스파르의 별명은 성자라구.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해 보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 걸.’

그제야 주변에서 들었던 가스파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선량한데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것이 마치 성자 같다고. 그렇게 좋은 사람이 또 없다고.

“자, 천천히 마셔.”

“고마워.”

목이 마른 탓에 무심코 큼큼거리자, 직접 물을 먹여주기까지 하는 그를 보며 코끝이 찡해졌다. 바로 옆에서 보게 된 가스파르의 수려한 외모가 그의 선행을 더욱 반짝이게 한 이유도 있었다. 원래부터도 잘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코앞에서 본 그의 외모는 마치, 보석으로 만든 꽃다발 같아서 눈을 돌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사람이 이 정도까지 다채롭게 화려할 수 있는지, 시원한 물 한 잔을 전부 다 비운 아일럿은 더더욱 호의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참, 의사가 네가 일어나면 꼭 해야 한다고 하던 게 있었는데.”

“어? 뭘 해야 하는데?”

가스파르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통을 내밀었다. 오일이나 다른 화장품 같지는 않은, 점성이 있는 하얀 액체였다.

“이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장미꽃과 비슷한 향을 맡으며, 아일럿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손을 내밀자, 가스파르는 통을 든 손을 뒤로 슥 빼고는 미소 지었다.

“이 약을 전신에 발라서 마사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 나중에 근육통이 오거나, 부딪친 곳에 멍이 올라올 수 있대.”

“전신에?”

“바로 발라 주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진다는데, 내 집에서 바르고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 그러면. 음.”

아픈 건 질색이다. 두고두고 아픈 건 특히나.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은 걸까, 아니면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은 걸까. 묘한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는 동안 가스파르는 아일럿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잠깐만 쉬고 있어. 하인들한테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준비?”

“응. 가서 사용할 물건들을 확인하고 올게.”

그렇게 말한 뒤 가스파르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일럿은 저도 모르게 가스파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누워 있다가, 괜스레 얼굴이 홧홧 거려서 빠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저를 침대에 눕혀 주던 손길이 너무 다정했던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친절한 거 아냐? 얼굴을 붉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몸을 뒤집어 겹쳐진 팔 위로 얼굴을 묻었다.

빨리 마사지만 받고 돌아가자.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가스파르는 좋은 사람이지만, 오늘따라 운이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다. 있을수록 괜히 안 좋은 꼴만 보일 듯한 예감이라고 할까. 아일럿은 눈을 굴려서 가스파르가 나간 이후 계속 닫혀 있던 방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쟁반 위에 여러 물건들을 잔뜩 담은 하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간이침대까지.

“……?”

마사지를 하는데 저렇게 장황한 준비가 필요해? 저 정도로 번거로울 줄 알았다면 하지 않겠다고 했을 터였다.

“가운으로 갈아입으시는 걸 도와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마사지를 받는 거면 옷을 전부 벗어야 하나? 등을 돌리고 단추를 풀던 아일럿은 안에 받쳐 입고 있던 민소매를 벗으려다 조금 망설였지만, 앞부분은 받지 않고 뒤만 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민소매를 벗고 가운을 입었다. 가운은 얼핏 만져 보았을 때도 무척 보드라웠는데, 피부에 닿는 느낌도 아주 좋았다.

“이쪽 침대에 엎드려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살짝 기분이 좋아진 아일럿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희고 얇은 천이 한 장 깔린 간이침대가 저와 가까운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여기 올라가면 된다는 거겠지? 하인이 시킨 대로 엎드린 채 대기하고 있으니, 이윽고 하반신에는 담요 같은 것을 덮어 주고 가운을 잡아 당겨 허리 아래로 끌어내렸다. 방 안이 서늘한 탓인지 약하게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은 좀 추우시겠지만 마사지를 받으시면 몸이 따뜻해져서 조금 덥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혹시 전에도 마사지를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자주 받는 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너무 열중하다 목이나 허리가 아파올 때면 수도의 유명 마사지사를 찾아간 적도 있었던 아일럿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것에는 나름대로 익숙했다. 하지만 이전에는 뭉친 근육을 풀어 준다는 뚜렷한 목적 때문에 대기하는 시간마저도 지금 같이 나른한 분위기가 아니라 어딘지 전투를 앞둔 느낌이었다.

“어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또한 마사지사 앞에서는 항상 반팔로 된 옷을 입고 있었지 오늘처럼 옷을 전부 벗지는 않았다. 편히 있으려고는 하는데, 가운을 고작 한 겹 걸쳤을 뿐이라는 사실이 몸에 긴장을 얹어 버렸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막상 마사지가 시작 되자-

“여긴 어떠신가요?”

“조… 좋습니다.”

“이쪽은 괜찮으신가요?”

“거기도…… 흐아.”

아일럿은 단 몇 번의 손길로 제 정신이 극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나 능숙하다니. 처음에는 약이 아닌, 옅은 과일향이 나는 오일을 사용한 마사지사는 제 몸을 손끝으로 홀리고 있었다. 치료가 주된 목적이었기에 마사지사의 손길 또한 마냥 부드러웠다.

간지러운 듯, 시원한 듯. 처음에는 맨 등에 따뜻하게 데워진 손을 올리고서 척추를 따라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는데,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얼마 안 가서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아-”

몸이 둥실, 둥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채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을 무렵 매끄러운 손끝이 세심하게 등을 매만지다 어깨로 향했다. 어깨와 승모근을 둥글리듯이 움직이고, 엄지에 약간 힘을 실어 누르는 것도 좋았다. 그다음에는 양쪽 팔까지. 근육의 결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어루만지는 듯한 솜씨였다.

“잠시만 쉬고 계시면 바로 다음 차례를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거절했으면 후회할 뻔했다. 이런 거라면 하루에 한 번씩 받아도 좋을 정도였다. 수도에 가면 반드시 비슷한 마사지를 하는 마사지사를 찾아보겠노라고, 나른해진 상태로 아일럿은 생각했다. 어느 새 마사지사의 말대로 몸에 열이 적당히 올라, 굉장히-

“…….”

자기 좋았다. 엎드린 채로 잠이 든 아일럿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몸을 뒤집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무심코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버렸지만 그 정도로는 잠이 달아나지 않았다.

“으음…?”

제집처럼 잠을 자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사지가 시작 되어 있었다. 얼굴에 올려진 적당한 온도의 젖은 수건이 마음에 든다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가 따뜻한 수건 밑에서 눈을 크게 떴다. 마사지사의 손이 제 갈비뼈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저 앞은 괜찮은.”

언제 몸이 뒤집혀져 있었던 거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손이 위로 올라오자 몸이 굳었다. 마치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여러 개의 손가락이 가슴에서 넘어와 쇄골을 어루만질 때는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얕게 흘리고 말았다. 단순히 나른한 탓이 아니었다. 전신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흐. 아, 앗.”

이 와중에도 마사지사의 솜씨는 어쩌면 이리도 뛰어난지. 등을 만지던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듯하다가도 섬세함은 여전했다. 문제는 그게 노골적으로 가슴이나 그 주변을 향하고 있다는 것. 넘어지면서 가슴만 다쳤을 리도 없는데, 앙가슴이나 쇄골, 혹은 갈비뼈를 문지르는 손길에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거, 거기는 그만.”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게 전부였으나 나름대로 이제 그만해 달라는 표현이었다. 어차피 앞을 다 보였으니 어쩔 수 없지. 마사지사니까 더 심한 것도 많이 봤으리라는 생각에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하…….” 

마사지사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아래에 덮고 있던 담요로 배와 음부 근처를 가려 주고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물렀다. 등을 마사지할 때 사용하던 오일을 사용하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끈적이는 젤을 사용하는 듯해서 살짝 아쉬웠지만 준비를 해 준 가스파르의 성의를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어?”

잠깐, 어디까지 올라오려고? 무릎 뒤를 만지던 손이 그대로 위쪽을 향했다. 그러고는 단숨에 허벅지 안쪽과 치골을 제 것이라도 되는 양 힘껏 붙잡았다. 잠깐이지만 분명, 손이 그곳에 닿았다.

“자, 잠깐만. 거긴. 으. 앗…!”

경악할 틈도 없었다. 손끝을 세운 채 긁어내리는 손길 때문에 피부 위에서 전류 같은 것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아랫도리가 묵직해진 듯했다. 왜 마사지사는 그런 곳을 만져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뭐라고 한 소리를 하려는데.

“여기도 만지는 게 싫으니?”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럼 다시, 가슴을 만져 줄까?”

잘못 듣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아일럿.”

“……너.”

“어차피 힘도 잘 안 들어가잖아.”

경악하는 아일럿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가스파르는 상당히 야릇한 눈을 하고는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본격적으로 일 치르기 전에 긴장 좀 풀어 주려고 했는데, 너 정말 민감하다.”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검지 하나를 아일럿의 가슴 위에 댄 가스파르가 여전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이런 걸 숨기고 있었구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동하던 손가락이 납작한 유두를 지그시 눌렀다.

“왜 민소매를 입고서 호수로 들어오나 궁금했는데.”

“아으, 흑.”

“게다가 여름에 입는 옷이라기엔 꽤 두껍고, 몸에 붙는 재질이었지 않니?”

근육은 별로 없어도 길게 잘 뻗은 몸을 탐색하던 가스파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은 정말 어지간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함몰 유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다. 해서 검지와 중지를 구부리고는 집요하게 유두 위를 살살 긁어 보기도 하고, 일자로 작게 난 홈 위를 간질이다 그 주변에서 원을 그려 보기도 했다. 아쉽게도 효과는 없었다.

“어지간히 나오지 않는 편인가 봐? 보통 이 정도 하면 흥분해서 삐쭉 튀어나오던데.”

“흐으으, 아, 앗. 만지지 마, 아……!”

가스파르는 아쉬워했고 아일럿은 고함을 질렀다. 그가 제가 꽁꽁 숨겨둔 비밀이었던 함몰 유두 위에 손을 댈 때마다, 제 의지를 벗어나 튀어나가려 하는 새된 비명을 애써 참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버거웠지만.

이거 하나는 머릿속으로 의논할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이 새끼는 미친 새끼다.

내가 속았다.

“음. 몇 번 더 굴려볼까.”

“개, 흐, 개자식!”

“여기서 몇 바퀴나 돌려줬으면 좋겠어?”

말하지 않으면 계속 할 셈이라는 걸, 맛이 간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보고 나서 곧장 알아 차렸다. 그렇기에 오히려,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눈이었다.

“아, 계속?”

“한 바, 한 바퀴……!”

“그건 너무 적은데. 다시 생각해 볼래?”

“세, 셋.”

“그것도.”

“다…… 다아, 섯.”

“좋아. 그럼 앞으로 다섯.”

이미 세 번이나 문질러 놓고서 앞으로 다섯이라니, 아예 아일럿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가스파르는 손바닥 전체를 그의 가슴팍에 대고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일럿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버티려고?”

힘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더니 약을 사용한 게 틀림없었다. 몸이 말도 안 되게 민감…….

“어떡하지. 난 변태여서 못 참게 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흐으, 읍.”

미친 새끼. 변태 새끼. 개새끼.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아는 욕도 얼마 없는 아일럿은,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의 욕을 가스파르에게 쏟아내고 싶었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었다.

“프, 흐, 흐으, 앗……!”

입과 목이 제 것이 아닌 듯했다. 분명 참을 수 있다 생각했는데 제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셋, 그리고 넷.

“다섯은 좀 느리게 해 볼까.”

“으그, 흑, 흐으윽.”

거의 움직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정말, 바늘구멍 하나만큼 움직이는 정도.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쾌감이 타닥타닥 튀었다. 그가 제 유두에서 손가락을 떼어 냈을 때는 이를 악물고 버티느라 입 꼬리가 축축해졌다. 거친 숨이 여전히 이 사이로 씩, 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함몰되어 있는 거 아냐? 아래만 툭 튀어나왔어. 유두는 여전히 이 모양인데.”

“이제 그만해. 그만, 그만.”

“다섯 번이나 아래를 굴려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개새끼! 너 이딴 짓을 하고도……!”

“이딴 짓을 하고도 뭐?”

두 손에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을 듬뿍 바르고 온 가스파르가 아일럿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어쩔 건데, 아일럿 바슬레인.”

가스파르는 창백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거듭 물어 보았다. 기세 좋게 소리 지른 아일럿의 대답이 궁금했다.

“내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긴 한데, 그 애들 중에 너처럼 말한 애는 한 명도 없었어. 그래서 궁금해서 그래.”

손을 한번 맞잡고는 문질렀다. 두 손을 떼자 하얀 액체가 어느 새 끈적끈적해져서 가스파르의 두 손 사이에서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갑자기 자기 몸에 바르면서 자위를 할 리는 없으니 가스파르는 저걸 자신에게 사용할 것이 뻔했다.

“선박 몇 대 가지고 장사질 하는 귀족집 도련님이 뭐 어쩌시려고 그러니?”

한마디도 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그렇지 않다고, 영지도 있고 유서와 전통도 있는 집안이라고 말해 보았자 조롱거리밖에 더 될까. 소리를 쳐봤어도 상대는 가스파르 루였다. 황족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억울함에 눈물을 삼키는 것이 전부였다.

“다음부터는 상대를 보고 말해.”

“흐……!”

약이 잔뜩 묻은 손이 가슴에 닿자마자 피부 위를 시리고 무딘 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교묘하게 유두만을 피해서 움직이던 가스파르는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갈비뼈와 배, 이어서 골반까지 약을 펴 바르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여기.”

“아!”

여전히 파묻혀 있지만 어느 때보다도 예민해진 곳을 가스파르는 중지로 툭툭 때렸다. 그런 행위가 반복 되자 아일럿은 참으려던 것도 잊고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으로 가스파르를 노려보았는데, 그 표정에 가스파르가 어찌나 온화한 미소를 짓던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여기,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은 있니?”

“아, 앗, 흐우, 읍.”

“아일럿?”

“…….”

아일럿은 입을 다물고 씩씩 거렸다. 본의 아니게 그 표정이 대답이 되었다.

“한 번도 없나 보군.”

어린 시절부터 내내 그랬었다. 나이가 들면 괜찮아지려니. 조금 커서는 큰 문제도 아니니 이런 상태여도 괜찮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코가 크거나 손가락 하나가 짧기도 한 것처럼 생활에 문제만 없으면 되는 거라고……. 다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가리던 걸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싫었다. 거기에 만져지는 것도-

“입으로 해 보면 나오려나.”

이번에는 싫다는 말도 못 하고 입을 떡 벌렸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가스파르가 도톰한 입술을 제 가슴에 대었다. 그러고는 추잡한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다른 한 손으로는 반대편 유륜을 꽉 눌러 짜면서.

“흐아, 읍, 흐으읏……. 아!”

생경한 감촉이 스쳤다. 낯선 곳이 움직이는 불쾌한 감각. 아일럿은 가스파르를 떨어뜨리려 난리를 쳤지만 무거운 솜이불이 수십 장은 올라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무거워 어깨를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요한 입술은 여전히 제 가슴 위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하, 지이, 익, 히……. 아으, 윽.”

깊게 파묻혀 있던 부위가 처음으로 밀려나오는 감각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가스파르는 입을 떼고서 자신의 작품이라도 된다는 양, 퍽 감격스러운 눈으로 튀어나온 유두를 보고는 손끝으로 가볍게 쥐어 보았다. 제가 심하게 빨아놓은 덕에 원래부터 붉었던 유두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살도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드디어 나왔네.”

“힉. 흐윽.”

“모처럼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고정 좀 시켜놓을까?”

삐져나온 유두가 제법 컸다. 엄지와 검지로 집어서 가지고 놀기 딱 좋은 크기. 만면에 뿌듯함을 숨기지 못한 가스파르는 쟁반 위에 있는 자루에 손을 넣더니만 작은 방울이 달린 집게를 가지고 왔다.

“하지 마!”

그걸 어디에 사용할지, 그의 의도가 투명하다 못해 뚜렷하게 보였기에 아일럿은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반항도 소용없이 왼쪽 가슴에서 방울 소리가 났다. 나무집게가 삐쭉 튀어나온 유두를 칵 하고 깨물어 버린 탓이었다.

“하아, 으윽……!”

“너 정말 마음에 들어.”

방울이 쉴 새 없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톱 하나만큼 작은 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굴리면, 그만큼이나 바쁘게 아일럿도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참으려고 억누르는 듯, 낮은 목소리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는 것이 아주 그만이었다.

“이번 여름은 너 덕분에 즐거울 것 같아, 아일럿.”

큰 기대는 없었는데, 벌써부터 좋은 반응을 보여 주는 탓에 가스파르는 입술로 호선을 그리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아, 하윽, 씨, 흐……. 으, 웁.”

밖으로 꺼내야 할 유두는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새빨개진 채로 저를 노려보는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아일럿이 필사적으로 거절하는 곳에 혀를 꾹 찔러 넣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번에도 좋은 소리를 내었다.

*

“마차를 타고 돌아가지 않으시나요?”

“…….”

“주인님께서 주인님의 마차로 손님을 모셔다 드리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약 두 시간.

정확히는 2시간 하고도 16분.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그런 무섭고 흉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신문에 실린 살인 사건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겁하던 아일럿은 2시간 16분 동안 난생 처음 살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노도처럼 거센 살의가 한 사람만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도.

정말 죽일 수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랬으리라.

그런데 마차를 타고 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집사의 얼굴을 보니 속이 역해졌다. 모를 리가 없다. 제 주인이 미친놈이라는 걸 집사가 어떻게 모르겠어? 아일럿은 입을 틀어막고서 가스파르가 준비한 마차에도 타지 않고 두 발로 마구 달렸다.

‘겨우 두 쪽이 전부 튀어나왔어. 그런데 말이지, 이건 교정이 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너무 힘든 모양이지 않을까?’

남자들이 교접을 할 때 그러하듯 제 엉덩이에 손을 대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나, 그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유두뿐이었다. 기어코 양쪽 유두를 전부 밖으로 나오게 만들고는 집게를 달더니 약 같은 것을 사용해서 내내 만져댔다.

‘그건 그렇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한 건 처음이야. 정말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이네. 난 욕 듣고 흥분하는 취향도 아닌데.’ 

‘하, 아앗, 흣, 흐으으… 아…….’

‘굳이 흥분하는 쪽을 치자면 신음 소리야.’

입으로는 온갖 이야기를 다 해대면서 손은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민감했던 유두는 시간이 지날수록 화끈해졌고, 나중에는 소리를 참는 것을 포기하고 제발 그만해 달라는 소리를 거듭했다. 그랬더니 그, 화형대에 올려도 마땅치 않을 황족 놈이-

‘그럼 소리를 참지 말고 열심히 울어봐. 그걸로 만족스러워지면 놓아 줄 테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대로는 언제까지고 벗어나지 못할 듯하여 스스로를 죽었다고 생각하고 입이 열리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만, 가스파르는 제 귀를 잘근거리며 능욕으로 점철된 말을 여러 작가들의 글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처럼 다양하게 쏟아냈다.

‘젖꼭지도 아래도 다 세웠어. 아래야 그렇다 쳐도 위는, 이 크기면 옷 위에서도 두드러질 거야. 처음 만질 때는 부드러웠는데 이젠 유륜까지 딱딱해졌네. 계속 만져주면 부드러워지려나? 넌 살이 달착지근하니까 빨아주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어라, 빨아주는 건 위쪽인데 아래가 젖네.’

이 놈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건 대체 뭐지? 나랑 같은 학문이 맞긴 해? 수치스러움을 넘어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수많은 음어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와중에도 아일럿은 수십 번 숨이 넘어갈 듯한 감각을 맛보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다.

‘눈 떠. 집에 돌아가려면 씻고 가야지, 아일럿?’

그가 거칠거칠한 붓을 제 유두에 가져다 대기 전까지만.

가스파르는 그 붓으로 유두를 닦아 주겠다는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는, 까슬한 붓끝으로 솟아오른 유두를 쓰다듬었다.

‘제대로 닦지 않으면 나중에 옷에 얼룩이 질 거야. 유두도 튀어나와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흐으, 흑, 읏, 아…….’

그는 그저, 제가 다시금 울면서 그만해 달라는 말을 하길 원했을 뿐이었다. 마지막 오기로 참으려 했지만 싸움의 승자는 처음부터 가스파르였다.

‘이제 거의 다 했어. 조금만 참자.’

한쪽 유두에 묻어 있던 것이 전부 붓으로 옮겨갔을 무렵에는 신음이 아니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해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어도, 이미 눈물 자체가 애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쉽게 울지 마. 나는 참았다가 흘리는 눈물을 좀 더 좋아하거든.’

그 치욕스러운 시간을 다 부서 버릴 수만 있다면 목숨의 반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개자식…….”

저도 모르게 차올라 밖으로 새어 나가려던 눈물을 안간 힘을 쓰며 삼킨 아일럿이 별장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일럿을 기다리고 있던, 본가에서 함께 별장으로 온 하인이 따라붙었다.

“도련님?”

책을 읽고 온다던 아일럿이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기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슬슬 호수로 가볼 생각이었는데, 밤늦게 돌아온 제 도련님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것을 보고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감기라도 걸리신 건 아닌지, 일단 저녁 식사에 대해 물으려 했는데-

“필요 없어. 바로 잘 테니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네, 네에.”

단칼에 잘렸다. 아일럿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하인을 두고, 2층으로 올라 와서 가지고 온 옷들 중 가장 헐렁한 옷을 꺼내 입었다. 유두가… 무엇인가 살짝 닿기만 해도 욕이 나올 만큼 아팠다. 참다못해 고통을 잊기 위해서 빈속에 술을 왕창 들이켰지만, 잠을 자려 하니 유두가 자꾸만 거슬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닿지 않게 윗옷을 벗고 자는 게 나을 정도로.

“……안 되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드라지는 유두의 존재감에 짜증이 솟구쳤다. 술에 취한 채로 다시 걸어 나간 아일럿은 하인에게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얼음이 담겨져 있는 주머니를 만들어 오게 했다.

“예, 도련님. 바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차게 하면 감각이라도 좀 둔해질 테니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윗옷의 아랫부분을 티 나지 않게 붙잡은 채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던 아일럿은 한숨을 쉬다 이를 갈았다.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어떻게든 이 치욕을 갚고 말겠노라 다짐하며 수치심을 애써 억눌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생각지 않는 게 약이었다. 무력함을 깨달을 때마다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은 잊으려 했다.

“빌어먹을!”

…아무리 잊으려 해도, 눈을 뜨고 있을 때면 함몰이 된 채로도 잔뜩 부푼 유두가 가스파르의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만들어서,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얼음주머니 두 개 말씀이시지요?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해.”

간신히 잠든 저녁.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아일럿은 또 얼음주머니를 부탁했다. 더위를 원체 잘 타니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들 머리나 목에 얹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지. 옷 속의 사정은 집안사람 누구도 알지 못할 터였다.

“도련님. 말씀하신-”

“어, 어, 거기 두고 가.”

“알겠습니다.”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얼음이 가득 든 주머니를 하인이 가져다주었다. 아일럿은 내내 윗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에, 하인이 얼음주머니를 가져다주기가 무섭게 손만 뻗어서 주머니가 담겨진 쟁반을 끌어당겼다. 가슴에 차가운 것을 대고 나서야 그나마, 고여 있던 열기가 식는 기분이었다.

“하으…….”

어쩔 수 없이 그 뒤로도 하루에 세 번씩, 얼음이 담겨 있는 주머니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며 자그마치 사흘 동안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스칸다에서 지내는 동안은 내내 그럴 것이었다.

당장 본가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갑작스럽게 돌아온 자신을 보고 부모님이 의아해 하실 테니 적어도 며칠은 꼼짝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읏.”

집으로 보낼 편지를 작성하던 아일럿은 사용할 단어를 생각하다 멈칫했다. 깃털펜의 끝이 하마터면 제 유두에 닿을 뻔했기 때문이다. 얼음주머니의 효과가 다했는지 다시 예민해진 유두가 짜증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약간 거리를 두고 펜을 쥐었다. 오늘 안에는 부모님께 보낼 편지를 보내야 했다.

자신은 스칸다에서 잘 지내고 있고, 부모님이 건강하신지와 집에는 별일이 없는지 궁금하다는. 스칸다로 피서를 올 때마다 항상 보내던 내용이니 쓰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으나 마음이 심란한 탓에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항상 이 다음에는 뭐라고 썼었지? 아일럿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누군가 크게 발을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스칸다로 함께 따라온 하인, 에딘이 달려오는 소리인 듯했다.

“도련님. 도련님. 주무십니까?”

“무슨 일이야? 이렇게 소란스럽게…… 부모님께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꼭 알려드려야 할 일이 생겨서.”

“무슨 일인지부터 말해 봐.”

문을 닫아 놓은 채로 아일럿은 벗어두었던 옷을 입었다. 에딘이 저리 달려올 만한 일이면 뭔가 큰일이 생긴 모양이나 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단추는 왜 이렇게 잘 끼워지지 않는지, 아무래도 이 옷은 버리는 편이-

“수도에 계신 주인님의 선박이 정부 기관에 압수당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단추를 반도 못 꿰었다는 것도 잊고서 서둘러 달려간 아일럿은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에딘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님의 선박에서 불법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 자세한 사정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고요. 일단 마님께서 해당 기관을 찾아가시겠다고는 하시는데…….”

“불법적인 일? 그게 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그… 수입이 금지된 약물을 선원들끼리 밀수한 모양입니다. 거기에 마법석까지요.”

“사람이 와서 그 말을 전해 준 거야?”

“예. 1층에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 와 있습니다.”

금지된 약물에 마법석까지 밀수하다니. 밀수는 큰 범죄이다 보니 혐의가 쉽게 풀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설령 무고하다 해도, 정부에 의해 집안이 다 털릴 만큼 조사를 받고 나서야 선박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원들이 엮인 일이니 부친 또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더욱이 선박으로 여름에 일을 하지 않으면 1년이 고달팠다. 뿐만 아니라 내년부터는 선박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사업과 더불어, 새로운 상품을 수입하는 일이 예정 되어 있었기에, 이번 년도에 자금을 많이 비축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아니, 혹여나 결백함을 증명할 길이 없어 이대로 선박을 계속 압수당하고, 아버지가 누명을 쓰게 된다면-

“그 사람을 좀 만나 봐야겠어.”

“지금은 1층 응접실에 계실 겁니다.”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1층으로 향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 집안의 상황은 어떤지부터 물어보고, 그다음은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다. 부디 감옥에 계신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낮고 빠르게 숨을 내쉬던 아일럿은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고생이 많지, 아일럿?”

“……아.”

그러고는 손이 두 개나 있는데 왜 어느 쪽 손에도 총이 없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옆에 있는 에딘이 총을 차고 있었다면 그걸로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그를 쏴 버렸을지도 모른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정말로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 그리고 그를 데리고 아일럿의 별장을 찾아온 가스파르 루.

“그런 표정 짓지 마. 사람을 다짜고짜 의심하는 건 나쁜 버릇이고. 또.”

가스파르가 손짓을 했다. 함께 따라 들어온 에딘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가 제 도련님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과 함께 응접실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가스파르는 그제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그런 표정 보면 흥분 되거든. 너무 흥분 돼서 가끔은 못 참을 때도 있어.”

“……네가 저지른 일이 아니란 걸 믿으라는 거야?”

“네가 믿든 안 믿든, 어차피 똑같아. 그런데 의심하면 기력만 빠져나갈 뿐이니까 몸을 소중히 하라는 거지.”

가스파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니, 응접실에는 아일럿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아일럿.”

장갑을 낀 하얀 손이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내 앞에. 앉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 되지 않아.”

“…….”

“아니면 내 허벅지 위에 앉고 싶니?”

“…….”

“사흘 동안이나 못 봤어. 생각보다 너무 아쉽더라.”

아쉬운 것은 아일럿이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선박이 전부 압수 된 것도 모자라 누명까지 쓰게 될 판이다.

“앉아.”

“자. 됐어?”

적어도 가스파르의 앞에서는 수치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노라는 생각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눈을 똑바로 맞추고 나서야 가스파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하고 있는 오해부터 이야기 해 볼까.”

“오해?”

“선박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불법적인 경로로 마법석을 수입하고 있었다고 들었어. 이것만 들어도 내가 꾸민 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아? 널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일을 꾸미겠니?”

“믿든 안 믿든 어차피 똑같다면서.”

“흐음.”

“상관없잖아.”

말과 함께 내뱉는 숨이 떨렸다. 아일럿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세게 쥐었다.

“그래,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렇지만 난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주제에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테이블 위에 손으로 쥐고 던질 수 있는 게 왜 없는 걸까. 왜 응접실에는 총이 없는 거지? 그것도 아니면 창, 칼, 무엇이라도 좋았다. 제 앞에서 웃고 있는 가스파르의 잘난 얼굴을 후려칠 수 있는 단단한 흉기가 필요했다.

“선금으로 한 대부터 돌려줄게.”

아일럿이 얼마나 자신을 증오하든 말든 혹은 이 자리에서 씹어 삼키고 싶어 하든 말든, 가스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두툼한 자루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하겠다, 하지 않겠다에 대해서는 애초에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선택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이었고, 아일럿은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 보상을 약속할 필요도 없다.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신에게 따질 만한 위치가 되지 않으므로.

“이걸로 사흘 동안 준비하고 나한테 찾아와. 아일럿.”

자루를 내려다 본 아일럿이 고개를 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도 해 보지 않았으면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보는 입장에서는 아랫도리가 저릿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

가스파르가 돌아간 이후에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일럿은 제 방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자루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지금 열든 나중에 열든 괴로워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타들어가는 듯한 숨을 길게 내쉬고서, 끈을 풀어서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쏟았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나무로 된 집게. 그 끝에는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낯익은 집게를 보니 아일럿은 무심코 미간을 좁힌 뒤 두 번째 물건을 들었다.

와인 잔 크기의 병. 그 안에는 끈적끈적한 크림이 들어 있었다. 세 번째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컵이었으나, 밑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자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으.”

망설이다 컵 안에 손을 넣어 보았더니, 제 손가락을 엄청난 힘으로 빨아들였다. 컵을 자루 속에 급하게 쑤셔 넣었다.

네 번째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판 하나였다. 딱딱한 줄 알았는데, 테두리만 그럴 뿐 중앙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더니 금방 자국이 남을 만큼 말랑말랑했다. 고민 끝에 슬쩍 손톱으로 긁어 보니 흔적이 그대로 남아 버렸다.

이건 또 뭐 어쩌라고? 아일럿은 판을 내려놓으려다…… 작은 크기의 딜도와 그것보다 조금 더 큰 딜도를 발견했다. 초심자용으로 제작된 탓에 크기와 모양이 부담스럽지 않았으나, 보기만 해도 역했다.

“씨발.”

스스로 듣기에도 한없이 어색한 욕이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은 욕을 반복하던 아일럿은 들고 있던 고무판으로 딜도 두 개를 가린 뒤에, 마지막으로 양피지를 풀어 보았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기에 문장이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사랑스러운 아일럿]

그게 이런 것일 줄은 몰랐지. 보자마자 토하고 싶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아일럿은 헛구역질을 하다가 진흙을 씹어 먹는 기분으로 그 밑의 문장들을 읽어 내렸다.

[오늘부터 사흘간, 매일 오후 여섯 시에 네 별장으로 사람을 보낼 거야.]

[자루 안에 들어 있던 고무판에, 발기한 네 유두를 찍어서 보내도록 하렴.]

……욕을 하고 싶었는데 알고 있는 욕이 더 이상 없었다. 하나 설령 아일럿의 입이 험했다 하더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가스파르에게는 무슨 욕을 해도 부족했다.

[네 유두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는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으니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기를 바라. 모쪼록 양쪽 모두 형태가 확연히 드러나게 한 다음 찍어서 보내는 게 좋을 거야. 모양이 확실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가서 보러가는 수밖에 없잖니? 함께 보낸 물건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추신. 널 위한 장난감을 두 개 보내봤어. 사흘 뒤에 내 집으로 올 때, 네가 안에 넣을 수 있는 쪽을 넣고 오도록 하렴. 어디에 넣고서 와야 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을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를 내봤자 제 손해일 뿐이었으나, 양피지를 북북 찢어서 그대로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거친 숨이 입 밖으로 연신 새어 나왔다. 사흘 동안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이번 일을 저지른 것이 가스파르가 아니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자신에게 오늘 같은 일을 시키기 위해 무슨 일을 저질렀을 것이 뻔했다.

대체 왜?

학기 중에 가스파르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본 적은커녕, 가깝게 엮인 일도 한 번 없었다. 호수에서 미끄러져 버려서 도와줄 수밖에 없었던 게 화가 났던가? 인사도 안 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게 기분 나빴어? 의중을 짐작해 보려다 포기했다. 원래 정상인은 미친놈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자신에게는 세상이 둘로 갈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황족인 가스파르에게는 이 일들이 그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를 갈아대던 저를 쳐다보던 그 평온한 표정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증거였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더 큰일도 벌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 하면 될 거 아냐.

선택권이 없다는 건 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구.

기억의 일부를 떠올리는 것조차도 싫었지만 가스파르가 어떻게 제 가슴을 만졌었는지 되새겨야만 했다. 먼저 한쪽 가슴에 두 손을 가져다 댄 아일럿은 길게 숨을 토해내고 나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가슴을 전체적으로 쓰다듬었었다. 그다음에는 유두 주변을 손끝으로…….

“으으.”

스스로의 손으로 하는 것이니 만큼, 가스파르가 했을 때보다는 자극이 덜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유두를 건드리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손끝이 유두에 닿기가 무섭게 몸을 움찔거린 아일럿은 몇 번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뗐다.

“…….”

그러고는 방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혹시 지나가던 하인이 제가 낸 소리를 들을까 두렵기도 했다. 망설이다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을 싹 긁어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문과 가장 떨어진 곳은 창가 근처의 침대였다. 편히 쉬어야 할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들키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흐으, 읍.”

침대에 앉아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유두는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손으로 하다 보니 가스파르가 하는 것처럼 되지도 않았다. 손을 조금이라도 매끄럽게 하지 않으면……. 입술을 꽉 깨문 아일럿은 앓는 소리를 냈다.

빨리 끝내자. 질질 끄는 것보다는 시간이라도 단축하는 게 낫다. 그런 생각으로 병을 열고 크림을 손에 덜어냈다. 예상대로 크림은 심하게 끈적거리는데다, 손바닥에 바르는 즉시 피부가 약간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피부가 건조할 때 바르는 다른 젤을 사용하는 게 나았을까,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이러한 일에 사용하라고 보낸 것일 테니 그나마 나은 구석이 있을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서 유두에 크림을 펴 발랐다.

“아. 윽.”

손끝으로 천천히 덧그리듯이, 패여 있는 곳을 매만졌다. 그렇게 적당히 어루만진 후에는 유두를 잡고 양쪽에서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그때도 워낙 잘 나오지 않았었기에 이렇게 해서 바로 빠져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판판한 가슴을 잡고서 몇 번씩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니 운 좋게 오른쪽 유두가 빠져나왔다.

“하-”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이제 다른 쪽을 해야 하는데, 도로 들어가 버린다면.

‘모처럼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고정 좀 시켜놓을까?’

자루에 들어 있던 나무집게의 용도가 떠올랐다. 계속 손으로 잡고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한 손만 사용하기에는……. 잠깐 죽었다고 생각하고서 집게를 들었다. 그걸로 오른쪽 유두를 집어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나오라고, 좀…!”

왜 가슴은 두 개인 걸까. 하나를 간신히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서 다른 쪽도 하려고 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가스파르가 하는 일을 그저 견디는 것도 힘들었는데, 직접 하는 건 더 그랬다. 오른쪽은 운이 좋았던 걸까, 왼쪽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시간이 오래 지체될수록 몸과 마음이 여러모로 괴로워지는 것도 문제였다. 젖소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을 쥐어짜고 유두를 비틀고 있으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저 여름 방학을 즐기기 위해 스칸다에 오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쩌다가.

“하으, 읏, 하아, 아…….”

익숙하지 않은 일을 거듭하는 손목도 아팠고, 집게로 고정해 놓은 유두 또한 더는 무리라고 생각될 만큼 아팠다. 결국, 컵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 손에 묻어 있던 끈적끈적한 액체를 손수건에 마구 문질러 닦은 아일럿은 손도 대기 싫은 컵을 왼쪽 가슴에 부착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 손과 오른쪽 유두가 자유로워졌다는 것.

“아프, 흐-”

유두에 매달고 있던 집게를 떼어내고 손끝으로 붙잡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려 잡고 있는 꼴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지만 집게에 물려 있는 것이 너무 아팠고, 다시 튀어나오게 하려 고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아일럿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아, 앗, 흐아, 으으윽.”

처음 실험해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컵에 달려 있는 끈을 한번 잡아당겨 보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컵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힘껏 빨아들였다.

“읏, 아아……!”

동시에 도저히 소리를 참을 수가 없어져서 몸을 웅크렸지만 도리어 목 안쪽에서 끓는 듯한 소리가 새었다. 쾌감이 지나쳤다. 저도 모르게 허리 아래를 요란스레 들썩이던 아일럿은 컵이 멈추고 나서야 신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하아, 젠…장.”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서 가슴에 다시 컵을 대고, 끈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컵이 맹렬하게 제 가슴을 빨아들이면서, 늘어났던 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앗, 흐, 하으, 윽. 아!”

그 와중에도 혹시 밖으로 나왔었던 유두가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까, 한 손으로는 오른쪽 유두를. 다른 손으로는 침대 시트를 쥐고 버티던 아일럿은 유두가 밖으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컵을 떼어냈다. 이제, 저 고무판에 찍기만 하면 되는데……. 흥분해서 딱딱해지긴 했지만 제대로 찍힐지 걱정이 되었다.

“윽.”

고무판을 가까이에 가져다 대고는, 그대로 짓눌렀다.

“……?”

고무판이 제 몸을 순간 쭉 빨아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깜짝 놀라서 판을 잡아당겼지만 맙소사, 마치 저와 한 몸이라도 된다는 양 떨어지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아일럿이 난리를 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뭐, 뭐야. 왜 안 떨어지는 건데!”

저 젤 때문이 틀림없다. 손톱으로 긁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달라붙을 리가-

“흐윽.”

떼는 것마저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다니! 제 가슴에 빨판처럼 달라붙은 고무판을 떼어내려 애썼으나 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유두가 빨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좀 떨어……져!”

문은 잠겨 있었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제발 그것만은 안 돼. 절대 안 돼! 아일럿이 안간힘을 쓰며 판을 밀어내자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 유두가 판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

차마 소리를 삼킬 수 없었던 짧고 강렬했던 고통 뒤, 보기도 싫을 만큼 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분노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이 끔찍한 일을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하으, 하…….”

오묘한 해방감과 함께 퍼진 쾌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사정을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으나, 사정을 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아랫도리를 보니 숨이 막혔다. 고간이 실금이라도 한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아일럿 바슬레인 님.”

더러워져 버린 속옷과 바지를 제 손으로 처리해야 했던 충격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오후 여섯 시가 되기 약 5분 전, 가스파르의 하인이 별장의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께서 바슬레인 님께 받아오라고 하신 물건을-”

“여기 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루에 넣어둔 물건을 건네주었다. 가스파르의 하인은 아일럿이 넘겨 준 자루를 조심스레 받아들고는, 들고 온 자루를 내밀었다.

“주인님께서 바슬레인 님께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빌어먹을 고무판이 자루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도 딱 하나. 한 번에 다 찍지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까지……. 어차피 고무판이 없어서 더 찍지도 못했지만, 가스파르의 치밀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슬레인 님.”

“살펴 가세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툭 뱉어낸 뒤, 아일럿은 쓰레기라도 된다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자루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당연하게도 방 안에 들어가서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냅다 자루를 내팽개쳤다. 어차피 내일 해도 되는 일이긴 하지만, 당장 보기만 해도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왜 하필 그런 새끼가 황족이여서!”

던져 버리는데 그치지 않고, 바닥에 내던져진 자루 위에 옷까지 덮어서 가렸다. 더욱이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머리가 쿡쿡 쑤시듯 아팠다. 최근 들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을 내쉴 뻔하다가 삼키고는 침대에 누웠다.

이른 시간이지만 눈을 붙이고 싶었다. 피로가 무겁고 불쾌하게 몰려오자, 베개에 머리를 대고서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문제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으로 얕게 잠들었다 깨고 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자꾸만 유두에 신경이 쓰였다.

“……흐.”

다들 자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참고 자 보려고 했으나 한번 자각을 하고 나니 시간이 지날수록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 근처의 줄을 잡아당겨, 근처에 있는 방에서 자고 있을 하인을 불렀다.

“네, 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막 잠들었던 하인은 종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졸린 눈을 부비면서 아일럿의 침실로 향했다.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일럿은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그게, 너무 더워서.”

“아, 얼음주머니 말씀이시지요? 바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를 텐데, 마음이 불안한 탓에 조심스러워지다 못해 움츠러드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도련님.”

몇 분 정도가 지났을까. 하인은 평소처럼 노크를 한 뒤에, 작은 주머니에 감싸진 얼음을 문 앞에 내려놓았다.

“도련님. 얼음주머니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리고 잠 깨워서 미안해.”

“도련님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잘 자.”

문에 귀를 대고 있노라니 하인이 다시 제 방으로 걸어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터벅, 터벅 걷다가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윗옷을 벗고 있던 아일럿은 문틈으로 손만 내밀어서 얼음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흐으.”

처음에는 얼음주머니 자체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으나, 시간이 좀 지났을 때는 얼음을 꺼내서 천천히 굴렸다. 아무래도 천을 사이에 두는 것보다는 직접 살갗에 대는 편이 더 시원하기는 했다. 아일럿은 얼음을 든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각이 져 있던 얼음이 유두 위에서 슬슬 녹아내리면서 둥글게 변하고, 녹으면서 생겨난 물이 가슴을 지나 갈비뼈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무심코 의자 위에서 허리 아래를 움직였다. 제 발끝이 서서히 곱아들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손을 움직이는 데 열중하다 새로운 얼음을 꺼냈다. 하지만 단순히 얼음을 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느덧 손끝으로도 유두를 만지고 있었다.

“하으, 으으읏.”

얼음이 없어졌는데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유두를 잡아당겨본 아일럿은 힉, 하고 길게 울음소리를 내었다가 저도 모르게 허벅지 사이를 좁혀서 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천 위로 만지는 것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기분이 좋던지,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아…!”

기분이 좋다는 걸 한번 느끼고 나니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을 위로 아래로 바쁘게 움직였다. 유두도, 그리고 부풀어 오른 성기도 몹시 간지러웠다.

“하.”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더 만져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번졌을 때 아일럿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제, 젠장.”

왼쪽 유두가 밖으로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게 당기고 돌려 댔으니 당연한 일이나, 붉게 튀어나온 것을 보자 욕부터 나왔다. 둥글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쓸데없이 크고 날이 서기까지 해서, 빠져나온 상태에서 옷을 입으면 천 위로 유두가 도드라질 게 뻔한 모습이었다.

“…….”

그런데 이걸 어떡하면 좋지? 슬며시 유두를 건드리고 나니 온몸에 전율 같은 것이 일어났다.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뜩이나 잘 나오지 않았던 유두를, 얼음을 굴리다가 나오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그저 열을 식히려고 했을 뿐인데.

잠시 생각했으나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었다. 만지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져서 멈출 수 없었던 거겠지. 혹여나 왼쪽이 다시 들어가기라도 할까 손끝으로 약하게 붙잡은 채로, 생각했다. 이 참에 오른쪽까지 만져서 판에 얼른 찍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아, 흐윽.”

내일도 찍어서 보내야 하니까 만지는 거야. 가스파르, 그 새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구.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야. 끊임없는 상념을 되풀이 하며, 아일럿이 반대편 가슴에도 손을 대었다.

“하아, 으. 읍.”

달아오른 살과 살이 닿으니 금세 몸이 반겼다. 가스파르가 보냈던 크림 대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다른 크림을 가슴에 펴서 바르고 나니 감각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그 바람에 그만 흥분하여 딱딱해진 제 아래를 의자에 문질렀다. 남는 손이 없는 탓에 그렇게라도 아래쪽에 어떤 감각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흐으읏, 하으, 읏. 아, 앗……!”

아래를 만졌기 때문이다. 가슴을 만져서 그런 게 아니야.

어제처럼 흠뻑 젖어 버린 다리 사이를 보면서 언뜻 본 아일럿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

“내가 줄 물건은 거기 있으니까 가져가세요. 가져오신 건 거기 두고 가시고요.”

두 번째 날에도 가스파르의 하인에게 새벽에 찍어낸 고무판을 보내 주고, 새로운 고무판을 받았다. 이제는 고무판과 엇비슷한 것만 봐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시한 일을 잘 끝낸 탓일까. 저녁 무렵, 그의 말대로 선박 한 대가 일단은 자유로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 사랑하는 아들 아일럿. 집안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심란할까봐 급히 편지를 보낸다. 네 아버지는 아직 조사를 받으시느라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시지만, 벌써 선박 한 대를 돌려받았어. 돌려받은 선박은 일단 운용해도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야.]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분들을 만나 뵈었는데, 수사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박을 일부나마 돌려받았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구나.]

[그리고 운이 좋다면 아버지의 연금이 이번 주 안으로 풀릴지도 몰라. 모쪼록 아직 어린 네가 많이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란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는 아일럿이 한계까지 몰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방어벽이었다. 이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았다가는 가족들이 피해를 보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이미 수없이 되뇐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다음날도 어김없이 찾아온 가스파르의 하인을 맞이했다.

“여기…… 받아요.”

“감사합니다, 바슬레인 님.”

아일럿은 밤사이에 겨우 제 가슴을 찍어서 남긴, 고무판을 자루에 두 번 세 번 감싼 뒤 하인에게 넘겼다. 하인은 아일럿이 준 자루를 공손히 넘겨받고는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그건 뭡니까?”

“주인님께서 바슬레인 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오늘도 그의 하인이 똑같은 고무판을 주겠거니 싶었는데, 선물은 무슨 놈의 선물? 자루가 아닌 커다란 상자를 받아 들긴 했으나 불길함이 목을 꽉 메웠다. 저번처럼 손끝으로 들고 오지도 못하고, 혹여나 하인에게 들킬까 직접 두 손으로 들고 2층으로 올라 온 아일럿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루에서 상자, 그런 작은 변화만으로도 나름대로 침착해지려 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일럿은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화려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위쪽의 고무판 하나. 하지만 상자에는 고무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망할 새끼.”

구석에 꽂혀 있던 양피지를 보고서 무심코 미간을 좁혔으나, 긴 한숨을 내쉬고는 끈을 풀고 펼쳐 보았다. 가스파르의 쓸데없이 고운 글씨가 눈을 괴롭혔다.

[평소처럼 할 일을 하렴, 아일럿.]

아마도 고무판에 대한 것이겠지. 저 망할 놈의 고무판. 오늘은 두 번씩이나 하라는 소리인가 싶어 이를 악물다가 돌연, 가스파르가 3일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걸로 사흘 동안 준비하고 나한테 찾아와, 아일럿.’

오늘로 딱 3일 째였다. 눈앞이 한동안 캄캄해졌으나 간신히 다음 줄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그걸 들고서 오늘 밤 자정이 되기 전에 내 별장으로 찾아오도록 해. 함께 보낸 옷을 입고서. 겉에는 발목까지 가리는 긴 코트를 입어도 좋아. 스칸다의 밤이 꽤 서늘해서 다행이지 않니?]

옷?

[추신. 혼자 입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하인의 손을 빌리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참고로 아래부터 입는 게 편하다고 하더구나.]

맨 밑에 깔려 있던 작은 상자 하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옷이기에, 하지만 가스파르의 변태적인 성향을 고려해 봤을 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라는 게 뻔했다.

그래서 더더욱 열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열어 버리고서 눈앞을 가렸다.

이것을 어떻게 옷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붉은 레이스와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검은색 끈일 뿐이었다. 펼쳐서 침대 위에 두어 보니 허벅지와 고간을 조일 듯한 가죽끈과 그 위로 가슴을 강조하는 끈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가슴 부근에는 가슴을 반 밖에 가리지 않는, 아슬아슬한 천이 붙어 있었고……. 부착 되어 있는 천을 움직여서, 구멍이 난 부분에 유두가 보이게 할 수 있는 형태였다. 아래쪽은 더 심했다. 가릴 수 있는 천도 없이 그저 엉덩이와 음부를 강조하는 끈만 남아 있으니, 이건 속옷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이걸 입고 오라는 거야, 지금? 입을 가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고 가스파르에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기에, 코트만 걸치고, 게다가 안에는.

[추신. 널 위한 장난감을 두 개 보내봤어. 사흘 뒤에 내 집으로 올 때, 네가 안에 넣을 수 있는 쪽을 넣고 오도록 하렴. 어디에 넣고서 와야 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을게.]

처음에 보냈던 편지에 덧붙여져 있던 글이 떠오르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큰 쪽을 넣고 와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작은 쪽을 넣으면 된다는 건데……. 말이 좋아 작은 쪽이지 원래 무언가를 넣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 넣는 물건이니, 작은 쪽이 손가락 두 개 정도의 둘레인 물건이어도 아일럿에게는 마냥 버겁게 느껴졌다.

“미쳤어……. 미친놈.”

괴로움에 몸을 비틀어 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어느덧 자정 한 시간 전. 아일럿이 가스파르가 보내 준 옷, 아니 끈들을 입고서 그의 저택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