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17화 (317/318)

7.

어린 동치제와 서태후, 그리고 조정의 중신들은 부랴부랴 저수궁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처음 서태후는 절대로 조선군이 그럴 리가 없다고 바득바득 우겼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총포소리에 확고했던 신념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이 어린

동치제를 앞세우고 저수궁의 문을 막 빠져나가려는데 앞에서 한 떼의 인마(人馬)가

달려들었다.

"이게 누구 신가? 어린 황제폐하가 아니신가?"

1기병연대 기병수색중대 병사들을 이끌고 저수궁으로 들이닥친 한수길이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자, 청국말을 할 줄 아는 통역이 나서서 그의 말을 전달했다.

동치제와 서태후 일행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전마(戰馬) 위에 떡 하니

걸터앉아 호령하는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 한수길은 그들이 보기에도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의 입에서 황제를 비꼬는 말이 튀어나오자 확실히 이들이

비우호적인 생각을 품고 들이닥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당연히 몸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난 함풍 10년(1860년)에 있었던 영불연합군의 북경

침공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 함풍제(咸豊帝)는 북경성을 양이(洋夷)의 군홧발에

내주고 급히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몸을 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포로가 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누가 서태후냐?"

한수길이 서태후가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서태후도

마찬가지였다. 믿었던 조선군이 하루아침에 배신을 하며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지

상상도 못했던 그녀였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됐는지 생각을 해봐도 해답이 없는

문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믿었던 금군 군사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필시 귀신같은 조선군에게 피떡이

된 게 분명하리라. 아련히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서태후는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나서서 대답을 하려 않자

한수길은 부관을 불렀다.

"부관! 용모파기(容貌 記)를 가져와라!"

이미 1기병연대에는 대정원에서 그려서 지급한 청조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용모파기가 있었다. 어린 황제와 서태후에게 사진기를 들이밀고 사진을 찍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선택한 방법이 바로 용모파기였다. 한수길은 몇 장의 그림을

넘겨받고 하나하나 대조해 나갔다. 그의 짐작대로 황제 옆에 서있는 귀부인이

서태후였다.

"당신이 서태후요?"

"......"

황제의 모후에게 묻는 말치고는 전혀 예법에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한수길은 개의치

않았다. 저런 여우같은 년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해졌으며, 나라 살림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잘 알고 있는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튀어나올 리 만무했다.

서태후는 부들부들 떨며 한수길을 노려봤다.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한수길을 노려보는 두 눈에는 제법 서릿발같은 기상까지 엿보였다.

"네 이놈! 어디서 배워먹은 돼 먹지 못한 수작이냐! 속방(屬邦)의 무관 주제에 예가

어디라고 난입하여 소란을 부리는 것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래도 서태후는 황제의 모후이고, 청조의 최고 실권자였다. 한때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한껏 위엄을 부리며

한수길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어디 한수길이 그런 허세에 겁먹을 사람이던가.

그런 허세에 겁먹을 정도였으면 애초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시간원정단에 지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같잖은 마음이 든 한수길이 말에서 내렸다. 6척에 이르는 한수길의

큰 키에 모두들 겁을 집어먹었다. 그들은 그가 서태후의 가당찮은 말에 잔뜩 성이 난

줄로 생각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이고 한수길의 눈치를 살폈다.

한수길은 서태후를 일별하고는 동치제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조선 육군 친위천군 제 1기병연대장 한수길 대령입니다. 이제부터 저희들이

폐하를 모실 것입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 그대는..."

동치제는 한수길의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하려했으나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차마 말을

다하지 못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선군 기병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저의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얼굴 가득 검댕을 묻히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6척 장신의 한수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동치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들의 용렬한 모습을

본 서태후가 한 걸음 나서며 잔뜩 성난 음성으로 일갈했다.

"네 이노옴!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썩 물러가거라! 내 이번만은 특별히 네놈들의

만행을 눈감아 줄 터이니 좋은 말로 할 때 물러가거라."

제법 일국의 태후다운 말이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한수길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뉘 집 개가 짖느냐? 하는 식으로 서태후의 말을 흘려들은

한수길은 뒤로 돌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황제를 모셔라.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자들도 함께 끌고 가라!"

어차피 김영훈의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이들을 볼모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김영훈이 무슨 생각으로 황제와 서태후 등을 사로잡으라는 명을 내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명이 내려진 이상 다른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이들을 붙잡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산 수용하기보다는 한 곳에 모아두고 감시하는

편이 편했다. 더구나 언제까지 자금성을 점거하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일단

지휘소를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저수궁 보다는 자금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태화전(太和展)이나 중화전(中和展) 같은 곳에 지휘소를 설치할

요량이었다. 한수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동치제와 서태후 일행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일부 중신들이 반항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의 서슬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청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와 태후, 조정 중신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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