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16화 (316/318)

6.

서태후의 처소인 저수궁에는 한 떼의 대단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바로 어린

동치제와 조정의 중신들이었다. 그들은 건청궁(乾淸宮)에서 정사를 의논하고 나서

서태후가 어린 동치제를 저수궁으로 청하자 모두 우루루 몰려든 것이다. 저수궁

중앙의 상좌에는 서태후와 어린 동치제가 의자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 앞으로는 중신들이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어마마마. 웬일로 소자를 찾으셨사옵니까?"

"호호홋! 이 어미가 요즘 격조한 터에 황상의 용안을 한 번 뵙고 싶어서 이리 납시라

한 것입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소자가 불민하여 자주 문후(問候) 여쭙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닙니다. 황상. 황상은 이 나라 대청(大淸)의 기둥이십니다. 어찌 공사(公私)가

다망(多忙)하지 않겠습니까? 다 이 어미의 욕심이지요."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서태후는 어린 아들이 겸손의 말을 하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덤으로

조정의 중신들까지 따라온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원래 그녀가 어린 동치제를

저수궁으로 부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오늘 금군 부통령 파해가 조선군의

도움을 받아 공친왕의 수급을 베기 위해 출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내락(內諾)

이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결정이었다.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말 그대로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일이었기에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어린 황제를 자신의 처소로 불러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황제가 자신의 옆에 있으면 금군과 조선군을 물리친

공친왕이 황궁 안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쳐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부른 것이다. 일종의 보험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저수궁 밖에 금군 통령

영록이 군사들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였다. 여차하면 황제를 볼모로

잡고 목숨을 구해보자는 심산인 것이다. 서태후는 만면에 웃음을 띄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번 참에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중신들까지 물갈이를 하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차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아들까지 내쳐야

할지도 모르는데 하찮은 밥벌레 같은 조정의 중신들이야 말해 무엇할 것인가.

'호호호... 이놈들! 이제 얼마 있으면 내 세상이 된다. 그동안 아녀자가 정사에

관여한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네놈들의 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알겠느냐!'

그녀가 남몰래 이런 생각을 하며 미소짓고 있는데 어린 동치제가 말했다.

"어마마마. 요즘 안색이 좋아지셨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응? 아! 일이 있기는 한데 별 것 아니랍니다. 호호홋!"

"그 일이 무엇이옵니까? 어마마마. 소자가 알면 안 되는 일이옵니까?"

"황상. 궁금하십니까?"

"궁금하옵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어마마마."

어린 동치제의 얼굴에는 궁금증이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평소 얼음장같이 차가운 성정의 모후(母后)의 얼굴에 춘풍이 가득할까? 어린

동치제는 모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서 말해달라는 소리였다. 어린 아들의

궁금해하는 표정을 서태후는 천천히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알게될

것인데, 지금 말해버릴까? 이 생각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상. 놀라지 마세요."

"......?"

"실은 누군가가 반역을 꾸미는 것을 이 어미가 적발했답니다."

"예-에? 반역요?"

"그래요. 반역!"

"그, 그게 누구이옵니까?"

"그것은... 바로! 혁흔입니다."

좌중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혁흔이라니! 그럼 공친왕이 바로 반역의 주모자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린 동치제와 중신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고, 워낙 비중 있는 인물이 연루된

일이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중신들도 많지 않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문제는

있었다. 공친왕에게 반역의 혐의를 씌운 이가 바로 황제의 모후라는 점에서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그러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황제는 말문이 막힌

듯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좌중의 중신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한껏 득의만면한 표정의 서태후가 다시 말했다.

"황실의 척족인 혁흔은 방자하게도 스스로 황위(皇位)에 오를 욕심으로 각지의

반역도당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그 소란스러움을 틈타 황위를

차지할 계책을 꾸몄습니다. 이 어미가 사전에 적발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황상."

"......"

"어-허! 왜 대답이 없습니까? 이 어미가 무고(誣告)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허면! 어찌 대답이 없는 것입니까?"

"하오나,"

"하오나 뭡니까?"

"그런 엄청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소자는 정신이 없을 따름이옵니다."

"허-어! 이런 답답할 노릇이 있나. 이 어미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권력욕에

사로잡힌 혁흔이 스스로 황위에 오르기 위해 각지의 어리석은 한족(漢族) 백성들을

선동했고, 그렇게 해서 나라 안팎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스스로 황권을 찬탈하려

했다고요!"

"......"

어린 황제는 역시 말이 없었다. 자신이 아는 숙부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이었다. 서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배를 아파서 난 자식이

이런 우유부단하고 용렬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좌중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서태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어미가 혁흔을 잡아오라고 이미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만일 그가 죄가 없다면

순순히 황명을 받들고 따라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죄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할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후면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그, 그런..."

"왜요? 이 어미가 잘 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어마마마."

어린 동치제는 모후의 서슬에 기가 죽어 말까지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이미

군사들을 보내서 압송할 것을 지시했다면 그때 가서 모든 일을 확인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 칼자루는 그녀가 쥐고 있었으니 어린 동치제가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내관 하나가 뛰어들어온 것은 어린

동치제의 말이 끝나고 나서였다. 무엄하게도 황제와 태후가 있는 저수궁에 무단히

뛰어든 내관은 그 자리에서 엎드리며 외쳤다.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지금 조선군이 막무가내로 황궁에 난입하여 닥치는 대로

군사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고 있사옵니다."

"무어라!"

"어서 피하시옵소서. 언제 이리로 들이닥칠지 모르옵니다."

"그게 사실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밖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를 들어보시옵소서!"

과연 내관의 말대로 아련히 총포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총포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점점 다가오는 게 저수궁 안에서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서태후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야! 이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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