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14화 (314/318)

4.

금군 부통령 아이흔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왕부로 다시 들어온 공친왕은

슬며시 걱정이 치밀었다. 저놈들이 조선군까지 끌어들인 것을 보면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게 분명한데... 조선군이 정면으로 들이치면 효기영 군사들로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게 그의 걱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선군의 전력이 막강하다던데... 정말

저들이 천하무적일까? 이런 호기심도 생기는 공친왕이었다. 그가 멀리서 본 조선군은

끔찍하게 생긴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귀신이 분장한 것처럼 얼굴에 검댕을 잔뜩

칠한 것도 그렇고, 볼썽 사나운 알록달록한 군복도 그랬다. 그리고 동그란

벙거지까지 머리에 눌러 쓴 꼴은 웃기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어떻게 저런 것들을

걸치고 전쟁을 할까? 막강한 조선군에 대한 소문이 모두 헛것이었던가? 더구나

검은색 바자와 빨간색 윗도리를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싸우는 영국군의 모습이

조선군과 대비되자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갔다. 공친왕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 조선군을 폄하하고 있고 있는데, 재앙이 닥쳤다.

[씨우우우웅! 쓔우우우웅! 쓔웅!]

[콰쾅! 쿠웅! 콰콰쾅! 콰콰콰쾅!]

"아이쿠!"

공친왕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문과 담벼락 근처에서 포탄이

터지면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가끔씩 끔찍한 비명소리가 굉음을 뚫고 그의

귀를 때리고 지나갔다.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하여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만

공친왕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와 화염이

주변을 휩싸고 돌았다. 폭음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아까 대충

훑어봤을 때는 분명 대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헌데 어디서 대포를 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 지긋지긋한 포격이 언제 그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처음 들어본 굉음과 화염, 폭음과 먼지는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꼼짝하지도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이어 터지던 굉음과 화염이 그치는가 싶더니 정면에서 금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우와와와와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도륙내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이 있고 나서 금군 군사들이 물밀 듯이 정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왕부를 지키고 있던 효기영 군사들은 뿔뿔이 도망치고 없었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으아악-!"

"살려줘-!"

"죽어라-!"

"공친왕을 찾아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처음부터 금군 부통령 파해는 서태후로부터 공친왕의 수급을 베어오라는 명령과 함께

공친왕부의 모든 식솔들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화근의 싹은 처음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그를 압송한다는 황제의 칙서만

가지고 온 것뿐이었다. 아무리 공친왕이 황제의 신하라고 할 지라도, 그래서 황제의

칙서라는 형식을 빌어 왔을지라도, 그가 순순히 몸을 맡기지 않을 것임을 서태후도

알고 있었고 파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조선군으로 하여금 효기영을 공격케 하고

그 뒤에 금군이 공친왕을 비롯한 공친왕부의 모든 식솔을 척살 할 것을 계획한

것이다. 한참을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던 공친왕은 금군 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부터 여우같은 서태후 년은 처음부터 지금의 일을 계획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이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군사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정신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친왕(親王)으로서의 체면도 최고 실권자로서의 자부심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직 살기 위해 도망칠 뿐이었다.

"저기 공친왕이 있다-!"

"잡아라-!"

갑자기 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느새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공친왕은

죽어라 도망치기는 하여도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쳐들어왔는지 왕부 안에는 금군 군사들로 꽉 차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부의 모든 일을 도맡아하던 집사도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고, 집사의 어여쁜 딸은 몇 명의 군사들에게 둘러

쌓여 겁탈을 당하고 있었다. 겁탈을 당하는 이는 집사의 딸만이 아니었다. 치마만

둘렀다면 예외 없이 굶주린 군사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아비규환이었고 한

폭의 지옥도였다. 다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익숙한 소리였다.

"아악-! 왕야!"

아내였다. 아내가 군사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대로 군사들에게 뛰어갔다.

"이놈들! 감히 어디 와서 이런 패악을 부리느냐!"

"호-오. 이게 누구 신가? 공친왕이 아니신가."

"그렇다 이놈들. 내가 네놈들이 찾는 공친왕이다."

공친왕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관가 나서자 당당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죽을 몸 더

이상 굴욕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때는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였고, 현 황제의 삼촌이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아까와 같이 본능에

사로잡힌 추한(?) 행동은 할 수 없다는 나름의 다짐을 한 것이다.

"허! 이것 봐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혼자 살겠다고 이리 도망치고 저리 달아나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당당해졌나?"

"이, 이..."

공친왕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이놈들은 자신이 삶을 탐해서 식솔들을 내 팽개치고

도망 다닌 것을 본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모습을 보면서 즐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 겉잡을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오면서

얼굴이 놀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풍 맞은 노인네처럼

떨려오기 시작했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차라리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걸. 그랬으면

이런 수치와 모욕은 안 당했을 것 아닌가? 공친왕은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수치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금군 부통령 파해가

공친왕을 둘러싼 군사들을 보고 소리친 것이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해치워라!"

"알겠습니다. 대인."

공친왕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잡아먹을 것 같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파해를

쳐다봤지만 그는 이미 시선을 돌린 지 오래였다. 처음 공친왕을 희롱한 무관이 칼을

뽑아들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공친왕은 무관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파해가 있는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죽어서도 이 원한은 잊지 않으마!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파해는

공친왕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죽어 가는 공친왕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귀에 단발마적인 비명이 들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친왕의 수급을 벤 무관은 그것을 들고서 파해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대인."

"그것을 준비한 관에 담아라! 그리고 이곳의 모든 가솔들을 깨끗이 처리해라.

마지막으로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을 잊지 말고."

"예. 대인."

청국 최고 실권자의 한 사람으로 천하를 호령하며 무너지는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평생을 다 바쳤던 공친왕은 이렇게 죽었다. 한 때 자신과 연인이기도 했고,

뒤에는 정적으로 화한 서태후의 농간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아까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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