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라!"
구로다는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대의 지휘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형편인데, 힘들고 지친다고 해서 게으름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벌써
1제대의 절반 가량이 무너지거나 전투력을 상실했다. 더구나 1제대 군사들 중 일부가
명령도 없이 후퇴를 하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말았다. 1제대
군사들은 2제대 군사들과 달리 실전 경험이 전무했고 조선군을 몰아내자는 의욕까지
없었다. 저들에게 있어서 조선군의 지옥과도 같은 포화는 죽음을 재촉하는 진혼곡(
鎭魂曲)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저들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간다고는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구로다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빵! 빠방! 빠바방! 빵! 빵!]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펑! 퍼벙! 퍼버벙! 퍼벙! 펑!]
[쿠쾅! 콰콰쾅! 쿠웅!]
그런 와중에도 조선군의 사격은 쉴새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총성과 포격,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어 대고 있었다. 한 평생을
사쓰마번의 육군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구로다 조차도 이런 포화와 사격은
당해본 경험이 없었다. 하물며 구로다가 이럴 진데, 군사들 대부분이 전투 경험도
없고 전투 의욕도 없는 1제대 군사들은 어떨 것인가. 후퇴하지 않고 돌격하던 나머지
1제대 군사들도 조선군의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몸을 움츠리며 살길을 찾기 바빴고,
수십 명의 동료들이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질 때마다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을 터였다.
제대로 된 복장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들에게 그 이상을 기대한 것이
애초에 무리였던 것이다.
[빵! 빠방! 빠바방! 빵!]
[투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펑! 퍼벙! 펑! 퍼버벙!]
[콰콰콰쾅! 쿠콰콰쾅! 콰쾅! 쿠웅!]
"후퇴하라! 후퇴하라!"
급기야 1제대를 지휘하던 기라의 외침이 들리자 1제대의 살아남은 군사들이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라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일부 군사들만이 전열을
이탈했을 뿐인데,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이제는 조직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살아서 후퇴하는 군사들도 많지 않았지만 구로다가 느낀 충격은 엄청났다.
"안 돼-! 후퇴는 없다! 1제대는 돌격하라-!"
구로다는 악을 써댔다. 그러나 그의 말이 작렬하는 포화와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을
뚫고 1제대 군사들의 귀에 들어갈리 만무했다. 아니, 오로지 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도 같은 조선군의 포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정신이 팔린, 1제대
군사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한 일이었다. 어차피 1제대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선군의 공격에 대한 총알받이 역할만 해주길 기대했을
뿐이다. 휴가번에서 선심 쓰듯 빌려준 군사들이었다. 장비도 훈련도 형편없는
군사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버리기는 아까웠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아쉬울
때였으니까. 이러한 이유로 휴가번의 군사들을 주축으로 해서 1제대를 편성했다.
저들을 조공부대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공부대로 활용한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을까? 조공부대로 활용한다고 해서 없던 전의(戰意)가 생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서 어쩔 수 없이 1제대로 편성했고, 그래서 전위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구로다의 이런 기대를 저들은 무참히 저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고만 것이다. 참담한 심정의 구로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소리쳤다.
"북을 울려라! 함성을 질러라!"
[둥-! 둥-! 둥-! 둥-!]
"우와와와와와-! 돌격하라-! 후퇴는 없다-!"
그러나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른다고 해서 한 번 후퇴하기 시작한 1제대 군사들이
다시 돌격할 리 없었다. 1제대 군사들은 2제대 군사들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든지 말든지 후퇴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제 전열은 확실히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 일부 1제대 군사들이 무단으로 도망칠 때만해도 그런 대로
전열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1제대와 2제대 군사들이 삽시간에
뒤엉키면서 서로 치고 받고 깔린 군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제대의 후퇴는
제대로 돌격하던 2제대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2제대 군사들의 돌격이 주춤한
것은 물론이고, 살아남고 싶은 욕망에 이성을 지배당한 일부 2제대 군사들도 덩달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로다는 절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차라리 휴가번
군사들을 제외하고 작전을 펼칠 걸 그랬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구로다의 옆에서 있는 힘을 다해
달리던 다나카가 외쳤다.
"구로다님! 구로다님!"
"뭔가! 다나카!"
"포병대가... 포병대가..."
"뭐야!"
구로다는 뜀박질을 멈추고 포병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멀리 포병대가 위치하던
곳에서 연이어 화염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화염이 포병대가
있던 지역에서 연거푸 솟아나고 있었다. 어느새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무력화된
것이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구로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믿었던 포병대마저 조선군에게 당하고
보니 몸에 남아있던 힘이 그대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포병대가 있었기에 오늘의 공격을 계획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포병대마저 당하고 말았다. 온몸의 힘이란 힘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빗발치는 총탄도 보이지 않았고, 거듭되는 포화도 느끼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부하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다나카는 구로다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사쓰마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고자
오늘의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라던 그때의 구로다가 아니었다.
"구로다님. 구로다님. 정신차리십쇼!"
다나카가 뭐라 해도 구로다의 멍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로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포병대가 있던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나카가 다시 구로다를 부르려는데
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아-! 난 할 만큼 했다! 할 만큼 했단 말이다! 이놈들아! 그런데 왜! 왜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가! 왜!!!"
그는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적을 향해 부하들을 이끌고
돌격해야 하는 처절한 심정과, 그런 대도 적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는 애통한
마음이 절절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조선군의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이미
2제대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1제대의 후퇴하는 군사들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2제대 군사들은 조선군의 훌륭한 사격표적이 된 상태였다.
[빠방! 빵! 빠바방! 빵!]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탕!]
[퍼벙! 펑! 퍼버벙! 펑! 펑!]
[쿠웅! 콰콰쾅! 쿠콰콰쾅!]
"살려줘!"
"으아악-! 크아아악-!"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있었고, 도망치려는 군사들이 동료를
짓밟고 있었다. 조선군의 포화는 그들을 그냥 놔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