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다 덤벼!"
"ばかやろ!"
"地獄に落ちろ!"
3소대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미 진지 곳곳에 적이
진입하여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진지에는 아군과 적이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켜 있었다. 이제는 화기의 우수함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고도의 훈련으로 단련된 몸과 불굴의 정신력으로 적을 쓰러트릴 때였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피 튀기는 혈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박광남은 숨이 턱턱 막히고
한식보총을 든 손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몇 명의 적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박살을 냈는지 모른다. 얼룩무늬 전투복과 방탄복은
피칠갑을 한지 오래였고, 한식보총의 여기저기에도 피가 엉겨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받아쳐서 죽여라!"
송관석의 악에 받친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리고 지나갔다. 박광남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관석이 기다란 칼을 들고 있는 적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게 보였다. 송관석도 힘이 빠졌는지 적병을 향해 찌르는
몸놀림이 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적병은 송관석이 찌른 총검을 여유 있는 몸짓으로
흘려보내더니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몸놀림이 둔한 송관석은 주춤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왼팔이 적병의 칼에 싹둑 잘려 나가는 게
보였다.
"으아악-!"
적병은 여세를 몰아 칼을 번쩍 들더니 송관석의 가슴을 향해 그대로 찔러나갔다.
"분대장님-!"
"이야야야야아-!"
박광남이 송관석을 부르며 달려가는 순간, 송관석이 마지막 힘을 쏟아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송관석은 엉덩방아를 찧은 그 자세 그대로
마치 용수철이 퉁겨 올라가 듯이 적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송관석과 적병이 동시에
쓰러졌다. 이미 적병의 칼은 송관석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박광남의 눈에서 불통이 튀었다.
"분대장님!"
"과, 광남아... 쿨럭!"
송관석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박광남을 불렀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토해졌다.
"어, 어서! 어서 날 찔러!"
"분대장님."
"빨리! 나, 난 이미 틀렸다. 어서 찌르란 말야!"
박광남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송관석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밑에 깔린
적병의 몸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가 말한 요지는 자신의 몸을 찔러서 적병을 같이
죽이라는 소리였다. 적병도 송관석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바동거리면서 송관석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박광남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박광남이 망설이는데 적병이 송관석의 몸을
뒤집으며 위로 올라왔다. 이제 자세가 바뀌었다. 박광남과 송관석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광남아! 어, 어서...!"
송관석의 마지막 말에 박광남이 비장한 결심 끝에 총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적병을 향해 총검을 찔렀다.
"크으으악!"
"으으윽!"
송관석과 적병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박광남이 찌른 총검이 적병의 등의
뚫고 송관석의 가슴까지 찌른 것이다.
"분대장님-! 흑흑-!"
송관석은 그렇게 죽었다. 죽는 순간에도 송관석은 적병을 안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박광남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대로 무릎을 끓었다.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몸 전체를 휩싸고 돌았다. 잠시 후, 박광남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는
마음을 다 잡았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지금 해야할 일은 죽은
사람을 위한 복수를 해야한다. 아울러 남은 후임병들을 챙겨야 한다.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총검을 빼낸 박광남은 송관석에게 조용히 경례를
올리고는 뛰기 시작했다.
"이야야야아-! 이 개새끼들아-!"
이수현은 권총의 탄창을 갈아 끼우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비규환이었다. 진지
곳곳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소대원들이 죽었는지 알
수 없었고, 진지에 침입한 적이 얼마나 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피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적을 사살하는 일뿐이었다. 더불어서
부하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탄창을 갈아
끼운 이수현이 진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앞을 향해 달려가면서 보이는
족족 적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3소대 힘을 내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라!"
총탄이 발사될 때마다 어김없이 적병 하나가 지옥 문턱을 밟았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적병도 죽었고, 누군가와 백병전을 펼치는 적병도 등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총검을 휘두르며 괴성을 지르고 달려오던 적병도 죽었다. 진지를 가로지르던
이수현은 어느새 4분대가 담당하고 있던 진지의 최측면에 도달했다. 거기도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 부하들과 적들의 시체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탕! 탕! 탕!]
"죽어라!"
"으아아악-!"
4분대 지역은 아직도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분대가 담당한 구역과는
달리 가장 많은 적들이 침입한 곳답게 여기저기에서 피가 튀고 살이 저며지는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수현의 눈에 4분대 부분대장 이학원 병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학원은 가슴에서 줄기줄기 피를 뿜어내면서도 아직 살아서 적을 죽이고
있었다. 이학원은 한 명의 적병을 죽이고는 자신의 가슴을 바라봤다. 구멍이 뻥 뚫린
방탄복 사이로 시뻘건 피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래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몸, 저승길의 동반자를 좀 더 많이 데리고 가자.'
이학원은 가슴에 매달려 있는 수류탄 두 발을 꺼내들고는 안전핀을 뽑아서 양손에
나눠 쥐었다. 이제 저승길의 동반자만 찾으면 된다. 그것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이학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적병
대여섯이 자신의 분대원인 우춘매 일병에게 떼로 덤벼드는 모습이 보였다. 우춘매는
힘겹게 저항하다 곧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학원이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이 개새끼들아! 다 죽어-!"
이학원은 적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잠시 후 수류탄이 굉음을 내며 그대로 터졌다.
[쿠쾅! 쿠웅!]
"학원아-!"
이수현이 이학원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때는 이미 수류탄이 터지면서 그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죽고 난 뒤였다. 방금까지 살아서 숨을 쉬던 생명들이 어느새
차가운 시체로 화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수류탄이 터지면서 발생한 먼지와
연기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학원아-!"
이수현은 그대로 주저앉으며 이학원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소대장이 돼 가지고
자신의 소대원들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이제 다 끝났는데, 다 끝났는데 죽긴 왜 죽어! 왜! 왜!!"
어느덧 총성도 잦아들고 있었고, 곳곳에서 들려오던 악에 받친 소리들도 줄어들고
있었다. 한참을 주저앉아 있던 이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얼마나 많은
소대원들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소대원들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