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3소대가 담당하는 구역은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총성, 화염과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적 포병이 쏘는 포탄이 3소대 외곽 방어진지로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고,
반대로 화기소대에서 발사하는 40mm 유탄은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벌떼처럼 퍼붓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조명탄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고, 예광탄이 빛줄기를 뿜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빗발치는 화염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빗발치는 아군의 사격과 포격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적은
순식간에 제일 취약한 3소대 4분대 철조망 지대로 새까맣게 밀려들었다. 거의 300명
이상의 적이 4분대의 철조망 지대로 몰려드는 것을 본 이수현이 한식보총을 발사하며
소리쳤다. 적을 향해 사격하는 와중에도 소대의 지휘에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쉬지 말고 사격해라! 우리가 뚫리면 중대가 위험하다!"
[빵! 빠방! 빠바방! 빵!]
[투타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타타탕!]
[펑! 퍼벙! 펑! 펑!]
3소대의 전 장병들이 4분대를 지원하기 위해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적도
악착같았다.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드디어 철조망을 넘는 적들이 생겨났다. 철조망을
넘은 적들은 3소대 진지 정면으로 괴성을 지르고 소총을 발사하며 몰려들었다.
[빵! 빠방! 빵! 빠바방!]
"소대! 수류탄 투척 준비!"
이수현은 적의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적이 수류탄 투척 가능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을 보고 새롭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 바야흐로 근접전에 돌입해야하는
시기였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수류탄 투척!"
[쿠쾅! 쾅! 콰콰쾅! 쿠콰쾅!]
수십 발의 수류탄이 일제히 폭발하면서 접근하던 적들이 산산조각 나며 폭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고래고래
지르며 달려드는 적의 모습은 악귀가 따로 없었다.
"소대! 착검! 모두 백병전에 대비하라!"
드디어 적들이 진지 인근까지 접근하자 이수현이 이렇게 명령했다. 이제 적의 얼굴을
정면으로 맞대고 힘과 용기로 점철된 백병전을 펼쳐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바야흐로 적의 뼈를 부수고, 살을 가르며, 적의 피로 목욕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다행히 살아서 진지 쪽으로 달려오는 적은 많지 않았다. 적이 3소대
진지로 육박하는 것을 확인했는지 화기소대와 다른 소대의 지원사격도 어느새 뚝
끊기고 말았다. 적 포병의 포격은 사격 목표를 수정했는지 진지를 넘어 전술기지의
좀 더 안쪽으로 가해지고 있었다. 이제 한 번의 사격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이수연은 한식보총을 버리고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외쳤다.
"죽여라!"
"우와와와아-!"
적들이 진지 외곽까지 밀려들고, 소대장의 백병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들은
배장춘은 난감했다. 한식보총을 사용하는 일반 소총수라면 간단히 총검을 결합하고
백병전에 대비할 것이나, 한-4198식 기관총 사수인 자신은 달랐다. 14kg에 육박하는
한-4198식 기관총을 들고 백병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옆에 있던 부사수 이영복 일병도 그런 사수의 고민을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배장춘은 이영복에게 말했다.
"영복아! 탄띠 이리 줘라."
"어떻게 하실려구요."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조심해."
죽어라 사격하는 통에 이미 바지에 똥 싼 기억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그는 입고
있던 우의를 벗어 던지고는 한-4198식 기관총의 멜빵을 왼쪽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어
맸다. 그리고는 이영복이 건네준 한 묶음의 탄띠를 다시 왼쪽 어깨에 걸었다.
무거웠다. 14kg에 육박하는 한-4198식 기관총의 무게에다 탄띠의 무게까지
더하게되자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웠다. 배장춘이 한-4198식 기관총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이, 진지 곳곳에 적들이 뛰어들었다.
"죽어라!"
"이런 개새끼들! 죽어!"
"ばかやろ!"
조선말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왜국말이 난무하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서 터져 나왔다.
총성도 들렸고, 뼈가 부서지고 머리가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ちっしょ!"
막상 비장한 결심으로 한-4198식 기관총을 어깨에 매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배장춘을 향해 적병 하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달려들었다. 적병은 총검을 결합한 소총을 들고 배장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놀란 그는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탕!]
"개새끼! 놀라 죽는 줄 알았네."
달려오던 적병은 그대로 벌집이 되고 말았다. 배장춘은 이대로 있어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진지를
뛰쳐나갔다. 이때만큼은 어깨에 둘러맨 기관총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괴력이었다. 배장춘은 적들이 몰려오는 방향을 향해 그대로 진지를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배 상병님! 미쳤어요!"
이영복이 무어라 했는데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아! 다 죽어!"
[투타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으악! 크아악!"
"아아악! 크아아악"
배장춘은 괴성을 지르며 사방에 널린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따로
조준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깔리고 깔린 게 적이었다. 배장춘은 비에 젖어
미끄럽기 이를 데 없는 길을 죽어라 달리며 적이 보이는 족족 실탄을 퍼부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탕!"
[철크덕! 철컥!]
하지만 그가 왼쪽 어깨에 걸어 맨 탄띠는 무한정 실탄을 공급해주지 않았다. 실탄이
바닥난 것이다. 실탄이 바닥난 줄도 모르고 적을 향해 돌진하던 배장춘은 흠칫했다.
아직 적은 많았는데 벌써 실탄이 바닥나다니... 배장춘이 이런 생각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전방에서 그를 발견한 적병 하나가 달려들었다. 피아가 뒤섞인
난전 중에 하필이면 나한테 달려들다니! 배장춘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빵!]
"배 상병님! 뭐하세요! 정신 차리세요!"
"으잉?"
배장춘은 감았던 눈을 살짝 떠봤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부사수 이영복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아까 그 총소리는? 그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자신이 진지를 뛰쳐나왔을 때부터 이영복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배장춘이었다. 배장춘은 이영복이 오늘처럼 예뻐 보인 때가 없었다.
"너였구나. 히유, 살았다."
배장춘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쁨이
크겠는가. 그는 갑자기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픈 것을 느꼈다. 적을 향해 돌격할 때는
느껴지지 못했던 기관총의 무게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