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01화 (301/318)

8.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한

기세로 조선군의 가시 철망 지대로 접근하던 수백 명의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했지만 무표정하기만 했다. 어차피 저들은 주공(主攻)이 아닌 조공(助攻)

이었다. 조공은 주공이 공격하기 전까지 적의 시선을 붙들고 시간만 끌어주면

그것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이쪽의 공격이 주공이라고 조선군이

판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얼굴 표정이

그랬을지 몰라도 속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금 조선군을 공격하는 부대는 자신의

동생인 구로다 기요오카(黑田淸鋼)가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형의 그늘에 가려

죽은 듯이 지내야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조공부대를 이끌고 출정하라고 한

것은 죽으라는 소리였다. 자신도 어느 정도 조선군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이 살아남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조선군이 막강하고 하지만

이렇게 막강할 줄은 몰랐다. 하늘 높이 치솟아서 주변을 대낮처럼 밝히는 희한한

폭탄도 그렇고, 방금의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하는 포탄도 그랬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존재가 조선군이었다. 전체 조공부대의 병력이 1500명이 약간 안 되는

숫자였는데 벌써 절반 이상이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 중에는 자신의 동생도 있을지

몰랐다. 말이 좋아 전투력을 상실한 것이지 전멸이나 마찬가지였다.

"구로다님. 적이 너무도 막강합니다. 이러다 조공부대 전원이 옥쇄(玉碎)해야할지도

모릅니다."

부관 다나카 타이지(田中太治)의 진언이었다. 구로다는 젊은 부관 다나카를 한 번

힐끗 쳐다봤다. 그러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이런 젊은이까지 처절한 전투의

한복판에 세워야 한다는 게 마음 아팠지만 지금은 싸구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구로다는 무어라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나카 군(君)"

"예. 구로다님."

"군은 우리가 이 전투에서 이기길 바라는가?"

"당연합니다."

"왜지? 우리가 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거야..."

다나카는 말문이 막혔다. 겨우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진지를 자신들은

2개 연대 병력을 동원했고, 거기에 더해 휴가번에서 지원해준 1개 연대까지 투입할

예정이었다. 무려 5천명이 넘는 대부대가 겨우 200명도 안 되는 적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절망적이었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소리였다. 더구나

휴가번에서는 겨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지원해 주면서 더 이상 휴가번 지역으로

월경(越境)을 불허한다는 최후 통첩까지 한 상태였다. 조선군의 공격을 손에 손을

맞잡고 대응해도 될까말까한 상태인데 휴가번의 머저리 번주는 조선군의 표적이 오직

사쓰마번 하나만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기야 조선의 영토인(?) 류큐를 공격한

번이 사쓰마번이었기에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휴가번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형편이었으니, 구로다가 이끄는 남아있는 사쓰마번 군사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류큐로 원정간 1만의 병력과 해군 함정들만 있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초반에 조선군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만 했어도

이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조선군이 가고시마에 상륙하면서부터 지금껏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후퇴에 후퇴만 거듭했다.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밀리다가는 가까스로 모은 병력이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공중 분해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선택한

공격이었다. 이번 공격이 성공해서 적의 진지를 초토화시키고 아울러서 타루미즈(

乘水)에 있는 조선군 병참기지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계획된 전투였다. 다행히 타루미즈의 조선군 병참기지의 경비병력은

별게 아니라는 척후의 보고까지 있던 터였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 조선군을 몰아내는 발판으로 삼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나카 군."

"예. 구로다님."

다나카는 구로다의 싸늘한 말에 자세를 바로 했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키지 말아라. 나도 알고 있고, 군도 알고 있다.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우리는 결코 조선군을 물리칠 수 없다. 그런데 왜 적의

진지를 공격하느냐!"

"......?"

"억울해서다. 이런 식으로 밀리고 밀려서 결국 다이헤이요우(太平洋)에 빠져

죽기에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전통이, 우리의 지난날이 너무도 억울하다. 그렇지

않은가?"

"......"

"나는 우리가 죽기 전에 적어도 사쓰마 남아의 기개를 조선놈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간악한 저 조선놈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뚜렷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다나카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방금 구로다가 말한 것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런데 구로다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원 옥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친 것이다. 구로다의 말은 계속됐다.

"울지 마라. 다나카 군. 우리는 오늘 죽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혼(魂)만은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면면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언제고

우리 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구로다님."

"다나카 군!"

"예. 구로다님."

"조공부대에 연락해서 계속해서 돌격하라고 해라. 아울러 포병대에도 명령을 내려라.

쉬지 말고 사격하라고! 조공부대와 포병대가 조금만 분전하면 바로 주공을 투입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구로다님."

아직까지 조공부대를 지원하는 포병대의 피해는 없었다. 가끔씩 조선군이 포격이

포병대로 향하기는 했지만, 조선군의 포격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포병대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상태였다. 지금도 포병대는 꾸준히 지원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진 조선군 진지에 대한 정확한 타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조공부대에게 나름의 도움은 주고 있는 셈이다. 미국 육군의

3인치포를 복제 생산한 8문의 대포는 아직은 쓸만했다. 개전 초기 집성관이 포격을

받는 바람에 더 많은 대포를 끌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다나카는

조공부대를 독려하기 위해 목에 걸고있던 호각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사전에

약정된 대로 힘껏 불었다.

[삐이익-! 삐익-! 삐이이익-!]

날카로운 호각소리는 전장의 엄청난 소음을 뚫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마치 '나는

아직 살아있다!' 하고 발악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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