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박광남은 죽을 맛이었다. 달콤한 꿈나라를 채 헤매지도 못하고 외곽 방어진지에
투입되어 정체불명의 적을 맞아 분전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약 1개 소대 규모의
적을 단 한 명의 손실도 없이 자신의 분대가 물리쳤으니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자신의 분대가 외곽 방어진지에 투입되어 최초의 전투를 벌인 때가 자정이 못된
시간이었는데, 새벽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옴짝달싹 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진지에
몸을 파묻고 경계를 하고 있으니 좀이 쑤셔 죽을 것만 같았다. 후임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펼치고 있는 상황이니 짬밥을 조금 더 먹었다고 농땡이를 부릴 수도
없었다. 더구나 이놈의 모기는 얼마나 달려들던지 확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했던가?
좁아터진 진지에 짱 박혀 있느라 몸 여기저기에서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나려고
하는데 방금 전부터는 추적추적 비까지 내렸다. 후임병들이 내무반으로 달려가서
분대원들의 우의를 일괄적으로 가져와 더 이상 전투복이 젖는 일은 없었지만,
끈적끈적한 습기가 온 몸을 감싸고도는 게 미칠 지경이었다.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좁은 진지에 몸을 묻고 있는 박광남은 짜증이 왈칵 솟았다.
"이런 개 같은 놈들! 금방이라도 다시 쳐들어올 것 같더니만 코빼기도 안 비치네."
"누가 아니랍니까. 상녀러 새끼들."
벌써 몇 시간째 진지에 파묻혀 경계를 하고 있으니, 처음의 잘 벼려진 칼날과 같던
군기도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박광남이 말문을 열자 곁에 있던 유탄발사기 사수
이종석 상병이 맞장구를 쳤다. 이종석은 훈련소에서 교관과 조교들이 자주 쓰는
천군식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처음 천군 출신 교관들이 조선군 군관을
훈련시키면서 사용하던 욕과 말투가 지금은 전군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종석만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천군은 조선말을
버려 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말문이 트인 이종석이 이번에는
송관석에게 물었다.
"분대장님. 혹시 이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우리만 뺑이 치는 것 아닙니까?"
"뺑이를 치면 어떠냐. 우리가 뺑이 쳐서 우리 중대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쳐야지."
"그래도 그렇죠. 우리만 말뚝으로 경계를 서고 있자니 짜증나 미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분대장님. 제 놈들이 먼저 도발해 놓고 우리만 고생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
이종석의 불평에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모든 분대원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관석도 공감했다. 처음 도발한 왜놈들은 지금쯤 두 다리 쭉 뻗고 퍼
질러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들만 진지에서 밤을 새야한다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분대원들이 불평한다고 해서 자신까지 가세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참아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날이 밝을 거다. 그때가 되면 중대장님이
비상을 해제할 거야."
"날이 밝으려면 얼마나 남았는데요? 지금이 얼추 새벽 3시는 넘었을 테니 앞으로도
세 시간은 족히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 시간 씩이나' 라고 생각하지 말고, '세 시간 뿐이' 라고 생각해라. 그 편이
훨씬 편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이종석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기관총 사수 배장춘 상병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분대장님."
"왜?"
"저..."
"뭔데?"
"저... 뒷간에 좀 다녀오면 안될까요?"
"뭐? 뒷간?"
"아까부터 배가 살살 아픈 게 영 시원치 않아서리..."
"이런... 얼른 갔다 와!"
"알겠습니다. 분대장님."
배장춘이 반색을 하며 진지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도성용 일병이었다.
"분대장님. 뭔가가 잔뜩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뭐?"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송관석은 도성용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분대원들과 잡담을
나누느라 적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명 발자국 소리였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엄청난 병력의 발자국 소리였다. 시계가 영(零)인 상태인지라 정확한
거리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불모지 작업을 해 놓은 곳까지 적이 접근한 것으로
보였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소대 1분대 병사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전방을 주시했다. 모두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도록 오른손 검지를 한식보총의
방아쇠 울에 끼어놓고 있었다. 뒷간에 가겠다던 배장춘도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쏟을 것 같은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항문은 옥죈 상태였다. 다행히
야간이라서 그의 표정을 다른 분대원들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본인은 죽을
맛이었다. 송관석이 수타식 조명탄을 다시 손에 쥐었다. 아직 조명지뢰가 설치되어
있는 곳까지 적이 접근하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확실한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송관석은 자신의 한식보총을 모로 누이더니 넓적한 개머리판을 향해 수타식 조명탄을
그대로 내려쳤다. 펑! 소리와 함께 긴 꼬리를 드러내며 조명탄이 하늘로 솟았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의 함성이 들렸다.
[둥! 둥! 둥! 둥!]
[삐리리리리릭! 삐리리릭!]
[우와아아아아!]
"적이다!"
"아직 사격하지마! 기다려! 적이 좀 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려라!"
한식보총의 최대 사거리는 4km가 넘었고, 유효 사거리는 1km가 넘었지만 송관석은
중대장의 명령대로 실탄을 아끼기 위해서, 적을 보다 확실히 무찌르기 위해서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적이 조금만 접근하면 화기소대에서 박격포를 발사할지도
모르는데 미리 설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