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98화 (298/318)

5.

"기상! 어서 일어나라! 모두 기상!"

근무 교대 후에 간단히 씻고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있던 박광남은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옆에서 잠들어 있던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석유등에 비친 병사들의 얼굴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1분대장 송관석 하사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병사들에게 발길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란 소리 안 들리나! 빨리 못 일어나! 비상이란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분대장님."

"박광남! 비상이란 소리 못 들었나! 어서 애들 데리고 외곽 방어진지로 못 뛰어가!

너 말년 병장이라고 개기는 거야!"

"아, 아닙니다. 뭐하냐! 어서 단독군장으로 집합해! 서둘러!"

송관석에게 한 소리 얻어먹은 박광남은 애꿎은 후임병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한참

단꿈에 젖어있던 병사들은 아쉬운 듯 아직도 침상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송관석과 박광남의 호통소리에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속옷 차림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들은 서둘러 전투복을 입고 방탄복을 착용했다. 성질 급한 어떤

병사는 전투복 바지만 입고 윗도리는 방탄복만 걸친 채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송관석이 다시 소리쳤다.

"복장 똑바로 해라! 단독군장이란 말 몰라! 말뚝을 서야할지 모르는 데 어떤 놈이

방탄복만 입나! 야전상의까지 다 입어라!"

이때, 재빨리 복장을 갖춘 병사 하나가 내무반 유개호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보였다.

분대 총기 관리 병이었다. 내무반 입구에 있던 송관석은 그를 붙잡았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중대 행정반으로 총기함 열쇠를 가지러 갑니다."

"열쇠는 내가 가져왔다. 어서 시건장치 풀고 총기 나눠줘. 그리고 탄통하고 수류탄도

가져왔으니 분배하고!"

"알겠습니다."

손관석은 총기 관리병에게 열쇠를 넘겨준 뒤 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훈련이 잘된

분대원들은 어느새 복장을 차려입고 총기와 실탄, 수류탄을 받고 있었다.

"어서 우리 분대가 담당하는 외곽 방어진지로 뛰어가라! 선임병들은 후임병 잘

챙기고!"

"알겠습니다."

3중대 3소대 1분대 병사들은 미리 정해진 방어구획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개호로 이루어진 내무반을 빠져나온 병사들은 송관석과 박광남의 인솔 하에

한식보총(韓式步銃)을 덜렁거리며 뒤뚱뒤뚱 뛰었다. 턱 끈을 조이지 않은 철모는 뛸

때마다 자꾸 숙여지며 시야를 가렸고, 씰룩거리는 엉덩이는 뛸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수통을 때렸다. 곳곳에서 3중대 병사들이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게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위는 깜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중대 전술기지

구석구석을 다 아는 병사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박광남은 후임병들을 이끌고

3소대 1분대가 담당하는 외곽 방어진지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얼마 전에 자신이

근무하던 외곽 초소의 바로 옆이었다. 외곽 초소에는 자신과 근무 교대를 한

전경수와 김창동이 지향사격 자세를 취하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광남은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추고는 전경수를 불렀다.

"전경수."

"예. 부분대장님."

"어떻게 된 거야?"

"예?"

"왜 이렇게 난리냐구?"

"예. 아까, 그러니까 몇 분쯤 전에 우리 초소 바깥의 불모지 지대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침 순찰 중이던 일직사관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그것 뿐이야?"

"예. 그것 뿐입니다."

박광남은 허탈했다. 겨우 인기척을 느꼈다는 보고를 가지고 전 중대에 비상을 걸다니!

중대장이 미친 것 아냐? 아무리 적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었다고는 하지만-사실

그것도 의문이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전 중대에 비상을 걸다니! 겨우 잠이 들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비상을 걸다니! 박광남은 중대장이 야속했다. 허탈한 나머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입이 있는 대로 튀어나온 그가 투덜거리며 전방을

주시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온통 새까만 어둠만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바깥의 철조망 지대로 무언가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박광남은 눈을 부릅뜨고 철조망 지대를 관찰했다. 분명히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분대장 송관석 하사를 찾았다. 송관석도

박광남이 확인한 것을 느꼈는지 뚫어지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송관석이

박광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관석이 수타식 조명탄을 꺼내들었다. 정체불명의 접근자들은 아직

조명지뢰의 인계철선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좁은 범위만 밝히는 수타식 조명탄보다

훨씬 밝고 넓은 지역을 비추는 조명지뢰만 터진다면, 정체불명의 접근자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것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아쉬운 생각을 하며 송관석이 손에

든 수타식 조명탄을 내리치려고 하는데, 전방의 철조망 지대 근처에서 펑!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내뿜는 물체 하나가 하늘로 솟구쳤다. 조명지뢰였다. 조명탄은 긴

연기를 꼬리처럼 내뿜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최대 상승고도까지 올라간 조명탄은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3소대 1분대 병사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전방의 철조망 지대 인근에 약 1개 소대 규모의 적이 접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송관석이 소리쳤다.

"적이다! 사격개시!"

[빵! 빵! 빠바방! 빵! 빵! 빠바바바방!]

[투타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탕!]

[펑! 펑! 펑!]

한식보총과 한(韓)-4198식 기관총, 유탄발사기가 굉음을 토하며 발사되기 시작했다.

1분대 병사들이 일제사격을 가하자 철조망 지대로 접근하던 정체불명의 적 병력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3소대 1분대가 담당하던 외곽 방어진지에서 조명지뢰가 하늘로 치솟고, 총성이 울려

퍼지자 중대 지휘소에 자리 잡고 있던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야?"

"3소대 쪽입니다. 중대장님."

"3소대요?"

"그렇습니다. 중대장님. 어떡할까요?"

"음..."

정경진은 침음성을 삼켰다. 대대 참모들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한바탕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행보관님. 화기소대 박격포반에 명령해서 조명탄을 쏘아 올리라고 하세요. 그리고

전령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정경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양수연은 지휘소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명탄 몇 발이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3중대 전술기지는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정경진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거의 300m 정도나 떨어져

있었기에 모든 상황이 제대로 보일 리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3소대가

담당하고 있는 남쪽의 외곽 방어진지 쪽을 바라봤다. 3소대 담당구역에서는

한식보총과 한-1 기관총의 발사음이 연이어 들렸고 유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간간이 적의 비명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3소대가 효과적으로 적을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정경진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있었다. 한식보총

특유의 발사음만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적의 공격이나 응사는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게 전장(戰場)이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몰랐기에

긴장의 끈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를 찢을 것 같은 총성이 난무했는데, 어느새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정경진의 마음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비록

중대장의 신분에 있었지만 처음 맞는 실전이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의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얼마가지 않았다. 지휘소 밖에서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몇몇 간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중대장님."

3소대장 이수현 소위였다. 정경진을 포함한 다른 간부들의 눈과 귀가 이수현에게로

쏠렸다.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3소대 1분대가 담당하던 외곽 방어진지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3소대 1분대가 거둔 전과는 대단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20명이 넘는 적을 사살한 것으로 관측됐다.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그러면서도 3소대 1분대의 피해는 없었다. 이수현의 보고에 지휘소 안에 있던

간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겨우 척후병으로 보이는 적을 무찌른 것에

불과했지만, 초전(初戰)에 적의 도발을 분쇄했다는 자신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정경진도 기쁜 표정이었다. 하지만 막강 해병대 장교답게 자만하지는 않았다. 아니,

처음 맞는 실전이라는 측면에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려는 마음이었는지도

몰랐다.

"1개 소대 규모의 적병이라면 적이 아군의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보거나 대부대

공격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작전상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은 반드시

가까운 시간 내에 재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때는 이번처럼 소부대의 공격이 아닌,

대부대의 전면 공격이 될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본 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특별

조치를 내린다. 먼저 각 소대가 담당하는 외곽 방어진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시키고

진지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지급된 실탄과 수류탄의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여 균등하게

분배한다. 적이 우리가 보유한 실탄이 모자랄 정도로 대규모로 몰려올 것에 대한

대비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그리고 각 소대의 공용화기와 개인화기의 사격구역을 재검토하여 불필요한 실탄의

낭비를 줄인다. 또한 화기소대의 박격포와 한-1 고속 유탄발사기의 화집점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마찬가지 이유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각 소대는 맡은바 책임을 다하여 주위를 철저히 관측하고 적의 도발을 사전에

분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지금부터 우리 3중대는 초비상 사태에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정경진의 명령을 받은 각 소대장들이 각자의 소대로 달려갔다. 양수연은 정경진을

바라봤다.

"대대 전술지휘소에 전령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밤에 말입니까? 적이 사방에 깔렸는지도 모르는데요?"

"하기야 그렇군요."

"대대에서도 방금의 전투를 확인했을 겁니다. 어쩌면 외인부대 수색조 대원들에게

지원을 명했을 수도 있구요."

"예..."

정경진의 말대로 대대에 보고를 하고 싶어도 달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는 무리였다.

더구나 어느 곳에 적이 깔려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애꿎은 전령만 희생할

공산이 더 컸다. 지금으로서는 적의 공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했다. 정 안되게 생겼으면 비상용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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