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야. 기세창. 건빵 가져왔냐?"
"일병 기세창. 여기 있습니다. 부분대장님."
기세창은 야전상의 안에서 건빵 한 봉지를 꺼내 박광남에게 건넸다. 밤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이미 사위는 캄캄했다. 기세창이 건네준 건빵 봉지를 박광남이
뜯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물우물... 너도 먹어라."
"감사합니다. 부분대장님."
"감사하긴... 니가 가져온 것인데."
"그런데 말입니다. 부분대장님."
"응?"
"아까 중대장님이 말씀하신 게 무슨 뜻입니까?"
"아! 그거... 음... 야. 물 좀 주라."
"여기 있습니다."
기세창은 박광남에게 수통을 건넸다. 그냥 건넨 것이 아니라 수통의 뚜껑까지 열어서
건넸다. 일반적으로 경계병들은 수통에 물을 완전히 채우고 근무에 나가야 했지만
실제로는 부사수만이 수통에 물을 채워서 나갈 뿐이었다. 사수, 즉 선임병은
후임병에게만 수통을 채울 것을 지시하고는 자신은 빈 수통만 덜렁거리며 근무에
나오기 일쑤였다. 수통에 채워진 하찮은 물이라도 근무지까지 걷는 동안 느껴지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그런 식으로 부사수만 혹사시켰다. 숙소에서 중대
전술기지 외곽 방어진지의 초소까지 겨우 200m~300m 떨어진 것에 불과했지만,
조선에서의 근무 관행에 익숙한 병사들은 의례 사수는 빈 수통으로, 부사수는 물을
꽉 채운 수통을 허리에 달고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박광남도 그랬다. 그는
기세창이 내민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저녁시간에 취사병들이 끓인 물이라 시원할 리
없었다. 그래도 갈증은 해소할 만 했다.
"뭐라고 했지?"
"예. 아까 막사에서 중대장님이 하신 말씀있잖습니까?"
"응. 중대장이 뭐라고 했지? 뭐더라? 아! 경계근무 잘 서고 이상 징후가 있으면 주저
없이 조치한 후에 보고하라고 했지. 너도 들었잖아."
"예.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중대장님의 말씀은... 뭐랄까, 유독 경계근무 잘
서라고 강조하시는 게 좀 이상했습니다."
"기세창."
"일병. 기세창!"
"조용히 해. 새꺄!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
"일병 기세창. 시정하겠습니다."
기세창은 박광남의 주의에 금새 소리를 낮춰 복창했다. 박광남은 행여 순찰자가
오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고개를 쭉 빼서 주의를 둘러보았다. 야간에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기 때문에 전술기지 내의 다른 간부들도 들었을지 몰랐고, 저 멀리에
있을지 모르는 적군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적군보다는 순찰자나 다른 간부들이
듣는 게 더 괴로웠다. 그는 기세창에게 눈알을 한 번 부라려 주의를 주고 말을
이었다.
"기세창."
"일병 기세창."
"조용히 들어라. 그리고 너만 알고 있어. 딴 애들한테 입만 뻥끗하면 너는 그 날
부로 군 생활 다 한 거야. 알아들어."
"예. 알겠습니다."
속으로는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지만 기세창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 인간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말할 때가 많았으니 일단은 순순히
대답하고 볼 일이었다.
"아까 간부들이 얘기하는 걸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며칠 내로 우리 중대 전술기지가
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예-에? 그게 사실입니까?"
"이 새끼가 조용히 하라니까."
"시정하겠습니다."
"나도 지나가다 들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는데 간부들 얘기가 대대에서 전령이 왔다나
어쨌대나. 아무튼 그랬대나 봐. 그래서 특히 경계근무를 잘 서라고 한 걸 거야."
"그럼, 언제 적군이 쳐들어온답니까?"
"새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간부들도 모르는데."
박광남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기세창은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고대하던
전투를 할 수 있단다. 이제 나도 왜놈들을 무찌르고 당당히 훈장을 받을 수 있다! 이
생각을 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헌데 왜 그 사실을 우리 중대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을까요?"
"글쎄...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에이,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런 것까지 알려구
하면 머리만 아프다. 근무나 잘 서라."
"알겠습니다. 부분대장님."
기세창의 대답을 뒤로하고 박광남은 남은 건빵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 아주 잠깐, 왜
알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딴 데로 돌렸다. 어차피
확실한 것도 아닌데 괜히 병사들 마음에 바람만 집어넣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중대장 이하 간부들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박광남은 기세창이 잔뜩
웅크린 채로 철조망 밖을 주시하자 모자라는 잠을 보충할 생각인지 철모를 깔고 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숙달된 경계병이라면 자면서도 귀를 열어놓을 수 있었고, 몇 km
떨어진 곳의 발자국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얼마나 가면(暇眠)을 취했을까? 박광남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무료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기세창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세창은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전방을 향해 몸을 웅크리고 방아쇠 울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알 수 없는 충격이 가해졌다.
[딱!]
"어딜 보고 있어! 교대 근무자들 오는데."
기세창은 그때서야 다음 말번 근무자들이 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동안 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교대 근무자들이 오는 소리를 들었을까? 이래서 짬밥이
무서운 건가? 기세창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총구는
자신의 전방, 그러니까 중대 지휘소 쪽을 향하고 있었다. 박광남은 어수룩한
부사수의 몸짓에 실소(失笑)를 흘렸다.
"다음 근무자가 누구냐?"
"전경수 상병과 김창동 이병입니다."
"그래? 그럼 니가 수하(誰何)해라."
"알겠습니다."
원래 모든 경계근무자는 전 근무자와 다음 근무자가 누군지 확실히 숙지해놔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것은 부사수의 몫이었다. 사수는 일일이 그런 것을 확인하기
귀찮아했고 모든 것을 후임병에게 일임했다. 더구나 수하와 같은 것도 사수가
해야하는 것이지만 다음 교대 근무자가 후임병일 경우에는 부사수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박광남도 다음 교대 근무자가 자신보다 후임병이었기에 부사수인 기세창에게
수하를 맡긴 것이다. 기세창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수하를
했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교대 근무자들도 부사수인 김창동이 수하에 응했다.
앞에서와 같은 경우였다. 이윽고 교대 근무자들이 초소로 들어왔다. 초소라고 해봐야
교통호가 약간 밖으로 튀어나온 정도였으니 금새 꽉 차버렸다.
"야! 전경수."
"상병 전경수."
"훈장 탈지도 모르니까 근무 잘 서라."
"예?"
"근무 잘 서라고. 적병이 접근하는 걸 사살하면 훈장이라도 줄줄 알어?"
"에이, 설마요. 왜놈들이 나 잡아주쇼! 하고 오겠습니까?"
"농담 아냐. 임마. 오늘은 무월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어두워. 이럴 때 적병이
침투할 수도 있다고."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 병장님."
"그래 수고해라."
"충성. 수고하셨습니다."
박광남은 대충 경례를 받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생각에 기세창이 따라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세창도 전경수에게 경례를 한
후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의 몸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