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행보관님. 외곽 방어진지의 구축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아직 다 마무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워낙 지반이 단단하고 돌들도 많아서...
하지만 내일까지 작업을 하면 얼추 마무리는 될 것 같습니다."
"음... 어느 소대가 제일 더딘가요?"
"다른 소대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3소대가 담당한 방면이 가장
더딥니다. 중대장님도 아시다시피 그쪽이 유난히 지반이 단단한 것이 원인입니다.
암석도 많구요."
"그럼, 지뢰의 매설도 늦어지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중대장님."
"음..."
해병 1여단 3연대 3대대 3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중대 행정보급관 양수연 상사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외곽 방어진지의 구축도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지뢰지대의 구축도 늦어지게 생겼다. 이런 상태라면 적의 접근을 초반에
적발하여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오로지 청음초와
경계병들의 눈과 귀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주간이라면 몰라도
야간이라면, 특히 거의 무월광(無月光)이라고 할 수 있는 캄캄한 밤에는 적이
코앞까지 몰려와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장경진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양수연도 중대장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뢰지대가 구축되지 못한 게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대신 외곽 방어진지 밖으로
다수의 조명지뢰와 지향식지뢰를 설치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대장님."
"잘했습니다. 일단 그거라도 있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의 보고였지만 한결 안심이 되었다. 정경진은
중대 지휘소에 모여있는 각 소대의 소대장과 선임부사관들을 바라봤다. 오늘도
회의는 이걸로 끝인가? 아무 문제없이? 일부 간부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약간은
허탈한 표정을 짓는 게 그의 눈에 띄었다. 그들의 실망한 표정에 정경진은 한 가닥
고소(苦笑)가 피어오르려고 했다. 얼마나 전투가 하고 싶으면 저럴까?
"아까 대대에서 전령이 왔다 갔다."
"......?"
"......?"
이미 대대에서 전령이 온 것을 알고 있는 몇몇 간부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이제나저제나 그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반대로 대대에서 전령이
왔다간지 모르는 간부들은 의아한 생각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혹시?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온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었다.
"대대 참모들은 며칠 내로 적의 대규모 공격이 우리 대대로 집중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 대대로 말입니까?"
"그렇다. 대대에 배속된 외인부대 수색조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도출된 결론이라고
하니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대 참모들의 판단이다."
"그럼 우리 중대가 공격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 아닙니까?"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의 말이었다.
"맞다. 김 중위.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 대대의 각 중대 전술기지 중에서 우리 3중대
전술기지만이 유난히 돌출 돼 있고, 지형적으로도 불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다른 중대의 전술기지와의 유기적인 협조도, 대대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구나 우리 중대의 뒤로는 연대 보급물자를 비축하고 있는 승수(乘水)
포구의 보급창까지 다른 전술기지가 없다. 대대 참모들은 만약 우리 대대가
공격받는다면 우리 3중대가 제일 먼저 공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금 3대대 3중대가 담당하고 있는 녹실(鹿室)지역은 간옥천(肝屋川)을 끼고 발달한
농업 덕분에 주변에 크고 작은 마을이 많았다. 더구나 크고 작은 야산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야산은 바깥으로는 암석이, 안으로는 밀림이 형성되어 있어서
적의 대규모 이동이나 집결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조선군은 그러한 움직임을
관측하기 어려웠다. 사쓰마군과 인근의 휴가번 군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적합했고 숨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더구나 녹실지역은
사쓰마번과 휴가번을 잇는 일향가도를 제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3중대 전술기지는 약 80미터 정도의 야산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었고, 3중대 전술기지만 통과하면 곧바로 다다를 수 있는
승수포구까지는 호수와 습지, 전답과 오솔길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다른 전술기지는 없었다. 말 그대로 3중대가 뚫리면 소수의 경비병력만이 지키고
있는 승수포구의 보급창은 순식간에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었다. 만약
승수포구의 보급창이 적의 손에 들어가거나 파괴당한다면, 일향가도를 담당하고 있는
3연대 병력은 맨손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대대 참모들은 전령을 보내 3중대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은 지시한 것이다. 중대장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른 중대의 전투를 마냥 부러워만 해야 했는데 이제
드디어 고대하던 전투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전투가 없어서 지루했었는데 잘됐습니다. 중대장님. 우리 중대는 적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여도 끄떡없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 소위의 말이 맞습니다. 중대장님. 아직 전술기지의 외곽 방어진지도 완성되지
않았고 지뢰지대도 구축되지 않았기에, 완벽한 전술기지로서의 면모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 장병들은 내심으로 적의 공격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참에 사쓰마군의 잔당들을 모조리 소탕해 버리죠."
동안(童顔)의 1소대장 신원배 소위의 말은 받은 김기홍의 말에 중대 지휘소에 자리한
모든 간부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공감한다는 뜻이었다.
정경진은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중대원들이 그동안 얼마나
적과의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정경진도 느끼고 있었는데
일반 병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상되는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된다고 합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외인부대 수색조의 보고로는 연대급 규모의
부대가 집결하는 징후가 포착되었다고 하니, 그 이상일 것으로만 추측할 따름이다."
"호-오! 연대급이라. 더욱 잘됐습니다. 그 정도는 돼야 전투를 했다고 할 수 있죠."
"일단 가까운 시일 내로 적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각별히 전술기지의
경계에 신경 써 주기 바란다. 아무리 우리 중대의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경계에
실패하고서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각 소대장과 선임부사관들은 이점을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중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