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95화 (295/318)

2.

[퍽! 퍼벅!]

"으이구! 지겨운 삽질! 언제나 삽질을 안 하려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참호만 파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내가 알어. 임마!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것뿐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허구헛날 삽질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못 살겠습니다."

"너만 그러냐? 나도 마찬가지야 임마. 잔말말고 삽질이나 해."

길다랗게 늘어선 참호선 사이로 일단의 병사들이 사이좋게 삽질을 하고 있었다.

아열대 기후를 나타내는 구주는 조선에 비해서 상당히 따뜻했다. 조선은 겨울에

접어들었을 텐데 구주는 아직도 따뜻한 봄날 정도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야전상의와 전투복을 병사들은 삽질을 하면서 땀을 비 오듯 쏟아내고 있었다. 일부

더위를 못 참는 병사들은 야전상의를 벗고 전투복만 입은 상태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야전삽으로 참호를 건설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삽질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궁시렁댔다. 하기야 사쓰마번과 휴가번을 있는 일향가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80미터 고지에 주둔지를 정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삽질을 해대고 있었으니 불만이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호기롭게 왜놈들을

무찌르겠다고 녹아도에 상륙한지 어언 한 달하고도 보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삽질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지겨울 것인지. 그렇다고 다른 작전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일 주둔지 밖으로 매복도 나가야 했고, 일향가도를 지나다니는

왜인들 검문도 해야했지만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화끈하게 왜놈들을 때려부수는 것을 기대하고 왜국 땅 구주로 온 것이다. 당연히

허구헛날 삽질만 하라는 윗대가리들의 지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나 어쩌랴!

계급이 깡패라고 좆으로 밤송이를 까라고 해도 까야하는 게 군대였다.

"1분대! 10분간 휴식!"

분대장 송관석 하사가 소리치자 병사들은 들고 있던 야전삽을 내려놓고 참호에

기대어 앉았다. 부분대장 박광남 병장은 '10분간 휴식!' 소리가 들리자마자 잽싸게

야전삽을 놓고 그늘이 드리워진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았다. 역시 짬밥이 무섭긴

무서웠다. 입이 대빨 튀어나와 궁시렁대던 게 언젠데 어느새 자리를 잡고 완벽한

자세로 늘어진 박광남이었다.

"아이구, 죽겠다. 누구 담배나 하나 줘봐라."

"일병 기세창! 여기 있습니다. 부분대장님."

기세창이 건네준 군용 담배를 꼬나 문 박광남은 입을 쭉 내밀었다. 불까지

붙여달라는 소리였다. 이미 익숙해진 듯 기세창은 품속에서 성냥을 꺼내더니 불을

당겨 주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박광남의 표정은 느긋하기가 천하에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늘어진 상태였다. 기세창도 담배를 물었다. 비록 삽질하는 게 고되고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처럼 담배 한 개비 피울 수 있는 휴식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불만이라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직도 전투 한

번 못 치러본 것이다. 그저 언제 총 한 번 쏴볼까? 하는 생각과 혹시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정말 총 한 방 못 쏴보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 아냐? 하는 걱정뿐이었다.

박광남이 이런 기세창의 걱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야. 기세창."

"일병 기세창!"

"걱정 되냐?"

"예? 무슨...?"

"총 한 방 못 쏴보고 전쟁이 끝날까봐 걱정 되냐고."

"솔직히 그렇습니다. 부분대장님. 우리가 왜국 땅에 온지가 벌써 두 달이 다 돼

갑니다. 헌데 여태 전투는 고사하고 총 한 방도 못 쏴봤습니다. 어떻게 된 게 다른

중대는 전투도 곧잘 하고 전공도 많이 세웠다고 하는데 우리 중대만 이게 뭡니까.

정말 이러다 전쟁 끝날 때까지 전투 한 번 없는 것 아닙니까?"

[딱!]

"에라. 이놈아.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아직 이 구주 땅의 절반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전쟁이 벌써 끝날 리 없잖아. 조금만 기다려봐. 머지 않아 대규모 전투를

치를 날이 있을 거다. 그때 화끈하게 싸우면 되는 거야."

박광남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는 했지만 기세창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아직 구주를 점령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 사이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으랴? 아무리 오합지졸 왜놈들이라지만 언제까지 후퇴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놈들도 머리가 있다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너도 들어서 알지? 2, 2대대-병사들은 2연대 2대대를 줄여서 그냥 2, 2대대라고

부른다.- 3중대 소식."

"그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비록 2, 2대대 3중대가 기지를 습격한 왜놈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피해도 만만치

않게 입었다더라. 특히 왜놈들이 휘두른 칼에 죽은 애들은 모두 가슴에서 배꼽까지

칼질을 당해 내장을 모두 쏟고 죽었다더라. 방탄복까지 입었는데 그렇게 죽었다더라.

난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다행히 중대 전술기지가 다 완성되고 나서 적이 공격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그래봤자 2, 2대대 3중대의 피해는 얼마 되지 않지 않습니까? 걔네들이 입은 피해가

겨우 18명이 죽거나 상한 것인데 비해 왜놈들이 입은 피해는 엄청나지 않습니까?

중대장님 말씀으로는 사상자만 1300명이 넘고 포로도 200명 이상 잡았다고 하던데요?

덕분에 중대 전체가 일 계급 특진까지 하고요. 그런데 우린 이게 뭡니까? 날이면

날마다 삽질만 하고 있으니."

수후전투에서 2연대 2대대 3중대가 거둔 전과는 이미 신화가 된지 오래였다. 겨우

160명 남짓한 중대 병력으로 2000명이 넘는 연대 병력을 괴멸시켰으니 신화도 이런

신화가 없었다.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이런 승리를 해병대의 다른

중대에서 이루어냈다고 했을 때 당연히 칭찬부터 해야 했지만, 일반 병사들은 '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도 싸우게 해다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기창호의 볼멘 소리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게 다 중대 전술기지를 완벽하게 완성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임마. 알어? 우리가

이 더운 날씨에 땀 뻘뻘 흘리며 삽질하는 것도 다 살자고 하는 짓이라 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삽질은 너무 지겹습니다. 모양새 안 나게 허구헛날 삽질이 뭡니까.

가끔씩 지나가는 왜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기세창의 불만은 결국 그거였다.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봤는데 허구헛날 삽질만

하면서 지나다니는 왜인들한테 우스운 꼴만 보이는 것 아니냐? 이게 기세창의

불만이었다. 박광남도 기세창의 불만을 이해했다. 중대 전술기지라는 생소한 전술을

도입한 구주 정벌군 수뇌부가 야속했다. 정규군이면 정규군답게 적의 대규모

정규군과 접전을 펼쳐야 하는데 지금 구주 사정은 그렇지 못했으니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처음 도입한 중대 전술기지의 개념이 톡톡한 효과를 보고 있으니

일단은 중대 전술기지를 완벽하게 건설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이제 하루 이틀만

더 고생하면 지겨운 삽질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마음을

다잡을 따름이다. 기세창의 푸념에 박광남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지겨울 정도였다. 그는 이쯤해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었다.

"기세창."

"예. 부분대장님."

"너 오늘 야간 경계근무 나하고 같이 서지?"

"그렇습니까? 전 아직 근무편성표를 못 봐서 모르겠는데요."

"내가 이미 확인했어. 임마. 너 오늘 중번 근무 나하고 같이 서니까 그때 건빵 한

봉지 잊지 말고 챙겨와라.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헌데, 오늘 저희가 중번입니까?"

"그래, 임마. 내가 행정반 애들한테 중번으로 달라고 강력히 요청해서 그렇게 된

거야. 임마. 넌 사수 잘 만나서 복 받은 줄 알아야돼.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기세창은 힘차게 대답했다.

'오늘은 죽었다 깨어나도 건빵 한 봉지를 필히 챙겨야지.'

기세창이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박광남의 주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야간 경계근무는 3교대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저녁 6시에 시작되는 야간

경계근무는 다음날 새벽 6시에 끝나는데, 저녁 6시부터 8시까지가 초번 근무였고, 그

다음 두 시간이 중번, 다음 두 시간이 말번 근무라고 칭한다. 말하자면 군대식

용어다. 그런데 야간 경계근무는 말번이 제일 안 좋고 그 다음이 초번이었다. 말번

근무자는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서고, 다시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근무를 서야했으니

가장 안 좋은 근무배치라고 할 수 있었다. 3교대 상태에서 말번 근무에 걸리면 그

날밤은 잠이 들만 하면 근무를 나가야 하고,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와 잠깐 잠을 자고

근무에 나가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되도록 말번 근무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중번 근무는 가장 좋은 근무배치였다. 아직 초저녁인 8시부터

10시까지 근무를 서고, 다시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근무를 서는 것이 중번 근무인데,

최소한 몇 시간은 늘어지게 잘 수 있어서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근무였다. 이렇게

좋은 근무 시간에 배치된 것도 다 박광남이 행정반 요원에게 아부인지 요청인지를 한

덕분인데, 누구라도 중번 근무를 설 수 있게끔 힘을 썼다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감사의 표시를 할 필요가 있었다고 할까? 군대 생활 편하게 하려면 선임병에게

아부하는 요령도 있어야 했기에 자발적으로 건빵을 챙길 마음이 생긴 것이다.

박광남과 기세창이 시덥잖은 말을 주고받는 사이, 10분간의 꿀맛 같은 휴식시간은

끝이 났다. 분대장 송관석 하사의 말이 다시 들렸다.

"휴식 끝! 자! 다들 일어나라. 작업해야지."

"으이구, 지겨운 삽질을 또 하라네."

누군가의 푸념 섞인 소리가 들려왔지만 병사들은 하나둘 일어나 야전삽을 다시

잡았다. 이제 다시 삽질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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