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주에 상륙한 조선군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각각 북구주와 장기, 녹아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순조롭게 구주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상륙 초반에 사쓰마번의 번주
도진충의(島津忠義 시마즈 타다요시)와 번부 도진구광(島津久光 시마즈 히사미쓰)이
머물고 있는 학환성에 함포사격을 퍼부어 두 사람을 저승으로 보낸 해병 1여단의
앞을 가로막을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사쓰마번이 왜국에서 알아주는 강번(
强藩)이고, 구주 제일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번의 우두머리가 사라져 구심점이 없어진 상태였고, 유구과 대만으로 출병한
해군 함대와 일부 육군이 전멸한 상태였기에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그것은 북구주 방면에 상륙한 해병 3여단과 장기 방면에 상륙한
해병 2여단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기습공격을 펼친 조선군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구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쓰마번과
사가번 등 일부 신식군대를 보유한 번에서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조선군에
견줄 수는 없었다.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번은 뭐니 뭐니해도 사쓰마번이었다.
도진충의가 없는 사쓰마번에서는 번의 실권자 흑전청륭(黑田淸隆 구로다 키요타카)을
중심으로 남은 병력을 추슬러 조선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쓰마번이 신식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겨우 1개
대대 병력의 조선군에게 1개 연대, 또는 2개 연대의 병력이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국 사쓰마군은 근거지인 가고시마에서 퇴각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들이 조선군을 지능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적게는 몇 명에서부터 많게는 몇 백, 몇 천명으로 이루어진 사쓰마군의
패잔병들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조선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유격전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사쓰마군이 이런 식으로 대항할 줄 몰랐기에 해병 1여단
수뇌부는 당황했다. 그것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사쓰마군처럼 조직적으로
유격전을 수행한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패잔병들이 주축이 되어 펼치는 벼락같은
기습과 빠른 퇴각은 구주 정벌군 수뇌부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달리 무적이 아니었다. 사쓰마군을 비롯하여 구주의 제번(諸藩)에서
유격전으로 대항해오자 구주 정벌군에서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전술이다.
중대 전술기지 개념은 현대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도입한 전술인데, 월맹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식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蔡命新)
장군이 개발한 전술이다. 유럽이나 미 대륙과 같은 광활한 지역에서의 대규모
기동작전이 아닌 한국의 산악지형이라던가 월남의 밀림지형과 같은 특수지형에서의
작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동양인 특유의 인내력과 지구력, 순발력을 가지고
대응하여야 한다는 판단에서 개발된 전술이다. 중대 전술기지 개념은 세분해서 몇
가지 단계로 나눠진다. 첫 번째로 전술책임지역의 방위를 위한 거점을 구축하는데
목표를 두고 중대 단위의 전술기지를 설치하여 기지 주변의 전투정찰과 탐색을
실시한다. 두 번째로 공세로 이행할 발판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전술책임지역 내의
적의 지배지대를 수복, 평정한 후에 안정에 성공하면 전술책임지역 밖으로의
공격태세를 완비한다. 세 번째로 대부대 작전을 전개하여 전술책임지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여 경계선 밖에 있는 적을 격멸시키는 한편 점령지에 대한 완전한 평정을
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각 중대 전술기지는
책임 지역 내로의 적의 침투를 봉쇄하여 적의 연대 규모 공격에도 48시간 이상을
견딜 수 있도록, 탄약을 비롯한 모든 보급물자를 준비하고 아군의 포병지원 거리
내에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양헌수의 구주 정벌군은 채명신 장군의 중대
전술기지 개념을 보완하여 시행하였는데 대체적인 것은 한국군 중대 전술기지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가지 다른 점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 한국군이 48시간을
버틸 수 있는 보급물자를 비축한 것에 반에 조선군은 72시간을 버틸 수 있는
보급물자를 비축한 것이 달랐다. 보병용 무전기가 없고 아군 포병대의 효과적인
포병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 보병 대대별로 화기중대(
구(舊) 박격포중대)가 있었지만 화기중대는 기껏 박격포와 한(韓)-1 고속 유탄발사기,
벼락 기관총이 전부였으니 포병자원이라고 칭하기에는 어딘지 미흡했다. 두 번째로,
기동력 있는 기병대를 각 전술기지를 연결하는 부대로 활용한 점이 달랐다. 어차피
해병사단의 각 여단에 있는 포병대대는 기동력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효과적인 포병지원을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포병이 없기로 따지자면 구주의 제번(
諸藩)이 더했으면 덜했지 못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포병의 효과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중대 전술기지의 특성 상 기동부대가 그것을 대체한 것이다. 세 번째 다른
점은 대(對) 유격전 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한 점이다. 중대 전술기지 개념이 방어적
성격의 전술이라면 공격적 성격의 전술이 바로 대 유격전 부대의 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의 유격전 거점을 사전에 적발하여 직접 격멸시키거나 주변의 다른 아군과
공조하여 섬멸하는 게 대 유격전 부대의 임무였다. 중대 전술기지는 해병사단의 일반
중대가 전담하였고, 대 유격전 부대는 그동안 점령지에 대한 선무공작을 담당하던
외인부대가 동원되었다. 그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한 대민사업과 선무공작을 담당하던
외인부대는 이로써 당초 부대를 창설한 목적에 걸맞게 적의 유격전에 대항하는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임무를 변경되었다. 조선군이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전술을 도입하면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적의 소규모 기습과 같은
유격전에 의한 피해가 속출했었는데 중대 전술기지의 도입과 대 유격전 부대의
운용으로 조선군은 효과적으로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이 시행되면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전투를 꼽으라면 단연 수후(水候)전투가
유명했다. 상륙 초반에는 멋모르고 달려드는 구주 제번(諸藩)의 군사들 덕분에 제법
쏠쏠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구주 제번(諸藩)에서 유격전 개념으로-사실 이들은
유격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조선군을 괴롭히면서 별다른 전과가 없었기에
수후전투는 더욱 값진 전과였다.
수후지역은 사쓰마번의 녹아도에서 구마모토번의 웅본(熊本 구마모토)을 거쳐 장기로
이어지는 살마가도(薩摩街道 사쓰마가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 수후
인근에 해병 1여단 2연대 2대대 3중대가 전술기지를 세운 때는 조선군이 구주에
상륙한지 한 달이 약간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군은 구주의 3대 가도인 살마가도와
장기가도(長崎街道 나가사키가도), 일향가도(日向街道 휴가가도)를 장악하여 구주
제번(諸藩)의 연합을 차단하고 물자의 유통과 병력의 이동을 봉쇄할 목적으로, 3대
가도 곳곳에 중대 전술기지를 건설하여 운용하고 있었는데 수후 인근의 전술기지도
그런 경우였다. 2연대 2대대 3중대는 2대대 전술지휘소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전술기지를 세웠는데, 이는 조선군 야전교범에 따른 중대 전술기지 운용수칙에
의거한대로 건설된 것이다. 참고로 조선군 야전교범 중대 전술기지 운용수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대 전술기지는 사주방어 원칙에 의거하여 내곽, 외곽의 이중진지를 준비하되
중대 지휘소와 공용화기진지 및 취침호 등은 모두 유개호로 만든다.
둘째, 중대 전술기지는 조명지뢰와 지향식지뢰(클레이모어) 등 각종 지뢰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모든 조기경보수단을 최대로 활용한다.
셋째, 중대 전술기지는 기지 외곽으로부터 200m~500m 떨어진 지점까지 불모지작업을
실시하여 예상되는 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적발한다.
넷째, 중대 전술기지 외곽으로부터 150m~400m 떨어진 예상되는 적의 접근로에,
화기소대의 박격포와 한(韓)-1 고속 유탄발사기 등 모든 공용화기는 최소한 네 개
내지는 다섯 개의 화집점을 미리 설정해 놓는다.
이러한 중대 전술기지 운용수칙의 의거하여, 2대대 3중대가 수후 인근에 중대
전술기지를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음력 9월 20일 새벽에 1개 연대 규모의
구마모토번 군사들이 중대 전술기지를 공격했다. 그것도 주간에 감행한 공격이 아닌
야간 공격을 말이다. 하기야 주간에는 500m에 이르는 불모지지대를 통과하기도 전에
적발될 터고, 그동안의 전투로 조선군의 전투력이 상상외로 막강한 것을 알고
있었으니 노출이 쉬운 주간보다는 야간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야간에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조선군 중대
전술기지는 보통 200~300m의 다각형 방어진지로서 호를 깊게 이중으로 파고 장애물과
각종 지뢰를 매설하여 진지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건설된다. 이 점을 알리 없는
구마모토군은 야간 기습을 위해 3중대 전술기지로 접근하다 누군가가 조명지뢰의
인계철선을 건드리게 되었고, 3중대 야간 청음초와 경계병들에게 발각되기에 이른다.
이쯤해서 물러났으면 별다른 피해가 없었을 것인데, 용맹한(?) 구마모토군은 3중대
전술기지의 정면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3중대 병사들은 이미 조명지뢰가
터지면서 취침 중인 병사들까지 일어나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아무리 많은
수의 적이 몰려와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기껏 양식보총(攘式步銃)과 비슷한
사양의 소총과 전장식의 구식 대포로 무장했을 것이 분명한 구주 제번(諸藩)의
허접한 군사들을 당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없었던 구마모토군은 매섭게 몰려들었다. 구식 대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제법 진형을 갖춰 3중대 전술기지의 정면으로 밀려오던 구마모토군은,
처음 당하는 각종 지뢰의 폭발로 인한 피해와 3중대 장병들의 응사로 인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어도 물러나지 않았다. 후방에서 군사들의 돌격을 지원하던 구식
대포도 이미 3중대 화기소대의 박격포와 한-1 고속 유탄발사기의 사격에
무력화되었지만,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휘관의 독전(督戰)이 추상같았기 때문인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도무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인해전술을 고집한 구마모토군은 마침내 3중대 전술기지의 외곽
방어진지 앞까지 밀려들었다. 구식 군대에게 이만큼의 돌격을 허용한 것도 막강한
조선 해병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마모토군의 역량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엄청난 피해 앞에 더 이상의
무의미한 돌격을 감행할 자신이 없었던지 구마모토군은 천천히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음력 9월 20일 새벽 3시경이었다. 그러나 후퇴를 한다고 해서 다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3중대 전술기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을 파악한 2대대
전술지휘소에서는 주변에 위치한 1중대와 2중대의 전술기지로 즉시 전령을 보내
예상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더불어서 대대 예비로 돌려져
있던 기병중대의 투입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였으니 구마모토군의
패잔병들이 후퇴를 하려고 해도 후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개 연대
병력의 구마모토군은 800여 명의 사망자와 500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 포로 200여
명을 남기고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그에 비해 2대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구마모토군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낸 3중대에서 18명의 병사가 죽거나 상한 것이
전부였는데, 특이하게도 칼을 맞고 죽은 병사도 있었으니 그것은 3중대 전술기지의
외곽 방어진지까지 접근한 소수의 사무라이에 의한 피해였다. 이 전투를 조선 구주
정벌군에서는 수후전투라고 부르고 있는데, 중대 전술기지를 운용하고 나서 가장 큰
전과를 거둔 전투가 바로 수후전투였다. 이렇듯 중대 전술기지의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 조선군의 점령지 획득과 안정화는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외인부대를 활용한 대 유격전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외인부대는 부대
전체가 귀화 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답게 왜국 사정에 정통했다. 1개 분대, 또는 2개
분대가 통합된 형태의 대 유격전을 전개한 외인부대는 소규모의 적을 찾아냈을 때는
직접 교전하여 격멸시켰고, 대규모의 적을 색출했을 때는 해병사단의 지원을 받아
섬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