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경의 조선 공사관으로 돌아온 오경석은 며칠 동안 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혼자서 집무실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있는 게 한 눈에
보기에도 무슨 대단한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어!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고민이로구나..."
김종완이 일러준 계책은 자신이 생각해도 훌륭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청국 조정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지게 될 것은 불은 보듯 뻔했다. 정말이지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태후(
西太后)를 움직여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서태후와 그 일당들에게 상당한
공을 들였고 나름대로 신뢰도 쌓았다. 그러나 이 문제만은 달랐다. 아무리 그동안
쌓아놓은 신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음... 역시 안득해에게 접근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득해에게 접근해서 서태후를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안득해만한 인물이 없어 보였다. 오경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공사관 소속 서기관 유명철이 들어왔다. 하얀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온 그는 그것을 오경석에게 내밀었다.
"영감. 저수궁(儲秀宮)에서 인편으로 이것이 왔습니다."
"이것은...?"
"모르겠습니다. 단지 저수궁에서 왔다는 사람이 공사 영감께 드리라고만 했습니다."
"음... 알겠네. 자네는 그만 일 보시게."
"예. 영감."
유명철이 나가자 오경석은 급히 봉투를 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펼쳐보았다.
예상대로 서찰이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저수궁에서 서찰이 왔다는
소식에 혹시 서태후나 안득해가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상대로
서찰은 안득해가 보낸 것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마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해(海)>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화려한 외교적 수식어나 불필요한 미사여구는 하나도
없었다.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줄의 내용과 보낸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수결(手決)
만 있을 뿐이었다. 상당히 보안에 신경 쓴 모습이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저들이
얼마나 은밀한 만남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여우가 꼬리를 드러내는가?"
오경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안득해로 하여금 서태후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저쪽에서 먼저 은밀히 만나자는 서찰을 보내왔다.
은밀한 만남을 원하는 것으로 봤을 때 그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할 것이리라.
어쩌면 저들이 그것을 원해서 자신을 부른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방울을 다는군. 그나저나 내일은 무슨 선물을 가져가서 늙은 여우의 마음을
훔쳐야 하나. 고민이구만."
한 가지 고민이 해결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고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서도 싫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태후마마. 구천세(九千歲)! 구천세! 구천세!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어서 오세요. 오 공사. 오랜만입니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그동안 본의 아니게 격조하였사옵니다."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려. 그만 일어나세요."
"예. 태후마마."
무릎을 꿇고 있던 오경석은 서태후의 말에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서태후의 말이 상당히 친절한 점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오경석은 한 쪽에 조용히 시립하며 준비한 예물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태후의 뒤에 서 있던 안득해가 그것을 냉큼 받아 한 쪽에 놓았다.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오고 그러시오. 그저 오 공사를 뵙고자 했을 뿐인데..."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서태후는 오경석이 가져온 예물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펼쳐보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무엇을 가져왔는지 그 자리에서 풀어보던 것이 오늘은 이상했다. 오경석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한 줄기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때 서태후가 은근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 공사."
"예. 태후마마."
"오늘 이렇게 그대를 부른 건 한 가지 긴한 청이 있어서라오."
"청이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태후마마. 그저 명(命)만 하시옵소서. 신(臣)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 태후마마의 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서태후는 기분이 좋았다. 외방(外邦)의 외교관이 스스로 몸을 낮춰 신하로 칭하는
것이 듣기 좋았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그녀는 더욱 은근히 말했다.
"지금 내게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시겠소?"
"......?"
"그것은... 아, 그것은... 다름 아닌 시동생 문제입니다."
서태후는 일부러 공친왕에 대한 문제를 꺼낼 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경석이 자신의 연극을 알아차려도 그만이고 못 알아차려도 그만이었지만, 왠지 그
문제를 스스로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있는 측근도 아닌
외방의 외교관에게 고민을 털어놔야 하는 신세에 대한 자괴감의 발로였는지도 몰랐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듯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말했다.
"내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하리다. 혁흔을 없애주시오."
"마-마!"
오경석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올 줄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직접적으로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무리 공친왕 혁흔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고 정적이지만 그녀의 시동생이고 현 황제의 삼촌이 되질
않는가. 그런 사람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여 없애달라니! 놀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오경석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긴 말 하지 않겠소. 나와 공친왕과의 사이가 물과 기름과도 같다는 것은 오 공사도
잘 알 것이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사이지요. 하지만 지금 내
세력으로는 공친왕을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오
공사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어떻소? 나를 도와 주시겠소?"
"마마..."
"이번 일만 도와준다면 내 오 공사와 귀국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도와주시겠지요?"
공친왕의 가장 큰 힘이 이홍장의 회군이었는데, 이홍장이 회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출병한 상태에서 그를 보위할 수 있는 세력은 기껏 황궁 내삼영(內三營) 중 호군영(
護軍營)을 제외한 효기영(驍騎營)과 전봉영(前鋒營)이 전부였다. 서태후는 이홍장이
강남에 가 있는 사이에 어떻게든 공친왕을 제거하고 싶어했는데 생각대로 쉬운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뿌리깊은 앙숙 관계에 있는 두 영이 의외로 공친왕을 중심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의 움직일 수 있는 무력이라고는
기껏 금군(禁軍)이 유일한 실정에서, 금군만으로는 효기영과 전봉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내심으로는 효기영과 전봉영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상태에서는 절대 성공하기 어렵다는데
서태후의 고민이 있었다. 더구나 강남에 출병한 이홍장이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도
그녀의 조급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홍장이 연전연승하면 할수록 공친왕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 분명했고, 그러한 상태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동안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여러 중신들이 점차로 공친왕에게
기우는 것도 그녀의 선택을 강요하는 원인이었다. 황궁 내삼영 중 하나인 호군영
통령 살포소(薩褒燒) 같은 이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여기에 그동안 정사에
무관심했던 동태후(東太后)까지 나선다면 자신이 설 땅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녀로 하여금 오경석을 찾게 만든 것이다. 일종의 승부수를 띄웠다고나 할까?
진작부터 오경석과 천진에 주둔 중인 조선군을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원래부터 서태후와 공친왕
사이를 잘 알고 있던 조선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서태후를 위해 힘을 쓸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움직일 결심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녀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로 인해 서태후가 주저하자 김영훈과 한상덕은
김종완으로 하여금 서태후를 움직이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그 지시를 받기 위해
오경석이 천진에 다녀온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격이지만
오경석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덥썩 승낙하자니 저들이 의심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오경석의 입만 주시하는 서태후와
안득해의 가슴만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한참을 망설이던 오경석의
입이 열릴 기미가 보였다.
"꿀꺽!"
긴장한 안득해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저수궁에 메아리쳤다.
"태후마마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사옵니다."
"고맙소. 오 공사. 정말 고맙소."
서태후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오경석의 손을 잡을 듯 유난을 떨었다. 그만큼
감격했다는 소리였다.
"하온데 신이 어떻게 도우면 되올른지...?"
오경석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대답을 하긴 했지만 무슨 방법으로 공친왕을 없애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연기였다.
"간단한 일이에요. 지금 천진에 귀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요?"
"그렇기는 하옵니다만...?"
"그들을 동원하면 될 겝니다. 내가 알기로 천진에 주둔 중인 귀국의 군대가 군기가
정연하고 무장도 튼실한 신식 군대라고 들었는데..."
"사실이옵니다. 태후마마. 천진에 주둔 중인 우리 조선군은 정예 중에 정예이옵니다.
하오면 그들을 움직여서..."
"그렇소. 귀국의 군대라면 별 어려움 없이 효기영과 전봉영을 무찌르고 공친왕을
제거할 수 있을 것 아니오?"
"아!... 태후마마의 말씀이 참으로 옳사옵니다. 마땅히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오 공사께서 천진의 귀국 군대를 동원해 주신다면 내 결코 오 공사와 귀국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귀국 조정에는 내가 따로 언질을 넣겠소. 어떻소. 해주시겠지요.
"
"신명을 다해 태후마마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감격한 듯 떨리는 오경석의 대답에 서태후와 안득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이제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던 공친왕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비록 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기에 한 줄기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나라는 어떻게 되든 정권만 잡으면 된다!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거리낌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