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선군 해병대의 공격에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것은 녹아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구주 정벌군 1전대와 해병 3여단이 맡은 장기(長崎)도 마찬가지였고,
2전대와 해병 2여단의 관할인 북구주도 별 다른 저항이 없었다. 어제 조선 공사
신철균이 장기의 막부 행정관과 제번(諸藩)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막부나 제번(諸藩)에서는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워낙 급작스런
선전포고였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장기는 왜국에서 가장 외국 세력이 강한
곳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군사적인 측면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길을 통해
소식을 알리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지만 이미 1전대 함정들에 의해 바닷길이 봉쇄된
이상 하나마나한 시도에 불과했다. 물론 저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장기의
대촌만(大村灣 오무라만)에 사령부를 설치한 해병사단장 양헌수는 대형 야전 천막
안에서 참모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1여단과 3여단의 피해는 어떻다고 하던가?"
"아까 수수께끼 암호해독기를 통해 들어온 전문에 의하면, 1여단은 별다른 피해 없이
녹아도 상륙했다고 보여집니다. 아울러 사쓰마번주 도진충의(島津忠義 시마즈
타다요시)가 있는 흑환성에 대한 함포 사격도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1여단의 피해는?"
"아직까지 별다른 피해는 없다는 보고입니다. 사령관님."
"음... 그럼 3여단은?"
"3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령관님. 3여단이 보내온 전문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상륙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좋아. 잘 하고 있군."
해병사단 작전참모 강혁수 대령의 보고를 들은 양헌수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막부
행정청에 소속된 일부 막부군과 순찰조 병력의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구주 정벌군 사령부가 설치된 장기도 그랬지만, 다른 곳도
조선군의 공격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다. 다행이었다.
"군수참모."
"예. 사령관님."
"보급품의 하역은 어떻게 되고 있소?"
"지금까지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약 4할 정도 하역한 상태이고, 이
상태라면 내일쯤이면 모든 보급품에 대한 하역이 완료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이곳 장기에는 우리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급품
하역에 자원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그들이 있었기에 보급품에 대한 하역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양헌수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나먼 왜국 땅에서 조선
백성들이라니...? 전혀 뜻밖의 소리였지만 그것은 군수참모의 말 그대로였다. 이곳
장기에는 쥬신상사가 오래 전부터 터를 닦아왔고, 단도(端島 하지마섬)에 탄광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 백성들이 상당히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가족들도 많이 건너와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조선인 촌락까지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조국의 군대가 장기에 상륙한 것을 안 그들이 자발적으로
보급품의 하역에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왜국 쥬신상사의 사장 전준호가 나서서
동원하기도 했지만, 조국의 장병들이 온다는데 마다할 조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군수참모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은 양헌수는 상당히 감동을 받은 듯 했다. 감격한
표정의 양헌수가 이번에는 해병 2여단장 조진호 소장을 불렀다.
"조 장군."
"예. 사령관님."
"지상전에 대한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령관님. 이미 우리 장병들은 충분한 전술훈련을 마치고
작전이 시작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좋아요. 일단 사단 직속의 수색연대가 장기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에 조 장군의
2여단이 작전을 펼치도록 하세요. 작전은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좋습니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 구주 정벌전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나가서
일들 보세요."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충성!"
"충성!"
구주 정벌군 사령부의 참모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헌수는 부관에게 말했다.
"부관! 공사 영감과 외국 공관 대표들이 와 있다고 했지."
"예. 사령관님."
"모셔오도록!"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야전 천막을 나간 부관이 다시 들어온 것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미
조선 공사 신철균을 비롯한 다른 외국 외교관들은 양헌수가 자신들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령관 영감."
"어서 오십시오, 공사 영감."
양헌수와 신철균의 품계는 같았다. 하여 서로가 평칭을 사용하여 인사를 나눴다.
신철균은 자신을 따라 들어온 외국 공관의 대표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조선군 사령관 양헌수입니다."
"영국 공사 파크스요."
"아라사 영사 블리디미르입니다."
"미국 영사 시워드입니다."
신철균의 통역으로 분분히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작전회의에 사용되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았다. 당연히 양헌수와 신철균이 주인의 자리에 앉았고,
외국 공관 대표들이 손님의 자리에 앉은 형국이었다. 전투복 차림의 위압적인
모습의 양헌수는 다른 이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오늘 본관이 여러분들을 초청한 이유를 다들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
"......"
양헌수의 서슬 퍼런 말에 다른 외국 대표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착잡하다는
표정뿐이었다. 그 모습을 쓰윽, 하고 둘러본 양헌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미 계신 신철균 공사에게 들었겠지만 왜국이 우리 조선의 영토를 무단으로
공격했습니다. 우리 조선군은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서 구주에 상륙한 것입니다.
주상전하와 섭정공 합하의 명을 받은 우리 조선군은 지금 이 시간 부로 이곳 왜국의
전 해상을 전쟁수역으로 선포하는 바입니다.
"전쟁수역요?"
"그렇습니다. 전쟁수역!"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령관각하. 전쟁수역이라니요?"
나가사키 주재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George Seward)는 양헌수를 향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양헌수는 시워드 영사의 이런 행동이 건방지게 느껴졌다. 감히
미국 영사 따위가 조선군 해병대 중장에게 두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꼴이라니!
더구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말이야!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호-오. 시워드 영사. 귀관은 전쟁수역의 의미를 몰라서 본관에게 묻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사령관각하께서 선포하신 전쟁수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좋습니다. 설명해 드리죠. 전쟁수역이란,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지는 수역을
말합니다. 전쟁수역으로 선포된 곳에서 적군을 이롭게 하는 어떠한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시워드 영사!"
양헌수의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서 시워드 영사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던가! 전(前) 상하이(上海) 주재 미국 총영사가 아니던가. 더구나 자신의 삼촌은
전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William
Seward)가 아니던가. 윌리엄 시워드는 지난해 조선 침공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긴
했지만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국 정계에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조카인 자신에게 도발적인 조롱을 하는 조선군 사령관이라는 자의 말투는
모욕으로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통역을 통해 듣는 말이라 그 의미와
뉘앙스가 약간 다르게 들릴 수 있었지만, 앞에 있는 조선군 사령관이라는 자의
표정으로 봐서는 자신의 느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시워드 영사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언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방자해졌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노란
원숭이들이 이렇듯 하늘 모르고 날뛸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처음부터 조선이 일본을 침략(?)하는 것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워드 영사에게 양헌수의 말은 아니꼬움의 극치를 달리는 말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던 양헌수는 회심의 표정을 지었다. 한마디로
같잖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양헌수가 이렇게 시워드 미국 영사의 속을 긁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쓰마번 해군력이 성장할 수 있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나라로 영국을 꼽을 수 있다면 사쓰마번 육군의 성장을 위해 기여한 나라로는 미국을
꼽을 수 있었다. 이미 어제 신철균이 파크스 공사를 만나 그 점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입장을 전달했던 것을 알고 있는 양헌수는, 미국을 겁주기 위한 방편으로 시워드
영사에게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 조선은 전쟁수역으로 선포된 모든 선박에 대해서 국적을 불문하고 검문을 할
것이며, 검문에 불응하는 선박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공격도 불사할 것입니다."
"뭐요? 공격요?"
"그렇습니다. 전쟁수역 내에서 운항하는 선박에서 혹시라도 왜국을 이롭게 하는
상품이나 물품이 발견되었을 때는 당연히 몰수할 것도 아울러 밝히는 바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이 안되고 되고는 귀관이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조선군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양헌수의 말에 시워드 영사는 할 말을 잃었다. 당장 조선군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이
미국에게는 없었다. 한 동안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시워드 영사는
영국 공사 파크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도와달라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파크스 영국 공사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제 파크스 영국
공사와 블라디미르 러시아 영사가 신철균과 비밀리에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시워드 영사는 또 다시 분노했다. 만일 신철균과 파크스 영국 공사 사이에, 신철균과
블라디미르 러시아 영사 사이에 오고간 얘기까지 알게 된다면 입에서 거품을 물었을
것이지만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일본과 류큐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시워드 영사가 다시 따지려는 순간, 블라디미르 러시아 영사가 양헌수에게
물었다.
"그럼 왜국을 이롭게 하는 상품이나 물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왜국에게 이로운 행위는 말 그대로 왜국을 지원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품으로는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군수품을 들
수 있습니다."
"군수품요?"
"그렇습니다. 총포와 화약, 탄약을 포함한 모든 군수품이 해당됩니다."
"음... 우리 러시아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군요.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하."
블라디미르 러시아 영사와 양헌수와의 말에 대부분의 다른 외교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치적, 군사적 야심이 없는 다른 나라들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있어서 별다른 지장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했기에 비교적 담담히 양헌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거리를 지켜보던 시워드 영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청국에서 기존에 진출해 있던 유럽의 다른 나라에게도 밀리는
형편에서 일본에서까지 말린다면 미국의 대(對) 아시아 정책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일본을 강제 개항했던 나라가 미국이 아니던가. 이런 미국이
일본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프랑스에게도 밀리고 급기야는 조선에게도 밀리게
생겼으니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일본의 실질적인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프랑스에게 밀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방의 제번(諸藩)을 공략하는 계획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립적인 분위기의 사쓰마번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속이 타지 않을 손가.
어떻게든 무슨 수를 내야한다는 생각을 시워드 영사가 하고 있을 때 양헌수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럼 모두들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아, 아니... 저..."
시워드 영사는 양헌수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양헌수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잡아먹을 듯 양헌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이놈들! 두고보자. 언제고 네놈들의 콧대를 꺾어줄 날이 있을 것이다.'
비상(飛翔)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