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마즈 타다요시는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깊은 산중을 헤매고 있었다.
해는 아직 남아있었지만 울창한 나무에 가려서인지 주변은 깜깜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짙게 끼여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홀로 깊은 산중을
헤매는 것도 두려웠고,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것도 두려웠다. 커다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영민한 머리의 소유자 사이고 쓰구미치도 보이지 않았고, 살아있는
무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오야마 이와오도 없었다.
"이봐! 아무도 없나! 누구 없냔 말이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하는 수하는 없었다. 그저 공허한 메아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울고 싶었다. 무사로서, 77만석의 대번(大藩)을
다스리는 번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울고 싶었다.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도 없었다. 얼마나 산을 헤맸는지 몰랐다. 이리
채이고 저리 자빠지면서 이미 신발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고, 새하얗던
버선은 시커멓게 변한 지 오래였다. 숨은 턱에 차왔고 목도 말랐다. 하루 종일
굶어서 배도 고팠다. 얼마나 헤맸을까? 울창한 숲이 끝나며 넓은 목초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짙게 끼어있던 안개도 감쪽같이 개었다. 햇살이 목초지를 비추는 풍경은
그림같이 멋졌지만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저 지옥 같은 숲이 끝났다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헉! 헉! 도대체 여긴 어디야? 무슨 놈의 숲이 이렇게 깊지? 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어디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며? 수하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하면 쓰루마루 성(
鶴丸城)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이렇게 자문해 보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널브러져 있는 그의 귀에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두두두!]
시마즈 타다요시는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상태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살펴보았다.
아직 말발굽 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 봐서는 곧 나타날 것 같았다. 기뻤다. 분명 자신의 수하들이 나타나는
것이리라.
"어이! 여기다! 여기야! 나 여기 있단 말이다!"
그의 소리를 들었는지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깨끗한 검은색 털을 자랑하는 말이
나타났다. 말 위에는 한 사람의 괴인(怪人)이 타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붉은색
갑주와 금빛 비늘이 반짝거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시마즈 타다요시가 갑자기
나타난 괴인을 바라보며 의아해 하고 있는데 검은색 말을 탄 괴인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괴인이 탄 검은색 말이 점점 가까이 올수록 그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기겁했다. 분명 얼굴이 있어야 마땅했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지옥의 심연(深淵)처럼 새까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괴인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 쭉 뻗은 오른
손에 들린 칼은 번뜩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는 좁혀졌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괴인, 그것도 얼굴 없는 괴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늘의 똥구멍을 찌를 듯 우뚝 솟아있는 칼은 그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쐐애액!]
"크-헉!"
시마즈 타다요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 없는 괴인이 휘두른 칼은 그의
오른팔을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지만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칼을 맞은 덕분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도망쳐야 했다.
저 놈은 분명 나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가 보낸 자객이다! 이 생각이 든 시마즈
타다요시는 정신 없이 뛰었다. 그러나 뒤에서는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를 내며
괴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말을 탄 괴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싸아아악!]
"으윽!"
이번에는 괴인이 몸을 숙이고 칼을 휘둘렀는지 왼쪽 종아리 아래의 발뒤꿈치 뼈와
붙어있는 힘줄(아킬레스건)에 칼을 맞았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꽈당!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 윽... 너, 너는 누구냐? 누가 보낸 자객이냐?"
어느새 말을 돌린 괴인은 천천히 시마즈 타다요시에게 다가왔다. 괴인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마치 벙어리처럼... 시마즈 타다요시는 앉은 채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누구냐? 누군데 날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
"살려다오. 날 좀 살려다오."
"......"
"원하는 것이 뭐냐?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주겠다. 그러니 날 좀 살려다오."
시마즈 타다요시는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가 온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미 발목과 팔의 상처에 대한 아픔은 잊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살고 싶어서 애원할 뿐이었다. 그러나 괴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느새 말에서
내린 괴인은 그의 앞에 우뚝 섰다. 검은색 신발이 시마즈 타다요시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괴인의 신발을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붉은색 갑주를 지나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무심한 듯 검은 심연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그때 괴인의 눈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는 괴인이 들고 있던 칼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시마즈 타다요시의 얼굴 쪽으로 휘둘러져 왔다.
[쒸이이이익!]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쓰루마루 성 천수각 꼭대기에서 잠을 자던 시마즈 타다요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세웠다. 악몽이었다. 생전처음 보는 얼굴 없는 괴인에 의해 자신의 머리가 떨어지는
꿈이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입고 있던 잠옷뿐만 아니라 이불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왜요? 악몽을 꾸셨어요?"
"헉! 헉! 헉! 응..."
옆에서 자고있던 그의 아내도 비명소리에 놀라 잠을 깬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 불을 밝혔다.
"어휴! 이 땀 좀 봐. 무슨 꿈을 꿨는데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물... 물 좀 주구려..."
시마즈 타다요시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붉은색 갑주를 입은 얼굴 없는 괴인. 그 괴인이 휘두른 칼에 잘려나간 자신의
목.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아직도 괴인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내가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꿨는데 그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아니야. 아무 것도."
아직도 악몽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보며 아내가 물어도 시마즈
타다요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앉아만 있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무언가에 홀린 듯 아내에게 물었다.
"잠깐! 무슨 소리 못 들었소?"
"무슨 소리요?"
"뭐가 터지는 소리 같은 것 못 들었냐는 말이오."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아내는 영문을 몰라했다.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지를 않나. 이제는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냐고 채근하지를 않나. 오늘따라 유별난 행동을 보이는 남편이
이상해 보였다. 아내의 생각을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시마즈
타다요시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바다 쪽을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해군의 여러 함정들이 정박해 있던 바다에서는 연신 폭발음이 들렸고,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다. 사쓰마번에서 자랑하는 갑철함(甲鐵艦 장갑함의 왜국식 용어)
아카기(赤城)가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있었고, 전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齊彬)가 일본 최초로 진수한 서양식 기범선 쇼헤이마루(昇平丸)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도 보였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1km 남짓 들어와 있는 쓰루마루 성에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로 폭발하는 함정들이 내뿜는 화광은 주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쇼헤이마루가... 쇼헤이마루가..."
사쓰마번의 해군에서 쇼헤이마루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했다. 길이가 겨우 30m에
불과하고 자체 무장도 10문의 구식 함포를 장착한 것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배였지만, 어느 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쓰마번 해군의 자부심이었다. 전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서양식 기범선 쇼헤이마루는
그가 도안한 닛쇼키(日章旗)가 처음으로 게양된 배였다. 후에 막부의 요청에 의해
쇼헤이마루와 닛쇼키를 진상했지만, 막부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배였다. 한마디로 사쓰마번 해군의 정신이 담겨있는 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쇼헤이마루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바다에 정박 중인 해군
함정들만 공격을 받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쇼헤이마루가 산산조각 나자
이번에는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의 해안포대가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모두 다섯
군데의 해안포대는 엄청나게 퍼붓는 포격에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일었고,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해안포대가 통째로 날아가고
있었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절망했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시마즈 타다요시가 막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드는데 꿈에서 본
괴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검은색 말을 타고 붉은색 갑주를
입은 괴인은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 한 자루
들고 있었다. 모든 게 꿈에서와 똑 같았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괴인의 눈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서 섬광이 번뜩이면 내 목숨이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찰라의 시간이 흘렀고, 괴인의
눈이라 짐작되는 부분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콰콰콰쾅! 쾅! 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