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박현명은 백두산함의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저 멀리로 보이는 큰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마도였다. 대마도만 지나면 이제 왜국 땅이 지척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대마도를 지나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이다.
그리고 그토록 사무쳤던 한을 풀 수 있다고 이제야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밀려왔다. 비록 고향 땅은 망해 사라졌지만 그 한을 이제야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처음 강계에서
강화도로 부대가 이동할 때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주둔지인 청파에서
강계로 이동했을 때만해도 만주를 점령하기 위한 부대 이동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터에, 다시 만주와는 천리도 더 떨어져있는 강화도로 이동한다고 했을 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의구심만 들었다. 며칠 전에 강화도를 출발한 수송선단에
승선하고 나서는 그런 의구심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제는 의구심이 말끔히
가셨다. 얼마 전에 작전 장교가 이번 정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살아 생전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왜국 땅을 다시 밟는다고
생각하니 벅찬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땅이 비록 철천지원수 막부와
사쓰마번의 땅이라도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구나."
박현명은 벅찬 가슴을 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판에는 왜국이 지척이라서 그런지
많은 병사들이 나와 있었다. 외인부대의 선임병과 후임병들도 보였고, 이번 구주
정벌군의 실질적인 주력인 해병사단 병사들도 보였다. 병사들은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서 대마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긴장하는
기색은 역력히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는지라 아무래도
긴장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현명은 깊게 숨을 들이쉬어
긴장을 풀려고 했다. 막부와 사쓰마번의 땅이 가까이 오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왜? 긴장되나?"
"충성! 아닙니다. 소대장님."
나타난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외인부대 3대대 2중대 1소대장 박수동 중위였다.
"괜찮다. 누구나 실전에서는 긴장되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그랬는데 뭘..."
박현명은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소대장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알고 있는 박수동은 상당히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원래 군역을 치르기 위해
일반 병으로 해병대에 입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부사관으로 장기복무를
신청했었고,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죠슈번 정벌전에서 공을 세워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순수 병 출신이
군문에 남아서 장교로 진급한 특이한 사례였다. 해병대 출신으로 외인부대가
창설됨과 동시에 외인부대로 전출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소대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박현명이 외인부대에 입대하면서부터 줄곧 소대장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그의
화려한 이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소대장도 실전에서는 긴장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긴장 풀어라. 우리가 누구냐?"
"예?"
"우리가 누구냐고!"
박수동의 큰 소리에 박현명은 움찔하며 대답을 했다.
"우리는 무적의 외인부대입니다!"
"외인부대 복무수칙 제 6조!"
"모든 외인부대원은 전투에 임해서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싸운다. 만약 부상당하거나
죽게될지라도 반드시 적을 격파한다!"
"그래! 바로 그거다. 우리는 무적의 외인부대다. 그동안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인부대 복무수칙을 복창한 박현명은 박수동이 고마웠다. 이렇게
해서라도 부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소대장의 노력이 고마웠다. 갑판에 있던 많은
해병대원들이 바라보아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성일보의 종군기자 이일구입니다.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두 사람에게 다가온 사람은 뜻밖에도 종군기자였다. 이일구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해병대원을 취재하는 도중, 한쪽에서 들려온 복창소리에 흥미가 생겨서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일구는 박현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고향은 어디냐? 나이는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입대한지는 얼마나 됐느냐?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느냐? 왜국 출신인데 왜국에 총부리를 겨눌 수 있겠느냐? 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이 모든 왜국 출신 외인부대원들에게 해당되는
질문이라 박현명은 뜨끔했다. 그렇지만 평소 가슴속에 생각해오던 문제라 무리 없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죠슈번 출신의 귀화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선 사람입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외인부대원은 명예로써 조선에 충성하는 지원병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조국은 조선입니다!"
박현명의 조선말은 나무랄 데 없었다. 조선에서 산지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더듬거리는 것도 없어졌다. 그는 이일구의 질문에 큰 소리로 죠슈번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왜국 출신이 아니라 죠슈번 출신이라는 말이었다. 조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왜국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치는 그의 눈에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외인부대원이라는 자부심, 조선
사람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이일구는 박현명의 눈에서 정말로 스스로를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약간 기가 질렸다.
"예. 잘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념 촬영 좀 할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자는 말입니까?"
"그래요. 잘하면 모든 조선 사람들이 박현명 일병의 기사를 볼지도 모르겠군요."
이일구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자 주변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던 다른 병사들이 우와!
하고 몰려들었다. 일생에 한번 있을지 모르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그는 흡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사진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노출 시간을
오래 잡아야 하는 은판사진(銀板寫眞)이었지만 이미 충분할 만큼 노출이 되었기에
바로 준비될 수 있었다.
"여기를 보세요. 모두 웃으세요, 웃어! 자! 찍습니다!"
[펑!]
마그네슘이 터지면서 섬광이 번뜩였다. 모두들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사진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박수동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그 소리를 따라 외쳤다.
"싸우자! 이기자! 야!"
"싸우자! 이기자!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