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82화 (282/318)

2.

어제가 한가위였기에 아직도 달빛은 환했다. 약간 일그러진 달을 보며 김영훈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직 한 낮에는 더웠다. 그래서 입고 있는 옷도 낮에 입던

모시적삼 그대로였다. 가만히 달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흐음..."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의 주인공은 김영훈이 고개를 돌리려는

기미가 보이자 입을 열었다.

"왜요? 잠이 안 오세요?"

"응? 언제 오셨소?"

"방금요."

김영훈의 아내 조부인이었다. 김영훈은 아무리 국정에 바쁘다고 해도 잠만은 아내와

함께 잤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한 번 물꼬가 트이자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아비가 오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에 조부인이 몸소 아재당에 온

것이다.

"애들은 자오?"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요. 헌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그래 보이오?"

"그건 아니지만..."

"그저 마음 쓰이는 일이 있어서 잠시 나와있는 거라오."

"혹시...? 왜국에 출병한 병사들 걱정하고 계셨어요?"

"응? 당신이 어떻게 아시오. 내가 말한 기억이 없는데?"

"풋!"

조부인은 살포시 웃었다. 마치 한 송이 백합이 핀 것같이 화사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입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앵두 같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아녀자라고는 해도 서방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를 수가 있나요. 그저

귀동냥으로나마 들어서 알고 있었답니다."

"그래요? 후후후... 그래, 오늘도 절에 다녀왔소?"

"예."

김영훈은 그녀가 근처 절에 출입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 혼인하고

나서 생긴 버릇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절에 다니는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 살얼음 같은 정치판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으니,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절로 불공을 드리러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오늘은 무슨 소원을 빌고 오셨소?"

"달리 소원이랄 게 어디 있나요. 그저 서방님 하시는 일이 잘되게 해주십사 하고

비는 것뿐이지요."

"음..."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나 자신과 아이들의 안녕을 위해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아내가 고마웠다. 그것은 아이를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신한 몸으로

절에 가서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고 백팔배(百八拜)를 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몸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절로 달려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지극

정성 덕분인지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영훈은 그렇게

믿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 자신의 충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지극 정성으로

기도한 덕분에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일반 백성들의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의 얼이 수천 년을

면면히 이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 김영훈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부인은 지아비가 자신의 손잡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만 들어갑시다."

"예."

"아! 이왕이면 우리 술이나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소?"

"왜요? 술이 드시고 싶으세요?"

"오랜만에 당신과 함께 한 잔 하고 싶구려."

"알겠어요. 바로 준비할게요."

운현궁의 내실에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주안상은 간소했지만 조그마한 해주반에

가지가지 음식이 한 상 가득 있었다. 꿩 앞 가슴살을 저며 수삼(水蔘)과 파를 다져

넣은 전유어며, 편육, 육회, 약식, 송편이 가득했다. 김영훈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무얼 이리 많이 차렸소?"

"별 것 아니에요. 한가위 제수(祭需) 음식 남은 것이랍니다."

조부인은 지아비가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역정을 낸다고 생각했다. 겨우 다섯 가지

안주가 뭐가 많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도 익히 지아비의 담백한 성품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결코 다섯 가지가 넘는 상을 차려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명절

음식 남은 것으로 모양을 낸 것을 가지고 뭐라 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새침한

대답에 김영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을

장병들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인."

"오늘만 그냥 드세요.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네?"

"허-어, 참. 알겠소. 대신 오늘 만이오!"

"예. 알았어요. 자, 제 술 한 잔 받으시고 저도 한 잔 주세요. 어서요."

조부인은 모처럼 내외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여인답지 않게 지아비에게 아양도 떨었다. 김영훈은 아내가 따라주는 송순주(松荀酒)

를 쭉 들이키고 아내에게 잔을 건네 술을 따라주었다. 잔을 받은 조부인도 서슴없이

들이켰다. 조부인은 은수저를 가만히 들더니 꿩 가슴살을 저며 만든 전유어를 들어

지아비의 입으로 가져갔다. 김영훈이 유독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전유어였다. 그

중에서도 꿩고기로 만든 전유어는 특히 좋아했다.

"맛있구려."

"한 잔 더 드세요."

송순주를 한 잔 더 들이키고 안주를 달라는데 어김없이 꿩 가슴살로 만든 전유어였다.

조부인은 지아비가 왜 유달리 꿩고기로 만든 전유어를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신은 다른 안주도 많은데 왜 유독 꿩 가슴살로 만든 전유어만 좋아하세요?"

"궁금하오?"

"예. 궁금해 죽겠어요."

조부인은 지아비의 눈을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김영훈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아내의 눈길을 피했다. 자신도 왜 꿩고기로 만든 전유어만 좋아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아련한 향수는 있었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외삼촌들이 잡아다

구워주던 꿩고기에 대한 향수였다. 한겨울에 외삼촌들이 눈밭을 뒹굴며 잡아온

꿩고기는 무엇을 해도 맛있었다. 전골을 해도 맛있었고, 국을 끓여도 맛있었다. 또

아궁이에서 바로 구워도 맛있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조선에 도래한 후에도

유달리 꿩고기를 선호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생각은 일부러

라도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둬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한 점이 그것이었다. 시댁 식구들과 친가 쪽 일가붙이가 없는

아내와 아이들. 김영훈은 그런 아내와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냥... 맛있으니까."

"피..."

조부인은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헌데, 말이오. 내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말인가요?"

"이 꿩고기 말이오."

"꿩고기가 왜요?"

"도성 안에 꿩고기 파는 데가 많소? 어떻게 하면 항상 신선한 꿩고기를 구할 수

있는지 언제나 궁금했다오."

"별 걸다 궁금해하시네요. 꿩고기 파는 데는 많답니다."

"그래요?"

"그렇지 않구요. 생치(生雉)뿐만 아니라 건치(乾雉)파는 데도 많은 걸요."

"호-오. 생치라 함은 산 꿩을 말함이고, 건치라 함은 말린 꿩을 말하는 것일 텐데.

대체 그 많은 꿩이 어디서 난다는 말이오?"

"어디서 나긴요? 포수들이 사냥을 하는 거죠."

"음... 그렇군."

아내의 말에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다는 표현이었다. 가끔씩

시장에도 나가보았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사실 김영훈은 잘

모르겠지만 도성 안에서도 꿩을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울 장안에 삼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도 주변에 산이 많고 골이 깊었기에 산짐승, 들짐승도

많았다. 호랑이와 같은 맹수가 출몰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조선 최대의

도시답게 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도 높은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당연히 음식과

요리에 대한 수준도 높았다. 조선 팔도에서 생산되는 각종 특산물이 집결하는 곳이

바로 서울이었고, 그런 물품들이 거래되는 시전(市廛)도 많았다. 조선후기 북학파(

北學派)의 거두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

서울에 대해 적어 놓은 일종의 인문지리지)을 살펴보면 당시 서울 장안에 존재하는

시전의 종류와 파는 물건에 대한 것이 세세하게 나와있는데, 거기에는 서울 장안에서

팔리는 고기에 대한 대목도 있다. '생치전과 건치전, 생선전은 주로 병문(屛門)에

있다.' 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병문은 골목 어귀의 길가를

말한다. 즉 시전이 서는 골목 어귀의 길가에는 어김없이 생치전과 건치전이

존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미루어봤을 때 당시 조선의 산하에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얼 그리 생각하세요?"

"응? 아, 아무 것도 아니오."

"한 잔 더 받으세요."

김영훈은 아내가 따라주는 송순주가 유달리 달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었다. 조부인이 이번에는 육회를 집어들었다.

"이 육회도 한 번 드셔보세요.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이라는 곳에서 나온

쇠고긴데 맛이 기가 막혀요."

"농무목축시험장? 아! 거기!"

"아세요?"

"알다 뿐이겠소. 내가 명해서 만들어진 곳인데 어찌 모르겠소."

"그래요?"

"그렇소. 벌써 도축용 쇠고기를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단 말인가? 허-어 참!"

그랬다. 지난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청국에 다녀온 단련사(團練使) 최경석(崔景錫)

이 몰고 온 삼천 마리의 양과 왜국에서 들여온 오백 마리의 화우(和牛)를 기반으로

시작한 농무목축시험장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올해부터 도축용 쇠고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매년 꾸준히 청국과 왜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가축들도 있었고,

자체적으로 증산하여 늘린 가축들도 많았다. 이제는 일정량의 양고기와 쇠고기를

꾸준히 시장에 내 놓을 정도도 성장한 상태였다.

'그래, 나만 알지 못했지, 우리 조선은 꾸준히 나아가고 있구나.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김영훈은 취기가 돌았다. 별로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은데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처럼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도 원인이었지만, 여러 가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기 때문에 더욱 빨리 취기가 올라온 것이다. 김영훈은

가만히 손을 뻗어 아내의 가녀린 손을 잡았다.

"부인."

"예. 서방님."

"내일은 말이오."

"......?"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 왜국에 출병한 우리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빌어주시오."

"우리 병사들의 무사귀환을 말입니까?"

"그렇소. 내일 아주 큰 일이 있는데, 모든 장병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수

있도록 부인이 부처님께 빌어주시오."

"아! 그래서 서방님께서 걱정하고 계셨군요. 왜국에 출병한 우리 병사들에 대한

걱정요."

"그렇다오."

사실 오늘 오전에 유구를 접수하러 떠난 제 1왕립근위함대 소속의 명림답부함과

친위천군 1개 대대가 무사히 유구를 접수하고 사쓰마번에서 파견한 관리들도 모조리

사로잡았다는 전문이 왔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유구를 접수할 수 있어서 모두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삼일 안으로 나가사키의 조선 공사가 정식으로

막부에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었다. 선전포고가 있고 난 후에 사쓰마번을 응징한다는

명목 하에 구주를 점령할 군사작전-구주 정벌전-이 거행될 것이다. 그러나 쉽게

해병사단을 파견하고 해군 함대 동원한 것처럼 보였지만 김영훈은 속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왜국과 전면전까지 벌여야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기에, 아니, 그것보다는 우리 장병들의 안위에 대한 것이

무엇보다도 걱정이었기에 남모르게 달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아내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고. 남편의 근심을 읽은 조부인이 선뜻

웃으며 대답을 했다.

"알겠어요. 우리 병사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수 있도록 지성을 다해

불공을 드리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소. 이제 그만 잡시다."

김영훈은 아내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잡아당겼다. 조부인은 지아비의

완력을 당할 수 없었다. 와락, 하고 지아비의 품에 안겨든 조부인의 숨결은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불을... "

이윽고 불이 꺼지며 운현궁 내실에는 한바탕 춘풍(春風)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생명의 약동을 온몸으로 내비치는 봄바람은 그쳤다 불었다를 반복하며 내실을 휩싸고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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