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81화 (281/318)

1.

"그림 같은 풍경이구만."

"그러게나 말이야. 저기를 보게. 벌써 수확 철이 됐는지 농부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군."

강화부성 외곽에 있는 포로 수용소의 철조망을 붙잡고, 머리칼이 노랗고 얼굴이

불그스름한 양인(洋人) 두 사람이 멀리로 보이는 황금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로는 올망졸망한 산들이 제각각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황금 들녘의 건너에는

바다도 보였다. 조선 사람이 소금강(鹽河)이라고 부르는 강화해협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들녘에서 수확에 열중인 조선 농부들을 바라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선 사람들은 참 부지런해. 이 땡볕에도 쉬는 법 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근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야. 안 그래?"

"맞아. 근면하고 순박하기로는 우리 아일랜드 사람보다도 더한 것 같아."

철조망 건너 조선 사람들이 수확을 하는 모습을 보는 두 사람은 지난해 가을 조선을

침략했다가 포로가 된 3국 연합군 지상군 소속의 부대 중 미국 해병대의

중대장들이다. 각각 토마스 에벗(Thamas Abbott)과 새뮤얼 맥킨타이어(Samuel

McCintire)라는 이름을 가진 대위 계급의 두 사람이 이곳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한지는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약간 마른 체격의 토마스는 아일랜드

출신답게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봐. 새뮤얼."

"응?"

"우리는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글쎄..."

"자네 아들 새뮤얼 주니어의 생일 전에는 가야할텐데 말이야."

"그래야지. 올해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야지. 정말 그래야 될텐데..."

강화도에 포로로 잡혀있는 3국 연합군의 지상군 병력은 강화부성 외곽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와 정족산성에 분산 수용되고 있었다. 수용소 생활은 생각보다는 할 만

했다. 처음 조선 해군 함대의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 당할 때 만하더라도 모두들 '

이제는 다 죽었구나'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의외로 조선군은 국제법에 의거하여

포로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비록 수용소 내의 모든 시설을 3국 포로들이

지어야 했지만, 건축에 필요한 벽돌과 목재 등 모든 자재는 조선군에서 조달해

주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결 빠르게 수용소의

모든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어진 수용소 시설은 완벽했다. 건물들은

깨끗했고 2층 침상의 내무반은 청결했다. 여러 채의 건물들은 포로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고도 남았다. 별도로 장교들을 위한 건물도 만들었다. 잘 만들어진 세면장과

상하수도 등의 위생시설, 거기에 병원까지 있었다. 물론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은

3국 출신의 의사거나 군의관이었지만... 식사도 훌륭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자체

취사병들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제공한 부식만 받아서 조리하는 것이었지만 원하는

부식은 뭐든지 구해 다 주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조선의 추수감사절이라

하여 조선 전통 음식까지 보내올 정도였다. 거기에다 운동 시간까지 있었다. 거기에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포로들과 본국의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도 자유로웠다.

이쯤 되면 포로 생활이 아니라 어디에 휴양 온 것처럼 느껴질 만 했다. 앞에 있는

철조망만 없다면 말이다. 아무리 생활 여건이 좋아도 자유를 박탈당한다면 모든 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조선에서의 포로 생활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토마스가

아들 얘기를 들먹이자 새뮤얼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포로가

되고 나서 태어난 아들놈의 얼굴도 못 봤는데... 비참한 기분의 새뮤얼은 얘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근데 조선군 경비대는 왜 바뀐 거래?"

"응? 아, 그거.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쉐리던(Sheridan) 장군의 부관 말로는

그동안 수용소를 경비하던 조선군 해병대가 모종의 일로 어디론가 출정을 한 것

같다고 하던데?"

"출정?"

"그래, 출정. 단순한 훈련이라면 저렇게 대규모로 이동할 리가 없다는 거지. 더구나

모든 장비와 병력을 동원해서 말이야."

"그럼 또 전쟁을 한다는 말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런가 봐."

새뮤얼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쟁이라니? 만일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자신들이

집으로 돌아갈 일은 점점 멀어지지 않겠는가. 눈앞에 노래지는 소식이었다.

"어디랑? 어디랑 전쟁을 한데? 설마...?"

"아니야. 우리 미국이나 유럽 국가는 아닌 것 같다던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히유... 다행이다."

"왜? 그럼 우리 미국과 조선이 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은 거야? 바보 아냐!

"

"야! 그럼 너 같으면 걱정이 안되냐? 조선이 또 다시 우리 미국이나 유럽 국가와

전쟁을 벌인다면 당연히 우리의 귀환도 늦어지게 될 것 아냐!"

"조용히 좀 해. 조선군 경비병이 들을라.

새뮤얼에게 핀잔을 준 토마스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조선군 경비병은 없었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처음에 나도 그 점을 걱정했었지."

"어느 나라가 될지는 몰라도 우리 꼴 나겠구만..."

"누가 아니래냐."

두 사람은 작년에 있었던 엄청난 해전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60척이 넘는

어마어마한 함대가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사라진 광경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시체들과 침몰한 전투함의 잔해들이 두둥실 떠다니던 모습,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바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그 바다에 자신들이 있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전우들이 피바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바라만 봐야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지금

포로로 있는 3국 연합군의 지상군 병력 대부분은 그러한 자괴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철조망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하고 계십니까?"

"아! 어서 오십시오. 피어스 대위."

영국 해군 정보부 소속의 윌리엄 피어스(Wiliam Pierce) 대위였다. 피어스 대위는 두

사람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정답게 나누고 계신 겁니까? 제가 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무슨 일은요. 별 일 아닙니다."

"예..."

"... 혹시, 피어스 대위는 알고 계십니까? 조선군이 출정한 것을요?"

"아! 그거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정보 계통에 있다보니 그런 정보는 좀 빠르지요."

"예..."

새뮤얼은 건방지게 말하는 빌어먹을 영국놈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애초에 영국 해군 정보부에서 건넨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시작한 전쟁이었다. 이런

놈이 옆에 와서 거들먹거리는 꼴은 정말이지 보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궁금한

것을 먼저 알아야 했다.

"무슨 일이랍니까?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한답니까?"

"저도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전쟁을 벌이는 이유와 전쟁을 벌이는 상대가 어느

나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영국 해군 정보부에서는 조선군의

상대가 일본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요?"

"그렇습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조선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가까운 나라는 청국과

일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나라만이 거의 유일하게 조선이 관계를 맺어오던

나라구요. 그런데 청국은 각지에서 반란과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게

위태로운 지경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우리 3국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한 조선군과 청국군이 충돌을 한 적도 없구요. 그렇다면 남은 상대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해군도 동원되었겠네요?"

"그렇지요. 당연히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지상군으로 해병대와 다른 부대가

합류했으니... 대단한 원정이 될 것 같습니다."

새뮤얼과 토마스도 다른 부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해병대가 수용소의

경비를 다른 부대에게 넘기기 전에 1개 연대 규모의 또 다른 부대가 합류했었다.

지상군으로 1개 사단의 해병대와 1개 연대급 병력을 동원했다면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클 것인가? 감이 안 잡히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선군 해병대와 실제 전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알 수는

있었다. 자신들이 본 조선군 해병대는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나라 해병대와 맞붙어도

뒤지지 않는 훈련과 군기를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군복과 장비도 미국이나 영국의

정규군보다도 더 세련돼 보였고 훌륭해 보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장비와

군복이었다. 한마디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조선군이었다. 이 생각을 하자 갑자기

정강이가 쑤셔왔다. 지난번 조선군 해병대와의 정기 축구 시합에서 상대방 선수와

부딪힌 자리가 새삼스레 아픈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새뮤얼은 얼이 빠진 채로

오른쪽 정강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놈의 군대가 밥 먹고 공만 찼는지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또 체력은 어떠했던가? 경기 내내 질풍처럼 내달리던 상대방

선수들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해야 했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철조망 건너만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는 한가지 생각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신기하게도 세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똑같았다.

'에구, 불쌍한 일본놈들...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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