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79화 (279/318)

4.

사쓰마번에서 류큐를 복속시키고 대만을 응징할 함대와 병력을 동원하느라 한참

분주한 어느 날, 운현궁 아재당에는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12부의 모든

중신들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섭정공 김영훈이 마땅히 자리해야할 상석은 비워져

있는 게 약간은 이상했다. 아재당에 자리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자신들의 부채로

더위를 식히며 이런저런 주제로 한참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타났다.

북방군 사령관 김욱 대장과 제 1친위해병사단장 양헌수 중장이었다. 늦여름의 열기를

쫓기 위해 활짝 열어놓은 방문을 통해 들어온 두 사람은 먼저 와 있던 중신들과

분분히 인사를 나눴다. 애초에 김영훈의 명으로 국방부에서 김욱과 양헌수를

운현궁으로 불렀으니, 국방대신 신헌은 두 사람과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나 다른 중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외무대신 박규수가 눈이 크게 떠진 채로 물었다.

"아니! 두 분 장군께서 웬일이시오? 설마 두 분도 섭정공 합하께옵서 부르신

것이오이까?"

"그렇습니다. 대감."

"호-오. 그 먼 강계에서 예까지 오셨다면 미리 전갈을 받아야 했을 텐데요?"

"맞습니다. 대감. 저는 어제 한 대감께서 보내신 전문을 받고 바로 달려와서

지금에야 도착한 것입니다. 만일 경평선 열차가 없었다면 한참을 더 걸렸을 것입니다.

"

"하기야 강계까지 바로 연결된 철도는 없으니 천상 평양까지 말을 타고 와서 경평선

열차를 타야 했겠구려."

"그렇습니다. 대감."

지난 초여름에 편성하여 집결하기 시작한 북방군의 임시 주둔지는 평안도의 강계였다.

곧 만주로 진격해야할 북방군의 특성상 만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대규모

부대가 주둔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평안도 북부에서 너른 평지를 자랑하는 강계에

임시 주둔지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규수는 사신으로 청국에 여러 번 다녀온

전력이 있었기에 평안도 일대의 지리에도 비교적 밝았다.

"예로부터 강계는 미인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다고 하더니만 김 장군께서 첩실을 들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하하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대감."

박규수의 농담에 김욱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정색을 했다. 박규수도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이 모두들 정실 이외에 어떠한 첩실도 두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김욱에게 농담을 한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과거 같으면 강계 인삼, 강계

포수와 더불어 강계의 세 가지 자랑 중 하나인 강계 미인의 본 고장인 강계에

부임하는 수령방백은 너나할 것 없이 현지에 첩실을 들이지 않았던가. 지금이야

시대가 변해서 그러한 일이 드물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일이 결코 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니 그의 정색이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좌중의 중신들은 얼굴이 벌게진 김욱을 보며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박규수는 시선을 한상덕에게로 돌렸다.

"헌데, 대감."

"말씀하시지요?"

"합하께옵서는 어디 가셨소이까? 우리를 이렇게 부르신 까닭은 또 무엇이구요?"

"지금 합하께옵서는 창덕궁에서 주상전하를 뵙고 계십니다."

"주상전하를요? 왜요? 무슨 일이 있는 겝니까?"

김영훈이 임금을 만나러 창덕궁에 갔다는 소리에 나머지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고

한상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중신회의를 소집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오늘 중신회의를 소집한 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이오이까?"

한상덕은 이미 중신회의를 소집한 이유와 김영훈이 임금을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세한 얘기는 김영훈이 돌아온 이후에 설명할 생각으로

말끝을 흐린 것인데 호기심 많은 박규수는 그런 한상덕의 의중을 알면서도 물고

늘어졌다. 잠시 망설이던 한상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모든 중신들을 부른

이유가 거기에 있었는데 조금 일찍 알고 늦게 알고는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 실은 며칠 전에 제 1왕립근위함대의 광개토태왕함에서 보낸 한 장의 전문이

대정원과 국방부, 해군사령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광개토태왕함이라면 해군사령관 김종완 대감을 따라 청국에 파병한 함대의 기함이지

않소이까?"

"그렇습니다. 광개토태왕함은 지금 청국 남해안을 초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함이 왜요? 아니, 가만..."

한상덕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던 박규수는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표정이더니 신헌을 바라보았다.

"그럼, 위당(威堂) 대감께서도 광개토태왕함에서 보낸 전문의 내용을 알고

계셨소이까?"

"그렇소이다. 저도 알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이렇게되자 모든 중신들이 그 전문의 내용이 암시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위당 대감. 전문의 내용은 별 것 아닙니다. 겨우 왜국과 유구(琉球 류큐)

의 어민 여러 명이 대만에 표류하여 살해당했다는 내용의 전문이었으니 별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살해당한 왜국과 유구의 어민이 쉰 여덟이나 되는 것이 좀 많을 뿐 별

다른 내용은 아니었질 않소이까? 더구나 우리 어민도 아닌데 우리가 신경 쓸 이유도

없구요."

"실은...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니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이까?"

신헌과 박규수를 비롯한 모든 중신들은 한상덕의 말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쉰 여덟

명이 살해당한 일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과

조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니 새삼스레 한상덕의 말에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혹시 이번 일을 계기로 청국과 왜국과의 긴장이 조성되고, 그래서 그 긴장감을

이용해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더구나 신헌은

영문도 모른 채 김영훈의 명으로 군의 일선 지휘관인 김욱과 양헌수까지 부르지

않았던가. 모든 중신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그들의

의아한 눈초리에 한상덕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김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원장. 말씀드리세요."

"아니, 합하.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오시옵소서. 합하."

창덕궁에서 방금 돌아온 김영훈은 관복 차림 그대로였다. 그의 뒤로는 청국에

있어야할 김종완이 있었다. 중신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욱과 양헌수를 부른

것도 모자라서 김종완 까지 부르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는

의아함이었다. 아재당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먼저 와 있던 중신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옵니다. 합하. 신등(臣等)도 방금 왔사옵니다."

"김 장군과 양 장군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합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합하. 헌데 김종완 해군사령관 대감께서는...?"

외무대신 박규수가 김종완의 느닷없는 출연에 의문을 표시하는데 김영훈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여(余)가 불렀습니다."

"예..."

한상덕 등 몇몇을 제외한 중신들은 김영훈의 등장에 긴장했다. 김영훈의 서슬에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필경 범상치 않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불렀고,

그것이 광개토태왕함에서 보내온 전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의 긴장이었다.

창덕궁에 들어가 임금을 만나고 온 것을 아는 이상, 어쩌면 자신들도 모르는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자연스럽게 하게되니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청국에 있어야할 김종완까지 소환한 것을 보면 필경 범상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의 긴장이었다. 좌중의 중신들을 한 번 둘러본 김영훈은

한상덕에게 고갯짓을 했고 그의 신호를 받은 한상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될지 막막합니다만... 실은 유구는 왜국의 영토가

아니라 우리 조선의 영토입니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오이까? 유구가 우리 조선의 영토라니요?"

좌중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유구가 조선의 영토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닌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여?

중신들의 표정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사람이 늦더위를 먹었나?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평소의 한상덕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가만히 한상덕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왜국의 막부를 도우러 파병한

대가로 북해도와 대마도를 할양 받은 것을요."

모든 중신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끊었던 한상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실은 그때 우리 조선이 할양 받은 영토에 유구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그것이 참이오이까?"

모두들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커지며 튀어나올 것 같이 부릅떠졌다. 특히 성격이

괄괄한 내무대신 김병국은 큰 소리로 경악성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단순히 유구라는 조그만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흥분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무려 6년이라는 기간을

일언반구도 없이 조정에 알리지도 않았던 김영훈의 행태에 경악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김욱과 양헌수는 조정에 출사하여 정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전혀 상관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명색이 한 나라의 대신들이요, 각 부처의

최고책임자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어떻게 한마디 언질도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영토의 편입과 같은 중대한

일을 그동안 알리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그동안

대외적으로 우리 땅임을 선포하지도 않았고 관리하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좌중에 자리한 중신들의 안색이 무거울 정도로 침중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김영훈의 정확한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무어라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김영훈의 성정으로 봐서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었기에

그렇게 방치해두다시피 했을 것인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한상덕에게서 김영훈으로 옮겨졌다. 이런 일은 김영훈에게 설명을 듣는 게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김영훈이 어색한 기침을

터트렸다.

"어흠! 한 대감의 말이 모두 사실입니다."

"으음..."

"음... 합하. 그러면 그러한 중대한 일을 여태껏 함구하신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혹시 신들이 알아서는 안될 이유라도 있었던 것이옵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유구는 지난 인조(仁祖) 년간에 왜국의 사쓰마번에

정복당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쓰마번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해 오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국의 막부에서는 지난 병인년(1866년) 우리의 힘을 빌리기 위해

사쓰마번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유구까지 우리에게 할양하겠다는 제의를 해왔답니다."

김영훈은 유구를 요구한 것이 조선 조정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막부에서 먼저 제의를

했다고 했다. 이제야 모든 일을 밝히는 마당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 밝혀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결국 우리 조정은 막부로부터 북해도와 대마도, 유구를 할양 받고 해병여단을

파병한 것이지요. 사실 당시 막부의 입장에서는 죠슈번과 사쓰마번이 토막파의

우두머리로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두 번을

삭번(削藩)할 생각을 했었고 죠슈번의 정벌을 기화로 사쓰마번까지 처리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구의 할양까지 제시한 것이지요."

"그 말씀은... 다시 말하면 막부에서는 유구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표방함으로써

우리 조선과 사쓰마번과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

조선과 사쓰마번이 싸우게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제의를 했다는 말씀이옵니까?"

"위당 대감께서 바로 맞히셨습니다. 그러나 여는 유구를 할양 받은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지 않고 지금까지 때를 기다려 왔지요."

김영훈의 친절한(?) 설명에 좌중의 중신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새로운

영토를 할양 받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은 지극히 지양해야할 일이 틀림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쪽이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전쟁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전쟁에 끌려 다니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더구나 총 한방 쏘지 않고 눈엣가시와 같은

사쓰마번을 조선의 힘을 빌어 응징하려는 불온한 생각까지 막부에서 계획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새삼스럽게 왜놈들의 얄팍한 술수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까지 생겨난

지경이었다. 바야흐로 처음 김영훈이 유구를 할양 받은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한

불쾌했던 기분이, '과연 섭정공 합하께옵서는 올바른 선택을 하셨구나!' 하는

분위기로 반전된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여러 중신들이 혹은 비분강개하고 혹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한상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과연 합하시다. 순식간에 말 몇 마디로 좌중을 압도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다니...

결국 막부의 왜놈들만 죽일 놈들이 되지 않았나... 과연!'

거의 6년이라는 시간을 함구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밝히는 것이 그동안 김영훈과

천군을 믿고 따랐던 많은 중신들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안기는 일인 줄 알고 있기에

내심으로 고민하고 걱정하던 한상덕이었다. 그런데 김영훈은 단 몇 마디로 그런

고민과 걱정을 일거에 해소하지 않는가. 한상덕이 감탄을 하든지 말든지 김영훈의

말은 도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병인년(1866년) 당시에는 우리 조선의 힘이 지금보다는 훨씬 미약했던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양 장군이 지휘하던 해병여단을 왜국의 죠슈번 지역에 파병한

상태였기에 달리 병력을 운용할 여유도 없었구요. 그런 상태에서 유구를 할양

받았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한다는 것은 유구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사쓰마번과의 무력충돌을 각오해야한다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물론 우리 조선이

왜국의 일개 번을 꺽지 못할 리는 없지만 가급적이면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여는 당장 그 사실을 공표하여 불필요한 무력충돌을

감수하기보다는 좀 더 때를 기다리고 힘을 길러서 나중을 기약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유구를 할양 받은 사실은 정식 협정을 통해 체결된 내용이기

때문에 물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땅이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닌 이상, 결코

서두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그동안 주상전하와 여, 그리고 여기

있는 한 원장과 당시 윤정우 왜국 주재 조선 공사만이 알고 있었답니다. 이런

일일수록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함구해 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여를 믿고 따라준 여러분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답니다.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망극하옵니다. 합하."

"당치도 않사옵니다. 합하."

막부에서 유구의 할양을 먼저 제의했다는 부분만 제외하고는 김영훈은 성의껏 답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절반만 사실대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의 힘이 아직은

미약했기에 좀 더 힘을 기른 연후에 유구를 정식으로 편입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다 정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래

김영훈은 유구를 할양 받는다는 협정을 체결하는 순간부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유구 어민의 살해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원래의 역사에서 유구

어민의 살해사건이 1871년에 일어나는 것을 생각해서, 그 사건을 기화로 사쓰마번을

확실하게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비롯한 천군이 과거로

온 이상 역사의 흐름에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저변에는 막부의 죠슈번에 대한 두 차례에 걸친 정벌을 지켜본 결과, 가지게

된 생각이 깔려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막부의 죠슈번 정벌과 지금 시대에

일어났던 정벌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유구 어민 살해사건과

같은 경우도 비록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생각에서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도 상관없고

시간차를 두고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역사가 어느 정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쓰마번을 처리하는 것과 더불어, 그동안 가슴속에 품었던 계획까지 추진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예측가능한 역사의 흐름이랄까...

물론 앞으로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설명한 김영훈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대만에서의 유구 어민 살해사건을 통보한 광개토태왕함과는 별도로 사쓰마번의

동태를 감시하던 왜국 주재 조선 공사관 소속 대정원 요원의 암호전문이

도착했답니다. 그것은 지금 사쓰마번이 유구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대만을 응징하기

위해 함대를 편성하고 병력을 모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구 어민 살해사건을

빌미로 대만에 출병하여 무언가 새로운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신 것입니다."

광개토태왕함이 보낸 전문말고도 대정원 요원이 보낸 전문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좌중의 중신들은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의 힘이 유래 없이 막강한 지금, 그동안 대내외적으로 비밀에 부쳤던 유구의

조선 할양을 공표함과 동시에 조선의 영토인 유구에 침입하려는 왜놈들을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참 고개를 주억거리던 김병학이 고개를

들어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하오면 합하께옵서는 유구를 침범하려는 저들 왜놈들을 응징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신 것이옵니까?"

"대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영훈은 김병학에게 다시 질문했다. 김병학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 땅을 지켜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더불어서

그동안 불가피하게 방치하다시피 했던 유구를 정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옵니다. 합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초(穎樵) 대감."

"부족하다고 하오시면...?"

"여는 이번 기회에 완전히 유구가 우리 땅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유구를

침략하는 사쓰마번의 야욕을 응징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쓰마번의 본거지에도 병력을

파견하여 저들의 야욕을 분쇄할 생각입니다. 더불어서 과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복수를 할 생각입니다. 또한 가능하면 사쓰마번이 있는 구주(九州 큐슈)까지 우리

조선의 영토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아-!"

"모두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1866년)에 해병여단을 왜국에 파병할 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주장을 말입니다. 그때 일각에서는 차제에 왜국을 응징하고

영구히 복속시키자는 주장을 했었지요. 그러나 여는 반대를 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의 국력으로 왜국을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다스리기는 힘에 부칩니다. 그때 여는 어떻게 하면

왜국을 효과적으로 압박하면서 저들을 통제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했답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왜국을 남북으로 압박하는 전략입니다."

김영훈도 왜국을 응징하고 깨부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점을 수반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2천만이 약간 넘는 조선의 인구로 비추어 봤을 때, 4천만에 육박하는

왜국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왜국이

무슨 경제적인 이권이나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자칫하면 골치만 썩이는

결과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말 그대로 왜국은 조선에게 있어서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인 나라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왜국을 남북으로 압박하는 전략이었다.

북쪽에 있는 북해도와 남쪽에 있는 구주를 획득하여 남북으로 압박한다면 굳이

전체를 먹지 않아도 왜국은 조선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물론 왜국과

연계하려는 서양 제국(諸國)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까지 한 상태였다.

"아시다시피 왜국은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제일 북쪽에 있는

북해도는 이미 우리 조선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유구를 침략하려는

사쓰마번을 응징하면서 제일 남쪽에 있는 구주만 손에 넣는다면 실질적인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본주(本洲 혼슈)와 별 볼일 없는 서국(西國 시코쿠)이라는 조그만 섬만이

남게됩니다. 이 상태에서 저들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가만 놔두어도 자연히

우리 조선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굳이 머리 아프게 저들을 점령하여

다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요."

"과연... 합하의 뜻이 전적으로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대단한 계책이옵니다. 합하."

모든 중신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자 김영훈의 표정도 밝아졌다.

김영훈을 비롯한 모든 중신들이 밝은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는데 김병국이 나서며

말했다.

"하오나, 합하. 왜국의 구주는 사쓰마번만 있는 것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더구나

나가사키는 막부의 직할령이기도 한데... 만일 막부에서 우리의 군사행동을

저지하려고 한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더구나 왜국의 본주에 있는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 구주로 온다면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구주를 장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영어(穎漁) 대감."

"황공하옵니다. 합하."

"대감께서는 왜국의 본주와 구주가 비록 좁기는 하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그렇사옵니다. 합하."

"그리고 과거 죠슈번 지역이었던 시모노세키 일대에는 우리 해병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도 아시지요?"

"그렇다면...?"

김영훈과 김병국은 익히 알려진 지명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현지에서 불리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잘 모르거나 알려지지 않은 지명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그냥 한글로 바꿔서

불렀다. 당연히 현지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불러야 했지만, 조선의 힘이 막강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구주지방에 있는 제번(諸藩)이야 별로 신경쓸 것이 못되지만 본주의

막부 정규군은 얘기가 다르지요. 그러나 우리 해병연대 병력이 구주와 본주를 잇는

시모노세키 지역을 꽉 잡고 있는 한 막부의 정규군이 구주로 구원병을 파견하기는

요원한 일입니다. 더구나 해군이 나서서 그 일대 바다를 철통같이 막는다면 해군이

빈약한 막부에서 어떻게 구주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김영훈의 말처럼 구주에 있는 잡다한 제번(諸藩)은 신경쓸 것이 못됐다. 사쓰마번

외에도 구마모토번, 사가번, 후쿠오카번, 쿠루메번, 휴가번, 오스미번 등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막부의 위세에 눌린 자잘한 번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해병연대가

시모노세키를 장악하고 있고 해군이 바다를 틀어쥔다면 막부의 구원병도 걱정할 것이

못됐다.

"일단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왜국의 구주로 출정한다고 생각하고 관계 부처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외무부에서는 외교적인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조치해 주시고, 내무부에서는 구주와 유구에 파견할 관리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주세요. 재경부에서는 이번에 출정하는 우리 장병들에 대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여

여에게 가져오는 것을 잊지 마시구요. 또한 보위부에서는 새로 개장한 병원선에

근무할 의원들과 의녀들의 선발에 신경을 써 주세요. 구주로 출정할 부대에 대해서는

여가 따로 생각한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울러 이 일은 주상전하께서도

흔쾌히 찬성하신 일임을 명심하시고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망극하옵니다. 합하."

"신명을 다하겠사옵니다. 합하."

"그럼, 위당 대감과 대정원장 대감, 해군사령관 대감, 김 장군과 양 장군만 남고

이만 돌아가서 일들 보세요."

청국에 나가있는 김종완과 일선 군 지휘관인 김욱, 양헌수 등을 운현궁으로 부른

것을 보면 무슨 복안이 김영훈에게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중신들은 생각했다.

중신들은 일제히 일어나 김영훈에게 인사를 하고 아재당을 나섰으며 김영훈은 일일이

답례를 하며 그들을 전송했다. 어느새 좌중의 중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재당에는 김영훈과 다섯 사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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