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이고와 소에지마는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구로다 기요오카가 무릎을
꿇고 두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이고는 말끔한 반면에 소에지마는 돌아오자마자 사이고에게로 왔는지 여행객 차림
그대로였다. 사이고는 소에지마가 이미 차를 마셨음을 알기에 잡다한 격식은 제하고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소에지마님."
"고생이랄 게 있겠나. 다 번을 위해 한 일인 것을."
""가셨던 일은 어떻게...? 잘 되셨습니까?"
"그게... 어렵게 되었네."
"어렵게 되었다 하시면...?"
"조선 공사 신철균이란 자는 우리의 제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했네.
하지만 일개 공사의 입장과 조정의 입장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네."
"우리의 뜻을 조선 조정에 품신이라도 해달라고 하시지요?"
"나라고 왜 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가 완곡하게 거절하는데 별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조선과 막부와의 유착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어렵지 않나 싶으이."
"음..."
사이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미 구로다 기요오카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고는
있었지만 막상 소에지마의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전달받자 그것의 의미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사이고가 다시 물었다.
"그럼 영국 공사는 만나 보셨습니까?"
"영국 공사 파크스(H. S. Parkes)는 만나봤네. 하지만 영국 정부로서도 지금
당장에는 큰 도움을 줄 형편이 아니라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네."
"그래요..."
말하는 소에지마나 듣는 사이고나 한결같이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한쪽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구로다 기요오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왜국의
정국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왜국의 제번(諸藩) 중에서 지난 병인년(
丙寅年 1866년) 막부에 의해 죠슈번이 멸망하고 나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번은 다름
아닌 사쓰마번이었다. 그동안 줄곧 죠슈번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이었지만,
그래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추진했던 토막파(討幕派)의 동지라는 동질감이 알게
모르게 양 번에 상존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토막파의 한 축을
담당하던 죠슈번이 멸망한 사건은 사쓰마번에게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는 일대
사건이었다. 사쓰마번에서 느꼈던 위기감은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사쓰마번은 부랴부랴 군비를 확충하며 앞날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국에 접근하여 해군력을 증강하고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배웠다. 육군력도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나름대로 증강한 상태였다. 막부는 막부대로 사정이 많았다.
막부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사쓰마번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죠슈번을 무너트리고 나서 당장 사쓰마번까지 정리할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잠자코 힘을 축적하면서 때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 사이에 조선에서
보내준 의약품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죽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새로운 장군으로 등극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어
이제는 언제 막부가 사쓰마번을 향해 힘을 투사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죠슈번이 무너지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막부로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자신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사쓰마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쓰마번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죠슈번과 같은 꼴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막부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지만 그러기에는 사쓰마번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앉아서 막부가 쳐들어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홀로 서기였다. 나름대로 해군력과 육군력을
충분할 만큼 증강한 상태였고, 홀로 서기를 뒷받침할 만큼 경제력도 튼튼했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주변에서 자신들을 후원해줄 수 있는 강대국(强大國)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사쓰마번은 홀로 서기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의
지지를 얻을 생각을 했다. 그것을 위해 소에지마가 나가사키의 조선 공사관을
방문하여 조선 공사 신철균을 만나 그 의사를 타진했던 것인데, 조선 공사 신철균은
조선 조정에 사쓰마번의 뜻을 품신하는 것도 완곡하게 거절하여 소에지마를 낙담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와 함께 대표적인 정한론(征韓論者)라고 할 수 있는 소에지마가 조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선 공사관을 방문하여 지지를 호소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쓰마번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 간단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고메이(孝明) 왜왕(倭王)이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 의해 독살
당하고(*1) 나서 그의 아들 무쓰히토(睦仁)가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메이지(明治)
왜왕이다. 그리고 막부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왜왕에게 넘기는
사건이 바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헌데 고메이 왜왕이 이와쿠라에게 독살
당하지도 않고 막부의 장군 이에모치가 원래의 역사보다 몇 년 더 살게되면서,
대정봉환은 물론이고 명치유신까지 물 건너간 상황이었으니 소에지마의 심중에
정한론이 자리잡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꾸준히 자신들을
후원해 주던 영국과 미국이 지난해 조선 해군에게 무참히 패함으로써 당분간
동북아시아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자국민들의 안전도 책임지지 못해 조선군의
힘을 빌리고 있는 형편에서 왜국의 조그만 번에게까지 힘을 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점이 사이고와 소에지마의 안색을 어둡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었다.
답답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던 사이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시시각각 막부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음..."
"소에지마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막부와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면 결국은 죠슈번 꼴이
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막부와 외교적인 교섭을 벌이는 것은 어떨까?"
"외교적인 교섭요?"
"그래. 우리가 그동안 저질렀던 일을 막부에서는 없었던 일로 덮어주고, 우리는
막부를 타도하자던 그동안의 움직임을 사과하고 덴노(天皇 왜국에서는 자신들의 왕을
건방지게도 천황이라고 칭한다.)에게 충성하며 막부를 보위한다고 맹세한다면 저들도
그동안의 일을 덮어두고 우리 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
사이고는 말문이 막혔다.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막부에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가자는
것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막부에 고개를 수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막부에 의한 1차 죠슈번 정벌 때에도 막부는 죠슈번을
무릎 꿇리고 존왕양이를 주장했던 토막파 공경(公卿) 몇몇만 죽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던 전례가 있었다. 덕분에 죠슈번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다시 힘을 비축해
막부에 대항할 수 있었다. 사이고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막부에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간다 해도 막부에서는 그 전의 죠슈번에서와 같이 일종의 희생양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 점이 걱정이었다. 사이고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막부에서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설령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것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 음...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방법이 없질 않는가 말이야. 방법이!"
"무언가 전기(轉機)가 필요합니다."
"전기?"
"그렇습니다. 단숨에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전기 말입니다."
"음..."
소에지마도 사이고의 말에 공감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과 같은 상황은 끝을
맺어야만 했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막부나 사쓰마번
양자에게 득이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막부는 막부대로 막강한 사쓰마번과의 무력 충돌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사쓰마번도 마찬가지였다. 꿀 먹은 벙어리인양 두 사람이
아무런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큰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왔다.
"사이고 있나! 날세. 오야마."
두 사람의 대화를 한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구로다 기요오카는 무례하게 뛰어든
사내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곧 그런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야마님."
뛰어든 사내는 사이고의 죽마고우인 오야마 이와오(大山嚴)였다. 사이고의 절친한
친구로 어린 사이고와 함께 데라다야 사건에 뛰어든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원래 역사에서 러일전쟁에서의 봉천대회전(奉天大會戰)을
승리로 이끈 일본측 사령관이 바로 오야마였다. 방에 뛰어든 그는 소에지마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한 다음 사이고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오야마."
"방금 희한한 소식을 들었다네."
"희한한 소식?"
"그래. 희한한 소식."
"무슨 소식인데 그러나. 속 시원하게 말을 하게."
"방금 어떤 어부가 그러는데 류큐(琉球)의 어민들이 대만에 표류했다가 거기
원주민들 손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지난 초여름에 발생했다네."
"그래?"
오야마의 말을 들은 사이고는 별 다른 반응이 없는데 정작 발끈하고 나선 것은
소에지마였다. 그렇지 않아도 건방지게 자리에 뛰어든 오야마가 못마땅했던
소에지마는 사이고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자 인상을 찌푸리며 오야마를
향해 눈을 치켜 떴다. 겨우 반 식민지 류큐의 어민 몇몇이 죽었다고 이런 호들갑을
떠는 오야마가 갑자기 속없는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고를
추종하는 젊은 무사들의 시건방진 평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그
점까지 집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소에지마가 오야마에게 점잖게, 그러면서도
힐난하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이것 보게, 오야마. 지금 그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야! 어찌 그것을
모르는가!"
"아니, 저는 그저..."
"됐네, 이 사람아."
오야마는 소에지마의 꾸지람에 금새 얼굴이 벌게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유용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가져온 것인데, 사이고는 가만히 있고 소에지마가 나서서
면박을 주자 수치심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들 수도 없는 그로서는 그저
속만 끓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야마도 무사라고 자부하는 자였다. 잠시
소에지마의 불의의 일격에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꼬랑지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숨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에지마님.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 아니면?"
"류큐의 미야코(宮古) 어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어민들도 같이 살해당했다는 말입니다.
"
"뭐야?"
"미야코의 어민 54명과 우리 어민 4명 등 도합 58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
여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사이고가 놀라서 물었다. 무덤덤하게 있던 사이고가 관심을
나타내자 오야마는 절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왜 아니겠나. 지금 살해당한 어민들의 유족들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닌 것을 보고
오는 길일세."
"음. 알겠네."
이렇게 대답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사이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소리쳤다. 무언가에 잔뜩 흥분한 것 같은 말투였다.
"구로다!"
"예. 사이고님."
"자네는 즉시 구로다님께 가서 번성(藩城)으로 드시라고 이르게."
"예? 번성으로요?"
"그래! 이유는 알 것 없고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말씀드리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에지마님."
사이고는 이번에는 소에지마를 찾았다.
"소에지마님께서는 번 내의 다른 인사들을 즉시 번성으로 소집 좀 해주십시오.
번주님을 모시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나중에 알게 됩니다. 지금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 알겠네."
사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소에지마의 표정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오야마를 불렀다.
"오야마. 자네는 지금 그 사건의 정확한 내용을 소상하게 파악하여 번성으로 오게.
단순히 소문만 취합하지 말고 유족들의 말을 듣고 확실한 내용을 파악하라는 말일세.
혹시 생존 어민이 있다면 그 자의 증언도 청취해야 할 것이야."
"알았네."
사이고의 갑작스런 말에 모두들 정신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방을 나간 구로다
기요오카는 도대체 무슨 일로 사이고가 저러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렸고,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소에지마는 떫은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분을 삭이며
사이고의 집을 빠져나갔다. 오로지 오야마만이 신나는 일이 있는 듯 네 활개를 활짝
펼치며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고의 표정은
사뭇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비장감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하늘이 우리 사쓰마를 위해 내린 기회 아닌가.
절대 놓칠 수 없지.'
무언가 알 수 없는 결의에 찬 모습이었지만 그 이유는 오로지 그만이 알고 있었다.
잠깐 비장한 표정을 지은 사이고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어차피 번성에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사이에 자신도 준비를
해야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