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방의 다른 지방 같으면 이제는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올 것이건만 상하(
常夏)의 가고시마(鹿兒島)는 아직도 한 여름의 무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가고시마의 어느 커다란 저택 후원에서 한 사내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사쓰마번의
실권자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였다. 사이고 쓰구미치는 조선의 대정원 요원에
의해 암살 당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친동생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사쓰마번의 유력 인사들이 암살 당하자 형의 뒤를 이어 새롭게 사쓰마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실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실권을 잡았다고 폄하하는
세간의 평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일정 부분
형의 후광이 작용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런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불과 열 다섯의 어린 나이에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데라다야(寺田屋) 사건에 가담하여 담대한 성품과 용맹함을 만방에 과시한 인물이
바로 사이고 쓰구미치였다. 훗날 서양의 군제를 연구하기 위해 서양을 방문하기도
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사이고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수련해왔던 시현류(示現流)를 오늘도 어김없이 연마하고 있었다. 한 쪽
어깨를 드러낸 채 칼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이고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눈을 치켜 뜨는 것과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시현류 특유의 원규(猿叫)라는 괴성과 정면 가르기
수법이었다.
"끼야악!"
시현류의 정면 가르기는 따로 '내려 베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순간적으로 원규를
내뱉으며 상대의 혼을 빼고 정면으로 가르는 칼 솜씨는 커다란 덩치의 사이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더불어 주변 공기를 삽시간에 냉랭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정면 가르기의 결과로 두툼한 둥치의 대나무가 산뜻하게 대각선
방향으로 잘리며 털썩, 소리를 내고 쓰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짝짝짝!"
"응?"
"정말 대단한 정면 가르기였습니다. 사이고님."
사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군가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구로다 기요오카(黑田淸鋼)일 줄은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반가운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서 오게. 구로다 군(君)."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사이고님. 마치 석년의 도고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구로다 기요오카가 말하는 도고님이란 바로 시현류를 창시한 도고 시게카타(東鄕重位)
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이고를 그런 인물과 비교한 자체가 실로 대단한 아부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구로다 기요오카의 아부성 발언이 과히 기분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줄기 겸양의 말을 내 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슨 소리! 내가 어찌 도고님의 발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저 도고님의
그림자만큼의 실력만 가지고 있어도 과분할 정도지. 석년의 도고님께서는 두께가
여덟 치나 되는 바둑판을 베었더니 바둑판을 두 동강을 내는 것도 모자라 다다미를
자르고 마루 밑 가로받침대까지 잘라버렸다고 하지를 않던가. 하찮은 나 정도의
솜씨가 어찌 도고님과 비견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사이고님. 검(劍)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봐도 사이고님의 정면 가르기는
정말 도고님이 환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습니다."
"하하하하! 그만, 그만! 아마 자네 형님인 구로다님이 자네의 그 말을 들었다면 당장
자네를 요절내시려고 했을 것이네. 그만하게."
지금 사이고가 실권을 잡고 있는 사쓰마번은 사이고 말고도 구로다 기요타카(
黑田淸隆)와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라는 이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사이고
쓰구미치와 구로다 기요타카가 해군과 육군 등 국방과 내정을 담당하는 번(藩)의
실권자라면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번의 외교를 담당하는 실권자였다. 구로다
기요오카는 사쓰마번의 또 다른 실권자 구로다 기요타카의 친동생이다. 형 구로다
기요타카가 용맹과감한 성격과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갖춘 전문가라고 한다면, 동생
구로다 기요오카는 와카(和歌 왜국 고유의 시)와 한시(漢詩)에 조예가 깊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구로다 기요타카는 군사적인 식견과
무사로서의 자질을 놓고 볼 때 누구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인물로 결코 사이고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런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비상시국인
작금의 형편상 쓸데없는 권력 투쟁에 소모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지경이라 세
사람은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면서 사쓰마번의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이고는 허리춤에 매달린 하얀 면 수건을 집어들더니 천천히 칼날을 닦고는 칼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웬일인가? 이 시간에 내 집엘 다 찾아오고?"
"나가사키에 가셨던 소에지마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소에지마님이 오셨어? 이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어서 가세."
"예."
사이고는 구로다 기요오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걷던 그는 구로다 기요오카가 어련히 알아서 따라올 것을 아는
양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소에지마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손님방에 계십니다."
"그래? 음... 가셨던 일은 어찌되었다던가?"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다만...?"
사이고가 갑자기 멈춰 섰다. 뒤따르던 구로다 기요오카는 갑자기 멈춰선 사이고와
부딪치기 않기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야만 했다.
"소에지마님의 표정이 썩 밝지 않은 게 가셨던 일이 그렇게 잘 풀린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래? 음... 가지."
사이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소에지마가 나가사키에 간 이유는 단순히 유람을
하기 위해서, 또는 장사를 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사쓰마번의 생존이
걸려있는 중대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막부령인 나가사키에 간 것이다. 비록
사쓰마번에서 그동안 꾸준히 나가사키 지방의 상계(商界)에 상당한 투자를 하였기에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막부에 반하는 사쓰마번의 실권자가 명목상이라고
하더라도 막부령인 나가사키에 간 일은 실로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사키까지 간 소에지마가 별다른 성과 없이 귀향했다는 말은, 앞으로
사쓰마번이 선택할 수 있는 패가 많지 않다는 것과 같았기에 순간적으로 사이고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사이고가 말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본
채에 다 와가고 있었다.
"자네는 먼저 가서 소에지마님을 접대하고 있게. 내 바로 씻고서 찾아뵙겠다는 말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이고님."
사이고는 구로다 기요오카에게 명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본 채로 들어갔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먼지와 땀이 범벅이 된 몰골로 소에지마를 만나러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