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74화 (274/318)

6.

천진에서 파병 조선군 수뇌부를 위한 환영 만찬이 열리고 있을 때 조선 공사

오경석은 천진에 있지 않았다. 지금 오경석은 서태후가 기거하고 있는 저수궁에 와

있었다. 아직 서태후는 침전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미리 안득해를 통해 사전에

자신의 방문을 알렸는데도 서태후는 자신의 하루 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 오경석도

서태후의 일과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서태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는 젖어미로부터 모유를 먹는 시간임을 오경석도 모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한가롭게 차를 홀짝이며 서태후를 기다릴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수궁에

딸린 궁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태후마마께옵서 납시옵니다."

잠시 뒤에 청국 전통의 황태후 복식을 한 서태후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예의 안득해가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오경석은 급히 무릎을 꿇었다.

"태후마마 구천세(九千歲)! 구천세! 구천세! 태후마마의 강녕하심을 감축 드리나이다.

"

"일어나시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오경석은 서태후에게 극진한 예를 취했다. 비록 황제가 아니었기에 만세를 부르지

못했지만 구천세를 사용하여 극진한 공경을 선보였다. 사실 다른 서양 제국(諸國)의

외교관들은 청왕조의 황제에게나 서태후에게나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의 예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 1860년 체결된 북경조약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지금 서양 제국(諸國)의 외교관들은 그저 자국의 국왕

알현시에 행하는 예를 취할 뿐이었다. 이런 점을 오경석은 잘 알고 있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청국에 신속하는 조선의 입장과 서태후를 고무시키려는 생각에서

서태후를 예방할 때면 어김없이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해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경석은 천천히 일어나 한 쪽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시립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경건한 몸짓이었다.

"헌데, 오늘은 어인 일로 어려운 걸음을 하시었소?"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그저 태후마마의 옥체 강녕하신 지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이옵니다."

"호호호호. 내 오 공사의 염려 덕택에 편안합니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더불어 태후마마의 성려(聖慮) 덕분에 영·법·미 3국

공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한 조선군이 무사히 상륙하였음을 아뢰올려고

들었사옵니다."

"음... 그래요?"

"예. 태후마마."

서태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변하며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오경석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서태후의 인상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 안득해가 무어라 귓속말을 그녀에게

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안득해의 귓속말을 들은 서태후의 안색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듣자하니 조선에서 이번에 서양 3국 공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한 군대의

위용이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사실입니까?"

"망극하오신 말씀이옵니다. 태후마마. 감히 신하된 나라의 군대가 상국(上國)의 땅을

밟은 것만으로도 망극한 일이온데 어찌 군세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저

우리 조선은 상국의 위엄을 거스르지 않고 상국의 평안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뿐이옵니다."

"음... 그 말이 정녕 한치의 그름도 없겠소? 믿을 수 있겠느냐 이 말이오."

"믿어주시옵소서. 태후마마. 어찌 우리 조선이 상국을 섬김에 있어서 소홀할 수

있겠사옵니까? 아니, 어찌 우리 조선이 태후마마를 섬김에 있어서 감히 소홀할 수

있겠사옵니까? 우리 조선은 언제까지나 태후마마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할

것이옵니다."

"내 아해의 말도 있고 하니 그대를 믿겠소. 앞으로도 나를 섬김에 있어서 열과 성을

다하여 주시기 바라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서태후는 오경석의 입에 발린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조선군이 천진에

상륙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하며 불쾌하기 그지없었는데

안득해의 귓속말을 들은 후에는 조선군의 상륙이 결코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입에 발린 소리일망정 오경석이 혀가 잘 돌아갔던

것도 서태후의 마음을 돌리는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오경석의 혀가 잘

돌아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조선군이 청국에 상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적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일 것이다. 다행히 조선군이 청국에 상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서태후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경석은 서태후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한

쪽에 놓아두었던 예물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또 무엇이오?"

"예. 태후마마. 이것은 우리 조선의 쥬신상사라는 곳에서 개발한 화장품 일체와 각종

화장수들이옵니다."

"화장품과 화장수?"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어디 한 번 이리 줘 보시오."

오경석은 공손하게 가지고온 예물 보따리를 내놓았다. 서태후의 옆에 서 있던

안득해가 그것을 받았다. 서태후는 오경석이 내민 예물 보따리를 가만히 풀었다.

커다란 목기에 가득 담긴 것은 각종 화장품들이었다. 거기에 모발을 보호하는 미용

비누와 화장수도 같이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이오?"

"태후마마.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이미 서양 각국에 수출하여 호평을 받고 있는

여러 종류의 화장품들을 다시 연구하여 개발한 최신제품의 화장품과

화장수들이옵니다."

오경석은 어느새 서태후의 앞까지 가서 일일이 화장품의 종류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이 막대기는 입술 연지이옵고, 이것은 얼굴에 바르는 분이옵니다. 또한

이것은 머릿결을 윤기 있고 탄력 있게 만드는 모발 전용 미용 비누이옵고, 이것은

수욕할 때 몸에 바르는 미용수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저기 유리병에 담긴 것들은

모두 화장수이옵니다."

"오! 이것들이 정녕 화장품 종류란 말씀이오? 내 이렇게 생긴 것들은 생전 처음

보는구려."

"정녕 화장품이 맞사옵니다. 태후마마. 이미 우리 조선의 쥬신상사에서 개발하여

서양 제국(諸國)으로 수출하여 여러 귀부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제품들이옵니다.

이번에 신제품이 생산되어 제일 먼저 태후마마께 진상하는 것이옵니다."

"허-어, 기특한지고."

지금 오경석이 서태후에게 바친 화장품 종류는 현대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용 화장품 세트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질이나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도 서양 제국(諸國)의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서태후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입술에 바르는 연지는 립스틱을

말함이었고, 모발 전용 미용 비누는 샴푸와 린스를 뜻했다. 수욕할 때 바르는

미용수는 바디 크린저를 말하는 것이고 화장수는 각종 향수를 이르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합성수지가 일반에 보급되기 전인지라 합성수지 대신에 얇은 유기를 여러

번 두들겨 모양을 얇게 만든 막대기 모양의 립스틱은 그 범상치 않은 모양새부터

서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구나 밑에 달린 손잡이만 돌리면 입술 연지가 밖으로

쭉 빠져나오는 원리는 아무리 서태후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빨간색의 입술 연지뿐만 아니라 분홍색과 자주색 등 여러 종류의 입술 연지는

서태후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얼굴에 바르는 여러 종류의

분과 크림 등은 또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모발용 미용 비누는 어떻던가. 하얀

자기병에 담긴 여러 종류의 모발용 미용 비누는 액체로 된 것이 그 향과

빛깔에서부터 특별함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서태후의 얼굴은 기꺼움에 한껏

환해졌다. 일찍이 서태후의 정부(情夫) 중 한 사람인 이연영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미끈한 외모뿐만 아니라 최신 유행의 머리 모양을 선보임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것을 오경석을 비롯한 대정원 공작 요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북경에 유행한 머리 모양을 부러워한 서태후는 자신의 머리

모양도 그렇게 꾸미고 싶었으나 대궐 안에는 서태후를 만족시킬 만한 미용사가

없었다. 이때 이연영이 기생집을 찾아가 최신 유행의 머리 모양을 연구, 타고난

감각으로 서태후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이연영은 서태후의

최측근으로 출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연영 같은 이도 서태후의 환심을

사는데 오경석이 준비한 예물이 서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의 화장품이라는 것이 금보다도 훨씬 비싸게 취급되는 실정이었으니 그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서태후가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가볍게

떨리기까지 했다.

"이것들이 정녕 나에게 예물로 바치는 것들이란 말씀이오?"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이번에 쥬신상사에서 천진에 상륙한 조선군 편으로 동봉해

온 것들이옵니다. 오로지 태후마마께 바치기 위해 가져온 물건들이라 하옵니다."

"허-어, 이런 기특한 일을 봤나! 나는 저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준 바가 없건만

저들이 이런 예물을 보내오다니...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구려."

"일전에 예물로 바친 금강석 반지도 저들이 태후마마께 바친 것으로 아옵니다."

"무어라? 그럼 이 금강석 반지도 저들, 그러니까...?"

"쥬신상사라 하옵니다. 태후마마."

"그래! 쥬신상사. 그 쥬신상사에서 내게 바친 것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이런 일을 봤나. 참으로 갸륵한 정성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이보시오. 오 공사."

"하문하시옵소서. 태후마마."

"내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귀한 예물을 받고 모른척할 수는 없을 것 같소. 저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사하고 싶소만 무엇이 좋겠소?"

"......"

오경석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태후의 말이 다시 들렸다.

"어려워 말고 말해 보시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청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태후마마... 실은 저들이 상국에서 장사를 하는데 여러 지방 관헌들로부터 각종

뇌물의 상납을 강요당한다 하옵니다. 하여 뇌물을 바치는 데 장사하여 남긴 모든

이문을 쏟아 붓는 지경이라 하옵니다. 또한 지금 상국의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각지를 방비하는 군졸들과 장수들의 패악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들었사옵니다."

"이, 이런 발칙한 것들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저들을 도우면 되겠소?"

"제가 생각하건 데 저들에게 어보(御寶)가 찍힌 태후마마의 친필 서한이나 통행증

같은 것을 내리신다면 저들이 장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더구나 장사를 하여 남긴 이문으로 태후마마와 상국의 조정에 잊지 않고 예물을

바친다면 태후마마와 상국의 위엄을 살리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어보가 찍힌 나의 친필 서한이나 통행증이라?"

"그렇사옵니다. 태후마마."

서태후는 잠시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개 장사치들이 하는 일에 어보가 찍힌

친필 서한이나 통행증이라니... 서태후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안득해가 다시 나섰다. 안득해도 이미 오경석과 쥬신상사로부터 상당한 뇌물을 받은

상태였으니 자신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안득해의 귓속말을 들은 서태후는

한참을 생각하다 결심한 듯 말했다.

"좋소. 저들이 나를 위해 일을 하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아해는 문방사우(

文房四友)를 대령하렸다."

"예. 태후마마."

서태후는 안득해가 대령한 붓을 쥐고 나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칙령- 조선국 쥬신상사의 상인 정운두 일행은 조정을 위해 일을 하는 자들이니

각지의 상하 관헌들은 이들의 장사와 통행에 도움을 아끼지 말지니라.>

오경석으로부터 쥬신상사의 정운두 일행에 대한 얘기를 들은 서태후는 이와 같이

쓰고 나서 황제의 도장인 어보를 찍어 오경석에게 내밀었다. 어보는 진작부터 서태후

자신이 관리해오던 것이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서태후는 능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람 눈깔보다도 더 큰 금강석 반지와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화장품과 화장수들을 받은 서태후에게는 더한 것을 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안득해의 말처럼 훗날을 위해서는 오경석을 잘

구슬려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소. 이것들을 잘 사용하여 장사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아울러서 다음 번에는 이러한 예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이르시오."

예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더 많은 예물을 바치라는 말이라는 것을 오경석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서태후에게 바치는 예물로 상당한 금액이 지출된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길임도 잘 알고 있었다. 오경석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구천세! 구천세! 구천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