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73화 (273/318)

5.

"조선군 총사령관 일행이 언제 온다고 했죠?"

"정각 7시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곧 도착하실 겝니다."

천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교클럽 프린스 어브 웨일즈(Prince of Wales)는

엄청나게 몰려든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청국 주재 영·프·미 3국

공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위한 파병 조선군' 수뇌부를 위한 환영 만찬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번 환영 만찬의 실질적인 주재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 공사 웨이드

경과 벨로네 프랑스 공사, 로우 미국 전권공사 등은 프린스 어브 웨일즈의 중앙 홀인

알버트 홀(Albert Hall) 입구에서 김종완 일행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알버트 홀에서는 한 떼의 인사들이 몰려들어 음악과 춤을 즐기고 있었지만

이들은 한가롭게 그런 것들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듯 보였다.

"혹시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죠?"

"아직 7시가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합니다. 벨로네 공사.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래요. 벨로네 공사. 조선군 총사령관을 보니 약속을 어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늦게라도 반드시 올 겝니다."

벨로네 공사는 평소와 다르게 초조해 보였다. 웨이드 경이나 로우 전권공사도

초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벨로네 공사는 그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웨이드 경과

로우 전권공사는 벨로네 공사가 초조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경 주재 8국 외교관들 때문이었다. 원래 오늘의 '청국 주재 영·프·미 3국

공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위한 파병 조선군'을 위한 환영 만찬은 며칠 전에 조선군이

천진에 상륙하고 나서 벌일 예정이던 환영식 대신이었다. 그때 파병 조선군을 위한

환영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된 후에 3국 공사가 다시 환영 만찬을 준비하고

싶다는 뜻을 김종완에게 전달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진 결과가 오늘의 파병 조선군

수뇌부를 위한 환영 만찬이었다. 따라서 이번 환영 만찬의 주최는 3국 공사임에

틀림없었고, 환영 만찬도 처음에는 천진 주재 영국 영사관에서 벌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북경에 주재하고 있는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 등 8국 공사를 비롯한 다른

인사들이 오늘의 환영 만찬에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해 왔기에 부득이 비좁은

영국 영사관에서 최고급 사교클럽인 프린스 어브 웨일즈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영국

상인이 주인으로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넓은 정원과 빅토리아풍의 2층 건물이

아름다운 천진의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처음의 간소한 환영 만찬에서 각국의 거물급

외교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변질된(?) 오늘의 환영 만찬이 벨로네

법국 공사를 초조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지금 서양 제국(諸國) 중에서 조선과 수교한

나라는 독일과 영국, 미국 등 단 세 나라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국에 공관을

두고 있는 서양 제국(諸國)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오늘의 환영 만찬이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기에 북경 주재 8국 공사들이 너도나도 환영 만찬에

참석하려는 뜻을 피력했고 급기야는 모두 천진으로 내려와 사교클럽 프린스 어브

웨일즈에 도착하여 김종완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원래부터 조선과의

관계가 제일 껄끄러웠던 나라가 프랑스였고, 지난해 조선을 침략한 3국 중에서

아직까지 조선과 정식 수교를 하지 않고 있는 나라도 프랑스가 유일했다. 이런

실정인데 다른 서양 제국(諸國)에서 먼저 조선과의 관계 정립을 시도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 어찌 초조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국과 미국보다도 뒤쳐져 있었는데 다른 서양 제국(諸國)

까지 조선과의 수교를 염두에 둔 움직임을 보이는 작금의 상황은 결코 프랑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던 프랑스 정부와 벨로네 공사의 행보가 하루아침에

조선과의 수교를 염두에 둔 우호적인 움직임으로 변한 데에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벨로네 공사가 초조하게 김종완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선군 총사령관께서는 아직도 안 오셨습니까?"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 알렉세이 안드로포프(Alexei Andropov)의 말이었다. 웨이드

경과 벨로네 공사의 눈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아직 안 오셨습니다. 안드로포프 공사. 안에서 위스키라도 드시지 어찌 나오시는

겝니까?"

"하하하하. 영국의 위스키는 우리 러시아의 보드카에 비하면 훨씬 순한 술이라서

별로 내키지가 않는군요. 술은 뭐니뭐니해도 독한 보드카가 제일이지요."

"그래요? 이 더운 날씨에 독한 보드카를 마신다면 자칫하면 몸을 상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것은 위스키라고 어디 다릅니까? 더운 날씨에 독한 술을 마신다면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과연 조선군 총사령관께서 좋아하실 지 모르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프랑스산 와인을 얼음에 잘 재어 놨답니다."

"호-오, 그래요? 이 더운 날씨에 얼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안드로포프 러시아 공사는 약간 빈정거리는 듯 웨이드 경에 도전했으나 웨이드 경의

기막힌 응수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찌는 듯한 한 여름에 얼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그 구하기 어려운 얼음까지 구해 놓았다는 얘기에 새삼 영·프·미

3국이 오늘의 환영 만찬에 쏟은 정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벨로네 공사가 이번에는 안드로포프 러시아 공사를 겨냥하고 한마디했다.

"헌데, 안드로포프 공사께서는 어인 일로 머나먼 천진까지 걸음을 하셨습니까?

평소에 북경의 러시아 공사관 밖으로 출입을 잘 하지 않는 분으로 아는데 이상하군요.

"

"하하하하. 이상할 게 무에 있습니까? 지금 동아시아의 명실상부한 최강자는

조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해군사령관께서 귀 3국 공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파병 조선군 총사령관으로 오셨는데 어찌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러시아와 조선이 정식 수교를 할 것인데

당연히 인사를 드리러 와야지요."

"예-에?"

"지금 조선과 정식 수교를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들 놀라십니까? 우리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안드로포프 러시아 공사는 동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예프가 그동안 조선과의 수교에

공을 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조선과의 수교협상에 있어서 상당한

진척을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선과의 교역량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영국과 미국보다도 먼저 조선에 접근한 것은

러시아였다. 안드로포프도 말을 해 놓고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원래는 외교 기밀에

속하는 문제라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닌데 웨이드 경이나 벨로네 공사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견제하려는 듯 말하자 홧김에 한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됐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러분들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러시아와 조선은 정식으로 수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귀 3국보다도 일찍 교류를 해온 사이랍니다. 우리 러시아와 조선의

교역량은 매년 꾸준히 증가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답니다. 이런 양국의

우호관계로 비추어 봤을 때 본관이 조선 해군사령관 겸 파병 조선군 총사령관을

예방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웨이드 경과 벨로네 공사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특히 벨로네

공사의 표정은 옆에서 지켜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독일과 영국,

미국 등이 조선과 수교를 한 것도 배가 아플 지경인데 거기에 러시아까지 조선과

수교를 한다고 난리를 부린다면 프랑스의 동아시아 영향력이라는 것은 급속히 감소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웨이드 경의 표정도 벨로네 공사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져 있었다. 비록 지난 1860년 있었던 영·프 양국과 청국과의 북경조약을

중재하여 단단히 한 몫 챙겼던 러시아였다. 호시탐탐 남진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러시아까지 조선에게 꼬리를 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비록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년간 조선과 러시아와의 사이가 교역을 통한 우호

증진을 모색해왔다는 일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영국과 미국이 비록 조선과 수교를

했다고는 하지만 국가 간의 우호도에 있어서 러시아에 비해 앞서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안드로포프 공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러시아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증진해왔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영국과 미국은 대규모 전쟁

후에 수교를 한 입장이었다. 결코 긴밀한 유대관계를 토대로 수교를 했다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유럽에서의 러시아의 남진을 꾸준히 경계해왔던 영국이나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는 러시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조선과 러시아의 정식 수교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반대로 안드로포프 러시아 공사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동안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경원 당했던 울분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마음속으로 오늘의

만찬에 있어서의 손익계산으로 분주해 있을 때 입구에 서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조선군 총사령관각하 일행이 오셨습니다! 조선군 총사령관각하께서 수행원들과 함께

도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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